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1월 26일로 예정된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둔 10월 23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유’를 나가 있던 김종필이 귀국했다.
‘민족적 민족주의 전도사 김종필’
김종필은 11월 4일 고려대 총학생회가 주최한 ‘학생사상대강연회’에서 “우리의 민족주의는 반공을 기둥으로 삼아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고 자유민주주의를 그 배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11월 5일자 1면 기사(「민족주의 배경은 자유민주주의 / 휴식은 죽은 다음에 썩도록 할 것」)는 그의 강연 내용을 이렇게 보도했다.
김 씨는 (…) “후진국의 공동과제인 근대화를 위해 민족주의는 절실히 요구되며 민족주의를 통해 경제적 자립과 강력한 리더십의 확립을 이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대한(對韓) 미국정책의 제 문제, 대일(對日) 외교정책의 문제점, 제3공화국의 민주적 전망이란 네 가지 제목을 갖고 약 한 시간 동안 연설했다.
대일 외교정책의 문제점이란 제목의 강연에서 그는 “혁명정부의 대일정책이 저자세가 아닌 데도 그렇게 소문이 나고 있는 것은 국민들의 오랜 대일 감정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평화선에 대해 “당시의 이승만 라인은 현명한 것이었으나 그 후 그 방어를 제대로 못해왔었다”고 말했다.
그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당시 일본과 합의 본 것은 청구권 3억불, 해외경제기금 2억불, 그리고 수출에 1억불 이상 무제한으로 한다는 것이었다고 밝힌 다음 평화선문제만이 남았으나 이것도 1억2천만불어치의 어선 기술자재 등을 우리가 요구하고 있어 우리 어민들이 희생되지 않는 한도에서 꼭 타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제3공화국의 민주적 전망에서 자기가 “혁명 이후 일을 하다 의욕과잉으로 욕을 먹어 망명 아닌 망명을 하고 돌아오니 주위사람들이 좀 쉬라고 권고해온다”면서 “그럴 때마다 휴식은 죽은 다음에 썩도록 하겠다고 대답한다”고 말하여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 기사는 1면 아래쪽에 3단으로 배치되어 눈길을 끌지 못했으나 그 안에는 박정희 정권이 앞으로 강하게 추진할 ‘한일 국교정상화’의 핵심이 들어 있었다.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때 이미 청구권, 해외경제기금, 일본의 한국 수출에 관해서는 일본과 합의를 보았고, 평화선문제만 남았다고 공언한 것은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1965년 봄부터 정치적 폭풍을 일으키게 될 ‘굴욕적 한일회담’의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인 김종필의 공개강연 내용에 주목하는 논평을 내지 않았다.
11월 26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11·26 총선은 무소속 출마가 금지된 선거였다. 그래서 과거처럼 무소속 당선자를 자기 당에 영입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공화당은 당선 가능성이 높은 인사에게 공천을 주는 조건으로 입당을 시키는 방식을 썼다. 그 결과 5·16 주체세력이 그토록 매도했던 ‘구 정치인’이 대거 공천되었다. 공화당 공천자 162명 중 ‘구 정치인’은 51명으로 전체의 3분의 1정도를 차지했으며, 이 중 구 자유당계가 28명으로 가장 많았다. 51명 중 47명이 전국구가 아닌 지역구로 공천을 받았다. 그러려고 혁명 했느냐는 비판과 아우성이 쏟아지고 내분까지 일어나자 박정희는 ‘이상 6, 현실 4’라고 변명했다.
11·26 총선에서 공화당은 전체 의석 175석 가운데 지역구 86석에 24석의 전국구를 보태 110석을 얻는 압승을 거두었다. 민정당은 41석, 민주당은 13석, 자민당 9석, 국민의 당은 2석을 얻었다. (…)
김종필은 12월 2일 공화당 의장 자리에 복귀하였다.(<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편 2권>, 244~245쪽).
미국의 압력에 따른 ‘굴욕적 한일회담’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정희는 1964년 초부터 한일회담을 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한일회담은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목적과 미국의 강력한 요구가 어우러진 것이었으므로 지체할 까닭이 없었다.
1964년 1월 18일 한국에 온 미국 법무부장관 로버트 케네디는 김포공항에 착륙하자마자 “우리들(전 자유세계)은 자유 수호를 위해 일선에서 싸우고 있고 한국민들을 지원해야 하는 것이 의무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날 오후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회담을 갖고 경제원조, 군사원조 증가, 한일문제 등에 관해 논의를 했다(조선일보 1월 19일자 1면).
박정희와 로버트 케네디의 회담에서 ‘한일문제’가 다루어졌다는 데 관해 야당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케네디가 한일회담을 재개하라고 압력을 넣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육사를 졸업한 뒤 ‘천황 폐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만주군에서 장교로 복무한 적이 있는 박정희가 그 무렵의 고위 관료들과 ‘태평양 전쟁 전범(戰犯) 출신들’이 도사리고 있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자주적이고 호혜적인 회담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장면 정권을 붕괴시키고 집권한 박정희는 정통성 없는 정권의 운명을 경제개발에 걸었다. 그 역시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22일 한국의 군사정권은 일본에 조속한 회담 재개를 제의했다. 5·16 쿠데타 이후 사태를 관망하던 일본의 이케다 정권은 한일회담 추진이 국내에서 논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처음에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6월 20~21일 미국에서 열린 미일정상회담에서 이케다 총리가 일본의 안전보장과 한국 정세를 연계시키고 한국의 군사정권을 적극적으로 원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이후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미국의 강한 압력과 더불어, 기시(岸) 전 총리와 같은 자민당 내 우파세력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결국 5·16 쿠데타로 중단된 한일회담은 1961년 10월 재개되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401쪽).
