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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조인·비준 반대투쟁

- 조선일보 대해부 3권 -9장

기사승인 2019.01.16  12:3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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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뒤 무기 연기되었던 한일회담은 12월 3일에 재개되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한일회담 재개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과 미군의 ‘북폭’으로 베트남전쟁이 확대되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미국의 린든 존슨 행정부는 박정희 정권이 조속히 한일회담을 다시 열고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이루라고 촉구했다.

(…) 9월 하순부터 10월에 걸쳐 미국 국무부차관보 번디는 일본과 한국을 차례로 방문하여 양국 고위 관계자들과 연쇄회담을 개최하고 한일회담 타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64년 10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개입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특히 미국은 박정희 정권에게 계속 평화선만 고집하지 말고 회담을 타결시켜 하루빨리 경제 재건을 이룩하고 동북아시아 안보질서 강화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1964년 11월 출범한 사토 내각이 미국에 협조하여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결단하면서 제7차 한일회담이 재개될 수 있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439쪽).

박정희는 1965년 1월 9일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회담은 과거 15년을 끌어오는 동안 쌍방이 할 말은 다했다고 보는 만큼 금년에는 가부간 매듭을 짓겠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청와대 접견실에서 가진 공식 기자회견에서 “연내에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을 친선방문하고 싶다”고 밝혔다(조선일보 1월 10일자 1면).

2월 15일 한국과 일본 정부는 ‘한일기본조약안’에 합의했다. 과거 한일 간에 맺었던 조약들의 무효시점에 관해서는 “이미 무효이다”라는 문구를 기본조약에 삽입했다.

일본 외상 시이나가 한국을 방문하기 전날인 2월 16일 야당 진영은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회를 열고 “김종필·오히라 메모 백지화와 평화선의 고수 및 한일무역 불균형의 시정 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재 선에서의 한일회담 타결을 반대한다”고 선언하고 한일 외상회담 결과에 따라 ‘범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조선일보 2월 17일자 1면).

한국 외무부장관 이동원과 회담을 하러 2월 17일 입국한 시이나는 ‘도착 성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한 양국은 예부터 일의대수(一衣帶水수)의 인국(隣國)으로서 사람의 교류는 물론 문화적이나 경제적으로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만 양국 간의 오랜 역사 중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로서 깊이 반성하는 바입니다.”(조선일보 2월 18일자 1면).

시이나가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를 하지 않고 “양국 간의 오랜 기간 중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로서 깊이 반성”한다고 모호한 표현을 하자 한일회담 타결을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동원과 시이나는 “2월 18일 오후 제1차 회담을 갖고 한일회담 기본조약 문제에 완전히 합의하고, 19일 김동조 주일대사와 일본 외무성 당국자 사이에 가조인(假調印)을 하기로 원칙적 합의를 보았다”(조선일보 2월 19일자).

그 이튿날 기본조약에 대한 가조인 절차가 진행되었다.

한일 양국 정부는 20일 하오 14년 동안 끌어오던 두 나라의 기본관계에 매듭을 짓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을 가조인하고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시이나 외상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시이나 외무성장관은 공동성명에서 “공정 타당한 기초에서 한일회담을 조속히, 그리고 원만히 타결하기 위하여 결단성 있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에 합의하고 “가능한 한 조속히 농상회담과 무역회담을 열도록” 했다. (…)
시이나 외상의 내한 후 이 장관은 4차의 회담을 갖고 여러 현안에 대해 구체적인 토의를 했으며 특히 19일 밤과 20일 새벽에 걸친 막바지 절충 끝에 양측이 서로 맞섰던 구 조약의 무효화 문제, 한국정부의 합법성 등에 일본 측이 양보함으로써 구 조약은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표현으로 낙착되고 한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우리 주장이 관철되었다.
그러나 한국 측이 끈덕지게 내세우던 한반도 전역의 관할권은 이 조약에 명시되지 않았다 (조선일보 2월 21일자 1면).

