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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대통령선거-‘못살겠다 갈아보자’

- 조선일보 대해부 2권-17장

기사승인 2018.09.05  17: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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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의 대통령선거는 5월 16일로 정해졌다. 선거일이 공고되자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이승만이 언제 출마 선언을 하는지에 쏠렸다.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과 ‘우의, 마의’ 동원

이승만은 3월 6일 열린 자유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보낸 메시지를 통해 “금년 8월에 임기가 만료되는데, 이번 대통령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밝혔다. “3선은 민주주의적이 아니므로 야(野)에서 국사에 협조하겠다”는 것이었다. 81세 고령인 그가 건강 때문에 대통령 직무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아 더 이상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면 대중이 납득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민주주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불출마 통보를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1954년 후반기에 ‘현직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명시한 헌법의 조항을 고쳐서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은 이 조항의 제한을 적용받지 않는다”는 내용을 넣으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했던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결과를 보면 이승만은 ‘우의(牛意) 마의(馬意)’까지 동원한 충성분자들의 ‘열성’과 ‘국민의 뜻’을 못 이겨 출마하겠다고 나섰다. 그것은 이승만의 정치적 행태를 주의 깊게 짚어본 보통사람들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한 조선일보 3월 7일자 사설(「자유당이 후보자 지명과 이 총재의 메시지」)은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이 지니는 정치공학적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유당의 혼란’ 같은 부수적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이 대통령이 만일 중의(衆意)를 저버리지 못하고 출마 사퇴를 번의(翻意)하는 일이 있을 것인가 어떤가 하는 문제, 그리고 ‘민의’를 대변하여 자유당과 그 산하단체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번의를 간청하고 이 대통령이 이에 대하여 부득이 재출마를 하게 될 경우에 반드시 당대회가 지명한 부통령후보(이기붕-인용자)를 그대로 자신의 협조자로 선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 또는 이 현 대통령이 끝까지 출마를 사퇴할 경우 자유당은 어떠한 차선의 책(策)이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이 실로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에 있어서는 5일의 자유당대회는 자유당의 후보 지명에 아무런 실질적인 효과를 주지 못하고 자유당의 선거 대책은 당대회 이전보다도 더욱 혼돈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 이 대통령이 한 번 재출마 사퇴를 결의한 이상 그 번의를 쉽사리 할 것인지 이 점은 예측키 어렵다 하겠다. 수개월밖에 남지 않은 선거전을 앞두고 이 대통령의 번의를 간원(懇願)하는 자유당 당의(黨意) 혹은 민의가 충분히 표시되기까지 자유당의 고충도 적지 않을 것이려니와 자유당만이 아니라 각 야당의 정부통령 입후보도 이에 따라 적지 아니 암중을 모색하게 되지 않을까 예측되는 것이다.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이 나온 3월 6일 부산에서부터 관변단체들이 출마를 ‘간청’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한 시위는 3월 12일 동원된 노동자와 농민들이 경무대 앞으로 우마차 8백대를 끌고 행진한 사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우차와 마차는 서울시 통행이 규제되었기 때문에 그 행진은 불법이었지만, 자유당이 동원한 노동자들은 “이승만 박사의 3선을 지지한다”고 고함을 질러댔다. 서울시내 거리에는 쇠똥과 말똥 냄새가 진동했다. 14일에는 마사회의 마상 시위가 벌어졌고, 선거권이 없는 남녀 중고등학생들도 수업 시간에 교기를 앞세우고 비를 맞으며 시위를 벌였다.

그때부터 언론과 야당은 ‘우의, 마의’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조선일보 3월 13일자 2면에는 이승만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하는 ‘우의, 마의’ 앞에 직접 나와서 해산을 권유하는 사진과 기사가 실렸다.

이승만은 3월 23일 출마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조선일보 3월 24일자 1면 머리기사(「이 박사 재출마 결의 / 23일 하오 공보실 통해 발표」)는 이렇게 보도했다.

(…) 지난 3월 5일 이 대통령이 “올해 선거에는 출마 않기로 작정하였다”는 담화 발표가 있은 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재출마 요청 운동과 연일 경무대에 전달된 수만 장의 번의 요청서를 받고 재출마를 희구하는 국민의 뜻을 저버릴 수 없어 제3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할 것을 결심하였다고 추측되는데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나로 하여금 금년 선거에 기어이 입후보하도록 하려는 민중의 뜻을 받아들여 앞으로 자립경제 확립을 위해 더욱 많은 일을 하여야겠다”라고 국무위원들에게 시사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이날 하오 공보실에서는 이 대통령의 재출마 표명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동 담화의 주요 골자는 이 대통 령이 재출마를 결의(決意)하게 된 경위 및 이번 정부통령 선거에는 선거자금을 백만 환 이내로 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 것과 참의원의 조속 구성을 위하여 국회에서 법률을 속히 통과토록 요청하였다.