박정희는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와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하여 국교를 정상화” 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청구권의 ‘명목’과 ‘액수’가 논란의 핵심이 되어 회담은 제자리 걸음을 했다. 한국 측은 청구권이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 일본 측은 ‘경제협력자금’ 또는 ‘독립축하금’으로 주는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한국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가 1962년 10월 21일과 11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회담을 갖고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것을 통해 합의에 이르렀다. 그 메모에는 일본이 “무상 3억 달러, 유상(정부 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을 한국에 제공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금 제공의 명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굴욕적 한일회담’ 초기에 침묵한 조선일보 사설
1964년 1월 25일자부터 2월 24일자까지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가장 많이 오른 소재는 한일회담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눈앞의 이익을 위해 일제의 ‘식민지배’에 관해 정당한 배상을 요구하지 못하고 ‘청구권’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3억 달러를 요구한 것이 가장 뜨거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한 달 동안 조선일보에 실린 한일회담 관련 기사들 가운데 1면 머리기사들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 「어업보호선으로서 평화선 지켜야 한다 / 어제 국회 농림위서 논의 /외무·국방위와 금명간 연석회의 / 어민 권익 위해 필요 / 여야 이견 없이… 정 차관도 증언」(1월 25일자)
· 「미의 대한군경원조 등 기본정책 / 한일관계 영향 안 받는다 / 박·러스크 공동성명, 전부 계속 협조 다짐」(1월 30일자) 」 「어로 문제 타결 난항 / 어제 하오 한일 비공식 고위회담」(2월 4일자)
· 「대일협상 둘러싸고 / 여야 또 격돌 기세」(2월 6일자)
· 「대립점 차츰 접근 / 어제 한일어업 3차 고위회담 / 구체적 세부문제에」(2월 13일자)
· ‘한일협상 3월 안으로 타결 / 일 여당 간부, 기본방침을 결정」(2월 15일자)
· 「대마도 중심 규제수역선 분할획정에 합의 / 어제 한일고위어업회담 진전」(2월 19일자)
· 「청구권 27억불 요구 주장 / 민정당서 한일교섭 」안…오늘 의총서 확정」(2월 22일자)
· 「3월 중에 정치회담 / 대일교섭 기본방침을 결정’(2월 23일자)
그런데 불가사의하게도 이 한 달 동안 조선일보 사설란에는 한일회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글이 단 한 편도 실리지 않았다. 1월 31일자 사설(「한미고위회담 후의 공동코뮤니케를 보고」)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전부였다.
(…) 공동코뮤니케는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이 한일 양국뿐만 아니라 전 자유세계의 이익에 크게 공헌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그러한 견해 자체를 전적으로 시인함에 있어서 조금도 인색함이 없다. 다만 36년 간에 걸친 일본의 한국 강점이라는 엄연한 사실은 한국에서 구체적으로 누가, 그리고 어떤 세력이 친일적이다, 또는 반일적이다, 하는 피상적인 구분을 떠나서, 오늘의 한국사회와 한국민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은 일본관이라는 것이 있고 이에 따른 한일관계관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즉, 그러한 한국의 일본관과 한일관계관에서 벗어난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은 한일 양국에도 유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전 자유세계의 이익에도 배치되는 것이니 우리는 표면상 걷잡을 수 없이 변전(變轉) 무쌍한 듯한 세계사의 와중에서 이 진리를 포착 발견하여 진정 한일 양국 간에 영원한 친선관계가 보장될 만한 한일회담의 타결을 위하여 그러한 원칙을 제시하였거니와 앞으로 계속 이 원칙을 견지할 것이다.
이 부분은 박정희와 미국 국무부장관 딘 러스크의 회담에 관한 사설 가운데 일부이다.
조선일보는 1964년 들어 2월 26일자 신문에 처음으로 한일회담에 관한 본격적 사설(「한일문제의 타결을 위해선 일본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을 내보냈다.
양국이 다 같이 금년 5월 안으로 타결을 서두르는 한일회담은 작금 배 대사 등의 급거 귀국과 함께 정부와 여당 간에 일련의 고위회담을 개최함으로써 새로운 판국을 벌이려고 애쓰는 것 같다. 현금 한일회담의 초점은 어업문제에 집약되어 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전관수역을 어떻게 획정하며 규제수역의 규제방법은 어떻게 규정하며 또 그 밖의 어업협력 자금 등으로 되어 있다. 최근까지 계속된 실무자회담에서는 약간의 진전이 있었다고는 하나 일본 측의 무성의로 아직도 타결의 성산(成算)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의 문제는 회담의 형태를 바꾸어 확대된 정치회담에서 모색해보자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 일본은 어업문제의 공평한 해결을 자기 측의 이익 본위로 어떤 국제법의 존재가치가 국가 간의를 평화를 위한 것이라면 장차 평화의 불꽃이 튀길 가능성을 내포한 인접국과의 어업문제를 시발점에서 확연히 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새 바탕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어업문제를 둘러싼 일본 측에 대한 성의의 촉구가 결코 우리 측 일방의 이익에만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일본이 진정으로 인근 한국과 평화리에 공존하려는 성심(誠心)을 차제에 어업문제를 통하여 발휘하기를 거듭 희구하여 마지않는다.
