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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단독선거와 ‘제주 4·3 사건’

- 조선일보 대해부 2권-8장

기사승인 2018.07.04  11:4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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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7일 입국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위원단,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개국으로 구성)은 12일 서울 덕수궁에서 첫 회의를 열고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1월 24일 소련군정 당국이 유엔위원단의 북한 지역 방문을 거부하자 북한에서 기능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해졌다.


김구와 남로당의 남한 단독선거 반대투쟁

김구는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 보낸 의견서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면서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하자고 요구했다. 한민당 간부 등으로 구성된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위원회는 김구의 그런 행동을 강력히 비난했다.

소련은 조선의 김구에게서 그 충실한 대변인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자살적 행동으로서 참으로 해괴한 일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금후에는 김구를 조선민족의 지도자로는 보지 못할 것이고, 크레믈린궁의 한 신자라고 규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동아일보>, 1948년 1월 30일자).

한민당을 대변하던 동아일보의 2월 3일자 사설(「총선거를 단행하라」) 역시 김구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풍상 30년 간에 임정 간판을 사수하였는데, 그대로 법통을 인정치 않고 총선거란 무엇이냐는 반발심에서 실현성 없는 양군 철퇴니 남북요인회담이니 하여 이것도 저것도 되지 않으면 정권은 결국 자파에 돌아온다는 시대착오적 타산으로 (…) 입국 이래 반복된 허다한 과오가 여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한 감이 없지 않다.

1948년 5월로 예정된 제헌국회 총선거가 남쪽의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결과를 낳을 것이 확실해지자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되어 있던 남조선노동당은 민주주의민족전선과 함께 2월 7일 전국적인 파업을 일으켰다. 이 파업은 미군정장관 A.L 러치가 미군 철수설을 부인하는 성명을 낸 지 이틀 뒤에 일어났다. 남로당의 단선반대구국투쟁위원회가 지휘한 노동자 파업을 중심으로, 전기노동자들이 송전을 중단하고 철도노동자들은 철도 운행을 중단했다. 통신노동자들은 통신 설비를 파괴하며 미군정을 압박했다. 전국 곳곳에서 농민들이 가두시위에 나서는가 하면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벌였다. 3월 초까지 연인원 2백만여 명이 참여한 이 총파업에서 좌익세력은 90회쯤 경찰을 공격해서 18명의 경찰이 사망하게 했고, 좌익 가운데 12명, 군중 70명이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숨졌다.

좌익의 파업이 한창이던 2월 10일 김구는 남조선만의 단독정부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남북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死坑)에 몰아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을 재검토하여 국내외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유엔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는 이 필요에서 작성된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북 정치범을 동시 석방하며,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 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이니 이 철과 같은 원칙은 우리의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불변의 원칙으로써 순식(瞬息) 만변(萬變)하는 국내외 정세를 순응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독립이 희망 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왜정 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것과 같이 우리는 통일정부가 가망 없다고 단독정부를 주장할 수 없는 것 이다.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위안을 받으려 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사사망념(詐思妄念)은 해인해기(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정부 수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3천만 자매형제여!
한국이 있고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 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不肖)하나 일생을 독립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70 유 3인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금일 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구나 외국 군정 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난 것도 같았다.
 3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抑塞)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잇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사(深思)하라. (송건호 지음, <한국현대인물사론>, 한길사, 1984, 75~76쪽)

2월 19일 열린 유엔 소총회에서 임시위원단 의장 크리슈나 메논(인도인)은조선 문제 처리방안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미국은 그 가운데 제1안을 지지하면서 남한에만 선거를 실시하라고 권고하는 결의안을 소총회에 제출했다. 2월 26일 소총회는 미국의 제안을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채택했다.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는 3월 1일 총선거를 5월 9일에 실시한다는 포고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날이 일요일이라 기독교단체들이 반대하고 일식(日蝕)까지 겹쳐서 5월 10일로 선거일을 바꾸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3월 1일 ‘정부수립결정안 축하 국민대회’를 열었다.


조선일보 사설, ‘남조선 정부만으로 전 조선을 대표’

조선일보는 1948년 2월 19일자 1면에 「북조선 정권 수립설을 듣고」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실었다.

