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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국’으로 ‘천황 폐하께 충성’(1)

- 조선일보 대해부 16장(1)

기사승인 2018.01.31  23: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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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26일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는 바로 그 이튿날 「유고(諭告)」를 통해 조선 통치의 ‘5대 지침’을 발표했다. ‘국체명징(國體明徵)’ ‘선만일여(鮮滿一如)’ ‘교학진작(敎學振作)’ ‘농공병진(農工竝進)’ ‘서정쇄신(庶政刷新)’이 바로 그것이었다.


총독 미나미의 조선통치 ‘5대 지침’

그는 1937년 4월 20일 지사회의 석상에서 ‘훈시’를 통해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1) 국체명징: 아시아 및 세계의 대국을 불견(不見)하고 고루한 민족주의적 편견에 타(墮)한 자가 있고 또 공산주의자의 준동 있음은 유감이며 절멸되어야 한다. 제국 9천만 동포가 거국 일치 상하 일심으로 천업회홍(天業恢弘) 황도(皇道) 선양에 매진하려면 국체관념이 명징되어야 하며 특히 조선에서 요긴한, 반도시정의 근기(根基)다.
신사참배의 여행(勵行), 황거요배(皇居遙拜), 국기게양의 장려, 국가(國歌)의 존중 내지 국어[일본어]보급의 권장 등으로 실(實)을 거두어야 한다.
2) 선만일여: 최근 일만(日滿)관계에 반도가 점하는 지위는 크고 일만일체의 내용으로 선만 일여의 실체의 성립은 극히 필요하다. 착임 이래의 관동군 사령관과의 회견, 국경교량협정, 비화(匪禍), 및 밀수의 공동대책, 압록강공동기술위원회 설치, 통관협정, 우편협정, 수력발전협정, 도문가목사선(圖文佳木斯線) 건설의 촉진, 북선삼항(北鮮三港) 시설의 확충 등이 모두 이를 위함이요 선농(鮮農)에 의한 만주국 농업의 개척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교학진작: 반도교육의 근본주의인 교육수산(敎育授産)의 병진, 실학교육의 고양, 국민체위의 향상, 개념적 추상적 교육의 배제 등은 더욱 강조되어야 하나 교학에서의 국민정신의 함양이야말로 가장 긴요하다. 국민성의 도야, 국민도덕의 연성, 국민적 신념의 부식(扶植)으로 교학의 본지(本旨)를 삼아야 하며 ‘오등(吾等)은 일본제국 신민’이라는 신념과 긍지는 초 중 전문대학에 다 같이 긴절한 것이다.
교육자 자신이 국민적 신념의 심화, 정신의 단련, 품성의 도야에 노력하고 국어교육의 보급을 철저케 하라.
4) 농공병진: 세계대세, 특히 동아정세로 보아 제국 국방력의 충실은 급무요 따라서 생산력 증강은 제국 산업경제가 당면한 끽긴(喫緊)한 문제이다. 조선의 지리적 자원적 책무가 크니 일만일체 선만일여의 대방침에 기(基)하여 산업을 전진케 하라. 농산어촌진흥운동의 철저, 농경지 배분 이용의 개선, 농업경영의 합리화, 공업원료 생산의 촉진, 생산물 처리의 합리화, 어장의 개척을 연구하여 조선의 풍부한 농축임수(農畜林水)의 생산자원 및 수력 지하자원 등을 완전 이용케 하라.
5) 서정쇄신: 관청 본위의 형식주의를 타파하고 실질주의를 취하며 사무 간소화, 민심의 파악, 계몽에 의한 민심 창달, 관리로서의 본분 각준(恪遵)등으로 행정을 국가의 수요(須要)에 대응케 하고 세무(世務)의 활기(活機)에 적함케 함을 요한다(임종국 저, 이건제 교주, <친일문학론>, 2013, 민족문제 연구소, 29~30쪽).

총독 미나미의 ‘5대 지침’은 식민지 조선과 괴뢰국 만주를 하나로 만들어 중국 침략의 교두보로 삼고, 나아가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겠다는 일본정부의 정책을 압축한 것이었다. 1937년 말에 상해와 남경이 함락되고 중국에서 일본군의 강세가 굳어지자 조선총독부는 ‘5대 지침’을 더욱 강하게 추진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처럼 일제의 정책에 순응함을 넘어서 적극적 홍보기구로 나섰음은 물론이다. 그것을 ‘언론보국(言論報國)’이라고 일컬었다.

