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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람들’의 친일 기록(3)

- 조선일보 대해부 : 부록(3)

기사승인 2018.04.11  00:4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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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李光洙, 창씨명 香山光郞, 1892~1950)-언론계의 ‘무솔리니’

(…) 1910년 <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대한흥학보> 제11호에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했다. 같은 해 3월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남강 이승훈의 초청으로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1년 ‘105인사건’으로 이승훈이 구속되자 학감으로 취임해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 1915년 김병로·전영택·신석우 등과 교유하는 한편, 인촌 김성수의 후원으로 9월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했다. (…)

1919년 1월 「조선청년독립선언서」(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하이로 가서 신한청년당 조직에 가담했다. 안창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감해 7월 상해 임시정부 사로편찬위원회 주임을, 8월에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맡았다. 1920년 4월 29일 흥사단에 입단했다. 1921년 3월 상하이에서 귀국했다. (…) 같은 해 5월 동아일보사에 객원으로 입사했다. 1924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사설 「민족적 경륜」이 물의를 일으켜 퇴사했다. (…) 1926년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 1932년 7월 30일 문인 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및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3년 8월 동아일보사를 나와 같은 달 28일 조선일보사 부사장에 취임해 1934년 5월까지 활동했다. 1936년 6월 1일 경성일보사 초대 사장이자 조선 언론정책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고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의 흉상 건설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개월 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38년 3월 10일 정신적 스승인 안창호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으며, 11월 3일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했다. 이후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등 본격적인 친일행위의 길로 들어섰다.

1938년 12월 14일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했다. 1939년 3월 14일 ‘북지(北支) 황군 위문 문단사절’ 후보 선거 실행위원을 맡는 등 문단사절 파견을 주도하고, 7월 <삼천리>에 「문단사절의 의의」를 발표해 “조선민족이 일본국민이라는 견지와 감지(感地)에서 문예를 창작하거나 평론하려는 국민주의의 문인이나 문학은 조선에는 전연 없었다. 그런데 지나사변을 계기로 조선민족의 황민화라는 대변혁이 일어났다. 이번 문단사절은 실로 이 변혁을 문단의 입장에서 표시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6월 30일 조선총독부 도서과가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했다. 조선총독부 외곽단체로 1939년 11월 3일 발족한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1월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서 협회 주최 전선(前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

(…) 1940년 2월 무렵 소설 <무명(無明)>으로 일본의 모던일본사(후에 신태양사로 개칭)가 주관하는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 9월 29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애국일의 노래」가 방송되는 한편, 일문 산문집 <동포에 부침>(박문서관)이 간행되었다. (…) 5월 10일 협화총서 제5집으로 <내선일체수상록(內鮮一體隨想錄)>을 발간했다. 7월 7일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하는 용산 호국신사(護國神社) 오조영지(御造營地) 근로봉사에 참가했다. 8월 25일 임전대책협의회(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9월 7일에는 임전대책협력회가 주최한 채권봉공대종로대에 참가하여 거리에서 애국채권을 팔았다. (…)

1942년 2월 27일부터 29일까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저축강조 전진대강연회 연사로 활약했다. (…)

1943년 2월 26일부터 8월 3일까지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국민개병가(國民皆兵歌)」 현상모집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4월 17일 (…) 조선문인보국회의 이사에 선출되었다. 8월 18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희망의 아침」이 방송되었다. (…) 11월 8일부터 14일경까지 최남선·김연수 등과 함께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지원병을 권유하는 ‘선배격려대원’으로 연설했다. 이 행사를 중심으로 최남선과 나눈 「도쿄대담」이 <조선화보> 1944년 1월호 ‘학도출진 특집호’에 실렸다. 대담 자리에서 11월 14일 메이지대학 강당에서 열린 특별지원병 궐기대회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런 장면은,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오.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참으로 내선일체가 실현된 것 같은 장면이었지요. 조선 학생들이 의견을 말하면 내지 학생들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말을 하며, ‘하나가 되자’라는그런 생각으로 가득했지요.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모두가 울고 있더군요.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 (…)

1945년 1월 4일부터 17일까지 전쟁협력단체인 대화동맹(大和同盟)이 주도한 처우감사 총궐기 재성(在城)유지협의회 운동준비위원으로서 처우감사총궐기전선(全鮮)대회에서 “자, 조선의 동포들아 /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 이 큰 싸움을 이기게 하자 /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 대아세아 건설을 완수시키자 / 이럼으로써 비로소 / 큰 은혜에 보답하리라 // 아아 조선의 동포들아, / 우리 모든 물건을 바치자 / 우리 모든 땀을 바치자 / 우리 모든 피를 바치자 / 동포야 우리들, 무엇을 아끼랴 / 내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말지어다 / 내 생명 그것조차 바쳐 올리자 /우리 임금님께, 우리 임금님께”라는 내용의 시 「모든 것을 바치리」를 낭독했다. (…·)

