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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동아투위 선배들을 다시 만나랴

- [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24)] 박래부 새언론포럼 회장

기사승인 2017.04.16  22: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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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 선배들을 뵈면서, 가끔 시구 하나를 떠올리곤 한다. 김광섭의 짧은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이다.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 구절은 우리에게 제목보다도 더 낯익다. 이 시구는 최인훈의 희곡, 유심초의 노래, 홍파 감독의 영화 제목 등으로 애용되면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어디서 무엇이…’는 먼저 낭만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밤하늘의 별을 헤면서 별리와 재회로 수놓일 아득한 미래를 그려 보게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또한 이 구절은 긴 시간의 흐름 속에 전개되는 인간사의 얽힘과 운명 등 예측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여운이 다정하고도 육중하다.


‘민주인사’ 성유보 위원 석방 취재기

먼저 성유보 위원과 조우하게 된 사연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당한 뒤, 사회는 오랜만에 맞는 벅찬 기대로 술렁였다. ‘이제 악독한 독재가 끝나고 자유로운 민주주의 시대가 오는가 보다’ 하는 기대와 희망으로 출렁거렸다.

그날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등 권력자들은 청와대 인근 궁정동 인가에서 술을 마시다가 몇 방의 총성으로 파멸을 맞았다. 인기 여가수와 미모의 여대생이 대통령 양 옆에서 시중을 들던 질펀한 술자리가 순신간에 죽음의 파티로 변했다.

마침내 한국에 봄이 오는가. 나는 그때 한국일보 사회부에서 기자생활 만 1년을 맞고 있었다. 12월 7일 저녁 무렵 악명 높던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어 여러 교도소와 구치소에 구속돼 있던 많은 민주인사들이 석방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나는 회사로부터 “석방되는 민주인사들을 취재하고, 그 중 한 명을 구치소 앞에서 집까지 따라가서 르포 식 기사로 쓰라”는 지시를 받았다. 기분 좋은 취재 지시였으나, 마감시간이 촉박해서 쓰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서울 영등포구치소 앞에서 기다렸다. 저녁 7시 45분 쯤 이미 어둠이 깊게 깔린 구치소의 문이 열리자 솜옷 차림의 사람들이 나왔다. 4명의 민주인사 중 성유보 동아투위 위원의 귀가를 취재하기로 했다. 그는 마른 편이었으나 얼굴에서는 세상에 대한 선의와 강인한 신념이 투명하게 비는 듯한 지식인적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취재차에 성 위원을 태우고 (기사에는 택시를 탄 것으로 고쳐져 있음) 서울 강남구 도곡동 그의 10평짜리 아파트로 갔다. 차안에서 부지런히 기본적인 취재를 했다. 집에 도착하니 미처 석방 연락을 받지 못한 두 아들과 부인이 뛰어나와 매달리고 환호하며 부둥켜안았다. 1년 가까이 고난의 이별을 해야 했던 일가족 네 명이 별안간 재회를 하면서 빚는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한동안 눈물겹게 지켜보았다.

시내판 마감시간이 촉박해서 급히 회사로 돌아오며, 머릿속은 기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구상으로 바쁘게 돌아갔다. 여러 사람이 내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 한 명이 낮은 소리로 “성유보를 취재했다는데요?”라며 김해도 부장을 보았다. 김 부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뭐, 괜찮아” 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이럴 땐 흥순해서 쓰레이.”

부장이 기사 쓰기에 대해 충고하는 것은 드물었다. 퍼득 느낌이 오면서 기사 방향과 골격이 금방 다 정해지는 듯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기사를 빨리 완성해 넘겼다. 물론 그렇다 해도 기사는 다른 선배의 손을 거치며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흥분해서 써라”는 말은 현장의 설레고 감격적인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 가사에는 한밤중에 갑자기 찾아온 석방소식, 민주화가 실감되는 시대적 감격, 재회하는 가족의 뜨거운 사랑 등이 당사자와 같은 정서적 높이와 감정적 흐름으로 담겨 있어야 한다는 충고였을 것이다. 일가족이 포옹하는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사회면 머리기사로 나왔다. 제목도 훌륭했다.

