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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의 ‘민심 공작’

- 조선일보 대해부 4권 -7장

기사승인 2019.07.17  16:4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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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TV의 시판과 방영

신군부는 김대중 등 신군부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세력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지만, 민심을 얻는 데도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였다. 정성이 있든 없든, 신군부는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조선일보는 군부의 각종 정책을 홍보하는 나팔수 역할을 충실히 했다. 신군부의 새로운 정책이 나오면 기사와 사설 혹은 특집시리즈 등을 통해 충성스런 지원을 다했던 것이다. 조선일보가 신군부의 컬러TV 방영 계획 정책에 대해 관심을 보인 것도 그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컬러TV 방송은 신문 산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관심사였다. 조선일보는 컬러TV를 시판할 때부터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7월 12일 1면 머리에 「칼러TV 8월부터 시판」이라는 기사를 올리고, 1면 사이드에는 <컬러TV 시대>라는 6회에 걸친 시리즈의 첫 회를 내보냈다. 컬러TV 시험방송 6개월 전이었다.

마침내 컬러TV 시대가 열렸다. 아직 방영이라는 또 하나의 관문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시판이 허용된 이상 시간의 문제였을 것이다. 1954 미국에서 처음으로 방영되어, 인류에게 ‘색채혁명’을 일으켰던 컬러TV. 실로 4반세기를 넘어선 26년 만에 한국사회도 ‘색의 물결’ 속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시리즈 첫 회는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

지난 74년 1월 한일 합작회사인 한국내셔널이 컬러TV를 처음 생산, 수출한지 6년, 가전3사가 본격적으로 생산을 시작한지 만 5년. 컬러TV의 시판과 방영은 실로 끝없는 논란과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한다’ ‘못한다’는 6년간에 걸친 찬반논쟁이 끝장난 것은 그만큼 주변의 여건이 시판과 방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두환 정권에게 컬러TV 방송은 매우 유용한 홍보수단이었다. 시험방송을 거쳐 KBS 1·2TV와 MBC가 모두 컬러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80년 말이었다. 컬러수상기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방송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홍보에 크게 이용했다. 특히 KBS와 MBC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충성 경쟁은 그것을 더욱 부채질했다. 저녁 9시 시보와 함께 시작하는 뉴스 때마다 가장 먼저 전두환을 등장시킴으로써 ‘땡전 뉴스’라는 말이 보편화되기도 했다. 전두환의 복장부터 수많은 광고에 이르기까지 컬러TV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며 소비문화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과외금지 정책

7월 13일자 조선일보는 「과열과외 근절대책 강구 중」이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그날 “문교부가 고질적인 과열과외를 식히는 방법의 하나로 대학의 입학문호를 크게 넓히는 대신, 대학교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책을 강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교육제도의 변화는 물론 교육계 숙정 문제 등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조선일보는 7월 26일자부터 곧바로 <교육…·고칠 건 고치자>라는 4회짜리 시리즈물을 3면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 시리즈는 “갈수록 심각해져가는 과열과외 뿌리를 통째로 뽑을 수는 없는가:라며 구체적 방향을 제시했다. 조선일보는 시리즈 첫 회의 「편집자주」를 통해 국보위가 ‘교육개혁’을 주도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과열과외 해소를 겨냥한 교육정상화 방안이 정부 차원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국가보위대책위 문교·문공분위는 지난 22일 이를 위한 공청회를 가진데 이어 당면 과제별로 과감한 개혁안을 마련 중이라고 한다. 주최 측이 공청회에서 제시한 개선 방향과 토론인사들의 반응을 종합해볼 때 비교적 현실에 접근된 개선이 기대되기도 한다.

조선일보는 다음 날인 7월 27일자에 2면에 올린 사설로 그 정책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 사설은 국보위의 교육개혁 의지를 칭송하고 사회개혁과 안보 차원으로까지 연결하는가 하면 재정적 지원까지 걱정해주고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망국과외’라고까지 일컬어지고 있는 병적인 과열과외 현상을 어떻게 하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결코 새삼스러운 논의가 아니다. 20년래의 숙제인 것이다.
(…) 최근 국보위 주관의 교육정상화를 위한 과외해소 공청회를 계기로 일고 있는 논의에는 그러나 전에 없던 의욕과 기대들이 엿보인다. 그것은 목하 전개되고 있는 전반적인 사회개혁의 성격과 심도에서 교육 불신까지를 불식하고 교육정상화라는 궤도를 까는 위에서 과열과외를 해소한다는 근인적 치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 실로 오늘의 과외병리는 국민 분열의 인자가 되고 있고 그렇게 싹터가고 있다. 그것은 국민적 합일성을 견지해야 할 우리의 안보관을 내부에서 허무는 균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안보적 차원에서도 교육의 신뢰는 회복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외 해소를 비롯한 교육의 병리를 씻는 본 궤도는 교육예산의 독립제에 수반해서 확보돼야 할 재정의 안정바탕 위에서만 깔릴 수 있다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며칠 동안 뜸을 들이던 국보위는 7월 30일 ‘교육개혁’ 대책을 발표했다. 조선일보는 7월 31일자 1면 머리에 그 내용을 통단으로 깔았으며 2,3,7면에 관련기사들을 채웠다. 1면 머리기사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30일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을 확정 발표, 81학년도부터 대입본고사를 폐지하고 출신고교의 내신 성적과 예비고사 성적으로 대체하며, 대학의 졸업정원제를 실시하고, 대학입학 정원을 연차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8월 1일부터 과열과외 추방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전개, 모든 공직자와 사회지도급 인사들이 솔선수범해 공직자가 이를 어길 경우엔 사회정화의 차원에서 공직을 사퇴시키며 사설학원의 중고교 재학생 수강을 금해 이를 위반하는 학원은 인가 취소키로 하는 등의 획기적이고도 강력한 방안을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2면에서 이와 같은 대책을 ‘교육혁명’으로 평하고 「전 국민의 호응을!」이라는 제목의 통단사설까지 내보냈다.