(…) 작일(昨日) 내외의 보도는 북조선인민공화국 선포설을 전하고 있다. 북조선 정권의 존재는 그 선포 유무를 막론하고 이미 단독정권의 형태를 가지고 있음이 기성사실이다. 이것이 민족진영과 공산당 합작의 형식이었던 해방 직후와는 완전히 변모한 것으로 조만식 씨 퇴장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공산당 독재로 화하고 말았다. 이 정권이 이만치 진전되기까지에는 무력을 배경으로 한 탄압과 강제가 무수히 있었던 것은 월남동포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하는 바이다. 지금 북조선의 지배자들은 완전히 정권 군권을 장악하고 있어 금일에는 소련군이 철퇴한다고 해도 소호(小毫)의 동요가 없을 만치 되었다. 즉 소련군이 철퇴하더라도 소련세력은 의연히 북조선에 잔류하여 북조선 정권을 조종하고 북조선 정권은 소련의 이익을 대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이것은 도저히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로 된 정권이라 볼 수는 없는 것으로 금번 북조선인민공화국 선포설은 잠재 사실이 표면화했을 뿐이라고 본다.
그러면 우리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남북은 완전히 분단되고 말 것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게는 볼 수 없다. 지금 우리 문제는 국련이 취급하고 있다. 그 여하히 결정될 것은 아직 예측할 수 없으나 세계 평화와 인권 자유를 목표로 하는 유엔이 우리 문제를 그냥 포기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유엔이 어떠한 처치를 하든지 그것이 미국 1개국의 의사만이라고는 할 수 없고 적어도 전 참가국 57개국의 의사라고 할 수 있는 바로 가령 유엔에 의하여 남조선만의 선거로써 어떤 형태의 정부가 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완전히 전 조선을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간 우리는 유엔을 신뢰하여 최선의 방책이 그들에 의하여 안출(案出)되기를 고대하는 바이며 우리 자신 역시 최대 노력을 이에 첨가해야 할 것이다. 북조선 정권 출현설에 결코 비관할 것이 없다. 이것은 통일에의 한 과도적 단계로 본다. 우리는 이러한 위국에 직면할수록 혼신의 용력(勇力)과 불굴의 의지로써 민족의 대목적에 향하여 용왕매진할 뿐이다. 국제정세도 우리의 노력 여하에 의하여 호전될 수 있음을 확신하는 동시에 총역량을 이에 집결하기를 3천만 동포에게 절망(切望)하는 바이다.

이 사설은 북조선에 단독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남북이 완전히 분단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유엔이 ‘우리 문제를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유엔에 가입한 57개국 가운데 압도적 다수가 미국이 제안한 ‘남한 단독총선거’를 지지한 결과를 보고도 남과 북에 각각 다른 정권이 들어서도 분단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의 근거를 어디서 찾겠다는 것인가? 그리고 ‘북조선 정권 출현설’이 통일을 향한 과도적 단계라고 주장하는 조선일보의 기대가 허망한 것이었음은 그 뒤의 역사가 여실히 보여 준 바 있다.


조선일보의 엉성한 ‘4·3사건’ 보도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여 명이 제주도내 12개 지서를 공격하고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해서 경관 4명,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터졌다. 진보적인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먼 훗날 ‘제주 4·3 항쟁’ 또는 ‘제주 민중항쟁’이라고 부르게 될 역사적 사건이 시작된 것이었다. ‘제주 4·3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 동안이나 지속되면서 3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4월 3일 제주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미군정은 5일 100여명의 전남경찰을 응원대로 급파하고 제주경찰감찰청 안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조선일보는 뒤늦은 4월 6일자 2면에 ‘4·3사건’을 토막기사(「제주도 경찰관서 피습 / 시내 수개처에서 발생」)로 보도했다.

조병옥 경무부장 담(談)에 의하면 4월 3일 제주도 일대에 경찰서 피습사건이 돌발하였다고 한다. 경무부에 보고된 현재까지의 피해 상황은 경찰서 피습 11개소, 4명의 경찰관이 사망하고 8명의 청년이 희생당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만 보면 ‘4·3사건’의 원인은 무엇이고 무장봉기의 주체는 누구인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조선일보는 제주 현장을 직접 취재하지 않은 채 미군정청의 발표를 1~2단 기사로 짤막하게 보도했다. 4월 7일자 2면에는 경무부장 조병옥의 ‘발표’를 인용한 기사(「제주도의 치안을 교란 / 응원경찰대 현지 급파」)가 2면에 2단으로 실렸다.

6일 조 경무부장 발표에 의하면 4월 3일 이래 제주도에는 일대 불상사가 야기되어 폭동으로 인한 관공서의 습격파괴, 살육 방화 약탈 등으로 치안이 극도로 교란되었으며 경찰은 동시에 모조리 피습되어 도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기에 임하였으므로 즉시 경무부로부터 김동호 공안국장과 수원(隨員)을 특파하는 동시에 경찰 정예를 추려 응원경찰대를 현지로 급파하였다는 바 금번 사건에는 특히 공산게릴라의 지도하에 다수의 총기 수류탄과 흉기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서 조병옥의 발표를 빌어 처음으로 ‘폭동’, ‘공산게릴라’라는 말을 썼다.

조선일보는 5월 6일에야 ‘제주 4·3사건’ 관련 기사(‘제주 소요 의연 계속 / 군·민정 양 장관 공로로 현지 시찰’)를 2면 머리에 올렸다.