‘닫힌 門 열리며 「自由」의 포옹’
- 긴급조치 관련 구속자 석방되던 날
- 한밤중 갑자기 돌아온 아빠 보고 외국 갔다 온 줄 알고 “선물 어딨어”

부인과 함께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아이 둘을 안고 있는 성 선배의 사진도 멋졌다. 회사 선배가 고쳐 쓴 다음과 같은 도입부(리드) 역시 간결함 속에 감격과 흥분을 전하고 있었다.

한밤중 갑자기 안겨든 자유. 한밤중 갑자기 겪는 만남. 전국 곳곳의 교도소와 구치소 문 앞은 다시 결합하는 혈육들의 기쁨으로 밤새 출렁댔다. 솜옷 입은 아들을 부둥켜안은 어버이는 수염이 따가운 아들의 볼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쏟았고, “외국에 출장 가셨다”던 아빠를 마중한 다섯 살 아들은 “아빠, 선물은 어디 있어?” 소리쳐 어른들을 울렸다.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던 ‘한밤중’은 겨울밤답지 않게 짧고 또 짧았다.

내 기사지만 나머지 부분도 엄청안 과도기였던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분위기를 실감 있게 보여준다고 생각되어 옮겨 봐 본다.

시간으로는 8일 하오 7시 45분, 서울 영등포구 고척동에 있는 영등포 구치소 앞은 분명히 한밤중이었으나, 수감자들이 하나씩 둘씩 풀려 나오면서부터는 이미 새벽이었다.
맨 먼저 회색바지와 흰 저고리 김상복 군(25ㆍ중앙신학대 3년)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 나왔다. 소아마비로 약간 불편한 모습인 김 군을 멀리서 가장 먼저 발견한 김 군의 누이동생은 “오빠아” 하고 큰 소리를 냈다.
그 순간, 김 군과 김 군 가족들의 두 손 벌린 달음박질은 시작됐다. 멋지고, 감격적인 만남이었다.
다음 순서는 흰 저고리, 검은 바지 차림의 성유보 씨(37ㆍ전 동아일보 기자), 그 다음 순서는 송좌빈 씩(56ㆍ충남 대덕군 동면 주산리 151), 그리고 그 다음은 김용훈 씨(30ㆍ충남 논산군 논산읍 반월리 162).
이들은 모두 갑작스러운 석방 소식이 가족에게 전해지지 않아 마중 나온 가족이 없었다. 3인은 잠시 허탈한 듯하다가 근처 대폿집으로 가 막걸리 2되를 게눈 감추듯이 들이켰다. 안주는 돼지볶음.
송 씨와 김 씨가 어디론지 떠난 뒤 성 씨는 택시를 타고 서울 강남구 도곡동 제2아파트 26동 107호 자택에 밤 9시 50분 도착했다. 그 시간 부인은 남편이 다음날 새벽에나 나올 것으로 알고 머리를 감고 있었다. 두 아들 덕무 군(5)과 영무 군(3), 그리고 머리를 적신 부인 장순자 씨(36)와의 극적인 만남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아빠아” “아빠아”
번갈아 어깨에 매달리던 두 아들은 ‘선물’을 찾았다. 선물 대신 연신 뽀뽀를 퍼붓던 성 씨는 “나는 내일이나 나오는 줄 알고 …” 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는 부인을 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11개월 만에 맞이하는 일가족 4명의 재회였다.
“오늘은 바빠서 선물을 못 샀으니 내일 사 줄게”
성 씨는 아파트 문 안에 들어온 지 10여분 만에 비로소 의자에 앉으며 아들에게 말했다.

당시 성 위원은 2차 ‘민주인권일지 사건’으로 투옥돼 있었다. 처음에 내가 “한국일보 기자인데 석방 과정을 취재하고 싶다”고 말하자, “박이 죽었다는 얘기는 감옥에서 들었다”면서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오히려 묻기로 했다.