1938년 새해가 밝았다. 조선일보는 1월 1일자 석간 1면 머리에 지난해처럼 「‘원단·궁중의 어의」라는 기사와 함께 ‘천황’과 ‘황후’의 사진을 실었다. 1937년에는 남편의 사진이 오른쪽에, 아내의 사진이 왼쪽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천황 부부’의 사진 옆에는 「조선 사명 중대 / 각오를 새롭게 하라」는 총독 미나미의 「연두사」가 자리 잡았다. 그 아래에는 「불퇴전의 기백으로 조선이 정국 장래에 대처할 준비가 필요」라는 정무총감 오노(大野綠一郎)의 「훈시」가 실려 있다. 조선일보는 ‘대일본제국’ 왕실과 조선총독부 수뇌부의 새해 동정과 ‘말씀’을 대서특필한 지면 하단에 ‘3대 사업계획 내용’을 「사고」로 올렸다. ‘본보 6000호 혁신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특산품전람회’ ‘조선향토문화조사’ ‘극동시국지도 증정’을 실행한다는 것이었다. 일제의 중국 침략이 날이 갈수록 흉포해지는데 참으로 ‘한가한’ 문화사업으로 민중을 어디로 유도하겠다는 뜻인지, 아리송한 일이었다.

조선일보의 「신년호 1」에는 ‘황군이 점령한 (만리)장성’과 ‘제국 세력 하의 상해’ 사진이 크게 실렸다. ‘대일본제국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조선 지원병 제도 실시’를 적극 찬양

1938년 1월 18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 머리에 「조선에 지원병 제도 실시/ 획기적 중대 사실」이라는 제목의 사설이 올랐다.

15일 육군성 발표에 의하면 조선인에게도 금년 4월부터 지원병제도를 실행할 터인데 우선 4백명 정도를 보병에 한하여 연령 15세 이상 심신 건전한 자를 선발하여 6개월간 훈련하여 조선부대에 배속시키기로 한다는 바 재영(在營) 기간은 2년이라 한다. 병역제도는 일본 내지와 화태(樺太)에 본 적을 둔 사람에게만 한하던 것인데 이제 조선인에도 지원병제도를 실시한다는 것은 획시기적 중대 사실로 내선일체의 일(一) 현현(現顯)이라 볼 수 있다.
무릇 국민에는 납세, 교육, 병역 3종의 의무가 있는데 종래 조선인에게는 납세의 의무만 있었고 교육 병역의 의무는 없었다. 듣건대 당국은 우가키 전 총독의 초등교육 10개년계획을 5개년으로 단축하고 이후 8년을 기하여 의무교육 실시의 기초를 삼는다 하니 금차 발표된 지원병제도와 아울러 조선인도 점차 3대 의무를 다하게 될 터이다.

조선의 청년들이 독립된 나라의 국방을 위해 자원해서 입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는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가게 된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까? 조선일보의 사설은 일본 본토(내지)와 조선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내선일체’ 논리에 따라 ‘조선의 지원병제도 실시’를 ‘획기적 중대 사실’이라고 치켜세웠다. 나중에 드러났지만 ‘지원’ 형식으로 입대한 조선 청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개죽음’ 아니면 탈출뿐이었다.

육군특별지원령이 실시되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4월 3일자에 실은 사설은 조선일보 1월 18일자 사설과 대동소이한 논지를 펼쳤다.

반도통치 상에 일(一) 신기원을 획하는 육군특별지원병령은 의의(意義)의 심대한 금일의 신무천황 제일(祭日)을 복(卜)하여 실시되었다. 아등(我等)의 감격이 얼마나 지극하고, 영예가 얼마나 지대하다 할 바일 것이냐. 내선일체는 일한합방의 대정신이요 최고 이상이다. (…) 성은의 홍대(鴻大)하고 황화(皇化)의 지공무사(至公無私)함이 일월(日月)과 여(如)하고 우로(雨露)와 약(若)한 바 있으나 반도 민서(民庶)의 국민 자각과 인식에 간연(間然)이 존(存)한 한 그 균점(均霑)을 허하게 되는 바일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반도 민서는 금일까지 완전한 황국신민으로서의 혜택과 영예에 균점하는 역(域)에 달하지 못하였었고 또 그 국가의식이나 국민적 자각에 일말의 객려적(客旅的) 기분이 존(存)하므로 완전한 황국신민으로서의 혜택과 영예에 균점치 못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료한 사리일 것이어서 만일 지금까지 완전한 황국신민으로서의 혜택과 영예에 균점치 못하였던 것을 비(悲)하고 한(恨)한다 할지면 마땅히 아등 자체의 자각과 인식의 부족을 비하고 한하여야 할 바일 것이다. 사(獅)는 사로서의 실질을 구비함에 지(至)하여 비로소 사로서의 처우를 수(受)하고 봉(鳳)은 봉으로서의 실질을 구비함에 지하여 비로소 봉으로서의 처우를 수하게 되는 바이다. 황국신민으로서의 실질을 구비치 못한 한 황국신민으로서의 혜택에 균점됨을 기하게 될 바일 것이다.