이 사설은 1964년 초부터 속도를 내고 있는 한일회담의 배경에 미국 정부의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 한국의 박정희 정권과 일본의 보수정권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둘러싸고 ‘청구권’이냐 ‘독립축하금’이냐를 두고 정치적 줄다리기를 하는 현상은 거론하지 않고 어업문제를 두고 논란을 벌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면서 일본이 어업문제 해결을 통해 한국과 ‘평화 공존’하라고 촉구한다. 일본의 극우보수세력이 한일회담 타결을 통해 국교를 ‘회복’하고 한국에 다시 진출해서 정치·경제·문화 분야는 물론이고 외교의 영역에서도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않은 것이다.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위’ 결성과 활동
박정희는 2월 28일 경남 진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일회담은 한국 측에서 더 이상 양보할 것이 없으며 실무자급회담에서도 더 이상 토의할 필요가 없으므로 3월 중에 정치적 타결로 가부간 결론 내겠다”면서 “야당 의원들에게 최대한의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3월 7일자 1면에 실린 기사(「공동투위를 결성 / 야, 대일 저자세 저지에 강력책」)는 박정희 정권과 야권 사이에 ‘한일회담 정치적 타결’을 둘러싸고 극한적 대결이 벌어질 것을 예고했다.
한일회담의 막바지 고비를 앞둔 정국은 야당 측이 벌이기로 한 대일 저자세 외교 반대 범국민투쟁과 정부·여당의 한일회담 강행 방침이 정면으로 부닥쳐 원내외를 통해 드물게 보는 열띤 정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 것다.
농상(農相)회담 관계, 본회담 재개 및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방일 등으로 한일회담의 타결 기운이 한층 짙게 되자 민정당과 삼민회 등 야당 대표들은 6일 민정당사에 모여 ‘대일저자세 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구성키로 하고 오는 9일 하오 2시 종로예식장에서 사회단체, 종교단체 및 저명인사들을 망라한 범국민적 기구로 발족시키기로 했다.
민정당과 삼민회 등을 주축으로 한 재야세력은 3월 6일 예고한 대로 9일 오후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이하 범국민투위)를 결성했다. “윤보선, 박순천, 김준연, 장택상 씨를 비롯하여 민정·민주·자민·국민의 당 중견 당원과 변영태, 이인, 신숙, 장준하 씨 등 종교·사회단체 대표 약 3백명이 모인 가운데 시내 종로예식장에서 열린 결성대회는 1)한일회담의 즉각 중지 2)일본에 대한 반성 촉구 3)민족정기 고취를 부르짖는 구국선언문과 대일매국외교를 즉시 중지하고 한일회담에 대한 야당 측의 대안을 받아들일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대정부경고문을 채택했다.” 범국민투위는 한일회담에 대한 대안으로서 “1)청구권을 15억불로 한다. 2)배상금 12억불은 무역 베이스로 10년 간 한국 상품 15억불을 수입하는 것으로 대치할 수 있다. 3)평화선 기선基線) 40마일을 전관수역으로 하며 그 밖의 해역은 한일 합변(合辨변)수역으로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조선일보 3월 10일자 1면).
3월 12일 오후 한국과 일본 대표단이 도쿄의 외무성에서 2년여 만에 한일본회담을 열었다. 그러나 ‘어업 협력’과 ‘전관수역’ 문제를 두고 큰 이견을 보이던 농상회담은 3월 16일 결렬 직전에 이르렀다.
범국민투위는 ‘굴욕적 한일회담’ 저지투쟁의 첫 단계로 3월 15일부터 지방 유세에 들어갔다. 부산에서 열린 대회에는 3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 “3억불로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고 “일본의 재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연사들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16일 광주에는 1만여 명, 마산에는 1만5천여 명이 모여 범국민투위의 활동을 뜨겁게 지지했다. 유세 마지막 날인 3월 21일 서울 유세에는 4만여 명이 운집했다.
4·19를 연상시킨 ‘3·24 데모’
1964년 3월 24일 서울에서 1960년 4월 19일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조선일보 3월 25일자 1면은 온통 시위에 관한 기사와 사설로 채워졌다. 먼저 기사를 보기로 하자.
굴욕외교반대 대학생들 데모 / 어제 하오 서울대·고대·연세대생 등 4천여명이 가두에 / 경찰과 충돌…투석전 / 부상 모주 250여명 / 곤봉 날고 최루탄 발사 / 의사당 앞서 한때 연좌 / ‘민족과 조국 한 사람의 것 아니다’구호 외치며 / 어둠 속의 대치…저녁 8시 해산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아왔던 한일회담 조기타결을 에워싼 정계의 싸움이 24일 하오 드디어 서울시내 주요 대학생들의 집단 반대 데모로까지 불붙어 서울시내의 주요 도로는 그들의 외침으로 메워졌다. 이 데모는 4·19 이후 가장 큰 시위이며 민정으로 옮겨진 후 최초의 시위인 것이다.
