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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법살인’과 긴급조치 9호

- 조선일보 대해부 3권 -21장

기사승인 2019.05.02  12:5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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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1호와 4호는 반유신정권투쟁을 누그러뜨리는 데 한동안 효력이 있었다. 그러나 국내가 조용해진 데 반해 미국, 일본, 서독 등 해외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단체들이 결성되고, 1974년 7~8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한국 인권 문제 청문회’가 열리는 한편 인권 탄압과 전체주의적 사회 통제를 이유로 한국에 대한 경제·군사 원조를 크게 삭감하자는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자 박정희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박정희의 유화책과 되살아난 반유신투쟁

‘철권통치’만으로는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박정희는 1974년 8월 23일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했다.

그러나 9월에 가을학기가 시작되자 대학가에서는 민청학련 관련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9월 17일 고려대 총학생회가 구속학생 석방을 주장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제작했다가 경찰에 압수당한 것을 시발점으로 23일에는 이화여대 학생 4천여 명이 교내에서 집회를 열고 구속된 인사와 학생 석방, 국민기본권 보장, 언론자유 보장 등 6개 항을 결의했다. 그렇게 뜨거워지기 시작한 대학가의 반유신투쟁은 겨울방학 직전인 12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재야의 반유신 민주화운동도 전열을 강화해나갔다. 9월 23일 강원도 원주교구에서 열린 성직자 세미나에 참석했던 신부 3백여 명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하고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잇달아 열기로 결정했다. 9월 26일 사제단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2천여 명의 성직자와 신도가 참여한 가운데 ‘순교자 찬미 기도회’를 열고, 유신헌법 철폐와 긴급조치 무효화, 국민의 기본권 보장, 민주헌정 회복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 11월 18일 서울 광화문 문인협회 사무실에 문인 30여 명이 모여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고 구속된 학생들과 재야인사들의 석방, 언론·출판·결사·집회·사상 등의 자유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재야세력은 12월 25일 민주회복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립하고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윤보선, 이희승, 김재준, 김수환, 정일형, 김대중 등이 고문을, 윤형중, 함석헌, 강원용, 천관우, 이태영, 김영삼 등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국민회의는 1975년 3월 초까지 7개 시도지부와 20개 시군지부를 결성했다.

이보다 앞서 신민당 정무회의는 11월 12일 개헌안을 확정했다. 그 내용은 통일주체국민회의 폐지, 주권재민의 원리와 기본권 절대화, 대통령의 4년 연임제, 국정감사권 부활이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11월 14일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의 상황에서 개헌을 거부하는 행위야말로 역사에 대한 도전이며 민족에 대한 배신임을 엄숙히 경고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당 측은 국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성의있는 노력을 끝내 다수의 횡포로 짓밟아 국민의 실망과 분노가 한계선을 넘었으므로 신민당은 이제 국민의 선두에서 장외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고 밝혔다(조선일보 11월 15일자 1면).

국내의 유신반대투쟁이 강화되는 가운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세계 여론, 특히 미국의 언론과 의회 내 여론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들었다. 1975년 1월 22일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찬반 여부,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신임 여부를 묻기 위해 국민 투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민주화운동세력들은 공정한 민주적 절차, 언론탄압 중지,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고, 자유로운 찬반투표가 보장되지 않는 국민투표는 기만행위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다. (…)
1975년 2월 12일 강행된 국민투표에는 총유권자의 79.8%가 참여하였고, 그중 73.1%가 유신헌법에 대해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발표되었다. 1972년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의 91.9% 투표와 91.5%의 지지율에 비하면 훨씬 저조한 것이었다. (…)
행정부 말단조직까지 동원된 ‘행정투표’로 선심 공세와 위협까지 퍼붓고, 부정행위까지 저지른 사실을 감안한다면, 투표 결과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이 국민 다수에게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조한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투표 다음날인 2월 13일 압도적 다수표로 현행 헌법은 물론 대통령인 자신에 대한 신임이 확인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국민총화를 바탕으로 거국적 정치체제를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어 2월 15일 긴급조치 1·4호 위반자 중 형이 확정되어 있던 56명을 구속집행정지로 석방하였다. 2월 17일에는 대법원 형사부가 지학순 주교, 김찬국 연세대 교수, 강신옥 변호사, 이철 등 23명의 피고인에 대해서도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내려 이들을 석방하였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157~162쪽).