국보위는 30일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를 위한 방안을 밝혔다. 보도된 내용을 보면 그 과단성과 추진 의지에 일종의 혁명적 분위기를 감지하게 된다. 사실에 있어 교육의 울타리를 훨씬 뛰어넘어 가장 넓고도 심각한 사회갈등의 요인으로까지 돼버린 과외병리를 포함해서 그동안 쌓여온 교육의 적폐를 씻어내기 위해서는, 그리고 교육을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에 확고하게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임기응변적인 부분대책이나 수법으로는 문제의 근본을 해결할 단계가 이미 지났음을 잘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동안 어떤 혁명적 과단책을 촉구해오기까지 했다.
(…) 정확한 진단이 있음으로써만 적확한 처방은 내려진다. 국보위가 밝힌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이란 이번 처방은 그동안 우리 교육이 시달려온 병리와 그것이 몰고 온 현주소에 대한 면밀하고도 광범한 진단이란 근본작업의 바탕에서 내려진 것으로 받아들여져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를 크게 환영한다. (…)
이 순간 우리가 소망하고 지향하는 것은 신뢰가 불신을 추방한 도의사회 구현이며, 그것을 자라는 가슴들과 머리들에 씨 뿌리고 뿌리내리도록 해주는 의욕과 생기에 넘치는 우리의 새 교육풍토를 조성하는 일이다. 국보위의 방안이 시행됨에 있어 부분적인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당연히 보완돼야 하나 모처럼의 결의와 자세에는 결코 퇴색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과외부담에 시달리던 서민들은 과외금지에 좋은 반응을 보였다. 불법과외에 대한 처벌은 단호했다. 그러나 강력한 대응도 과외열기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7·30 교육대책 가운데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것은 졸업정원제였다. 대학의 졸업정원제는 고등교육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교육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신군부가 노린 목적은 정작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졸업정원제를 통해 학생들의 정치적 행위를 통제하고 학생시위를 근절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졸업정원제는 애당초 지켜지기 힘든 제도였고 결국 폐지되는 순서를 밟았다. 다만 대학정원 확대로 교육의 질 저하와 공급과잉에 따른 취업난을 유발하는 등 오히려 부정적 효과를 초래했다.


사회악 일소와 삼청 교육대

신군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긴장을 지속시킴으로써 사회 전체를 공포분위기로 몰아넣어 순치시키는 효과를 노렸다. 그 주체도 국보위에서 국보위 상임위로 바꾸었다. 국보위 상임위는 8월 4일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를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조선일보는 8월 5일자 1면 머리에 올린 「전국 불량배 일제 소탕」이라는 기사에서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의 사진과 함께 계엄령 포고 13호를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짜 2면의 「사회악 수술에 대한 기대」라는 사설은 ‘특별조치’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사회면에실린 기사(「<뒷골목이 밝아졌다」)는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사람들에 관한 통계자료를 자세히 소개했다.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인권유린이었다.

국보위 상임위는 4대악으로 통칭되는 권력악, 공직악, 사회악, 경제악 가운데 권력악인 권력형 부조리에 먼저 손을 대고 공직악인 공무원 숙정에 이어, 사회악 일소에 칼을 들이댔다.

(…) 국보위의 이번 조치에 대한 기대는 바로 지속적이고 심층적인 강력한 추진력에 대한 기대이며, 이 만성 고질의 병폐가 뿌리 뽑혀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그 의지에 대한 기대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공갈배는 공갈만 하고 깡패는 폭력만 휘두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악의 조직은 폭력도 부리고 공갈도 하며 사기도 치고 도박도 하고 밀수도 하며 성범죄를 저지르며 마약을 피우는 그런 총합적인 악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 이 조직의 끄나풀만 빠짐없이 잘라버린다면 이 기하급수로 가지를 쳐 나간 사회악이 증발될 것이나 문제는 검거나 강력조처로 그 끄나풀이 잘려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 이 점에 착안한 국보위는 죄질에 따라 군재 회부, 근로봉사, 순화교육을 베풀어 악질범은 강력 처단하고 선질범은 새사람으로 만듦으로써 끄나풀을 녹여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8월 5일자 사설).