이날 하오 1시 반 서울대학교 학생 7백여 명이, 3시에 고려대학교 학생 1천5백여 명이, 그리고 연세대학교 학생 2천여 명이 장안의 동서북 3방에서 파상(波狀)으로 국회의사당으로 몰려드는 동안 경찰의 도합 다섯 차례 60발의 최루탄 발사와 스물다섯 차례에 걸친 경찰 곤봉과 육박의 혈전이 벌어졌으며 시위군중의 석전(石戰)이 계속되었다.
시위 도중 2천여 명의 시민과 중고교 학생이 집산적으로 합세, 국회의사당에서 합류한 이들은 각기 선배국회의원들을 불러내어 1)굴욕외교 반대 2)김종필 씨의 즉각 소환 3)구속학생들의 즉각 석방 등 요구를 요로(要路)에 반영해줄 것을 약속받고 하오 8시 정각 만세삼창을 부르며 해산했다.
이 시위에서 2백여 명에 이르는 학생, 시민, 경관의 중경상자를 냈으며 288명의 시위학생과 시민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날 시위학생들의 선서 내용은 “정부의 대일 저자세에 허탈감과 분노를 느꼈다” “무턱댄 배타가 아니라 냉정한 안목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경계한다” “뼈대 있는 주체성 발휘를 위해 뜨거운 피, 냉정한 이성으로 싸운다”는 내용이었으며 이들이 외친 구호는 “반정부 데모가 아니라 정부를 위한 예비적 행위이다” “한일회담을 즉각 중단하라” “나라를 팔아먹은 김종필 즉시 귀국시키라” 등이었다.
조선일보 1면에 오른 사설의 제목은 「학생들의 현실 참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이다.
한일회담을 둘러싼 심각한 민족적 고뇌는 24일 급기야 서울시내 일부 대학생들에 의한 대규모 데모로 발전하였다. 보도된 바와 같이 “매국외교 중지하라” “일본제국주의 박살하라” “사수하자 평화선” 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운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대 사이에 난투극까지 벌였으며 한때 서울시내의 분위기는 몹시 삼엄한 바 있었다. 정상적인 법질서만을 지상(至上)으로 안다면 이러한 사태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국가적 일대 불행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차원을 높여 생각한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국가 백년대계인 한일회담의 귀추에 관하여 이렇게도 심심한 관심을 기울여 데모로 현실 참여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는 사실은 이 민족의 자주성과 국가의 발전을 지향하는 일면을 보여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고도의 외교기술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회담의 교섭과정이 과연 학생들의 현실 참여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인식하는 심도에 따라, 그리고 특히 지금 이 단계에 있어서는 한마디로 결론짓기에 매우 벅찬 과제가 아닐 수 없으되, 학생들의 순수무구한 혜지(慧智)가 표현된 대로의 ‘국가 존망에 관한 중대 문제’로 판단했다면 이는 충분히 애국적 동기에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평화적 시위의 권리가 법률질서와 맞부딪히게 될 때에 학생들의 거조(擧措)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고, 당면해서 이 물정 엄연한 민심의 물결을 여하히 수습하는가는 오로지 위정당국의 정치적 금도(襟度)와 현명에 달린 것이라 하겠다. (…)
(…) 우리는 학생들의 현실 참여를 이용하는 여하한 정치세력의 개입도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아무런 정치적 배경이 없고, 어떠한 관련성도 없이 오직 자기들의 지성적 판단만으로 ‘애국적 궐기’로 믿어서 감행된 데모라고 믿기에 이를 순수한 것으로 단정하는 것이며 만일 여기에 조금이라도 다른 어떠한 정치적 작용, 또는 불순한 선동이 있게 된다면, 학생들의 자발적 데모를 모독하고 욕되게 하는 짓이 되리라. 그렇게 되면 사태는 자못 미묘하게 변화될 것을 우리는 두려워한다. (…) 우리는 오늘 이 침통한 사태를 민족사 전환의 큰 원동력으로 삼아 전화위복하는 양지(良知)를 정부·정치인·학생 그리고 전체 국민들에게 호소하고자 하며 특히 데모에 참가한 학생 제군은 이미 충분한 의사 표시로 남김없이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이제 냉정한 지성인의 기본적 자세로 되돌아가야 할 것을 요망한다.
이 사설은 조선일보가 5·16 쿠데타 이래 처음으로, 대학생들이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벌인 대대적 시위를 ‘민족의 자주성과 국가의 발전을 지향하는’ ‘애국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결론 부분에서는 “데모에 참가한 학생 제군은 이미 충분한 의사 표시로 남김없이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이제 냉정한 지성인의 기본적 자세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권유’하고 있다. 엄연한 주권자인 대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 시위에 나섰을 때, 그리고 학생과 시민의 항쟁에 밀려 이승만이 ‘하야’라는 형식으로 항복 선언을 했을 때 조선일보는 학생들의 투쟁과 희생에 힘입어 시민들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을 찬양한 바 있다. 3·24 데모는 굴욕적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재야세력의 ‘선도(先導)’에 영향을 받은 면도 있지만, 학생들의 자발적 ‘봉기’라는 점도 인정했어야 마땅하다.