이광수는 시, 소설, 평론, 좌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천황제와 황국신민화 찬양,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 정당화와 전시동원 독려, 그리고 문학을 통한 보국 등을 적극 선전했다. 1939년 2월 <동양지광>에 발표한 시 「가끔씩 부른 노래」에서 “한토(韓土)의 이천만 민초와 함께 임금님, 우리 임금님 하고 / 우러러 받들도다 / 영원한 탁류에 헐떡이는 황하(黃河)의 흐름도 맑아져 / 천황의 나라가 되노라”고 조선인에게 ‘천황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을 권유했다. 왜냐하면 “황민화가 될수록 조선 민족에게는 행복이 오는 것”(「국민문학의 의의」, 매일신보, 1940.2.16.)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끌려가는 일본국민이어서는 아니 된다. 구경하는 국민이어서는 아니 된다. 자발적, 적극적으로 내지 창조적으로 저마다 신체의 어느 부분을 바늘 끝으로 찔러도 일본의 피가 흐르는 일본인이 되지 아니 하여서는 아니 된다.”(「황민화의 조선문학」, 매일신보, 1940.7.6.)고 하여 완전한 황민화와 자발적인 충성을 요구했다. (…)

1939년 무렵 일본의 동양체제론, 내선일체론, 대동아공영권론 등을 받아들인 이후, 마침내 일본 천황 중심의 대동아공영권론을 신념화하기에 이르렀다. 1941년 9월 3일부터 5일까지 매일신보에 발표한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에서 “영국은 당시 세계에 최부(最富)한 인도를 2세기 간의 통치로 세계의 극빈자를 만들었다. 난인(蘭印: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인용자) 불인(佛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인용자)도 모두 영(英)의 통치와 동공이곡(同工異曲)이다. 그들은 식민지의 토민을 유우(乳牛) 이상으로 생각지 아니하였다. 오직 착취하기 위하여서만 그 생존을 허하였고 그 주민 자신의 문화 번영은 염두에 없었다. 이것이 과거 영불의 대죄악이다. // 그런데 일본의 공영권이란 이러한 영불의 정책과는 대조적이다. 각 민족으로 하여금 각득기소(各得其所)케 하면서 공존공영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오랜 탐욕이 지배하던 지구상에 황도의 신낙원을 건설하자는 성(聖)된 사업”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론을 진정한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역사적 모험으로 선전했다. (…)

(…) 1940년 2월 20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창씨와 나」에서는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광랑(光郞)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 어명(御名)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가슴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일체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하였다”라며 창씨개명을 적극 옹호하는 한편, 자신의 창씨개명을 합리화했다.
「심적 신체제와 조선문화의 진로」(매일신보, 1940.9.4.~9.12)에서는 내선일체를 “내가 재래의 조선적인 것을 버리고 일본적인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내선일체의 최후의 이상을 “조선 이천삼백만이 모두 호적을 떠들어보기 전에는 내지인인지 조선인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조선인은 쉽게 말하면 제가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일찍 조선인의 동화는 일본신민이 되기에 넉넉한 정도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 버려야 한다고.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유일로가 있다”고 전제한 후 “조선인의 국체관념과 습성과 지력이 내지인과 동일 수준에 오르는 날 조선인은 내지인과 다름없이 내각 총리대신도 육해군 대장도 될 것이요, 대공사도 될 것이다. 국가가 요구하는 것은 충성 있는 인재다. 조선인이니 아니 쓴다는 이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조선인이 황국신민의 정조(情操)가 확립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문제다”라고 주장했다. 조선인이 일본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아예 조선적인 것을 소멸시키라고 요구하는 등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극단적으로 호응하고 있다.

제국의 질서 안에서 조선인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일본인보다 더 천황에 충성해야 한다는 논리는 평론·논」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을 비롯한 문학 작품을 통해서도 적극 제시되었다. 「우리 집의 노래’(<신시대>, 1941년 1월호)에서는 “아바님과 어머님이 앞을 서시고 / 언니 아우 항렬 찾아 차례로 서서 / 신명전에 합장하고 기원드리세 / 우리 나라 우리 집이 태평하소서 // 몸에 가득 아침하늘 햇볕을 받아 /공손하게 가지런히 허리 굽혀서 / 우리 임금 천황 폐하 겨오신 곳을 / 마음 모아 정성 모아 요배 드리세”라고 노래하며 황국신민으로 살 것을 제창했다.