2차 민권일지 사건은 동아투위가 1978년 12월 27일 명동성당에서 200여 명의 민주인사와 함께 송년회를 가진 것에서 시작됐다. 그 자리에서 ‘동아투위 소식’을 배포했다. 경찰은 10여 일 뒤 윤활식(위원장 대리), 이기중(총무 대리), 성유보 위원을 연행한 후 구속했다. 소식지에 실린 ‘자유언론은 영원한 실천과제’라는 글이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1차 민권일지 사건은 그보다 두 달 전쯤인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4돌 기념일에 시작됐다. 동아투위는 이날 ‘동아투위 소식’에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사건 일지’ 125건과 함께 ‘진정한 민주ㆍ민족 언론의 자표’라는 글을 실어 자유언론을 유리하는 제도와 법의 철폐를 주장했다.

이날 밤부터 1주일여에 걸쳐 홍종민(총무), 안종필(위원장), 안성열, 박종만, 장윤환(위원장 대리), 김종철, 이규만, 임채정, 정연주, 이기중 위원이 차례로 경찰에 연행됐다. 이 중 6명이 구속되었고, 11월 27일에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명이 더 감옥에 갇혔다. 1, 2차 민권일지 사건으로 10명이 구속되었다.

성 위원과는 비열하고 잔혹한 독재정권 하에서 강제해직된 선배기자를 취재하는 기자로서 민주화에의 부푼 희망 속에 만났다. 그러나 그 뒤로도 민주화까지는 한참 긴 가시밭길이었다. 이듬해 ‘서울의 봄’은 박정희 후계자들에 의해 유혈과 함께 유린당했다.

1975년 박정희 치하에서 동아투위와 조선투위가 결성됐을 때보다, 오히려 전두환이 광주학살로 권력을 찬탈한 1980년에는 각사에서 언론의 정도를 걸으려는 더 많은 언론인이 강제 해직되었다.


1975년 3월 동아투위와 함게 한 엉뚱한 1일 단식

좀 엉뚱한 얘기지만, 나는 성 위원과 해후하기 전에도 동아투위와 관련된 기억이 있다. 그 역시 ‘어디서 무엇이…’를 생각나게 하는 일화다. 1975년 3월 13일 동아일보사 언론인 23명이 정권의 광고를 통한 언론 탄압에 항의하며 회사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동아투위가 결성되기 4일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17일 새벽 폭력배들에 의해 농성장에서 강제로 끌려나옴으로써 130시간 만에 단식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아 언론인들의 자유언론 투쟁은, 특히 단식 투쟁은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끌면서 많은 지지와 격려를 받았다.

나는 그 무렵 서울 근교 부대의 파견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동아 언론인들의 투쟁 소식은, 계급은 상병이었지만 제대를 3개월 정도 남겨 놓은 내게도 비교적 소상히 전해지고 있었다. 당시는 베트남 파병 병력에게 병장계급을 몰아주었기 때문에 나는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나는 언론들의 단식이 계속되던 날 저녁, 8~9명 정도 되던 우리 부대원들에게 웃으면서 농담처럼 선언했다. “나도 동아일보 기자들처럼 내일부터 단식한다.” 부대원들은 모두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다음날 아침을 굶었다. “진짜 하시는 거예요?” 졸병들이 놀리는 표정이었다. 점심도 굶었다. 졸병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저녁 식사 때도 식당에 가지 않고 대공초소로 보초를 서러 갔다. 조금 서 있으려니까 졸병 두 명이 식기에 밥과 반찬을 담아 들고 초소까지 왔다.

웃으면서 “야, 나 단식 중이잖아” 해도 그들은 난감한 표정만 지었다. “그러지 말고 드세요.” “박 상병님, 저희들한데 서운한 게 있으면 말로 하세요.” 도무지 그냥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들을 불편하게 할 수 없어 내기 지기로 했다. “그래, 고맙다. 그런데 난 정말 단식하려고 했던 거다.”

내가 해 본 1일 단식은 그때 한 번 뿐이다. 그때는 정말 단식을 해 보고 싶었다. 하루하루가 아무 자극도 없이, 심지어 고통도 없이 지나간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민망하게 느껴졌다. 동아 언론인들의 진지하고 처절한 결행에 동참하기보다, 그것에 편승하여 정신적으로 나태해진 나 개인의 자극제로 삼고자 한 점은 죄송하다.