조선일보는 2월 23일자 2면에 「한일기본조약의 분석과 어려운 차후의 교섭」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4일 간에 걸쳤던 시이나 일본 외상의 방한 결과 한일회담은 두 가지 점에서 확실히 일보전진하게 된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첫째는 기본조약의 가조인을 보았다는 데서 조기 타결의 기운을 한층 고조시켜 20일에 발표된 한일 양국 외상의 공동성명으로써 약속한 ‘농상회담’과 ‘무역회담’ 그리고 각 분위(分委)별로 계속 진행 중인 제 현안의 전면 타결을 위해 묵직한 고임돌이 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시이나 외상이 착한(着韓) 성명 및 전기 공동성명 속에서 “양국 간에 있었던 불행한 관계에서 연유한 한국 국민의 대일감정”에 유념하는 ‘유감의 뜻’과 ‘깊이 반성하는 바’임을 표명함으로써 ‘사과 사절’의 역할을 다소나마 대행하였다는 점이다. (…) 국내 일부에서는 이번 외상회담의 성과를 과대평가한 나머지 마치 한일회담이 거의 다 되어 가는 것처럼 서두르는 단순한 사람들이 없지도 않으나 가조인된 기본조약의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 볼 때 우리 측이 크게 후퇴한 것도 없다 할 것이나, 그와 함께 일본 측도 우리 외교 당사자가 기뻐서 선전할 만큼 우리에게 양보한 것은 별로 없는 것이다. (…)
(…) 하긴 지금까지 굉장히 고자세로 임하던 일본 측이 이만큼이라도 접근해왔다는 성의는 절충에 당해온 외교 당사자들의 갖은 노고와 함께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으나, 그리 대단치 않은 기본조약문의 표현에도 이번처럼 심각한 정치교섭이 필요했던 것을 상기할 때 착잡한 이해가 얽힌 한일회담은 이제부터 더 어려운 관령(關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 정부는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사설은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이 한국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관해 피상적이면서도 안이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기본조약 가조인이 한일회담 ‘조기 타결의 기운을 한결 고조’시켰다는 표현은 당시 야당을 비롯해서 시민단체들과 학생들이 ‘굴욕적 회담’이라고 비판하던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한일회담이 조속히 타결되는 것보다는 한국이 일본을 상대로 확고한 주체성을 바탕으로 국교를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와 그의 ‘참모장’ 격인 김종필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빚어낸 한국인들의 피해와 희생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지 못하고 ‘청구권’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겨우 3억 달러를 받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조선일보의 사설이 주장하는 대로 한일회담이 조기 타결되면 ‘식민지 민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 강제 징병과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배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은 명확한 일이었다.

게다가 위의 사설은 일본 외상 시이나가 “양국 간에 있었던 불행한 관계에서 연유한 한국 국민의 대일감정에 유념하는 ‘유감의 뜻’과 ‘깊이 반성하는 바’임을 표명함으로써 ‘사과 사절’의 역할을 대행하였다는 점”을 가조인 회담의 성과라고 보고 있다. 한일회담이 타결된 뒤 2014년 현재까지 드러난 일본 보수정권의 언동을 보면, 그때 시이나의 ‘사과 사절’ 역할이 가식적인 것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바로 그 무렵, 태평양전쟁 기간의 ‘전범들’과 극우보수주의자들이 이끌던 일본의 집권자민당을 상대로 받아내지 못한 ‘사과’가 오늘날에는 더욱 받기 어려운 것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시이나의 말 뒤집기와 조선일보 사설의 급변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을 하고 돌아간 일본 외상 시이나는 2월 25일 서울에서와는 전혀 다른 발언을 했다. 조선일보 2월 26일자에 실린 ‘동경 발 로이터-동화통신’의 기사(「어업회담은 평화선 철폐를 전제 / 한국 측서도 이미 양해 / 시이나 외상 중의원서 언명」)는 그 사실을 이렇게 보도했다.