1938년 4월 26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에 실린 사설(「총후보국 강조주간」)은 ‘장기전에 대처할 국민적 각오’를 강조했다.

지나사변은 장기전에 입(入)하여 국민의 총후 지원이 일층 실요성(實要性)을 띠게 되었다. 즉 제국은 지나의 실요지대를 점령하고 해안선을 봉쇄하였다 할지라도 국민정부의 완전한 생명선을 액(掖)하기에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이며 만주사변에는 무력을 많이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 장(張) 정권의 재정적 유산이 많아 만주국 건설에 곤란이 없었으나 금번 지나군은 소위 초토항전술 하에 패퇴하니 건설에 재정이 거액으로 필요하며 국민당이 비록 궤멸한다 할지라도 국민당과 합작한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후원 하에 견고한 세력을 가졌으며 일독이(日獨伊)의 방공협정이 성립되었다 할지라도 독이만을 의뢰할 처지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시국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장기전에 대처할 국민적 각오를 촉(促)함은 현하의 급무니 오는 29일의 천장절(天長節)을 중심으로 1주간 총후보국 강조주간을 제정한 것은 시의에 적당한 일이다.
총후보국 강조는 단순한 선전만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효과있는 선전, 실행을 함을 주요 임무로 삼나니 비상시 재정 경제에 대한 국민협력요강 중의 중요사항인 소비절약 및 저축장려운동을 통하여 시국을 인식케 함으로써 적당하다고 인(認)한다. 그러므로 시국상 소비 절약을 할 중요 물자는 20 종목 이상에 달하나 그 중 민중생활상 가장 중요한 관계를 가진 종이, 목면 및 연료의 3종류를 특히 절약 저축하도록 선전하는 동시에 비상시의 절약과 저축의 진정한 의미를 철저케 하기로 되었다. 본사 등 신문관계자 조직인 춘추회가 금일자와 5월 1일자 신문을 각각 8면으로 감면한 것은 이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조선의 민중은 일제의 착취 때문에 식량은 물론이고 생활필수품도 제대로 쓸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일본군의 중국 침략에 도움이 되도록 가난한 백성들이 종이, 목면, 연료를 절약하자면서 신문사들이 종이를 아끼기 위해 감면(減面)함으로써 ‘총후보국’에 앞장서고 있다고 선전했다.


‘성상 폐하께옵서는 옥체 유건(愈健)하시옵고’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조선일보가 조간 1면 머리에 올린 사설 「봉축(奉祝) 천장가절(天長佳節)」은 이것이 과연 우리 민족의 한 사람이 쓴 것인지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광명이 동천(東天)에 충일(充溢)하고 생생한 기력이 모토(牟土)에 편만(遍滿)하여 있다. (…) 춘풍이 신록에 빛나는 이 청상(淸爽)한 계절에 제(際)하여 만민일체로 천장의 가절을 봉축하는 것은 해마다 경하(慶賀)의 염을 새롭게 하고 감격의 정을 깊이 하는 바 있다. 성상(聖上) 폐하께옵서는 금일 금신(今辰)에 다시 일회의 어탄신을 맞이하시와 옥체 유건(愈健)하옵시고 황초(皇礎) 유견(愈堅)하옵신 것을 배승(拜承)하는 것은 실로 만방 무비의 광영이요 황국 무궁의 경행(慶幸)으로 억조 신민의 유공유구(惟恐惟懼) 봉축할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회고하면 작년 7월 북지(北支) 일각에서 사변이 발발하여 응징의 사(師)가 정전(征戰) 9개월에 연전연승하는 것은 전선장사(前線將士)가 일념으로 황은에 보답코자 하는 적성(赤誠)의 표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성상 폐하께옵서는 만기총람(萬機總攬) 정무에 어다망하심에 불구하시고 출정장사의 간고(艱苦)를 어진념(御軫念)하시와 특히 신금(宸襟)을 어번뇌하옵신다고 배승하올 때에 황공무지한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거니와 전선(前線)의 혁혁한 무공이 다 어능위(御稜威)의 소사(所賜)인 것을 상기할 때에 더욱 감격에 불승(不勝)하는 바이다. 그리고 오늘 이때에 어탄신을 봉축하는 일반 신민의 감격과 경행은 필설로 다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서주성 드디어 함락!’