그러나 당시 동아 언론인에게 가해지는 정권과 회사의 비열한 폭력에 많은 분노를 느낀 것도 사실이다. 이런 사연으로 ‘동아투위’ 하면 ‘어디서 무엇이…’를 떠올리게 되지만, 그때까지 법학과를 다니다가 입대한 나로서는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역사에 큰 활자로 새겨져야 할 고난과 민주언론활동

그러나 1978년 나는 이런저런 모색 끝에 결국 신문기자가 되었다. 입사 후 1980년에는 전두환, 노태우 등 군인들의 권력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민주화투쟁의 대열에 섰고, 1991년에는 한국일보 4대 노조위원장을 맡았다. 그동안 언론계 언저리에서 이부영, 성유보 위원 등을 잠깐씩 뵌 적도 있으나, 현직을 떠난 뒤 2011년부터 새언론포럼 회장을 하면서 여러 동투 선배들을 만났다.

지난해 초 이명순 당시 동투 위원장이 먼저 새언론포럼에 가입했다. 이 위원장은 새언론포럼 초대 회장이었던 조성호 선배의 친구로 막역한 사이였다. 이 위원장은 가입하면서 오히려 새언론포럼 회원들을 동투 행사에 마구 참여시켰으니, 언론운동 조직을 확장하는 데 얼마나 절묘한 전략인가.

결과적으로 삶과 언론운동에서 동투 선배들은 나와 새언론포럼에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다. 지난해 그들은 나와 새언론포럼을 3월 춘천 오방산 시산제부터 7월 강원 홍천군 골프장 건설반대 시위장, 8월 경기 굴업도 골프장 건설 저지 갬페인장 등으로 데리고 다녔다.

덕분에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밝아진 것에 감사한다. 단순히 문제 많은 현장과 심각한 현실을 보여 준 게 아니라, 먼 거리를 오가는 동안의 친밀하고 격의 없는 대화와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잇게 해 준 것에도 고마움을 느낀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사에서 자유언론 투쟁을 벌이던 기자, PD,아나운서 등 언론인 113명이 강제로 쫓겨나면서 굳게 결속되었다. 38년간 풍찬노숙의 삶을 겪는 동안 18명이 고문과 옥고, 생활난, 정신적 고통 등으로 타계했다.

그러나 동투 위원들의 자유언론과 민주화, 조국의 분단 극복에 대한 의지는 굳고 뜨거웠고, 평균 나이가 70이 넘는 지금까지도 식지 않았다. 고독한 투쟁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은 지금도 월 1회 정례모임과 수시로 소모임 별 행사를 가지며 열정을 나누고 있다.

그들은 처음에는 보도되지 못한 주요사건들을 유인물로 세상에 알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 10명은 구속되어 긴 시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세상을 뜨기도 했다. 쇠창살 안에서 달의 결혼식을 맞은 위원도 있다.

간결하게 정리한 동아투위 일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가열찬 투쟁과 뒤에서 생활고를 면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쓰던 가족들의 신산한 삶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임의로 몇 군데를 들여다본다.

1975. 6. 18 이부영 위원,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 해임사원 가족 모임 바자회 성황리에 종료
1975. 7. 9. 연행되었던 이영록, 이태호 위원 석방.
1975. 7. 12. 잡화상점을 열기 위해 가게 계약. 해임사원 가족모임, YWCA에서 바자회 개최
1975. 7. 18. 김종철 위원 벌금 7만원 선고받고 항소. 조학래, 정영일, 이기중 위원 중앙정보부에 불려감.
1975. 7. 21. 고준환, 박종만, 강정문 위원 중앙정보부에 불려감.
1975. 7. 22. 서권석, 김종철, 김두식 위원 중앙정보부에 불려감.
1979. 3. 8. 수감 중인 이기중 위원 부인, 맞춤와이셔츠가게 ‘풀빛’ 개업
1999. 5. 3. 강정문 위원 별세
1999. 5. 28. 심재택 위원 별세

동투의 신념에 찬 활동과 행적은 한국 현대사에 큰 활자로 자리매김 되어야 마땅하다. 그들은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40년 가까이 조직적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펼쳐 왔으며, 후배들의 언론운동에도 자신감을 주었다. 동투의 행적을 세계 언론사에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한겨레 창간, 안종필언론상, 굴업도 시위… 운동의 다변화

동투의 활동은 민권일지에서 시작되어 우리 언론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한겨레 창간의 씨를 뿌렸다. 또 자유언론에 기여한 이들에게 수여되는 안종필자유언론상 제정 등 다방면으로 확산되었다.