박정희가 일련의 유화책으로, 악화된 국내외 여론을 무마하려고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과 재야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석방했으나 그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다. 3월 중순부터 대학가에서 반유신투쟁이 다시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3월 31일 고려대 학생 1천5백여 명은 대강당에서 「반독재구국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4월 7일 오후 5시 2천여 명이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는데, 그들 가운데 50여 명은 도서관에서 밤샘농성에 들어갔다. 4월 8일 오전 고려대 학생 3천여 명이 교내에서 다시 격렬한 시위를 벌리자 박정희는 오후 5시를 기해 고려대를 대상으로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다. “고려대에는 휴교령이 내려져 일체의 교내 집회와 시위가 금지되었다. 위반자는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었으며, 국방부장관이 병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 대학을 상대로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발동하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조치가 단행되었던 것이다. 서강대, 한신대도 1975년 4월 석방학생 복교와 학원민주화,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계속하였다. 고려대에 이어 한신대에도 휴교령이 내려졌고, 4월 9일까지 서울대의 8개 단과대학과 한국외대, 연세대, 서강대 등이 휴교에 들어갔다.”(같은 책, 173쪽).

박정희가 짧은 기간 펼치던 유화책은 긴급조치 7호 발동과 함께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

박정희가 고려대를 대상으로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던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사건 관련자들 가운데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우홍원, 김용원, 그리고 민청학련 관련자 여정남에게 원심대로 사형을 확정했다.

조선일보는 4월 9일자 7면 머리에 「대법원, 39명 원심 확정 / 인혁당·민청학련 등 피고 상고 기각 / 사형 8·무기 9명」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에는 인혁당 관련자들의 사형 확정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이튿날인 4월 11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 기사(「인혁당 관련 8명 사형 집행 / 대법 형 확정 하루 만에 / 서울구치소서 교수형으로」)를 본 재야인사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 사형이 확정된 피고인들을 만 24시간도 지나기 전에 처형하는 일은 일찍이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비상군법회의 관계자’의 말을 빌려 사형 집행 과정을 보도했다.

도예종은 조국이 공산주의 아래 통일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고 다른 7명도 자신의 사상적 신념과 연관된 것이거나 가족 문제 등에 관한 유언을 했다고 관계관은 전했다.
이들 8명은 작년 4월 27일 긴급조치 1·4호와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및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 혐의로 기소되어 작년 7월 8일과 9월 7일 비상 보통군재와 비상고등군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었다.
군법회의법에 따르면 사형이 확정되면 국방부장관은 6개월 이내에 사형집행명령을 내려야 하며 이 명령이 내린 후 5일 이내에 형을 집행하도록 돼있다.
이날 서울구치소는 오전 9시 30분 갑자기 평상의 면회업무를 중단한다는 공고문을 게시하고 일반면회객들을 돌려보냈으며 이때부터 주변에는 기동 경찰대가 출동돼 삼엄한 경계망을 폈다.
사형집행은 이때부터 시작돼 오후까지 계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가 이 기사에서 “도예종은 조국이 공산주의 아래 통일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고 다른 7명도 자신의 사상적 신념과 연관된” 유언을 남겼다고 ‘비상군재 관계자’의 말을 보도한 내용은 나중에 사실무근의 ‘작문’으로 판명되었다.

4월 8일 대법원에서 8명의 사형이 확정되자 이튿날 아침 서울구치소로 면회를 간 가족과 친지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구치소 정문과 담벽을 치면서 통곡을 터뜨렸다. 마지막 면회조차 못한 남편, 아버지, 형이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거나 교수대에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법무부 직원들과 정보기관원들이 그들의 주검을 버스에 싣고 화장장으로 가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천주교 신부 문정현 등 재야인사들과 유족은 서울 응암동 네거리에서 버스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폭력으로 유족들과 재야인사들을 뿌리친 그들은 8명의 주검을 화장해서 어딘가에 뿌려버렸다. 그들의 시신에서 고문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으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그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선포했다.

2005년 12월 7일,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인혁당 사건 피고인 8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해 8월 21일 서울민사지방법원은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대해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면서 시국사건사상 최대인 배상액수 637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남베트남 정부의 무조건 항복과 한국의 ‘안보 열풍’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당시 한국에서는 월남이라고 불렀음) 정부 대통령 두옹 반 민이 공산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베트콩임시혁명정부(PRG)’에 정권을 정식으로 이양했다. 30년에 걸친 인도차이나전쟁이 막을 내린 것이었다. 조선일보 5월 1일자 1면 머리에는 ‘UPI-동양’의 외신을 옮긴 「월남 정부 항복 / 공산군, 사이공 무혈입성 / 정부군 무장 해제」라는 기사가 크게 실렸다.

