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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악법 반대투쟁’과 남북학생회담

- 조선일보 대해부 2권 -27장

기사승인 2018.11.14  10: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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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8월 23일 수립된 장면 정권은 이듬해 5·16 쿠데타로 무너지기까지 9개월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집권했다. 장면 정권이 후반 들어 가장 시달린 문제는 학생운동권과 혁신정당, 그리고 진보적 사회단체들이 주도한 통일운동과 ‘2대 악법 반대투쟁’이었다.

7·29 총선 직후 내각책임제의 수장인 국무총리 자리를 두고 민주당 신파와 구파가 극한대결을 벌인 끝에 가까스로 집권에 성공한 신파는 취약한 정치적 기반 때문에 정권 안팎에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특히 4월 혁명 이후 사회 각계각층에서 터져나오는 집회와 시위, 거기서 쏟아지는 요구는 장면 정권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장면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은 특히 통일운동에 대해 이승만 정권처럼 ‘반공’을 앞세워 탄압하려고 했다. 나중에 ‘2대 악법’으로 불리게 된 ‘반공임시특별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통칭 ’데모규제법’) 제정 시도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일보, 악법 제정을 강력히 반대

1961년 3월 8일 정부 대변인 정헌주(국무원사무처장)는 반공임시특별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데모규제법) 제정에 관한 안건을 임시 각료회의에 붙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3월 10일 오전 전문 9조와 부칙으로 이루어진 반공임시특별법안을 각료회의에 상정했다. 법무부장관 조재천은 “어떤 사람이 김일성 만세를 부르거나 「적기가」를 고창(高唱)해도 현행 국가보안법으로는 처벌할 방도가 없다”고 특별법 제정 이유를 설명했다.

조선일보 3월 10일자 1면의 기사(「해석상의 문제점 허다 / 민주당, 정책위 거쳐 월말 국회 제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여당인 민주당은 정부에서 회부된 반공입시특별법안을 정책위서 심의함에 앞서 동 법안 내용을 공표하였다. 동당 김 선전부장은 이날 동 법안 내용에 언급하여 “범죄 구성요건이 모두 목적범으로 되어 있으며 정부로서는 이 법에 의해 ‘언론을 제한’하거나 국민의 ‘자유’를 침해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말했으나 법 규정의 구성에 있어서는 다분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 이 법안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1) 제2조의 반국가단체 정의에 있어 ‘공산주의에 따라 활동하는’이라는 어(語)의 해석문제 및 2) 공산주의의 개념을 누가 규정 해석하는 것인가의 문제 3) 가장 악용될 우려가 있는 제4조 1항의 “반국가단체 구성원을 찬양 고무 또는 ‘기타 방법’으로”의 해석문제가 언론 및 사상의 자유와의 한계성 문제 4)제4조 3항 및 4항 “문서 도서 ‘기타 표현물’의 종류 및 자류 수집에 관한 국민의 자유와의 관련성 문제 5)편의 제공에 있어서의 ‘기타의 방법’의 해석문제 및 군첩보기관의 대(對)민간인 수사권 등이다.

4월 혁명 이후 5·16 쿠데타 직전까지 집회와 시위가 꼬리를 물고 일어남으로써 정부가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을 치른 어느 국가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황이라고 이해하고 정권이 냉정하고 차분하게 대처할 문제였다. 그런데 장면 정권은 오히려 국민의 기본권과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법을 만들어 집회와 시위를 막으려고 했다.

당시 민족일보 등 혁신계 언론은 물론이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적 언론도 2대 악법에 대한 비판적 논설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반공임시특별법안이 각료회의에 상정된 이튿날인 3월 11일자 석간 1면에 「반공임시 특례법 시안(試案)의 부당성을 지적한다」라는 제목으로 ‘통단(通段)사설’을 내보냈다.