한겨레 창간의 씨는 1979년 11월 성동구치소에서 싹텄다. 안종필 위원장은 동료들에게 “새 시대가 오면 국민들이 골고루 출자해서 그들이 주인이 되는 신문사를 세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제도언론에 의해 묵살당하고 심지어는 왜곡까지 당한 이 땅의 진실을 우리 손으로 생생하게 기록하고 발표하고 증언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언론의 길”이라고 구상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이듬헤 2월 29일 사망했다.

안 위원장의 구상대로 새 시대가 열리고 한겨레가 창간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뒤였다. 1987년 6월 혁명이 끝나고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1980년 각사의 해직기자, 민주적 선배기자 등이 국민주를 모아 1988년 5월 15일 대망의 한겨레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꺽일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다’는 강직한 신념의 안 위원장이 자유언론의 험로에서 순직한 후, 동투는 1987년 그를 기려 안종필자유언론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전국언론노동조합ㆍ한국기자협회ㆍ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가 제정한 ‘통일언론상’고 나란히 해마다 시상되면서, 언론자유를 추구ㆍ구현한 언론인이 받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이 되었다.

동투의 법률적 관계를 보면 그동안 명예는 회복됐으나, 복직이나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도 “단 하루라도 복직을 원한다”고 외치고 있다.

2002~2003년에 동아투위 전원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드디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서 명예를 회복했다. 그 뒤 2008년 10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동아투위 소속 기자들의 해임은 정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 때문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정부 상대의 민사소송에서는 2011년 1월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했고, 2012년에는 항소가 기각됐다.

동투는 38주년을 맞은 지난 3월 18일, 정부와 동아일보사를 상대로 1975년 대량해고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들은 “긴급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듯이, 강제해딕 당한 뒤 40년 가까이 가시밭길을 걸오온 동아투위에서 대해서도 정부가 앞장서서 법적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면서 박근혜 정부에 해결을 촉구했다.

또한 동아일보사에 대해서는 “강제해직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단 하루라도 동아투위 위원들을 제자리에 복직시킨 뒤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주목할 만한 타 운동단체와의 연대

언론은 사회의 부조리와 모슨이 가장 첨예하고 집겨로디고 드러나는 공간이지만, 동투는 근래 사회ㆍ시민운동을 향해서도 시야를 넓혀 왔다.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언론 왜곡과 사회 부패가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긴 운동을 통해 많은 경험과 지혜가 쌓인 동투는 지금 사회적 약자가 소외되는 현실 속에 다른 시민사화단체에 목소로리르 보태는 든든한 동지가 되고 있다.

지난해 폭우로 장준하 선생의 묘소가 무너지면서 37년 만에 선생의 유골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동투는 선생의 타살을 신원하는 데도 어는 단체 못지않게 힘을 기울여 왔다. 장 선생이 정치인이자 언론인이었고, 또한 선생의 맏며느리 신정자 씨가 동투 위원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동투 위원 자신들의 고통이 유신독재 아래서 유린당하고 희생된 많은 이들의 아픔과 함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의 앞에서 침묵할 수 없는 지식인의 자의식과 자세에서 비롯될 것이다.

지난해만 해도 동아투위 소속 요요회는 7월 말 골프장 난개발로 주민이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서 5년간 힘든 투쟁을 벌여온 강원도 홍천군 동막리를 찾았다. 전국에서 온 희망버스와 함게 주민의 시위에 힘을 더했다. 홍천군에만 15개의 골프장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한 달 뒤 8월 말에도 요요회는 개발 반대 운동을 펴기 위해 인천항에서 90km 떨어진, 여의도의 5분의 1만한 작은 섬 굴업도를 1박2일로 다녀왔다. 조용한 해변과 다양한 희귀 동식물, 7가구의 민박집이 어울려 사는 굴업도의 평화도 위태롭기만 했다.