「새해」(매일신보, 1944.1.1.)에서는 “씩씩한 우리 아들들은 총을 메고 전장으로 나가고 / 어여쁜 우리 딸들은 몸뻬를 입고 공장으로 나서네. / 말 모르는 마소까지도 나라 일 위해 나서는 오늘이 아닌가. / 천년화평 도의세계를 세우랍신 / 우리 임금님의 명을 받자와 / ‘예’ ‘예’ 하고 집에서 뛰어나오는 무리 / 이날 설날에 반도 삼천리도 기쁨의 일장기 바다. /무한한 영광과 희망의 위대한 새해여.”라고 노래하여 일본 천황의 명령에 망설임 없이 나설 것을 촉구했다. (…)

1942년 5월 8일 일본 각의에서 1944년부터 조선인에게도 징병제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자 “내후년부터 조선 사람의 아들들은 징병이 되게 되었습니다. 사나이의 할 일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농사나 공장이나 기타 여러 가지 직업으로 나라를 돕는 일이요, 또 한 가지는 병정이 되어서 나라를 돕는 일입니다. 그동안 조선 사람 남자들은 병정이 못 되었으니 반편 국민 노릇을 한 세음이었습니다. 내후년부터야 옹글은 국민이 되는 것”(「징병과 여성」, <신시대>, 1942년 6월호)이라고 환영했다. 전쟁이 격화되어 패전의 기운이 짙어가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조선 청년들에게 천황의 국민으로 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1943년 10월부터 실시한 학병제에 동조하여 “이 성전의 용사로 / 부름받은 그대-조선의 학도여 /지원하였는가, 하였는가 / -특별지원병을- / 그래, 무엇으로 주저하는가 / 부모 때문인가 / 충 없는 효 어디 서리. / 나라 없이 부모 어디 있으리 // (…) // 가라 조선의 6천 학도여. / 삼천만 동향인의 앞잡이 되라 / 총후의 국민의 기탁(寄託)과 / 누이들의 만인침(萬人針)을 받아 띠고 가라”(매일신보, 1943.11.5.)고 노래했다. (…)

국민문학 또는 국책문학을 수립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그것을 이론화하는 글을 발표했다. 1939년 11월 14일부터 17일까지 경성일보에 발표한 「문학의 국민성」에서는 “국민성을 떠나 문학은 없다”는 전제 하에 “조선문의 문학은 일본 국민문학의 일부라고 하는 명확한 인식과 강력한 의식”을 지녀야 한다면서 일본 국민문학으로 예속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국민은 총동원되었다. 문인도 총동원에 아니 들지 못하였다. 문인도 모두 애국반원이 아니냐. 허위를 참지 못함이 문인의 본색이다. 진실이 문인의 생명이다. 문인의 붓은 마땅히 국민문학의 건설을 일정으로 향할 것”(「국민문학의 의의」, 매일신보, 1940.2.16.)이라 주장하고, 국민문학 건설을 조선문학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설정했다. 1940년 3월호 <조선>에 발표한 산문 「내선일체와 국민문학」에서 “조선반도의 문학으로 하여금 바람직하지 않은 경향을 청산하도록 하고 진리와 정의를 기조로 하는 새로운 일본문학”이 되기 위해 “조선문학은 ‘나는 일본의 신민이다!’라는 새로운 감격을 기조로 하여 국민문학성을 강하게 가지는 것”을 요구했다. 이 주장은 일제 말기로 갈수록 더욱 강화되어 일본의 지방문학으로서 조선문학론을 제기하는가 하면 국어(일본어) 창작론을 제출했다. (…)

해방 후, 1946년 9월 이학수의 도움으로 광동중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며 다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1947년 1월 도산 안창호기념사업회에서 도산 평전 집필을 의뢰받고 집필에 매달려 <도산 안창호>(태극서관, 1947.5)를 도산 안창호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출간했다. 친일에 대한 비판 여론 때문에 이름을 쓸 수 없었는데, 이 책에 춘원의 이름이 사용된 것은 제3판(1950)부터였다. (…) 1948년 6월에는 1946년 10월부터 1947년 2월까지 자신의 생활세계와 내면세계를 면밀하게 기록한 글들에다 상쟁(相爭)의 논리일 뿐이라며 당시 좌익을 비판하는 「내 나라」 등 3편의 논문을 추가한 <돌베개>를 생활사에서 간행했다. 1948년 12월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경위와 친일의 역사철학적 맥락을 전면적으로 밝힌 <나의 고백>을 춘추사에서 간행했다. 이 책에서 민족의식이 싹트던 때부터 일제 말기까지 자기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서술한 후, 일제 말기의 친일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나의 고백>에는」친일에 대한 변호 외에 「친일파의 변」이라는 부록이 있다. 여기에는 「홍제원 목욕」, 「삼학사’, 「관공리는 반민족자였던가」, 「미국인의 친일파관」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글들에서 병자호란 당시 끌려갔던 여성들을 홍제원 목욕이라는 지혜를 통해 감싸안았 듯이 친일했던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민특위의 2차 검거(문화계)가 시작된 첫날인 1949년 2월 7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차 심문이 끝난 후 조사관에게 약속한 대로 친일에 대한 고백서를 썼다. 같은 죄목으로 같은 날 검거된 최남선이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終世)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자열서(自列書)」를 쓴 반면, 이광수는 시종 <나의 고백>에서 보인 자세를 견지했다. 같은 해 3월 4일 고혈압증 등으로 병보석되었다. 공소시효 8일을 앞둔 8월 24일 특검에 송치되었으나 8월 29일 검찰관전원회의에서 4 대 5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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