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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제 논란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조선일보 대해부 4권 - 24장

기사승인 2019.11.13  12: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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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의 대통령 임기 만료일이 다가오자 최대의 관심사는 개헌이었고, 그 핵심 중 하나가 대통령 직선제였다. 신민당은 1천만 개헌서명운동과 개헌현판식을 위해 지방도시들을 순회했고, 그 때마다 총재 이민우는 국민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민우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얼굴 마담’으로 신민당을 이끌었으나 그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졌다. 그런 상황에서 이민우가 실세행세를 하자 양김 측과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1986년 12월 24일 이민우는 송년 기자회견을 갖고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그 구상은 ‘선 민주화 후 내각책임제 협상’을 핵심으로 하는 매우 민감한 내용이었다. 구속자 석방과 사면복권,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 등 민주화 7개항을 전두환 정권이 받아들인다면 내각책임제 개헌 협상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기다렸다는 듯이 12월 25일자 1면에 「이 총재, 내각제 협상 시사」라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그리고 2면에는 「협상의 계기 만들자 / 이민우 총재의 민주화 요구」사설, 3면에는 「개헌정국 ‘숨통’ 트이려나 / ‘합의’ 협상 가능성 첫 신호」등의 제목들을 붙여 이민우와의 총재 일문일답 및 해설을 내보내는 등 ‘내각제 협상’ 분위기를 띄웠다. 조선일보는 12월 26자 3면의 ‘데스크 칼럼(「싸움만 하려면 무인도로 가라」)을 통해 협상에 응하라는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민우 신민당 총재의 개헌 관계 발언은 경색정국의 타개를 위한 고심찬 모색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 개헌의 근본취지 자체는 실은 누가 전권을 쥐느냐 빼앗느냐 하는 것보다도, 사회의 전반적인 민주화를 어떻게 합의적으로 진일보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개헌 논쟁은 시종 정부 형태 문제를 둘러싼 팽팽한 대립으로 한 해를 허송했다.
(…) 이 총재의 발상이 현실적으로 성립되려면 거기엔 두 가지 요건이 충족돼야 할 것이다. 첫째는 집권 측이 진실로 민주화의 기본적인 조치들을 서슴없이 취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야권의 강경파들이 절제할 용의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 요컨대 대다수의 평균적인 국민이 바라는 것은 평화적이고 합의적인 방식에 의한 민주화의 진일보다.
여야가 만약에 소아로부터 대국을 우선시킬 수 있으면, 권력구조 논쟁으로 인한 정국의 경색은 마침내 풀 수 있으리란 것이 우리의 의견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의 이 총재의 발언이 야야 각 진영 내부에 건설적인 반응을 일으켜서, 그것이 여야 접근의 좋은 계기를 마련했으면 한다(12월 25일자 사설).

신민당 이민우 총재가 7개항의 민주화 전제를 붙이긴 했지만 여당이 주장하고 있는 의원내각제를 협상 대상으로 올릴 수 있다는 태도 표명은 개헌 정국에 큰 전환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민정당은 의원내각제를,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한치의 양보 없이 주장해왔지만 권력구조에 치우친 이 같은 개헌 논의는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상 공허하기까지 한 것이다.
(…) 여당에 “대통령 직선제로 계속 집권해 달라”고 한다든지, 야당에 “내각책임제로 정권을 맡아 달라”고 한다면 이들이 과연 “절대 못하겠다”고 하겠는가. (…) 그렇다면 지난 2년간 국민을 불안 속으로 몰아넣고 열풍과 냉풍을 번갈아 불게 했던 여야 간의 개헌싸움은 정치인들 간의 정권싸움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정치인 중에서도 “내가 무엇을 해야 겠다”는 소수가 다수 국민을 명분으로 해서 벌인 집권욕의 표시라 해도 크게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게임이나 정치에서 한쪽의 승리가 기정사실이 될 수 있는 조건만을 고집한다면 협상도 게임도 성립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 2년간 개헌 투쟁에서 모처럼 맞은 이번 기회를 여야 정치인들은 대협상으로 발전시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다시 자신들 위주의 내각책임제냐 직선제냐의 권력투쟁으로 들어간다면, 개헌에 관여하는 정치인들은 더 이상 국민을 인질로 하지 말고 무인도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돈식 정치부장>(12월 26일자 3면).

우여곡절 끝에 ‘이민우 구상’이 직선제 당론 변경을 시사하는 것으로 드러나자 사태는 심각해졌다. ‘이민우 구상’이 김대중과 김영삼에 대한 ‘쿠데타적 성격’을 보이자 양김이 나서 견제하기에 이르렀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1987년 1월 7일 회동을 갖고 “이민우 구상이 내각제 협상 용의를 담고 있는 듯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직선제와 민주화 7개항의 병행투쟁이 마치 직선제와 민주화가 대립적이라는 개념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조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것을 전해들은 이민우는 양김과의 3자회담조차 거부하고 불만을 표출하는 등 갈등을 빚다가 결국 1월 15일 김영삼과 ‘직선제 개헌론’에 합의했다. ‘이민우 구상’은 백지화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민우는 ‘선 민주화론’을 주장하며 갈등을 키워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이철승 등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제기하는 등 신민당 안에서 분란이 계속되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4월 6일 민추협 사무실에서 신민당 탈당과 신당 창당을 결정했다. 이어 4월8일 김영삼이 창당을 공식 선언했고 신민당 의원 90명 중 74명이 탈당, 신당에 참여하자 결국 이민우는 정계를 은퇴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파장

전두환 정권의 마지막 해인 1987년에 학원의 반전두환 투쟁은 걷잡을 수 격화되고 정치권의 개헌 논의는 갈등과 혼란을 거듭했다. 그런 상황에서 1월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이 서울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수사관들은 그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며 물고문을 시작했다.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그들은 결박된 박종철의 다리를 들어 올린 채 물 속에 머리를 밀어 넣었다. 결국 박종철은 욕조의 턱에 목이 눌려 경부 압박으로 사망했다. 그때 물고문에 가담한 수사관들은 조한경, 반금곤, 황정웅, 강진규, 이정호 등 5명이었다.