재벌인 CJ그룹 계열사인 씨앤아이 레저산업이 섬 토지의 98.5%를 매입하고 골프장과 리조트가 있는 오션파크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재발과 부자의 이기적인 손이 산하를 파괴하며 자들의 놀이터로 만들고 있는 현실이 동투 위원들의 발을 끄는 것이다.

홍천과 굴업도로 가는 길에는 요요회와 새언론포럼, 한국PD연합회, 문순c카페 등이 함께 했다. 새언론포럼과 한국PD연합회가 현업 언론계를 바탕으로 출발한 단체인데 비해, 문순c카페는 2008년 뜨거웠던 촛불시위를 배경으로 탄생한 시민운동 단체다. 문순c카페는 근래 동투 활동에 가장 적극적인 동반단체가 되고 있다.

동투와 문순c카페는 언론ㆍ시민운동에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보기 드문 운동의 사례이고, 상화 보완의 면에서 성공적이고 모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투가 운동의 지평을 넓혀 가며 이룩한 언론노조, 기자협회, PD연합회, 새언론포럼, 문순c카페 등과의 연대관계 또한 주목할 만한다.

 

동투의 일원이라는 것이 인생의 행복

40년 가가이 동투를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는 그들의 결속력은 놀랍기만 하다. 나이가 듦에 따라 건강이 나바 은둔하거나 이민을 가서 소원해진 위원은 있어도 113명 중 이탈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점에 대해 문영희 위원은 “우리 숫자가 10명 정도 되었으면 지금까지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투가 100명이 넘는 숫자이다 보니 지금까지 동력을 잃지 않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성유보 위원은 “다 미련해서, 우직해서 그렇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곧이어 “나에게 ‘그냥 회사에 붙어 있었으면 잘 살았지 않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어. 그러나 내 생각에 내가 동투에 있지 않고 눌러앉아 근무를 했다면, 박정희, 전두환 때를 거치면서 틀림없이 정신병에 걸렸을 거야”라고 덧붙였다.

동아투위가 규모가 큰 집단 지성이었기 때문에 결벽에 가까운 순수성으로 유지되었을 것이라는 자기 분석이다. 평소의 그들은 대부분 매우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하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교육과 시대상황이 그들을 진지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으로 이끌었을 듯하다.

그들은 예민한 시대 상황 속에 도덕적 가치과 윤리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은 후, 지식인으로서 신념과 사명감을 갖고 언론계에 들어온 엘리트들이다. 이 위에 식민통치와 전쟁, 분단 등으로 피폐해진 조국을 바라보는 우국충정이 겹쳐지면서 그들은 고난을 무릅쓰는 민주투사가 되었을 것 같다.

또한 그들의 정신에는 2차 대전 후 세계 지식인 사회를 풍미한 실존주의 철학이 각인돼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어느 철학보다도 인간의 자유와 선택, 주체적 결단 등을 강조하는 실존주의는 정치와 이념 등 현실 문제에 개입할 것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동투는 온몸으로 우리 현대사의 숱한 모순과 질곡, 부조리에 저항해 왔으며, 첨예한 의식으로 자유언론의 소중함을 일깨워 왔다. 그들은 신념과 사명감으로 긍정의 지평을 바라보면서, 지배계층의 정신적 천박함과 물질적 탐욕으로 오염돼 가는 사회를 정화시키고자 청량제와 방부제 역할을 해 온 지식인 집단이다.

많은 고난과 고초를 짊어진 삶 속에서도 그들은 개인적으로 강인ㆍ강직한 정신과 어기찬 기개로 한 명 한 명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 또 정치사회운동 차원에서도 하나의 훌륭한 모델이 되어 있다.

그들은 개인의 도덕적 삶에서 승리했고, 집단으로서 역사에 큰 자취를 새겨가고 있다. 너무 일찍이 치열한 투쟁의 고비에서 병을 얻어 순직한 안종필 위원장은 “내가 동투의 일원이 됐다는 것이 내 인생의 행복”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지금 김종철 현 위원장은 “우리는 동아일보에서 자유언론 실천투쟁을 하다 해직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으며, 평생의 소중한 가치로 삼겠다”고 말한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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