(…) 공산군 탱크부대는 민 대통령의 항복 발표가 있은 지 2시간 후인 12시 20분(한국시간 1시 20분) 사이공 시내로 무혈입성, 대통령관저인 독립궁을 점령, 베트콩 기를 게양했으며 이로써 인도지나 전역은 사실상 공산 지배 아래 들어갔다.
민 대통령은 이날 아침 긴급각의가 끝난 뒤 1분 동안의 짤막한 방송연설을 통해 모든 정부군에게 즉각 전투를 중지할 것과 유혈사태 없이 정권이양 절차가 끝날 때까지 현 위치를 떠나지 말도록 명령했다.
민 대통령은 베트콩임시혁명정부군에 대해 서로 전투를 중지하라고 호소하고 우리는 국민들이 지각없는 유혈사태를 일으키지 않고 정권을 이양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베트콩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평화와 민족의 화해, 그리고 국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베트남인이 서로 화해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민 대통령의 연설이 끝난 뒤 사이공 시내의 모든 경찰서들은 백기를 내걸었으며 탈출피난민들로 수라장을 이루었던 미대사관 건물이 불타는 가운데 사이공시는 무거운 정적 속에 빠져들어갔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신문 2면의 「월남 항복하던 날…본사 워싱턴·동경·파리 긴급전화」라는 기사에 ‘사이공을 잊어버리자’라는 국제 반응을 큰 컷으로 달았다. 미국은 사이공 함락을 ‘아시아 계획을 정리’하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패배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는 내용이 기사의 핵심이었다.

이 기사 바로 옆에는 「월남공화국의 최후-군사적 패배에 앞선 정치적 패배였다」라는 사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 포드 미국 대통령은 5만6천7백37명의 미국인의 생명을 희생하고 1천5백억 달러의 돈을 흩뿌린 미국의 가장 고되고도 긴 전쟁의 마지막 작전인 철수 지시를 내리고는 짤막한 성명을 통해 “우리의 마지막 헬리콥터는 떴다. 이것으로 미국의 월남 개입은 막을 내렸다”고 말했다.
사이공의, 아니 월남 전역에 앞으로 전개될 참상은 계속 외부에 알려지겠거니와, 하나 명백한 것은 역사의 이 시점에서 월남공화국은 영원히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1973년 1월 파리 휴전협정이 성립된 지 2년 3개월만의 일이요, 지난 3월 초 공산 측 공세가 개시된 지 실로 두 달만의 일이며 이웃 크메르가 백기를 든 지 13일만의 현실이다. (…)
우리는 65년에 비롯해서 73년 파리 휴전협정 성립으로 철수할 때까지 5만의 국군을 파월하여 월남의 대공전(對共戰)을 지원했다. 이는 6·25 동란 지원에 대한 미국과 월남에의 도의적 보답이라는 뜻이 있었으나 그보다도 국제공산주의 연합전선에 대항하는 아시아 자유진영의 집단안전보장 논리가 우리에게 더 절실한 의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
(…) 17도선과 38도선의 지리상 위도가 다를 뿐 한반도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 인도차이나 반도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조건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충격은 너무나도 절실한 과제를 준다. 그리고 월남의 전철을 밟지 말하는 절대적 보장이 우리에게 천부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이 교훈은 너무나도 뼈저리다. (…)
월남공화국의 종말은 우리에게 위기감을 절실하게 현실화해주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이 위기감을 어떻게 정치적 결속으로 전화(轉化)시켜 우리의 대공투쟁 역량을 앙양해 나가느냐는 데에 우리의 전도는 달려 있지 않겠는가. 허황된 외침이 우리를 보장해주지 못할 것이며 우리가 1차적으로 우리 자신을 책임지지 못하는 곳에 외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시아의 역사는 분명히 숨 가쁜 한 고비를 넘어가고 있으며, 월남공화국의 최후와 함께 그에 대한 정면의 도전자가 바로 다름 아닌 우리임을 냉엄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인식하는 터다.