시이나 외상은 25일 말썽 많은 평화선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일본이 어업회담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한국 측이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고 말하였다. 그는 중의원의 한 분과위원회에서 사회당 의원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답변하면서 이와 같이 말하였다. 한국이 한국전쟁 후인 1952년에 일방적으로 설정한 동 어로구획선을 폐지하는 데 공개적으로 동의하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일이었다. 시이나 외상은 일본은 평화선이 국제법상으로 불법적인 것이라는 것과 그와 같은 법률이 있는 만큼 일본 어선을 나포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어업회담에 임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계속하여 시이나 외상은 “일본이 이(李) 라인(평화선)을 인정한 바 없는 만큼 그와 같은 선이 없다는 데 대해서 어느 쪽에서건 굳이 이를 확인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본다”고 말하였다.
그는 한국 측에서도 그러한 이해 하에 어업회담을 수락한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 측이 평화선 존재를 여전히 고집한다면 3월 초 동경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는 한일 농상회담은 실현을 볼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양국 간의 국교정상화회담은 더 이상 진전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2월 26일 민정당 총재 윤보선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시이나 발언으로 박 정권이 평화선을 양보하고 일본과 암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주장하며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대변인 박영록도 “한일 간에 비밀흥정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외무부장관 이동원과 공보부장관 홍종철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국민은 현혹되지 말라”고 했고, 공화당은 “모든 문제를 정권 타도와 결부시키지 말라”고 응수했다(조선일보 2월 27일자 1면).

조선일보는 2월 28일자 1면에 올린 사설(「3·1 정신과 오늘의 한·일 관계 / 지금은 적이 국민들의 마음속에 있다」)을 통해 한일회담에 임하는 정부의 자세를 비판했다.

(…) 결론부터 말한다면 한일회담도 좋지만 3·1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떳떳한 한일국교 정상화가 관철되어야 하겠고, 온 겨레가 3·1 정신을 계승한 명예로운 자손으로서의 높은 긍지로 외세를 대하여 더욱 일본과의 수교가 이룩된다 하더라도 3·1 정신을 모독하는 천박한 몸가짐이 단 한 사람의 동포일지라도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우리의 다짐이다. (…)
우리는 첫째 한일회담에 임하고 있는 정부에 경고한다. 한일회담을 할 필요가 없다고 극언할 배타적인 국민은 그리 많지 않을 줄 안다. 그리고 14년이나 질질 끌어온 회담이 이제 막급피치를 올리게 됐다고 하여 조급한 태도라고 비난할 이유도 없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근세 개명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무엇 때문에 일본보다 뒤떨어졌으며 어찌 하여 일본군의 말굽에 짓밟혀 병탄당하게 된 비운을 맛보았던가. 그리고 왜 3·1 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하는 역사의식이 뚜렷이 선 대일교섭을 하고 있는가를 한번 반성해보라. 지난 2월 20일에 가조인한 ‘기본조약’을 놓고도 일본 정부는 벌써 딴소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 국민 대부분의 대(對)한국관이 어떻다는 것은 여기 일일이 헤아리기조차 불유쾌한 일이지만 평화선만 해도 그렇고,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에 관해서도 그렇듯이 저들은 제2차 대전에서의 ‘패전’이란 사실 하나만 인정했지, 한국과 한국인에 가한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서는 전혀 눈을 감거나 도리어 합리화시킬 논리를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는 증거가 역력한 것이다. (…)
(…) 3·1 정신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전 국민이 지위와 명예와 재산과 생명을 홍모(鴻毛)처럼 가볍게 여기고 대동단결하여 일본과 싸운 우리의 자랑인 것이다. 3·1절을 국경일로 정하여 해마다 3·1 정신을 선양·고취하는 이유는 그 옛날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치욕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신적 재무장을 하자는 데 있는 것이거늘, 적은 산중에 있지 않고 네 심중(心中)에 있다는 고언(故言)을 되새겨 한일관계가 오늘처럼 미묘한 국면을 맞이한 이때 우리는 3·1 정신의 엄숙한 재평가와 더불어 정정당당한 대일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을 다짐하면서 뜻 깊은 제46회 3·1절을 보내고자 한다.

이 사설은 닷새 전 사설(2월 23일자)의 논지와 동떨어져 있다. 그 사설에서는 “하긴 지금까지 굉장히 고자세로 임하던 일본 측이 이 만큼이라도 접근해왔다는 성의는 절충에 당해온 외교 당사자들의 갖은 노고와 함께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고 평가한 바 있는데, 시이나가 일본에 돌아가 평화선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자 2월 28일자 사설에서는 ‘3·1 정신’을 내세워 한국 정부의 대일교섭 자세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청와대는 물론이고 행정부와 국회에서 친일파 또는 그 후손들이 강력한 권력을 잡고 흔드는 정치세력이었다. 박 정권이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면서까지 굴욕적으로 한일회담을 조기 타결하려고 하는 동기는 앞에 밝혔듯이 미국의 압력과 정권 자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정권을 향해 3·1 정신을 따르라고 ‘권유’하는 조선일보의 사설이 대다수 독자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시이나의 ‘평화선 부정’에 대해 야당이 주장한 ‘박 정권과 일본의 암거래 설’에 관해 정부가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사설을 실었다면 3·1절에 걸맞았을 것이다.