3·24 데모에 관해 3월 25일자 신문 1면을 그에 관한 기사로 도배한 조선일보는 2면과 3면도 데모 관련 기사와 사진으로 채웠다. 「데모의 거리 / 하오의 표정 / 함성·육탄·난전」이라는 제목 아래 2면에는 학생들과 경찰의 충돌을 전하는 사진들이 실렸다. 3면에는 「대학가 휩쓴 뜨거운 바람 / 어제 3월 24일…화요일 오후 /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 노래 부르며 의사당까지 밀고가 /연도의 시민들도 합세」 「서울대, 이케다 수상·이완용 가상(假像)에 화형을 집행 / 전국 대학생에 메시지…하오 1시 30분 / 전진…대치…후퇴·소용돌이 친 장안 / 몽둥이 세례가 웬 말이냐…연좌·분노의 행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김준연, ‘박정희와 김종필 일본으로부터 거액 받았다’
4·19 이후 최대의 학생 데모에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한 박정희 정권은 연행된 학생들을 석방하고 평화시위를 보장하겠다면서 학생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위는 3월 25일 전국의 여러 대학과 고등학교로 확산되어 4만여 명이 거리로 나섰다. 서울의 시위대는 청와대 부근에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 2개 중대와 맞섰다. 3월 26일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통해 한일회담은 기존 방침대로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그날 시위 참가 인원은 전국 11개 도시에서 6만여 명으로 늘었다. 그러자 정부는 3월 27일 일본에 가 있는 공화당 의장 김종필을 소환하겠다고 발표했고, 그는 이튿날 귀국했다.
학생시위가 계속되고 있던 1964년 3월 26일 의원 김준연은 국회 본회의에서 박정희 정권이 일본으로부터 1억3천만 달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4월 2일에도 박정희-김종필 라인이 일본으로부터 2천만 달러를 받아 썼다는 등 13 가지 의혹 사항을 제기했다. 여당인 공화당은 김준연을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으로 고소·고발했다. 그는 4월 25일 구속되었다.
국회의원이 본회의에서 박정희와 김종필이 일본으로부터 거액을 받았다고 주장했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근거나 증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 문제의 진상을 추적하지 않고 있다가, 그가 구속된 뒤인 4월 28일자 2면에 강경한 논조의 사설(「김준연 의원의 구속을 조속히 해제하여야 한다」)을 올렸다.
(…) 우리는 김 의원의 (…) 발언 내용의 진부(眞否)와 그의 범죄 혐의 등의 사실 여부를 여기서 논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회의원으로서의 신분이나 사회적 및 정치적 지위로 보아서 과연 그를 구속까지 해야만 타당했던가를 초점으로 삼고자 할 뿐이다. 김 의원에게 설혹 범죄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도주의 우려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인정되는 한 어찌하여 인신구속까지 함으로써 정계에 파문을 일으키게 하였는지 도시 그 이유가 석연치 않다. (…)
(…) 물론 일본자금 사전 수수설을 퍼뜨린 김 의원의 발언이 국내외에 적지 않은 물의와 충격을 일으켰기 때문에 행정부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여 자연히 태도의 경화(硬化)를 가져온 줄 짐작되지 않는 바 아니다. 그러나 주권자인 국민들은 무엇보다도 정국 안정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나 정당정치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 김 의원에게 범죄 혐의가 있다면 정식 재판을 통하여 위법 사실이 확정된 다음에 구속해도 좋지 않은가. 지난 3대 국회 때도 박영출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요청이 보류되었으나 그 후 재판에서 그의 혐의 사실이 확정됨을 기다려 정식으로 구속한 일이 있음을 왜 상기하지 못하는가? 다시 말하거니와 이번 김 의원 구속은 한갓 감정적 보복수단이란 오해밖에 받을 것이 없는 부당한 행동이라고 우리는 간주한다. 이것은 곧 진정한 뜻에서의 여야 협조를 통해 현 난국을 타개하기를 바라는 국민의 희망을 무시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김 의원이 발설한 일본자금 사전 수수설이나 12개 의혹점이 하나하나 면밀한 조사에 의해 공개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그의 구속을 조속한 시일 내에 해제해줄 것을 관계당국에 요망한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군사정권이 서울 사직공원 부근의 국유지를 부정하게 불하했다는 사실이 4월 초 언론에 보도되자 가뜩이나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요동치던 정국에 새로운 논란이 터졌다. 야당은 군정 때부터의 국공유지 불하 경위와 배후에 정치적 흑막이 있는지를 밝히는 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국회에서 제안했고, 공화당은 거센 여론에 밀려 그것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야당은 서울 남산과 홍릉 용지의 부정불하 의혹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의 인척과 김종필의 형까지 배후로 지목되는 상황에서 검찰은 5월 11일 전 재무부장관 황종률 등 15명을 구속기소하고 8명을 불구속기소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박정희와 김종필의 일본 자금 거액 수수 의혹’과 국유지 부정불하 사건이 터지자 박 정권의 부정부패를 질타하는 여론이 뜨겁게 일어났다.
4월 혁명 4주년 기념일을 앞둔 4월 17일 서울대생 2백여 명은 ‘학원 사찰 중지’와 ‘구속학생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9일 여러 대학에서 기념식과 함께 시위가 벌어져 21일까지 계속되자 정부는 “연발하는 학생 데모가 국가 기본질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강경한 진압책을 마련했다.