1938년 5월 20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에는 「서주성(徐州城) 드디어 함락!」이라는 제목이 크고 자리잡고 있다. 산동성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강소성의 교통요지인 서주에서는 수십만명의 중·일 양국군이 혈전을 벌인 바 있었다.

서주성은 19일 정오 성내의 소탕을 종료, 즉일 입성식을 거행코자 하였으나 00부대장은 서주 점령의 영예를 혼자 할 것이 아니라는 무인다운 인정으로 즉일의 입성식을 보류코 20일 비공식으로 입성, 정식 입성식은 이 다음 성대리에 엄숙히 거행하기로 되었다.

이 기사 바로 위에는 「서주 점령/ 사변의 제2단계」라는 사설이 있다.

진포선과 위해선의 교차점에 처하여 교통상, 군사상 요충이 되고 남경 함락 후 중앙군 기타 유력부대 45만을 집결하여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서주는 마침내 19일 조조(早朝) 황군에게 그 일부가 점거되었다. 남으로 북으로 그리고 서로 포위된 서주가 불일(不日) 함락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추측했던 일이지만 수일 전 총공격을 개시한 이래 불과 기일(幾日)에 서주성이 점령된 것은 황군의 충용무비한 전투의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러나 서주의 함락으로써 곧 지나사변이 해결되었다고 속단하는 것은 불가하다. 왜냐하면 현재 점령한 부분은 지나 전국(全局)으로 보면 요지나 일부분에 불과하고, 비점령지대로부터의 패잔병의 게릴라전법은 상당히 황군을 괴롭히며 공산당과 결탁한 국민당은 비록 국민정부가 조락(凋落)된다 하더라도 공산당의 힘을 빌어가지고 항일을 준비하고 있으며 다년(多年) 배일, 항일의 국민교육을 받은 지나 국민들로 하여금 신정권을 지지하고 일본을 신임케 하려면 약간의 선무공작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황차 황폐한 전화지(戰禍地)의 부흥은 1,2년에 될 바 아니다. 그러므로 사변이 제2단락을 고하였다고 반드시 안심할 것이 아니라 견인지구하여 장기전에 처할 각오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조선일보가 보기에 ‘황군’의 전쟁은 중국의 요충지 몇 군데를 점령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중국 전역을 일본의 식민지로 삼은 뒤에 동남아시아로 영역을 넓혀 나가는 ‘대동아공영권’의 실행이 최종 목표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중국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에는 오랜 세월 외세의 압제와 수탈을 당해온 민중이 살고 있는데 조선일보의 눈에는 그들이 일본군에게 살육을 당하는 일보다는 ‘대일본제국’의 영토 확장이 더 중요한 과업으로 보였다는 뜻이다.


‘황국에 갈충진성(竭忠盡誠)을 다하자’

1938년 6월 11일자 동아일보에는 「영예의 초기 지원병/ 202명 건아 합격/ 오는 15일에는 경성제대 강당에서/ 성대한 입소식을 거행」이라는 5단 기사가 실렸다. 지원병 응모자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들어 3천명이 넘었는데 엄격한 심사를 거쳐 202명을 선발했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6월 15일자 조간 1면 머리에 「지원병훈련소 개소식에 제(際)하여」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조선 통치사상에 한 ‘에포크 메이킹’이요 미나미 총독의 일대 영단 정책하에 조선에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되게 된다는 데 대하여 이미 본란에 누차 우리의 찬의를 표한 바 있거니와 지난 4월 3일의 신무천황 제일(祭日)을 복(卜)하여 본 제도가 공포되고 그 실시에 대한 모든 준비가 착착 진행하는 중에 있었는데 그 동안 일반 민중의 열렬한 기대 가운데에서 지원병 원서 접수기한인 4월 10일까지에 지원자 수는 3천명을 초과하는 성관(盛觀)을 나타내었고 (…) 금일은 미나미 총독의 임장(臨場) 하에 훈련소의 개소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어찌 국가의 성사(聖事)가 아니며 경행(慶幸)이 아니랴. (…)
요컨대 금번 지원병제도의 실시는 위정당국에서 상(上)으로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려(聖慮)를 봉체하고 하(下)로 반도민중의 애국 열성을 보아서 내선일체의 대정신으로 종래 조선민중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던 병역의무의 제1단계를 실현케 하는 것이다. 황국신민 된 사람으로 그 누가 감격치 아니하며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 다만 오늘의 개소식을 당하여 특별히 이번에 엄선 중 엄선으로 선발된 지원병사들은 이와 같은 중대하고 심원한 의의를 가진 제도를 특별히 실시하는 초기에 있어서 제1차 훈련생인 만치 그만치 그 책임이 중차대한 것이다. 장래 국가의 간성으로 황국에 대하여 갈충진성을 아니하면 안 된다. 그리하여서 국방상 완전히 신민의 의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청년들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보는 지원병제도를 반대하다가 투옥된 인사가 40여명이나 되었는데도 조선일보는 그런 사실은 한 줄도 보도하지 않고 ‘황국에 갈충진성’을 하면서 ‘신민의 의무를 다하자’고 외쳤다.