“민중의 뜻을 따라 재출마를 결의했다”는 이승만의 발표에 대해 조선일보 3월 25일자 사설(「이 대통령의 재출마 결의 표명」)은 81세 노인의 ‘오락가락’을 비판하기보다는 긍정적인 논조를 펼쳤다.

(…) 좌우간 이 대통령이 “금번 선거에는 출마치 않기로 작정하였다”는 성명이 있은 이후 18일 간에 수백만 명의 재출마 요청 운동이 전개되었고 또 정계의 억측이 구구하여 선거기를 앞두고 정계가 불투명한 속에 암중모색을 거듭하여 오던 바 이번 표명으로써 여당인 자유당의 후보자가 결정됨에 따라 정계가 확실히 투명해진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다만 부통령후보로 자유당의 공천을 받은 현 민의원 의장 이기붕 씨는 이 총재의 지시에 따르겠다 하였으니 자유당으로서는 이 부통령후보도 급속히 태도를 표명케 하여야 할 일이다. 이와 같이 여당의 후보자 결정에 따라 야당에서도 각기 정부통령후보를 공천하여 정강정책을 통하여 일반 국민의 신중한 판단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정부통령선거도 이번으로 제2회째이고 또 종래의 개인 중심으로부터 정당 중심으로 전환된 경향이 농후한 만큼 여야 각 정당은 자당의 정강정책을 널리 주지시키어 공정한 선거가 실시되게끔 하여야 할 일이다. 이 대통령 출마가 확정된 금일 과거 경위를 더 논하는 것보다는 금후의 선거운동에 더 많은 명랑성을 부여토록 하여야 할 것이다.


30만 청중 몰린 민주당 유세장을 ‘교통 혼잡’으로 보도

민주당은 3월 28일 전당대회를 열고 대통령후보에 신익희, 부통령후보에 장면을 지명했다. 민주당은 선거구호로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내세웠는데 이 구호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승만 정권 8년 동안 쌓이고 쌓인 악정과 실정이 국민 다수의 반감을 일으키면서 정권 교체를 열망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 인사동 탑골공원 근처에 있던 민주당 중앙당사 옥상에 설치된 확성기에서는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자유당은 민주당 당사 맞은편에 대형 확성기를 걸고 “갈아봤자 소용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라고 맞받았다.

대통령선거는 이승만, 신익희, 조봉암(무소속)의 3파전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신익희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그의 유세는 5월 3일 서울 한강 백사장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150만여 명이었는데 무려 30만명이 넘는 인파가 백사장에 들어찼다. 투표권이 없는 어린이들을 빼면 서울 시민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신익희의 연설을 들으러 몰려간 셈이었다.

그것은 한국 정치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한강 백사장에 가지 못한 많은 국민까지 열광시킨 그 ‘대사건’을 아주 미미하게 다루었다. 5월 4일자 2면 중간에 실린 가로 제목 2단 기사(「인도교 근방은 교통 차단 / 어제 민주당 정견 발표에 시민 운집」)에는 군중의 일부를 담은 사진이 얹혀 있었다. 기사도 아주 짤막했다.

3일 하오 2시경 한강 모래사장에는 때 아닌 사람의 홍수로 한때 인도교 근방에는 모든 차   량이 통행을 못하는 일대 혼잡을 이루었다. 이날 민주당 대통령 입후보자 신익희 씨와 부통   령 입후보자 장면 씨의 정견 발표를 듣고자 모여든 수만 청중들이 한강 보트장 근처에 자리   잡은 연단을 둘러싸고 모여든 것이 이날의 혼잡을 일으킨 것이다.
약 한 시간 동안 각지에서부터 차가 밀려 일대의 교통은 마비되었던 것이다.