이 사설은 남베트남 정부의 패망을 계기로 한국사회에 곧 불어닥칠 ‘안보 열풍’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위의 글에서 심각한 문제로 드러나는 것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인식이 피상적이고 역사적 진실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1965년에 박정희 정권은 “6·25 동란 지원에 대한 미국과 월남에의 도의적 보답이라는 뜻”으로 월남의 대공전을 지원했다는데, 당시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그 시기에 ‘추악한 전쟁’이라고 국제적 비난을 받던 베트남전쟁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미국의 존슨 행정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유우방’을 그 전쟁에 끌어들여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미국은 인도차이나가 공산화하는 것을 막는 ‘반공투쟁’에 한국이 파병하도록 음양으로 압력을 가했다.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 있던 박 정권이 존슨 행정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파병에서 오는 막대한 ‘경제적 수입’이라는 당근은 ‘고도경제성장’을 밀고 나가던 박 정권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결국 박정희는 야당과 학생들,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이 ‘용병 파견’이라고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을 무릅쓰고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보냈던 것이다.

남베트남 정부 붕괴와 북베트남의 무력에 의한 ‘통일’이 세계적인 뉴스가 되어 있던 5월 2일 오전, 재계·학계·문화계 등 각계의 원로급 인사 55명이 참여한 구국동지회(대표 이갑성) 발기총회 및 시국선언대회가 열렸다. 그 모임에서는 「위난의 조국을 위하여’」는 제목의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이 채택되었다. “공산세력의 집중포화 속에 초토화되고 있는 인도차이나 사태가 이제는 피안의 불로만 볼 수 없게 됐다. (…) 총력안보라는 지상의 명제를 저해하는 어떠한 독소라도 국민의 이름으로 과감하게 제거되어야 한다.”(조선일보 5월 3일자 1면).

이 기사가 실린 1면 하단에는 「위난의 조국을 위하여」라는 호소문이 5단통 광고로 실렸다.
구국동지회의 시국선언대회를 신호 삼아 5월 5일부터 안보 또는 반공을 외치는 궐기대회가 잇달아 벌어졌다. 조선일보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런 모임이나 정치권 등의 동향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런 기사의 제목들은 아래와 같다.

· 「휴일 없는 반공궐기 / 총력안보 기도회도」(5월 6일자 7면)
· 「조계종서 안보대회 / 학교·단체도 잇달아」(56월 7일자 7면)
· 「안보국회 소집 사실상 타결 / 여야 총무 두 차례 회담 / 빠르면 주말에 공고」(5월 9일자 1면)
· 「남침은 자멸을 촉진 / 한적, 북적에 본회담 재개 촉구」(5월 9일자 1면)
· 「총력안보국민협 결성 / 38개 사회단체 대표, 내일 백만 궐기대회」(5월 9일자 7면)
· 「어제도 백50만명 궐기 / 총력안보 다짐도」(5월 9일자 7면)」
· 「8개 대학 4만 학생 안보궐기 / 서울·연세·고려 등, 현실 직시…면학 전념 다짐」(5월 10일자 7면)
· 「이북 5도민 등도 궐기」(5월 10일자 7면)

5월 10일 ‘안보궐기대회’는 절정에 이르러 5월 11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를 차지했다. 「서울시민 안보궐기대회 / 여의도광장서…백40만 참석 / 멸공 구국 다짐」이라는 기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 총력안보국민협의회(회장 이맹기)가 주관한 이날 대회에서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총력안보 굳게 다져 남침 흉계 분쇄하자” “4천만이 일어섰다 침략 망상 포기하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멸공구국대열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전국에서 메아리친 총력안보의 결의가 절정에 달한 이 대회에서 허정 대회장은 대회사를 통해 “공산주의자와의 평화협정이나 긴장 완화라는 것은 명분에 불과할 뿐 힘의 균형이 깨지고 이쪽이 약할 때는 무력으로 덤벼드는 것이 그들의 기본전략”이라고 전제하고 “자기 안보를 남에게만 의존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다.
인도차이나의 비극을 예로 든 허 대회장은 “일단 유사시엔 모두 최전선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멸공통일을 하자”고 다짐했다.

조선일보에는 ‘안보 열풍’에 관한 기사가 계속 실렸다. 「혈서·화형…안보 물결」 「여학생들도 안보궐기」(5월 11일자 7면), 「사회보안법 통과 협조 / 신민 방침, 정치적 독소 없다면」(5월 13일자 1면), 「초교파 구국기도회 / 근혜 양 참석, 임진각서…5천여 명 모여」(5월 13일자 7면).