(…) 첫째 이 법안은 국가보안법 개정에 의하지 않고 특별법의 형식을 취하려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1) 본법의 전부가 국가보안법에서 규정한 개념을 인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2) 9개 조 중 5개 조항이 다시 국가보안법을 병용하고 있으며 3)대체로 이 법이 다루고 있는 사항은 현 국가보안법이나 또 2·4 파동 시에 개악되었다가 작년 6월 10일에 폐기된 당시의 국가보안법(이것을 여기서는 개악법이라고 약칭한다)에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민주당이 개악법을 고쳐놓은 후 그것을 잘한 일이라고 실컷 자랑거리로 삼고 나서는 그로부터 얼마 아니 되는 오늘날 차마 보안법에 손댈 대의명분이 서지 않으므로 궁여지책으로 새 법을 만들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것은 정치도의상 용납될 수 없는 일이요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특별법 구상을 마땅히 백지로 환원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 개악법에서는 그래도 반국가단체라는 ‘정(情)을 알고’ 또는 ‘반국가단체를 위하거나 그 지령을 받고’ 가입하거나 권유한 때에만 처벌대상으로 삼았던 것인데 특별법안은 범죄 구성 요소로서 가장 중요한 이와 같은 요건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처벌을 하게 되었으므로 ‘그 정을 모르고’ 가입하였거나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되는 사실을 모르고’ 가입하였거나 심지어 ‘속아서’ 또는 ‘대한민국에 이익을 가져오는 단체인 줄 오인코’ 가입·권유한 무고한 사람까지도 올가미에 넣을 수 있게 한 것은 심한 망민법(網民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 이번 발표된 특별법의 시안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거의 전면적으로 이것을 입법화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정부와 여당은 그가 주동이 되어서 작년에 폐기한 개악법보다도 더욱 심한 이 특별법 구상을 일체 백지로 환원시키고 민주주의체제를 보존·신장시키는 가운데 이 법에서 얻으려는 좋은 면의 성과를 선정(善政)에 일로 매진함으로써 얻을 각오와 결심을 새로이 하기를 이 기회에 간곡히 권고한다.


혁신세력과 사회운동단체의 극렬한 악법 반대투쟁

장면 정권의 ‘2대 악법’ 제정 기도에 맞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투쟁을 벌인 조직은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를 비롯한 통일운동단체와 혁신정당, 그리고 진보적 사회운동단체들이었다. 3월 14일 4개 혁신정당과 민자통, 조국통일민족전선 등 3개 통일운동단체를 포함한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은 ‘반민주악법 공동투쟁위원회(정당·사회단체 공투위)’를 결성하고 “민주수호 정신에 입각해서 반민주악법 제정을 반대하고, 원내외투쟁을 효과적으로 단행하기 위하여 광범위하고 강력한 대중운동을 추진한다”는 내용의 ‘공동투쟁 강령’을 채택했다. 각 지방에도 공투위가 조직되었다.

3월 18일 경북 학생 공투위 주최로 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악법반대 규탄대회’에는 1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했다.

3월 22일에는 ‘반민주악법반대성토 대강연회’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그날 서울시청 앞에서 벌어진 집회와 시위는 4월 혁명 이후 규모가 가장 크고 격렬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장소에서 2백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옥을 둔 조선일보가 그 사건에 관해 상세한 보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조선일보는 3월 23일자 석간 1면에 「22일 데모 정치문제화 / 대량 체포를 추궁 / 내무위서 치안당국자의 출석 요청」이라는 기사를 4단으로 올리고 그 옆에 「22일 난동 데모는 틀림없는 파괴적 행동이다」라는 사설을 실었다.