지난 4월 초순에 발발한 제주도의 폭동은 그 후 당국의 선무진압 공적에도 불구하고 한 달이 지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어 총선거를 앞두고 금후의 추이가 주목되고 있는데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과도정부 측에서는 소요사건의 실정을 시찰코자 딘 군정장관과 조 경무부장이 5일 오전 7시 비행기로 김포비행장을 출발하여 제주도 현지에 향하여 실정을 시찰 후 동일 오후 5시경 귀착하였는 바 제주도 소요사건의 금후 귀추는 각 방면의 심대한 주시를 받고 있다.

이 기사 밑에는 ‘불원 진압될 터’라는 공보실장 김대봉의 말과 「4월 중의 사망 154명 / 제주도 게릴라대 재차 습격」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조선일보는 5월 7일자 2면 머리에 「제주 소요는 일반적으로 평온화」라는 군정장관 딘의 담화를 싣고, 5월 9일자 2면에 「제주경찰의 고문사건 / 지서장 등에 체형과 벌금 언도」‘라는 기사를 2단으로 다루었다. 조선일보의 소극적인 보도가 남한 단독총선거가 아무런 저항에 부닥치지 않은 채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지, 4·3사건을 고의적으로 은폐하려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총선거 19일 뒤 조선일보에 다시 등장한 ‘제주 4·3사건’

조선일보에 ‘제주 4·3사건’ 관련 기사가 다시 등장한 것은 5·10 총선거가 끝난 지 19일」뒤인 5월 29일이었다. 짤막한 기사의 제목은 「제주 소요 확대 / 사상(死傷) 납치 등 6백 명’이다.

조선일보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2개월 2일 만인 6월 5일자 1면에 처음으로 그 사건에 관한 사설(「제주사태 수집[收集]에 관하여’」)을 내보냈다.

육해경비대 출동 이래 제주도 사태에 관한 2일 부(附) 통위부 발표에 포로·귀순자 3천1백여 명이었다는 수자를 보고, 사태가 점차로 진정되어 가는 듯한 감을 가지게 되는 반면에 소위 폭도 측의 인원 수가 전하던 이상 뜻밖에 많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통위부장 발표문에 ‘그 완강한 행동은 날로 증세(增勢)’해 갔다고 했으니 그 증세에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주도민의 혼인이 대부분 도민 간에 많다는 특수사정으로 보아 도민 중에는 폭도 측 청년 중에 어느 누구나 대부분이 친척이 아니면 소위 ‘사돈의 8촌’쯤이라도 척분(戚分)을 가진 사람이 폭도 측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었을 것을 생각할 수 있고 또 고도(孤島)의 특수한 전통생활에서 가져온 자도민(自島民) 우선 혹은 비호의 소극적 배타심도 도와서 도민들이 흔히 폭도 측 청년에 대하여 동정적 경향에 있었을 것을 십분 짐작할 수 있다. 사건 발생 후 이미 2개월에 다수한 인원이 어떻게 산중 농성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리 그들이 약탈에 능했다 하더라도 다수한 주민의 실효 있는 동정적 무엇이 없이는 용이히 가능치 못했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려면 주민의 동정적 감정이나 직접 간접의 응원적 태도를 가산(加算)한다면 제주도의 사태는 일종의 반란적인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 다시 통위부장 발표문을 인용커니와 육해경비대는 “신성한 건국 초기에 동족상잔의 애사(哀史)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은인자중”하여 왔다는 것과 부득이 행동을 개시케 됨에 ‘사살(射殺)주의’가 아니고 ‘생금(生擒)주의’로 임하였다는 것에 우리는 그 태도의 온당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 사설은 ‘4·3사건’이 크게 확대된 원인을 제주도민들의 특수한 ‘척분 관계’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진압군인 육해경비대가 ‘동족상잔의 애사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은인자중’하면서 ‘사살주의가 아니라 생금주의’를 원칙으로 삼았다는 것을 ‘태도의 온당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제주도의 특수한 척분 관계가 4·3사건이 갈수록 확대되는 데 한 원인으로 작용했겠지만, 실제로는 미군정이 파견한 군대와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의 무참한 양민 학살과 제주도 초토화 작전이 사상이나 이념에 관계 없이 도민들의 저항에 불을 댕겼던 것이다.

제주 4·3사건이 그 이후 어떻게 전개되고 마무리되었는지는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펴낸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의 ‘결론’에 간명하게 정리되어 있다.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킬로미터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산간지대에서뿐만 아니라 해안변 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였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도 강경진압을 계속하였다.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었다. 가장 피해가 많았던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선무 병용작전이 전개되었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했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그해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천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잔여 무장대들의 공세도 있었으나 그 세력은 미미하였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실로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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