4월 22일 박정희는 “정부는 더욱 비상한 각오로써 불법 데모 치안교란자들을 철저히 단속하여 사회 안정과 법질서 유지에 힘쓰라”고 내각에 강력히 지시했다. 그는 국무총리 최두선에게 ‘시정(施政)의 일대 쇄신’이라는 제목으로 보낸 5개 항목의 훈령 제3호에서 “수주 간의 연달은 학생 데모 사건들은 민심을 극히 불안케 하고 있을 뿐더러 법질서롤 파괴하고 사회적 혼란을 자아내게 있다”고 주장한 뒤 “이 사태의 계속 방치는 무법과 방종의 고질적 병폐를 면치 못하게 할 것이며, 나아가 민주질서를 파괴하고 국기(國基)의 대본마저 흔들리게 할 우려조차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조선일보 4월 23일자 1면).
5월 11일 박정희는 ‘시국 수습’을 위해 전면 개각을 하면서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에 정일권,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에 장기영을 임명했다.
4월 말 이후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은 범국민투위가 주최하는 대중집회의 열띤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을 극도로 자극하는 행사를 열었다. ‘황소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황소는 공화당의 상징이었다.
‘축(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쓴 만장을 앞세운 채, 건(巾)을 쓰고 죽장을 잡은 학생 4명이 민족적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관을 메고 입장했다. 곧 이어 ‘한일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의 이름으로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민족사는 바야흐로 위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전환기에 섰다. 4월 항쟁의 참다운 가치성은 반외세·반매판·반봉건에 있으며 민족 민주의 참된 길로 나가기 위한 도정이었으나 5월 군부 쿠데타는 이러한 민족 민주 이념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 탄압의 시작이 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수렵적 정보정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행상적 탈춤으로 변장됐고 굶주린 대중의 감각적 해방을 위한 독화(毒花)의 미소를 띠었다.
국제협력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 민족의 치 떨리는 원수 일본제국주의를 수입, 대미 의존적 반신불수인 한국경제를 2중 예속의 철쇄로 속박하는 것이 조국의 근대화로 가는 첩경이라고 기만하는 반민족적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
우리는 외세 의존의 모든 사상과 제도의 근본적 개혁 없이는, 전 국민의 희생 위에 홀로 군림하는 매판자본의 타도 없이는 외세 의존과 그 주구 매판자본을 지지하는 정치질서의 철폐없이는 민족자립으로 가는 어떠한 길도 폐색되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한다. 굴욕적 한일회담의 즉시 중단을 엄숙히 요구한다(김삼웅, <민족·민주·민중 선언>, 일월서각, 1984, 41쪽).
여러 대학 학생 2천여 명과 시민 1천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낭독된 선언문의 내용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열린 바로 이튿날인 5월 21일 새벽 일찍이 보지 못했던 사건이 터졌다. 조선일보 5월 22일자 1면 머리에 실린 기사가 그 사건의 실상을 자세히 전했다.
무장군인 10여 명 / 법원에 난입, 압력 / 데모학생 영장 때도록 종용 / 숙직실 점거, ‘검사 불러오라’ / 판사 집까지 찾아가 버티고
카빈과 권총을 휴대한 무장군인이 집단으로 법원에 난입하고 영장담당판사를 자택으로 찾아가 약 2시간이나 5·20 데모학생들의 영장 발부에 압력을 가하는 등 우리 헌정사상 일찍이 없던 중대 사건이 21일 새벽에 일어났다. 공수부대 군복을 입고 군 앰뷸런스를 타고 새벽 4시 30분 법원에 나타난 12,3명의 이들 행위는 20일 하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 이은 데모에 가담한 학생들의 영장을 서울형사지법 양헌 판사가 대부분 기각한 후 약 3시간 만에 일어난 것이며, 재야법조계를 비롯한 각계로부터 “사법권의 침해는 물론 국가의 기본질서를 파괴하고 나아가서 내란에 가까운 망동”이라는 비판과 분노를 일으키게 했다.