한일협정 조인 반대투쟁

야당과 재야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범국민투위’가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격렬하게 벌였지만 한국과 일본 정부는 1965년 4월 3일 ‘어업’ ‘청구권’ ‘재일한인의 법적 지위’ 등 3개 현안을 일괄 타결하고 각각의 협정에 조인했다.

가장 큰 쟁점이었던 평화선 문제도 결말을 보았다. 평화선 문제와 직결된 어업협정의 주요 내용을 보면, 한국 어민만이 배타적으로 어업을 할 수 있는 어업수역(전관수역)을 공해 부분을 포함하여 12해리까지 설정하고, 40해리까지는 한국과 일본 어민만이 같이 조업하는 공동 규제수역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평화선은 어업협정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기본조약과 마찬가지로 모호한 방식에 의한 쟁점 봉합이었다. 한국 정부는 어업협정이 일본 이외에 다른 나라에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제3국에 대해서는 평화선이 엄존하고 있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한국이 전관수역 12해리, 공동규제수역 40해리를 확보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평화선 선포의 목적을 충분히 반영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어업협정으로 평화선이 소멸되었다고 보았다. 일본 정부의 주장이 진실이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442~443쪽).

조선일보는 4월 4일자 2면에 「한일 양국 간의 국교 정상화에 붙이는 우리의 우려」’라는 사설을 올렸다.

(…) 이제 가조인된 요강을 토대로 우리의 소견을 집약하여 표현하면 정부가 조기 타결을 서두른 나머지 졸속과 저자세에 일관하였다는 느낌이 드는 일이다. 특히 이번에 교섭의 주역을 맡은 이동원 외무장관이 초청국의 공식 체류일정을 어겨가면서까지 체류를 연기하여 외교적 관례를 깨뜨린 일은 가조인을 조급히 서두르려는 정부의 약점과 본심을 드러낸 것으로, 그런 식으로 중요한 국사를 처리하는 정부의 자세에 불안감마저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의 솔직한 불쾌감을 표시한다. 평화선을 철폐하였다는 데 대한 점은 국민의 가장 심각하고 광범한 불만을 자아내고 있다. (…) 더욱이 “한국의 대일선박청구권은 평화선에서 나포된 일본 어선과 실질적으로 상쇄한다”는 것은, 비단 평화선은 앞으로 철폐한다는 것에 멈추지 않고 훨씬 더 나아가 평화선은 과거에도 불법적이었다는 것을 우회적인 방법으로 실질적으로 확인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은 일을 크게 그르친 것이라 하여 지나친 판단이 아닐 것이다. (…)
이렇게 졸속으로 흐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각서라고 통칭되는 청구권 합의사항의 견인작용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청구권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것뿐이지 일본 측에서는 그것을 부인하고 대한경제협조라고 부르는 무상 3억불과 차관 2억불을 빨리 당겨 써보자는 데서 협상의 주도권을 굳게 잡지 못한 채, 사사건건에서 일단은 버리기도 하고 주기도 하다가 가조인 단계에 가서는 대체로 일본 측이 고집하는 줄거리대로 타결되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으니, 우리는 그렇게 작정된 한일 양국의 국교 정상화 후의 전망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의 국교 정상화 교섭에서 보여준 정부의 졸속 저자세와 독도를 포함한 평화선 및 어업권 타결 내용에 대하여 실망과 불안을 느끼는 것을 정부는 직시할 필요가 있음을 여기서 강조하고자 한다. (…) 정부에서는 평화선 침범이 없도록 일본 정부에 경고해야 할 것이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침범하는 일본 어선이 있게 될 경우에는 종전대로 나포 처단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지금까지 일본 어선들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고 하면 금후 어업조약이 체결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이 조약을 제대로 준수할까 하는 의문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이 사설은 ‘사후약방문’ 식의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있다. 왜 그런가?
서울에서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을 하고 돌아간 일본 외상 시이나는 2월 25일 이미 “평화선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일본이 어업회담에 임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고, 한국의 야당 측에서는 “시이나 발언으로 박 정권이 평화선을 양보하고 일본과 암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비판한 바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5억 달러에 불과한 청구권 자금과 차관을 서둘러 받으려고 평화선을 실질적으로 포기하고 굴욕적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은 당시 나라 안팎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위의 조선일보 사설은 한일협정 가조인이 기정사실이 된 뒤에야 비로소 “한일 양국의 국교 정상화 후의 전망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탄식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부에서는 평화선 침범이 없도록 일본 정부에 경고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한다. 한일회담 조기 타결을 위해 일본 정부에 대해 저자세로 일관한 데다 평화선을 실질적으로 포기한 박정희 정권이 무슨 힘으로 일본 정부에 경고를 할 수 있겠는가?