궁핍한 민중에 저축을 ‘권장’

조선일보 1938년 6월 22일자 조간에는 「저축 권장의 목표/ 장기전에 비(備)할 대책」이라는 사설이 실렸다.

21일부터 1주간은 이것을 저축장려주간으로서 관공서, 회사, 은행, 조합 등 총동원으로 저축을 장려하기로 되었다. 조선 내의 저축 목표는 2억 원에 있는데 이것을 무엇으로 표준한지 모르나 적국 80억 원의 40분의 1로 한 것은 조선의 부력(富力), 인구 등을 기본한 것일 것이다. 조선의 저축 표준이 2억 원이라면 1인당 약 10원, 1 호(戶)당 약 50원이다. 조선 형편에 1호당 50 원의 저축이 가능한가는 별개로 하고, 조선서도 상응한 저축을 할 것만은 필연한 형세다.
즉 지나사변 등은 현재의 정세로 보아 단시일에 종막(終幕)될 조짐이 없다. 국민정부는 패전을 계속하면서도 소련을 비롯한 구미 열강과 결탁하여 재정적 군사적으로 막대한 원조를 받고 있다. 이 국민정부를 최후까지 추격 붕괴시키려면 약간한 시일이 걸릴 바 아니다. 또 점령한 방대한 면적의 치안유지에는 상당한 병력과 재정이 필요하며, 일보 나아가 황폐된 점령 지역의 복구와 생산기구의 설치는 재정적 기술적으로 용이한 일이 아니다. 금년도 군사비와 경상비가 80억 원인 것을 보면 연(年) 80억 원이 필요한 것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금년도 세입을 보면 납세와 관세 등으로 된 것은 겨우 20억 내외로 50여억이 공채에 의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이 공채를 소화하려면 은행 기타 회사, 조합 등의 저축이 많아야 할 터인데 중요 은행, 회사의 1년간 저축은 2억여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저축은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국민은 가능 여부를 불문하고 필요 밑에 여행(勵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일보가 사설을 통해 ‘가능 여부를 불문하고’ 반드시 저축을 해야 한다고 명령조로 말하던 시기에 식민지 백성들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뒤부터 일제가 ‘토지조사 사업’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농지를 수탈하기 시작한 이래 자기 땅이 없어 소작인 노릇을 하거나 머슴살이 자리마저 구할 수 없던 사람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도시로 떠나 날품팔이를 하거나 낯선 만주 땅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는 중국의 국민정부를 ‘말살’한다는 명목으로 한 해 한 가구에 50여 원의 저축을 실질적으로 강요하려 든 것이다. 50여 원이라면 쌀을 여러 섬이나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국민 감격의 성전 1주년 기념일’

일제가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국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한 해가 되던 날이 1938년 7월 7일이었다. 그 날을 하루 앞둔 6일자 조선일보 지면에는 ‘성전 기념’을 전하는 기사가 요란하게 실렸다.