22일 서울시내에서 일어난 반공법 반대 데모는 탈선 정도가 아니라 국가사회의 안녕질서를 파괴하여 이 나라를 혼란상태에 빠뜨리려는 악의에 찬 행동이라고 해서 불가할 것이 없다. 현 정부의 반공법 제정 기도에 대해서는 본란에서 이미 4,5차 그 부당과 불합리성을 지적하면서 동 시안의 포기를 종용한 바 있었다. 신문지상이나 집회 등 언론으로 이에 반대를 표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데모라고 하더라도 질서 정연히 반대의사를 표시하는 데 그쳤다면 문제 될 것이 조금도 없다. 그런데 22일의 데모는 그 필요를 인정할 수 없는 소위 횃불 데모를 하면서 경찰의 백차를 파괴하고 민간의 승용차 심지어 버스를 탈취 또는 파괴하는 등 무법상태를 노현(露現)시켰으며 제지하려는 경관에 투석을 하는가 하면 곤봉으로 저항하였고 불온한 구호를 부르기까지 하여 현 정부와 치안유지의 책임을 가진 경찰을 적시(敵視)한 일까지 있었다. 이러한 난동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난동의 배후에 공산주의자가 있는 듯한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으며 혹은 공산주의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결과로 보아 공산괴뢰에게 협력 가세했다고 해서 변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 우리의 국가정책 중 변할 수 없는 것이 반공이다. 통일이 어렵게 된 이유도 어떻게 해야 공산도당에게 제압당하지 않고 민주통일을 성취할 수 있을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6·25 사변에서 공산당이 어떠한 집단이며 그들이 하는 정치가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생활을 무시하는 포학무비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 반공법을 제정하려는 정부당국 및 보수정객들에 대해서 그 과오를 지적해온 우리지만 22일의 난동데모에 대해서는 국민적 의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부에서는 신법 제정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민 중에 잠재할지도 모르는 공산간첩을 적발 검거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며 국가사회를 혼란으로 이끌어 넣으려는 난동분자들을 제거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다대수 국민이 장면 정부에 불신을 표시한다고 해서 공산도배의 활약을 방지하는 일에까지 정부를 비난할 리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도 모든 난동행위에 엄정한 비판을 가해서 이 국가 이 사회의 법질서가 문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특히 무사려한 학생 및 청소년들의 자중과 반성을 요망하는 동시 교단에 서는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바다.

조선일보는 3월 22일의 대규모 집회와 시위 현장에 관한 보도를 하지 않았으므로 이 사설은 다른 매체의 기사를 보고 상황을 파악했거나 논설위원이 직접 현장에 가서 본 사실들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반민주악법 공동투쟁위원회’가 주최한 집회에 참여해서 파괴적 행위를 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언론의 보도나 관련 자료를 보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확증도 없이 “이 난동의 배후에 공산주의자가 있는 듯한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진실 보도를 사명으로 하는 언론으로서는 공정한 자세라고 할 수 없다.

이 사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부에서는 신법 제정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민 중에 잠재할지도 모르는 공산간첩을 적발 검거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2일의 집회와 시위에 ‘간첩’이 ‘잠입’했는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장면 정부에 새삼스럽게 그런 당부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좌절된 남북학생회담

3월 23일 국방부장관 현석호는 “경찰이 못 막으면 군대를 동원해서 난동 저지에 전력할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한 뒤 “계엄령 선포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3·22 대회 이후 서울에서는 더 이상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러 지방에서 2대 악법 반대투쟁이 계속되었다. 23일 부산에서 경상남도 학생 공투위 주최로 열린 ‘악법 반대 경남 학생 총궐기대회’에는 1만여 명의 시민과 학생이 모여 “배고파 못살겠다. 통일부터 먼저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민주당사 앞까지 시위행진을 했다. 25일 전남 광주에서는 5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악법 반대 강연회가 있었고, 전북지역에서는 3월 25일과 30일 2대 악법 반대 집회가, 30일 충남에서는 악법 반대 궐기대회가 열렸다.

조선일보는 3월 25일자 석간 1면에 「국가보안법 개정 의도의 포기가 난국 수습의 바른 길이다」라는 사설을, 3월 31일자 석간 1면에는 「기본자유권의 말살이 우려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안」이라는 사설을 실음으로써 장면 정권의 2대 특별법 제정 강행에 반대했다.

4월 혁명 1주년을 전후하여 학생들 사이에는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4·19 1주년을 맞아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위기설과 군사쿠데타설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학생들은 의도적으로 기념행사를 조용하게 거행하였다. (…)
마침내 1961년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은 대의원회의에서 논란 끝에 남북학생회담을 공식적으로 제안하기로 결정하고, 다음날 이를 제안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는 1) 빠른 시일 안에 남북학도회담을 개최하며 2)회담 의제는 학생기자 교류, 학술토론대회 개최, 예술·학문·창작 교환, 체육대회 개최로 하며 3)남북 행정 당국은 학생들의 결의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 등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5월 3일 ‘민통전학련 결성준비대회’에서 서울대 민통련의 제안을 전국적 학생 민통련의 결의로 재확인하였다. 이날 민통전학련 관계자들은 학생회담 장소는 판문점으로 하며, 회담 시일은 5월 이내로 하고, 민통전학련이 지역별로 회담 대표를 선정하겠다고 계획을 구체화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335~337쪽).