석간 중앙일보는 1월 15일자 사회면에 「경찰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는 1월 16일자 11면에 그 기사를 4단으로 받았다. 제목은「조사받던 서울대생 사망」이었다. ‘고문’이란 말이 아예 빠진 조선일보 기사는 동아일보가 사회면 주요 기사로 박종철이  고문 받은 정황을 구체적으로 보도한 것과는 크게 달랐다. 조선일보는 1월 17일자 2면 사설(「<명명백백한 진상이…· / 조사받던 한 대학생의 죽음에 대하여」)을 통해 진상 규명을 요구하면서도 경찰의 정상적인 공안사건 수사를 섣불리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보이는가 하면 그 사건을 ‘불상사’ 등으로 표현하는 등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사망은 확실히 상수 아닌 변수였다. 갑작스러운 변수이므로 거기에는 당연히 여러 가닥의 의혹이 따른다. 의혹의 향방은 분명하게 두 가지로 갈라진다. 그런 변수가 상수에서 나왔느냐, 아니면 물리적인 변수로 말미암아 발생했느냐 하는 것이다.
(…) 부정적인 사례에 대한 불쾌한 시민들의 기억은 이번 사건에 대한 의혹의 시각을 변수 쪽으로 부채질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그와 같은 의혹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근거가 박약하더라도 걷잡을 수 없이 한쪽으로 줄달음질 칠 수도 있을 것이다. 있지도 않은, 혹은 박약한 근거로 사건의 귀추를 성급히 변수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냉정한 눈으로 사리의 귀결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한 젊은 대학생이며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가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동안에 생명을 잃었다. 그를 데려간 치안당국의 집안에서 그런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그것이 상수와 같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불상사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박 군이 억하고 죽었다”는 식의 해명성 보도자료를 냈다. 그것이 세상의 비웃음을 사자 치안본부는 사건 발생 5일 만인 1월19일에야 자체조사 결과 박종철이 수사 과정에서 물고문을 당하던 중 질식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담당한 경위 조한경과 경사 강진규를 2명을 구속했다고 덧붙였다.

조선일보는 1월 20일자 1면 머리기사로 그 내용을 보도하고 「고문은 없어져야 한다」사설을 통해 고문행위를 비판하고 일벌백계를 주장했다. 그런데 사설 내용은 박종철 사건이 마치 ‘용공·좌경’ 수사 때문에 벌어진 듯한 논조를 펼치는가 하면 “경찰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다”라는 식으로 고문치사 사건에 물 타기를 시도했다.

(…) 뒤늦게나마 경찰은 고문이 있었던 사실을 자인한 것은 다행한 일이기는 하다. (…) 우리 경찰이나 그밖의 수사기관들이 그동안의 모든 수사나 조사를 고문에 의존해 실시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때로는 우리에게 무력항쟁을 시도하는 용공, 극좌분자들에게까지 지나치게 관대할 수 없다는 그 나름의 고충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 물론 용공·좌경세력의 확산을 방치하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인권과 자유와 민주를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우리의 입장은 자유민주주의를 폭력으로 방해하는 세력을 뿌리 뽑지 못하는 당국에 안타까운 생각을 하고 있는 편이다. 다만 반민주·친공 세력을 가려내기 위해 비인도적 고문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고 우리는 믿는다. (…) 휴전선과 그 이북에 있는 폭력집단 때문에 우리의 자유가 다소 제한되고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법에 의하지 아니한 폭력도 불가피해진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경찰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수감되는 동료들의 얼굴을 가려주기 위해 똑같은 방한복과 방한모를 착용한 경찰관 10여명을 함께 승합차에 태웠다. 그들이 차안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각 신문에 실려 경찰의 제 식구 감싸기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그런 모습을 찍어놓고도 신문에 싣지 않았다. 후일 <조선노보>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밤 이 사진에 대해 ‘당신들은 동료가 구속되면 감싸주는 인정도 이해하지 못하느냐’는 질책이 떨어졌고, 결국 신문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3권, 152쪽). 조선일보가 이 사건에 대해 얼마나 편향적이었는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 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5월 18일 광주 항쟁 7주기 추모미사가 열린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 조작됐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제단의 폭로는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다. 검찰은 직접 고문에 가담한 경위 황정웅과 경장 반금곤·이정호를 구속했다. 또 사건 축소·조작 혐의로 치안감 박처원 등 간부 몇 명이 추가로 구속됐다. 그래도 민심이반이 심각해지자 전두환 정권은 5월 26일 국무총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재무장관, 안기부장, 내무장관, 검찰총장 등에 대한 문책 경질인사를 했다. 그러나 분노한 민심은 6·10 항쟁을 부르고 있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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