국민감격의 7월 7일 / 성전 1주년 기념일에/ 조선 경성 총동원 연맹 발회식(發會式)
개최, 개인 수만명 성동 원두에 총동원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동(同) 조선연맹의 발회식은 의의 깊은 성전 1주년의 기념일인 오는 7일 경성운동장에서 거행하기로 되었거니와 관계 방면에서는 이 날의 성대한 발회식을 전후로 미증유의 일대 행사를 진행하고자 모든 준비가 착착 진행 중이다.
이 날 경성에서는 각 단체를 필두로 관청, 은행, 회사, 중요한 상점, 공장 등 7백여 단체가 동원하여 경성연맹과 조선연맹의 발회식에 참가하게 된 터인데 식장에는 미나미 총독이 직접 나가서 모여든 민중 앞에 고사(告辭)를 피력할 터이다.
경성부에서는 미나미 총독의 열성에 넘치는 그대로 식장 안에 구석구석에 사무치도록 여러 개의 마이크와 확성기를 준비하였고 방송국에서도 전국에 중계방송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발회식이 끝난 뒤에는 곧 위령제에 옮기어 호국의 영령을 위로할 터이다. (…) 경성연맹에서는 내선일체, 진충보국(盡忠報國) 등 40여 종의 표어를 3백여 개의 깃발에 적어서 들고 나올 터이며 조선연맹에서도 “국민감격의 7월 7일을 감명하라”는 선전비라 10만 매를 산포하여 서울장안은 총후감격과 약진일본의 얼굴을 그대로 나타나게 하리라 한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하 정동연맹)은 일제가 중국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조선인들의 ‘총후 지원’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었다. 발회식에는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 시중회(時中會), 조선교화단체연합회, 계명구락부, 조선춘추회 등을 비롯하여 일본적십자조선본부, 조선군사후원연맹 등 59개 단체와 윤치호, 이병길 등 개인 56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정동연맹에 가입한 조선춘추회는 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국내 25개 일간신문사로 1938년 1월 30일 창립되었다. 조선춘추회는 5월 18일 아래와 같은 선언문을 발표했다.

장기전 하에 있어서 일본제국의 국운 발전은 침침호불기(駸駸乎不己)하고 황도(皇道)의 선포는 동아(東亞)에 퍼지고 있으나 시국의 중대차(重大且) 경륜의 불이(不易)함은 실로 전고(前古) 미증유다. 아등(我等)은 반도 언론기관으로서 여기에 신문 보국을 서(誓)하고 일치단결 아(我) 대륙정책의 전진 기지인 중대 사명의 수행에 협력해 왔으나 지금 획기적 교육령의 개정은 실로 내선일체의 실을 거(擧)하고 지원병제도의 실시는 전 반도 거국일치에의 역사적 비약을 하게 하였다. 차제에 당하여 아등은 더욱 국민정신의 고양을 도모하고 비상시국의 난관을 극복하여서 국위의 발양을 기하려 한다. 우(右) 선언함.

7월 7일 조선일보 석간 1면 머리에는 「지나사변 1주년」이라는 사설이 올랐다.

세간에서는 흔히 노구교 상에 있어 수발의 적탄(敵彈)으로 말미암아 금번의 지나사변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바 물론 금번 사변의 직접 동기가 거기 있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장(蔣) 정권의 항일용공정책은 제국으로서 묵시(黙視)키 어려운 바로서 만일 제국의 자중함이 없었던들 실력의 발동은 이미 그 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제국은 만주국이 건설된 이래 누차 일만지(日滿支) 3국의 공존공영을 위하여 장 정권에 제휴한 바 있었건만 장 정권은 소허(少許)도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적대하여 옴에 동아의 평화를 위하여, 소련의 적세(赤勢) 침략을 배제하기 위하여, 제국의 황도이상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장 정권을 그대로 둘 수 없게 된 터인즉 금번 사변에 있어 제국의 태도는 실로 부득이한 일이다. 여하튼 황군이 한 번 이르는 곳에는 막을 자가 없어서 북지는 물론이요 중지에도 (…) 제성(諸省)이 모두 평정되었다. 지금 장 정권은 오지로 도피하여 여명(餘命)을 보전할 방도 외에 없는 대신 북중지에는 이미 신정권이 확립되어 제국의 지도 아래 신중국이 건설되어 가고 있는 현세(現勢)이다. (…)
지나사변의 (…) 거대한 사명을 달성키 위하여는 전 국민의 일심협력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선에 나간 장병들의 희생을 생각하여서라도 총후의 국민은 마땅히 정성을 다하고 힘을 합하여 이 난관의 돌파를 꾀하여야 할 것이다. 당국과 사회 각 단체에서는 이러한 견지 아래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을 결성하여 전 국민의 정신적 협조를 고조하려는 바 지나사변의 1주년인 이 날을 복(卜)하여 조선연맹의 발회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제국의 신민 된 자로서는 누구나 이 연맹의 경일(敬日)을 찬성치 않을 자가 없겠지만 한 걸음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협력하여야 할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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