이 기사 바로 옆에는 「위기는 법질서의 파괴에 있다 / 학생 동향보다 군인들 망동이 더욱 불길」이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서고, 딛고 있는 나라 형편이 지금 그 중심을 잃고 방황하면서, 연쇄반응과 악순환을 거듭하여 불행의 심연에 빠져들어가는 듯한 위기의식을 느낀다. 물론 그것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멀리는 헌법을 폐품처럼 짓밟은 이승만 정권의 죄악이요, 가까이는 명분은 여하간에 헌정을 중단시킨 군사혁명으로 민주질서를 파괴한 데서 국가의 근저가 난마와 같이 흩으러진데다가 그나마 군정 이래 3년의 실절이 혁명공약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돼버린 데서 오는 욕구불만과 기강의 난맥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과 같은 사태를 우발적인 현상만으로 따질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정치적 책임을 누가 져야 하며, 누가 이 난국을 수습해가야 하는가에 관하여 참으로 침통한 관두(關頭)에 맞부딪히게 된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무엇보다도 통탄해마지 않는 것은 몇몇 군인들의 법질서 파괴행동이다. 도시 법이고 무엇이고 주먹과 총칼밖에 믿지 않는 무법천지 같은 변괴(變怪)를 다른 이도 아닌 국가의 간성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은 언어도단인 말세적 현상이라고 우리는 규탄하고 싶다. 이는 작년 3월 15일 최고회의 광장에서 벌인 군인데모의 재판과도 같은 것이나, 그래도 그때는 자기들의 상관인 군인들의 통치 하요, 다른 헌법기관에 난입한 것은 아니니까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짓밟은 난동이라고 타기(唾棄)하면서 처벌을 요구함에 그쳤으나 이번 것은 그때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민정 하라는 여건도 물론 중대한 일이지만 엄연히 독립되어 있는 사법부에 떼를 지어 위협했다는 사실에 이르러서는 근본적으로 민주정치와 법치주의를 무시한 소(小)반란행위였다 해서 과평(誇評)은 아니다. 더욱 이 사건에서 우리가 석연(釋然)할 수 없는 것은 21일 새벽 1시에 결정된 영장 기각 사실을 신문도 라디오도 미처 보도하지 못하고 있을 새벽 4시에 어찌 하여 그들 일단의 군인이 그렇게도 잘 알고 있었는가, 그리고 거리낌 없이 병기의 하나인 앰뷸런스를 몰고 법원과 판사 사택으로 횡행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면 난세요, 군기가 문란해서 분외(分外)의 흥분을 했다면 그런 군인들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으랴. 이유, 동기, 결과의 여하를 막론하고 추상과 같은 군법으로 엄중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끝장이다. (…)
(…) 법치주의는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법과 권력을 등에 업은 채 법질서를 파괴하는 몰지각한 행위에서 스며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고해둔다.
군정 때는 물론이고 민정이 들어선 뒤에도 ‘군사혁명’에 대해서는 좀처럼 비판을 하지 않던 조선일보가 이 사설에서는 “헌정을 중단시킨 군사혁명으로 민주질서를 파괴한 데서 국가의 근저가 난마와 같이 흩으러”졌다는 직설적 표현을 하고 있다.
시가전과 흡사한 ‘6·3 데모’와 계엄령 선포
제1야당인 민정당은 5월 21일, “살인적인 민생고, 교실에 경찰관이 침입하여 학생을 연행한 사건, 일부 군인의 영장발부 강요 사건 등 일련의 사태에 대한 책임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있다고 단정, 국회 본회의가 재개되는 즉시 헌법 제61조의 의해 그의 탄핵을 제소할 방침을 세웠다.”(조선일보 5월 22일자 1면).
그러나 5월 22일 박정희 정권은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폭동’이라고 규정하는 한편, 무장군인들의 법원 난입은 ‘우국충정에 따른 우발적 행동’이라고 비호했다.
5월 25일 서울, 부산, 대구, 춘천의 여러 대학에서 ‘난국 타개학생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난국타개 학생위원회가 대회에서 발표한 ‘구국비상결의선언문’에는 “부정부패 규명과 사죄, 학원 난입 경찰 처벌, 법원 난입 군인 처벌, 구속학생 석방, 민생고 타개를 위한 독점·매판 자본 몰수”라는 대정부 요구조건이 들어 있었다.
6월 2일 고려대를 시작으로 전국의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그날 시위로 학생 632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6월 3일 전국의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 타도’를 목표로 전면적 항쟁에 들어갔다. 서울대 문리대 단식농성에 참여한 학생이 4백여 명에 이르는 등 3·24 데모 이래 투쟁의 기세가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박정희 정권과 학생세력의 전면전이나 다름없는 6·3 데모가 시작되기 직전에 나온 조선일보 6월 3일자 2면에는 「박 대통령의 비상한 결단이 있어야 할 줄 안다」라는 사설이 실렸다.
쏟아지는 6월의 빗속을 무릅쓰고 또 다시 서울대·고대 등의 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데모를 감행하여 다수의 부상자를 내는 극한상태에 이르렀다. 더구나 이번 데모의 구호는 선명하게 “국민은 배고프다” “독재정권 물러가라”고 내걸어 ‘현 정권 불신’의 기세를 올린 점으로 보아, 5·20 데모 이래의 급격한 정세 변전을 의미함으로써, 벌써 닷새째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서울대 문리대 광장의 처량한 광경과 더불어 정국은 결코 심상치 않은 관두에 선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여기서 구구하게 이러한 사태를 유치시킨 원근(遠近)의 원인을 재검토할 겨를은 없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반정부운동으로 줄달음질친 학생운동의 봉기를 보고, 그 조류를 어떻게 돌리느냐, 또는 어떠한 대책으로 이 난국을 돌파하느냐 하는 문제가 초미의 급선무이지, 죽은 아이 연륜 헤아리는 식의 과거사를 왈가왈부 했댔자 사태 수습에 도움이 될 까닭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
무엇보다도 박 대통령은 이러한 사태를 맞이하게 된 그 저간의 경위를 냉철하게 분석해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젊은 정열을 불태우는 청년학도들이 극도의 자학행위인 단식투쟁을 서슴지 않으며, “교도소로 가자”고 외치며 영어(囹圄)의 몸이 될 것을 불사하면서 데모에 나선 학도들의 비장한 심경을 역지사지해서 통찰해보라. 그리고 쌀 한 가마 값밖에 안 되는 월 4,5천원의 박봉에 얽매어, 학생과 맞서서 싸우고 뒹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찰관들의 불쌍한 처지를 생각하고 울어줄 만한 정애(情愛)는 없는가. 이 모든 기막힌 부조리가 모두 박 대통령의 책임 하에서 발생된 일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면 일부 권력층의 처사에서 연유된 것이라 하겠다. 물을 것도 없이 행정부의 수반이요, 대여당의 총재인 박 대통령이 책임지지 않는다면 책임정치란 말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겠는가. (…) 학생들의 울분과 들뜬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를 것은 자르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면서 극적으로 이 정국을 전환시킬 만한 대영단이 없이는 오늘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임을 우리는 정시하면서 박 대통령의 혁명가다운 중대한 결단 있기를 거듭 촉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정부 각료들과 여당의 중진들도 백척간두에 선 이 위기를 극복함에 있어, 만의 일이라도 권력이 힘만을 과신하여 배국(排國)의 죄과를 범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하면서 이토록 험난한 사태를 가져온 데 대한 자기 가책의 양심이 있는가 없는가를 우리는 주시한다.