한일협정 조인부터 비준까지

4월 3일 한일협정이 가조인되자 야권과 학생들은 격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4월 7일 전남대에서 시작된 ‘한일협정 가조인 무효와 평화선 사수’ 운동은 4월 10일 전국의 여러 대학으로 번졌다. 4월 13일에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두개골을 크게 다친 동국대 학생 김중배가 15일 밤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죽음은 4월 혁명에 불씨를 댕긴 김주열의 희생에 버금가는 반응을 일으켰다.

박정희 정권은 4월 혁명 5주년을 계기로 학생 시위가 격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4월 16일 각 학교에 4월 말까지 휴교령을 내렸다. 그러나 학교 문이 닫힌 상황에서도 한일협정 조인 반대 투쟁은 계속되었다.

4월 24일 ‘민중당’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기로 합의한 민정당과 민주당 등 야당은 4월 28일 한일회담 비준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 의원직을 총사퇴하기로 결의했다. 5월 3일 민정·민주당의 통합으로 정식 발족한 민중당은 범국민투위를 중심으로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한일회담 조인을 저지하기 위한 궐기대회를 열었다.

박정희는 5월 3일 진해에서 시국에 대해 격한 감정으로 즉흥연설을 했다. “작금 한일문제를 가지고 말썽이 일어나고 있는데 일부 야당은 정부·여당이 그대로 비준을 강행하면 의원직을 그만두고 최후일각까지 투쟁한다고 격렬한 언사를 쓰고 있으며 일부 철부지 학생들이 거리에 뛰어나와서 매국외교니 굴욕외교니 무슨 정권 연장을 위해 하느니 한다. 확실히 말해 두거니와 내용도 제대로 모르고 거리에 뛰어나와 데모하는 학생은 정치인들의 앞잡이에 불과하다. (…) 4·19 정신 운운하나 그런 정신은 백년에 한 번이나 수백년에 한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숭고한 정신이다. (…) 요즘 지식인 가운데는 정부가 잘하는 일에 잘한다고 하면 소위 요즘 말하는 사꾸라요 인텔리가 아니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인텔리들의 자세는 고치자.”(조선일보 5월 4일자 1면).

이 발언은 박정희 정권이 민족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포기한 채 강행하는 한일회담을 굴욕적이라고 비판해온 학생들과 야당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이 그런 비판에 동조하면서 학생들과 야당을 지지하는 것을 모르는 척하면서 4·19 정신은 백년이나 수백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4월 혁명의 주체세력을 무시하는 ‘망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사설로 그런 폭언을 정당하게 비판하지 못하고 ‘시대착오적 발언’이라는 야당의 논평만 5월 4일자 1면에 2단으로 실었을 뿐이다.

학생들과 야권의 한일회담 조인 저지투쟁은 5월 내내, 그리고 6월 들어서도 격렬하게 펼쳐졌다. 6월 18일 고려대생들이 “타도 왜국, 대일 선전포고” “한일회담 조인 즉시 중지”를 외치면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21일 밤까지 전국의 13개 대학에서 8백여 명이 거기에 동참했다. 한일협정 조인을 하루 앞둔 6월 21일에는 서울 시내 12개 대학과 3개 고등학교 학생 1만여 명이 교문을 나서 시위를 벌였고, 22일에도 서울에서만 14개 대학 학생 1만여 명이 교내에서 집회를 열고 가두 진출을 시도했으나 경찰에 가로막혔다.