조선일보는 5월 6일자 석간 1면에 「시도의 가치 없는 남북학생회담의 제의」’라는 사설을 올렸다.

(…) 우리는 이 제의된 회담이 비록 학생들 간의 회담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공산당을 상대로 하는 것인 이상 시도의 가치가 없는 것임을 명백히 하여 대학생들의 지성이 이 이상 그 제의가 제래(濟來)한 파문을 확대시키지 않도록 하여주기를 바란다. 3일의 제의에 대하여 북한괴뢰 측 관헌과 학생대표들이 이를 환영 호응하였고 우리 정계 일부에서도 이를 지지하는 견해가 있었으므로 5일에는 민족통일전국학생총연맹 결성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이 제의의 과감한 실천을 기약하는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정부를 대변하여 정헌주 국무위원은 “순진한 학생들이 공산당 흉계에 빠지지 않도록 정부는 학생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전제하고 “정부는 선의의 보호책을 강구할 것이며 또 남북한 학생회담 같은 것은 허용하지 않겠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찬반의 파문은 모두 문제의 핵심을 회피 또는 은폐한 논의에 불과한 것이므로 대학생들의 조국통일에 대한 열의를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하기에는 적당치 못한 것임을 유감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
(…) 우리 대학생들이 판문점에서 만나게 될 북한 학생들은 명목은 같은 학생이라 하더라도 공산주의의 세계 제패의 전사(戰士)로 선발되고 그 목적을 위하여 충분히 훈련된 첨병학생인 것이다. 우리 대학생들이 그들의 의견에 찬성하면 우리 대학생들은 그날부터 미제국주의의 침략과 장면 반동정권을 반항하는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을 것이고 그들의 의견을 반대하면 우리 대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민족반역자, 미제국주의의 주구라는 악명을 감수하게 될 것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보다 앞서서 공산 측과 학생과 교수들의 교류를 시행(試行)한 바 있는 독일의 선례에 비추어 명백한 바가 있는 것이다. 우리 대학생들의 열의가 그들의 맹신과 흉계를 시정시킬 가능성은 천의 하나도 없는 반면에 그들의 인류 자유 말살의 흉계를 본의 아니나마 돕게 되거나 그들의 선전자료에 불과하게 될 천의 999의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정부나 학교 당국자들의 미온적인 태도도 시정되기를 바라는 바이지만 그보다도 직접 우리 대학생의 지성에 호소하는 바이다.

정부와 보수적 언론이 남북학생회담 제의를 강력히 비판하자 서울대 민통련 학생들은 5월 12일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내세우면서 사회단체가 주최하는 남북학생회담 지지집회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민통전학련은 5월 14일부터 일부 일간지에 「남북 학생 및 통일축제에 관한 우리의 요구」라는 광고를 실었다. 그 광고문안에서 핵심적인 것은 “남북학생회담 지지 여부를 알기 위해 국민 또는 전 학생의 투표를 실시할 것”이었다. 회담 강행 의사가 없음을 명백히 한 셈이다.

5월 13일 민자통 중앙협의회가 주최한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통일촉진 궐기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가 시작될 때는 5천여 명이 모였는데 가장 많을 때는 1만명 정도였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집회가 끝나자 1천여 명의 군중이 종로와 을지로를 지나 시위행진을 하면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고 쓰인 피켓을 흔들면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 “배고파 못 살겠다 통일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 궐기대회는 사흘 뒤 5·16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정치·사회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지면에서는 그 대회에 관한 기사도 논설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일보사 발행인의 지시에 따른 의도적 묵살인지, 편집간부들의 자발적 결정인지, 기자들의 취재 거부에 따른 결과인지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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