이 기사는 민주당 정부통령후보의 연설 내용이나 유세장에 몰려든 청중의 반응은 단 한 줄도 전하지 않으면서 ‘교통 혼잡’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망한 뒤에야 ‘각광’ 받은 신익희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 지명을 받은 뒤 조선일보 1면 머리에 오른 적이 없는 신익희는 5월 6일자 신문에서 비로소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해공 신익희 씨 급서(急逝) / 유세 도중 5일 이리서 / 호남선 열차 내에서 뇌일혈로」라는 제목의 기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며 동당 대통령후보 신익희 씨는 5일 새벽 호남선 열차 내에서 뇌일혈로 졸도되어 이리 호남병원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동 6시40분 회생치 못하고 향년 63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해공 신익희 씨는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 요직에서 독립운동을 해왔고 8·15 해방 후 귀국하여 독촉국민회 위원장, 입법의원 의장, 제헌국회 및 2기 국회의장을 거쳐 3기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한편 민주국민당 위원장을 거쳐 현재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동당 공천에 의하여 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며 4일 밤 동당 부통령후보 장면 씨와 함께 호남지방의 선거 유세차 향하던 중이었다.

고인이 된 신익희의 장례식은 5월 15일의 대통령선거 여드레 뒤인 23일에 치러졌다. 조선일보는 24일자 신문의 3면 절반을 극진한 추모의 염(念)으로 장식했다. 「온 겨레 묵념 속에 길이 가시다 / 종로의 큰 거리도 터지는 듯 / 추모의 시민 인산인해 / 말 없는 영구에 말 없는 하직」이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 해공 신익희 선생은 서거한 지 19일 만인 23일 국민들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우이동 묘지로 향하였다. 그런데 국민장이 거행된 이날의 장안은 발칵 뒤집히다시피 온 시민들이 영구차가 지나가는 네거리로 그리고 큰길가로 밀려나와 영구차를 향하여 우는가 하면 영구차를 호송하여 영결식장인 서울운동장으로 향하여 파도치듯 밀려들어가서 영결식장 주변은 한동안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랜 동안의 병환으로 돌아간 것도 아닌 선거운동 도중의 급서라 그 가족과 측근과 관계자들의 슬퍼하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겠거니와 온 국민이 선생의 서거를 슬퍼하여 이날 11시를 기하여 울려나온 사이렌을 신호로 전 국민은 다 같이 추모의 묵념을 올렸다. 그 중에는 천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시골서 찾아와서 선생의 영구차를 호송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선생의 서거에 대한 겨레의 슬픔의 정도를 말하여 주었다.


조선일보, 이승만과 자유당의 선거부정을 눈감다

민주당 후보가 없이 치러진 제3대 대통령선거는 이승만과 조봉암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개표 결과 이승만은 총 유효표의 52%인 504만여 표, 조봉암은 23.8%인 216만여 표를 얻었다. 조봉암이 예상을 넘어 그렇게 많은 표를 받은 사실은 그를 이승만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게 하는 한편 장차 ‘사법살인’의 희생자가 되게 하는 단초가 되었다.

신익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승만의 압승이 기정사실화한 가운데 뜨거운 관심을 모은 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이 401만여 표(46.4%)를 얻어, 380만여 표(44.0%)에 그친 자유당의 이기붕을 눌렀다. 이승만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굳게 다지고 있던 이기붕에게는 결정적 타격이었다.

특히 서울에서 이승만이 얻은 표보다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더 많은 것으로 확인되자 ‘국부(國父)’로 떠받들어져온 이승만은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뿐 아니라 미래의 정치 전망에 큰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선거 과정에서 음양으로 갖은 부정을 저질렀다. 특히 이승만은 신익희가 사망하기 전에 그에 대한 흑색선전을 일삼는가 하면 그의 사후에는 조봉암에게 ‘색깔공세’를 퍼부었다.

신익희가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신익희를 친일분자로 비난하였다. 이들은 ‘평화통일’을 말하는 조봉암을 용공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이승만은 5월 3일 논산훈련소에 수만 장병이 도열한 가운데 행한 연설에서 “일본과 회동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든가 또는 공산당과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겠다든가 하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 빼앗겨도 좋다는 것이나, 또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유의 언동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그날 유세에서 심지어 “공산주의자와 친일파들이 권력을 추구하고 있음”을 경고하고 그들은 “일본과 북괴에 비밀리에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이승만은 담화를 통해선 “이러한 사람들에게 투표를 해주어 이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 이것은 반역분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뿐이 아니라 민중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는 매우 과격한 주장을 펼쳤다.
이승만의 이런 과격성은 자유당의 선거운동이 나아갈 바를 지시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지방에서 “이 동리에서 만약에 야당계 표가 나온다면 이 동네는 몰살을 해버린다. 만약에 우리가 북진할 때는 너희들부터 전부 다 죽이고 가버린다”라고 주민들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었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3권>, 35~37쪽).

이승만의 일방적 공세가 극으로 치닫고 있던 선거운동 기간에 조선일보는 그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전달할 뿐, 거기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야당의 반박은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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