마침내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은 일본 도쿄에서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한국 외무부장관 이동원과 일본 외상 시이나가 서명한 한일협정은 ‘한일기본조약’ ‘한일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한일어업협정’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한일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등 1 조약, 4 협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선일보 6월 23일자 1면 머리기사에는 “이로써 한일 두 나라는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강제로 맺어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 이래 꼭 60년 만에 독립국가로서 다시 국교를 트게 된 것이다”라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자 1면에 「잊지 못할 반세기의 한(恨) / 한일 간 정식 조인에 착잡한 심정」이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올렸다.

1965년 6월 22일, 이날 우리는 또 한 번 「울밑에 선 봉선화」 노래를 불러본다. 나라 빼앗긴 한을 가슴 깊이 안고 애국자들이 동서남북으로 유랑하던 일제 36년간의 서러움이 불현듯 치밀어 오르는 애달픔 속에 역사의 수레바퀴는 3천만 겨레의 귓전에 그 무엇인가를 외치듯 속삭이듯, 새로운 윤회를 개시하는 신호를 울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 60년이라는 긴 연륜에 파묻혀, 망각의 피안으로 흘려버리기에는 너무나 뼈아프고 피맺힌 기록의 연속이었기에 우리는 오늘 다시 만감이 교차되는 가운데 엄숙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는 허전한 우리의 처지를 아니 느낄 수가 없다. (…)
(…) 우리의 요구를 최대한으로 관철했다는 정부의 자부이긴 하나, 국민들의 감정의 크기에 비하면 조인된 제 협정은 너무나 기대에 어긋난 감이 있고, 어느 정권이 맡아 한들 현재와 같은 여건 하에, 그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에 일말의 동정은 없을 수 없다 할지라도 그로써 국민의 불만을 가라앉히기에는 금후 여간 시련이 없어서는 안 될 형편으로 결착된 것을 우리는 서글퍼한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거국적 태세 위에 한일회담을 추진시키지 못한 우리의 국정(國情)을 원망하여도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기성사실로 되고 말았다. 현 정부는 이러한 정세 아래, 그리고 국민의 불만을 무릅쓰고 한일 간의 조인을 결행한 이상 응당 그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각오했을 것이요, 역사에 대하여 공화당 정권 단독으로 한일회담을 완결시킨 모든 책임까지 지고 임했을 것이라 믿을진댄 오늘 이후 벌어질 일체의 사태에 대하여도 소신에 순(殉)할 결의를 잊어서는 안 되리라.(…)
(…) 아직 비준 절차가 남아 있기 때문에 효력 발생까지는 상당한 국내 파란이 예상되는 것이지만, 이 조인을 계기로 우리 국민들은 어찌 하여 같은 20년이란 세월을 두고 오늘과 같은 자세로 한국과 일본의 위치가 정해졌는가를 첫째로 다 같이 깊이 반성해야 하며, 이미 일부 국민 가운데 천박한 친일 무드를 재촉하는 무리는 없는가를 되돌아보아 그와 같은 국민들 스스로의 ‘저자세’가 바로 국가 운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제2의 을사조약’임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마음 든든한 것은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고 일어선 젊은 학생들의 건전한 민족주체의식이요, 이것이 우리에게 없어지지 않는 한 조금도 일본을 두려워 할 것은 없을 것을 우리는 확신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심각한 관두에 서게 된 것을 느껴 우리는 어떤 의미로는 한결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키려 한다.

한일회담 조인에 대해 지극히 감상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사설은 조선일보 특유의 ‘불편부당’과 ‘양비양시론’의 ‘진수’를 보여준다.