박정희, 긴급조치 9호 선포

남베트남 정부가 무조건 항복을 한 4월 30일 이래 북한이 당장 남한을 공격하려 한다는 구체적 정보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북한이 무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전면전을 일으킨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남한을 들끓게 하던 ‘안보 열풍’은 그런 객관적 정세를 이성적으로 고려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뜨거운 ‘총력안보’의 외침을 배경으로 박정희는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를 선포했다. 조선일보 5월 14일자는 1면 전부를 긴급조치 9호 관련 기사로 채웠다. 1면 머리기사(「헌법 비방·개폐 선전 금지」)는 다음과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13일 오후 헌법 제53조에 의한 긴급조치권을 발동하여 현행 헌법의 부정, 학생시위, 유언비어 유포, 재산의 해외도피, 위장이민을 엄금하고, 공무원 부조리를 가중처벌토록 하기 위한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를 선포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1시 30분부터 40분 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거쳐 긴급조치 선포를 발표했으며, 이 긴급조치는 이날 오후 3시부터 시행됐다.
긴급조치 9호는 1)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라는 행위 2)집회, 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公衆) 전파수단이나 문서, 도서, 음반 등 표현수단에 의하여 현행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청원, 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3)의례적이고 비정치적인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 시위 또는 정치관여 행위 4)이 조치를 비방하는 행위 5)이상 4개항에 위반한 내용을 방송, 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 배포, 판매, 소지 또는 전시하는 행위 7)관계서류의 허위기재 또는 부정한 방법에 의한 해외이주를 금했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나 그가 속한 단체에 대해 주무장관은 단체의 대표나 장에게 임직원, 학생의 해임이나 제적을 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로 주무장관이 직접 대표자나 장, 임직원, 학생의 제적조치를 취하고, 위반기관에 대해 정간, 폐간, 휴업, 휴교, 해산, 폐쇄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조치를 위반한 자나 주무장관의 조치를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하여 1년 이상의 징역에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하게 했고, 미수나 예비음모도 처벌토록 했다.

 조선일보는 5월 15일자 2면에 올린 「새 질서 확립의 이정(里程) / 긴급조치 선포를 보고」라는 사설을 통해 긴급조치 9호를 적극 지지했다.

(…) 우리에게 가해지고 있는 잠재적 또는 현실적 위협이 용이한 것이 아니라는 현실 인식에 이의를 달 선량한 국민은 한 사람도 없으리라. 그러한 위협이 우리에게 새 질서의 생활을 요구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것이며 또한 현실을 직시하려 한다.
우리 사회에는 각종 이익단체와 기능이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회, 곧 반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사회의 조건이며 특징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포용하고 있는 전체이며 유일한 국가의 존재를 보위하고 유지하는 데 심각한 양상이 제기됐을 때 개개 이익단체는 국가 존립을 위한 이익에 우선적으로 종속돼야 한다는 이치와 현실을 우리는 이미 익혀오기도 했다.
이러한 우리의 입지조건을 지양하는 날을 가져온다는 이념과 결의에서 유신을 지향한 헌법이 마련됐고, 그 헌법이 우리에게 요청한 새로운 생활질서를 외면하고 우리가 달리 갈 길이 없음을 우리는 이 시점에서 거듭 확인하는 것이다. 그 길이 우리가 처한 여건에 의해 이상적이고 최선의 길은 아니라 하더라도 불가피한 길임을 우리는 인식하는 것이다.
문제는 다 함께 새로워져야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지도계층의 생활자세의 더한 변화의 시범에서부터 비롯돼야 할 것이다. 긴급조치의 정신이 지향하고 요구하는 이념적 체득이 얼마만큼 절실하며, 그것이 생활실천을 통해 얼마만큼 참되게 표현되느냐에 오로지 애타게 추구하는 국민총화의 관건은 좌우됨을 우리는 명심코자 하는 것이다.
이정표는 제시됐다. 그곳을 가는 도정에서의 소득이 결코 부(負) 아닌 승(勝)의 결과로 누적돼야 한다는 숙제가 남았을 뿐이며, 우리가 기대하는 모든 생활 변화에 의해 그 숙제가 풀릴 것을 우리는 확신코자 한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한 초헌법적 조치였다. 박정희는 자신의 종신집권을 굳히려고 헌정쿠데타로 만든 유신헌법조차 그 조치로 짓밟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일보의 사설은 “우리의 입지조건을 지양하는 날을 가져온다는 이념과 결의에서 유신을 지향한 헌법이 마련됐고, 그 헌법이 우리에게 요청한 새로운 생활질서를 외면하고 우리가 달리 갈 길이 없음을 이 시점에서 거듭 확인하는 것”이라는 궤변을 통해 박정희의 헌법 유린을 옹호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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