군·검과 거의 전 경찰이 동원되어 펼친 ‘사회악 일소’ 작업은 동원된 병력이나 검거된 불량배들의 수 등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사상 최대 규모였다. 단속반은 밤을 새워가며 도심 유흥가와 유원지 주택가 골목, 우범지대 등을 뒤졌고 붙잡힌 폭력·공갈·사기범 등은 서울의 경우 각 경찰서마다 가득 찼다. 검거된 각종 사범들이 각 경찰서에 2개씩 있는 보호실과 형사실을 메우고도 수용할 장소가 모자라자 합동단속반은 회의실과 강당을 임시 보호실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서울시경은 5층 폭력계 사무실 입구에 ‘불량배 소탕·순화지휘본부’를 설치하고 폭력계는 물론, 강력·도범·지능·수사·경제계 등 전 수사경찰관이 철야, 직접 단속에 나서는 한편, 일선서의 작업을 지휘했다.

(…) 합동단속반은 구속자를 제외한 사범들을 각 경찰서별로 여러 대의 버스에 분승시켜 순화교육장소로 수송했으며, 대여한 버스는 번호판과 차체에 쓰인 회사이름을 종이로 가려 뒤에 폭력배들로부터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했다(8월 5일자 7면).

‘삼청교육’은 바로 이 때 발표된 계엄포고 13호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삼청교육이라는 이름은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를 주관했던 국보위 사회정의분과위원회가 삼청동에 위치해 ‘삼청계획 5호’라는 이름을 붙인 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국보위 상임위가 이 특별조치를 발표하기 3일 전부터 합동단속반이 이른바 ‘불량배들’을 소탕했다. 합동단속반은 8월 1일부터 11월 말까지 여러 차례 단속을 벌여 6만여 명을 연행했다. 그 중 삼청교육대로 넘겨진 사람은 3만9천여 명에 이르렀다. 삼청교육은 3사단 등 전후방의 군부대에서 무장군인들이 혹독하게 인간 이하의 대우와 감시를 하는 가운데 1981년 1월까지 계속됐다.

삼청교육은 악랄한 인권유린의 현장이었다. 삼청계획 5호는 삼청교육의 대상자를 모호하게 규정했기 때문에 억울하게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경찰서별로 강제할당을 함으로써 경미한 이유로도 연행되는가 하면 정치적 보복과 노동운동 탄압을 위해 악용되기도 했다. 이런 야만적 인권유린의 공범은 언론이었다. 각 신문·방송사들은 국보위의 의도에 따라 삼청교육을 홍보하는 르포를 게재했다. 조선일보 역시 한 육군부대를 방문, 취재한 기사를 8월 13일자 사회면 머리에 올렸다.  기사의 제목은 「땀을 배우는 인간 교육장」이다. ‘17세의 고교생부터 59세까지’ 이 교육에 참여했는데, 그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산기슭에 자리한 넓은 연병장은 몸에 밴 악의 응어리를 삭여 내뿜는 땀과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시의 뒷골목을 주름잡던 주먹들과 서민을 울리던 공갈배들이 머리를 박박 깎고, 전봇대 크기의 육중한 ‘멸공봉’을 들고 비지땀을 흘리며 훈련을 받는 모습은 기자의 눈에는 차라리 희극적이었을지 몰라도 당사자들은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다.
서울서 동북쪽으로 1시간 20분 거리. 흙먼지를 날리며, 비포장도로를 15분쯤 달려 육군 OO부대 연병장에 들어서자 ‘수련’하고 있는 수련생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 이들의 정식명칭은 ‘삼청교육대의 수련생’들. 장교의 안내를 받아 연병장 한가운데로 나가자 멸공봉을 들고 ‘정신 순화’라는 구호를 외치며 좌우로 들었다 놓았다 하는 수련생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뚜렷이 보였다. 대부분이 20세 전의 앳된 얼굴들. 그 얼굴에서 과거의 악은 어느 틈엔가 찾아볼 수 없었다.
토요일도 없는 이들의 4주간 강행군 교육은 교육기간 중 술과 담배를 하지 못하고 신문과 TV를 보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신병훈련 스케줄과 같다. 삭발을 하고 군복을 입은 후 유격, 각개전투, 제식훈련 등 육체적 훈련에 중점을 둔 교육일정, 현역병과 똑같은 1식3찬의 식사, 매일 저녁의 자기수양, 그리고 오전 6시 기상에서 밤 10시 취침 등의 일과가 신병훈련과 유사하다.

삼청교육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했다. 육체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었고 교육 중 가혹행위 등으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삼청교육 이수자’라는 낙인이 따라다녔다. 2002년 10월 1일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특별조치로 검거된 사람들이 모두 6만7백55명이고, 그 중 4만3백47명이 군사훈련을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삼청교육과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은 3백39명이었고 불구가 된 부상자는 약 2천7백명인 것으로 드러났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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