“우리의 요구를 최대한으로 관철했다는 정부의 자부” “국민들의 감정의 크기에 비하면 조인된 제 협정은 너무나 기대에 어긋난 감” “어느 정권이 맡아 한들 현재와 같은 여건 하에, 그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에 일말의 동정” “국민의 불만을 가라앉히기에는 금후 여러 시련이 없어서는 안 될 형편” 등 박 정권이 최선을 다했지만 국민의 불만도 당연하다는 투의 표현들이 바로 그 ‘진수’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조선일보 사설은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고 단언하면서 공화당 정권이 한일회담을 완결시키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임했을 것이라고 신뢰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위의 사설은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고 일어선 젊은 학생들의 건전한 민족주체의식” 때문에 “조금도 일본을 두려워 할 것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박정희는 그 젊은 학생들에 대해 “일부 철부지 학생들이 거리에 뛰어나와서 매국외교니 굴욕외교니 무슨 정권 연장을 위해 한다느니 하느니 한다. 확실히 말해두거니와 내용도 제대로 모르고 거리에 뛰어나와 데모하는 학생은 정치인들의 앞잡이에 불과하다”고 폭언을 퍼부었는데, 그런 학생들이 박 정권이 굴욕적으로 타결한 한일회담의 방패막이로 나서서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지켜줄 수 있을까?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된 뒤에도 학생들은 비준 반대 시위를 계속했다. 4·19와 6·3 당시 거의 움직이지 않았던 이화여대 학생 1천5백여 명이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23일 가두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조인 반대투쟁은 ‘정치방학’으로 교문이 닫힌 6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7월 12일 한일협정 비준을 위한 임시국회가 열리자 서울시내 18개 대학 교수 354명이 서울대에 모여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선언을 했다. 그들은 “한일협정의 내용을 신중히 분석 검토한 끝에 우리의 민족적 자주성과 국가적 이익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뿐더러 장치 심히 우려할 사태가 전개될 것이 예견되므로 이에 그 비준을 반대한다”고 밝혔다(조선일보 7월 13일자 1면).

7월 14일 김홍일(전 외무부장관), 김재춘(정 중앙정보부장), 박병권(전 국방부장관), 박원빈(전 무임소장관), 백선진(전 재무부장관), 송요찬(전 내각수반), 손원일(전 국방부장관), 이호(전 법무부장관), 장덕창(전 공군참모총장), 조흥만(전 치안국장), 최경록(전 육군참모총장)이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한일 국교 정상화의 조기 타결을 내세운 최근 수년 간의 대일교섭 과정이 비정상적인 경로에 의해서 독선적으로 강행되어 왔을 뿐 아니라 조인된 조약과 협정의 내용이 거의 일본 측 안을 그대로 추종한 것 같은 비민주적인 것이고 국가적 위신과 이익을 상실케 한 성격의 것이라는 결론에 우리의 분석과 평가가 이르게 되었음을 국민 제위와 함께 깊이 비탄하여 마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이어서 그 성명서는 박정희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8월 11일 한일조약비준안 예비심의를 맡은 국회특별위원회가 열렸다. 한밤에 열린 회의에서 공화당 의원들은 야당 의원들의 저지를 완력으로 누르고 안건이 동의된 지 1분 만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그러자 민중당 의원들은 8월 12일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을 통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면서 사퇴서가 수리되지 않더라도 국회에 출석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공화당은 8월 13일 국회 본회의를 단독으로 열고 한일조약안과 함께 당시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던 ‘베트남 파병안’을 재석 104명 가운데 찬성 101명, 반대 1명, 기권 2명으로 통과시켰다.

8월 13일 야권과 학생들의 필사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공화당은 8월 14일 저녁 야당 의원들이 불참한 국회 본회의에서 한일협정비준안을 재석 111명 가운데 찬성 100명, 기권 1명으로 통과시켰다. “이로써 14년간 끌어오던 말썽 많은 한일관계 교섭은 비준안의 일본 국회 통과와 비준서 교환으로 완전히 끝나게 되었으며, 정국은 앞으로 비준파동에서 생겨난 엄청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적지 않은 진통을 겪어야 할 것 같다.”(조선일보 8월 15일자 1면).

한국사회를 뒤흔든 한일협정안 비준 문제가 박정희 정권의 일방적 ‘작전’으로 마감되었는데도 조선일보는 ‘비준안 국회 통과’ 관련 기사가 실린 8월 15일자 1면에 「해방 20주년」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올렸다.