이 사설은 5·16 쿠데타 이래 조선일보가 박정희를 직접 거론하면서 국가적 위기에 대한 책임을 추궁한, 최초의 사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튿날 그런 사설을 내보낼 수 있는 언론의 자유는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6월 4일자 조선일보 1면을 ‘장식’한 것은 박정희 정권의 초강경 대응에 관한 기사들뿐이었다. 「비상계엄 선포 / 서울특별시 일원에 / 3일 하오 8시를 기해 / 사령관엔 민기식 대장 / 교란된 질서 회복 목적 / 오늘 상오 10시 국회에 통고」라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 옆에는 박정희의 ‘특별담화’에 관한 기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3일 밤 비상계엄 선포에 즈음하여 담화문을 내고 “우선 정권을 무너뜨려 놓고 보자는 비지성적이며 무책임한 행동의 연속은 앞으로의 헌정을 위해 단호히 근절시켜야 하겠다”고 말하고 정부는 최단 시일 안정을 회복시켜 조속히 계엄을 해제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시민생활에 있어서의 자유와 입법기능 및 정치활동이 정상적으로 보장된다고 말하고 “과도적 조치를 악용한 간상모리행위나 경제질서 파괴범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
박정희가 계엄령을 선포하기 전, 6월 3일 오전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조선일보만 보면 전체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다. 왜 그런가?
6월 4일자 조선일보 1면 박정희의 특별담화 옆에 실린 기사는 ‘벽돌장’을 쌓아 놓은 것처럼 난도질이 되어 있다. 계엄사의 검열관들이 내용을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 6·3데모의 실상을 알려주는 기사는 1면 왼쪽 하단에 실린 「데모학생 만여 명이 참가 / 어제 서울서, 파출소 네 군데 파괴」뿐이다. 기사의 일부는 삭제되어 있다. 3면에 실린 데모 관련 기사들도 제목과 내용, 사진의 전부 또는 일부가 깎여나갔다. 사설은 물론 찾아볼 수가 없다.
<한국민주화운동사 1>에 기록된 6월 3일의 상황을 보기로 하자.
(…) 오전 10시가 넘자 각 대학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고려대생 2천여 명은 신설동과 안암동 로터리 부근에서 경찰과 충돌한 후 시내로 진출하여 오후 1시 40분 국회의 사당 앞을 점거하였다. 연세대생 2천여명과 홍익대생 1천여 명은 아현동 로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여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나 저지선을 뚫고 충정로 로터리를 거쳐 중앙청과 국회의사당으로 진출했다. (…) 서울대 문리대생 4백여 명은 단식 100시간을 돌파한 뒤 오후 5시경 단식을 중단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문리대생들은 단식 때 차림으로, 앞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고문을 당한 송철원을 들것에 들고 거리로 나와 큰 반향을 일으켰다. (…)
이날 서울시내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곳은 중앙청이 있던 세종로 일대였다. 세종로의 시민회관과 유솜(USOM) 건물 앞의 경찰 제1저지선에 걸려 일단 멈춘 학생과 시민은 약 1만여 명에 달했다. 오후 3시경 학생들이 철조망 1개를 50미터 가량 끌어내고 투석을 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했고 공수부대의 풍차까지 동원했다. 학생들은 제2저지선(경기도청앞)과 제3저지선(중앙청 정문 앞)을 연달아 돌파했다. 시위대는 제4저지선(조달청 앞)으로 밀려들어 청와대를 포위하고 오후 7시 30분경 경찰과 대치했다. 학생들만 시위를 벌인 것이 아니었다.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학생들을 격려하였고, 경찰의 최루탄 발사에 항의하였다. 또 곳곳에서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합세하여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경찰차량을 파괴하기도 했다.
6월 3일에는 지방에서도 시위가 가열되었다. 충남대 농대생 4백여 명은 교내에서 학원사찰 중지를 비롯한 박정희 정권 성토대회를 열고, 교문을 나와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광주에서도 2개 대학과 2개 고등학교 학생 1만여명이 최루탄을 터뜨리는 경찰에 맞서 2개의 파출소와 도청 건물, 그리고 경찰이 경비하고 있는 민주공화당 본부에 돌을 던졌다. 한마디로 6월 3일의 대규모 시위는 1960년 4월 19일의 시위를 방불케 하는 5·16 쿠데타 이후 최대의 항쟁이었다(429~430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