민주주의의 촛불이 꺼질 듯 말 듯 애처롭게 가물거리고 있는 이때, 우리는 광복절을 또 한번 맞이했다. (…)
(…) 오늘 이 시점이, 20년의 ‘도로아미타불’을 의미하는 대의정치의 파국 일보 전이라는 데서 우리의 마음은 한결 더 무겁고 슬프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했는데도 20년 전과 비교하여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꼭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민주정치에 대한 자신 없는 몸부림이다. (…) 아직 한 번도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현시켜보지 못한 정치풍토에서, 20년 전에 패퇴해 간 일본과의 수교 문제로 나라 안이 발칵 뒤집혀 국회까지 ‘일당 국회’로 절름거리게 만들었으니 어딘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인식 기초가 잘못돼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둘째로는 빈곤. (…) 빈곤 때문에 만부득이하여 다시 일본과 손을 잡아 경제협력관계도 시도해보자는 것일 것이고, 빈곤 때문에 사회가 불안의 껍질을 못 벗어나고 정국이 흔들리는 것이다. 누구의 책임이든 간에 부끄럽기 그지없는 20년 이래 불변의 빈곤이 비참하기만 한 것이다. 셋째로 이상이 없는 사회. 다시 말하면 정신적 구심력이 될 민족적 철학이 없고 비전이 없는 사회인 것이다. 이것은 20년 전과 비교해서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후퇴하고 있다 해서 조금도 잘못이 아니다. 그때는 그래도 막연하나마 ‘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희망이 있었고, ‘민주주의’라는 구심력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가 허전하고 답답하고 황량한 회의(懷疑)뿐이 아닌가. 새삼스럽게 민족주체의식이 고양되고 있는 사회 환경의 밑바닥에는 그 ‘민족주체의식’을 부르짖는 위정자 자신의 ‘주체의식’조차 가냘프게만 여겨지며, 동시에 철학적 체계 하나 갖추지 못하여 허무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이냐.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변하지 않는 세 가지 요소 때문에 답보하고, 절망을 느끼고, 울적해 있더라도 우리를 지배하는 시간과 공간은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20년’이란 이 가슴 치는 경책(警責)이 우리들 귓전에서 그저 흘러가지 않도록 전 국민이 다시금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 사설은 ‘해방 20주년’이라는 주제로, 한일협정비준안 국회 통과라는, 비민주적, 반민족적 행위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사건에 관해 두루뭉술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압력과 자기 세력의 당면한 정치적 이익을 위해 민족공동체의 건강한 발전과 경제적 성장을 무시한 채 한일 국교 정상화를 ‘군사작전’ 식으로 무리하게 밀어붙인 과정은 물론이고 야당과 재야세력과 학생들이 그토록 결사적으로 그것을 반대한 경위와 이유를 되짚어보고 나서 한국사회가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제시했어야 옳지 않은가.

위의 사설은 이런 소재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해방 20년을 맞이하는 1965년 8월 15일 현재 한국사회가 그때보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고 있다. ‘민주정치에 대한 자신 없는 몸부림’ ‘빈곤’ ‘이상이 없는 사회’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4월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것이 ‘민주정치에 대한 자신 없는 몸부림’의 결과였던가? 국민 대다수가 빈곤한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는 ‘혁명공약’을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킨 지 5년이 지나도록 박정희 정권이 해방 직후 못지않은 빈곤이 유지되게 했다는 뜻인가? ‘이상이 없는 사회’라는 말은 또 무엇인가? 젊은 청년학도 다수는 4월 혁명의 이념과 정신을 지키고 발전시키려고, 박정희의 쿠데타세력에 맞서 집회와 시위로 민주 회복과 민족 자주화를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그런데도 조선일보의 사설은 “그때(20년 전)는 막연하나마 ‘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희망이 있었고, ‘민주주의’라는 구심력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허전하고 답답하고 황량한 회의뿐”이라고 한탄한다. 그것은 조선일보 논설 집필자의 허무한 정신상태일 뿐이다.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 이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한국의 민족·민주·민중운동 진영은 군사독재와 반민주세력에 맞서 열성을 다해 싸워왔고,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민주적 정부가 작동하도록 하는 결과를 이루기도 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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