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6월 항쟁과 ‘6·29 선언’(1)

기사승인 2019.11.20  13:43:14

공유
default_news_ad2

- 조선일보 대해부 4권 - 25장(1)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격렬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자신의 임기 중 개헌은 불가능하다는 내용의‘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직선제 개헌운동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였다. 내각제 개헌 논의를 주장하던 ‘이민우 구상’이 물거품이 되고 김영삼의 신당 창당 선언 등이 이어지며 자극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조선일보는 4월 14일자 1면 머리에 <현 헌법으로 정부 이양 / 대통령선거 연내 실시/ 개헌문제 올림픽 뒤 생각해야>라는 제목으로 전두환의 ‘4·13 호헌’ 특별담화를 대서특필했다. 2, 3, 4면에는 해설과 사설 및 정치부 좌담, 그리고 담화 요지를 실었다. 조선일보의 한결같은 논지는 전두환 담화를 지지하면서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특히 해설과 정치부 좌담에는 ‘제2의 중대한 결단’ ‘국회 해산과 계엄령 선포’ 등의 협박성 용어들이 등장했다.

(…) 이제부터의 주제는 개헌 논의가 아니라, 현행 헌법에 의거한 정부 이양의 일정 전개라 할 수 있다. 현행 헌법에 따라 금년 내로 대통령선거를 실시하며, 전두환 대통령이 내년 2월에 새 대통령 피선자에게 정부를 이양한다는 시간표였다.
(…) 전 대통령의 이와 같은 결단의 배경에는,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 시국이 이대로 표류하다가는 개헌은 물론이요, 현행 헌법에 따른 당초의 단임 공약조차 제대로 이행할 수 없는 시간적·상황적 위기에 봉착할 것이란 우려가 짙게 깔려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전 대통령의 이와 같은 결단에 접하면서 우선 첫째로, 그간의 경위와 개헌 논쟁은 어찌되었건, 좌우간 내년 2월에는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가 분명히 바뀌도록 확정되었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다시금 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은 개헌을 통한 것이 아닌 현행 헌법에 따른 변화라 할지라도, 그 의미와 함축성이 대단히 크다고 우리는 생각한다(4월 14일자 2면 사설).

개헌정국의 일단 종식을 선언한 13일의 전두환 대통령의 담화는 정국 혼미가 몰고 올 파국은 우선 막아야겠다는 ‘정치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개헌문제로 여야가 정쟁을 계속하고, 이로 인해 시국 불안이 가중된다면 대사인 평화적 정부 이양마저 위험할 수 있다는 ‘파국’을 피하기 위한 통치권자로서의 결단 성격이 짙은 것이다.
(…) 한편 특별담화 이후에 전개될 정국 양상이 아직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대통령이 천명한 ‘단호한 대처’구절은 의미 있다 하겠다. “앞으로 부질없는 개헌 파쟁에만 골몰하여 사회 혼란을 조성하는 일이 있다면 대통령으로서의 모든 권한 행사를 하겠다’는 이 말은 현행 헌법 고수로 잔여임기를 마치면서 정부 이양을 하기 위한 통치권자의 결연한 방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3일의 중대한 결단과는 성격이 다른 제2의 ‘중대한 결단’이 앞으로의 상황 변화에 따라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역으로 이번의 결단을 추진하는 여권의 자세를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4월 14일 2면 해설기사).

-4·13 대통령 특별담화는 여러 측면에서 여권의 단호한 의지가 배어 있는 배수진의 성격이 강합니다. (…) 특별담화는 여권이 개헌에서 호헌으로 방침을 선회한 기본구도와 관련한 결단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제2, 제3의 결단이 잇따를 수도 있을 것이란 예측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 이날의 담화는 큰 의미로 보아 이른바 ‘판쓸이’ 등 국정 운영의 파국을 막기 위한 개헌정국의 동결이지만 앞으로 야권의 움직임 등 상황 전개에 따라서는 국회 해산, 계엄령 선포 등 헌법상 대통령의 권한에 속하는 조치들이 동원될 수도 있을 것이란 지적인 것입니다. (…)
-제2, 제3의 결단은 야권 동향과 함수관계에 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최근 민정당 측의 일련의 대야 비난 조치와 이날의 특별담화가 합의개헌의 무산을 야당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앞으로의 후속 결단이 야당 측을 겨냥할 것임을 예시하는 의미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가까운 장래에 드러나게 될 ‘통일민주당’의 노선 성격 등에 따라서는 정당 해산이 검토될 수 있으며, 김대중 씨의 재수감 등 양 김 씨에 대한 제재조치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란 추측들입니다만, 현재로서는 이 부분에 대해 확인되는 바는 없습니다(4월 14일자 3면 정치부 좌담「4·13 중대 결단 이후」).

조선일보는 정치부 좌담에서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를 위한 제2, 제3의 조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조치들이 헌정을 중단하는 비상한 수단임을 적시한다. ‘국회 해산’ ‘계엄령 선포’ ‘김대중 씨 재수감’ 등 전두환 정권의 ‘비상계엄 상태’를 상정하는 조치들이 예시돼 있다. 조선일보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그의 충실한 찬양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수행해왔다. 조선일보는 전두환의 육군대장 전역식 날, 「인간 전두환」이란 장문의 헌사를 내보내는 등 언론으로서는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조차 서슴없이 행했다.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1주년 때는 물론 5주년 때까지 매년 3월 초면 잊지 않고 5공화국과 전두환의 치적에 찬사를 보내는 기획과 사설을 실었다. 전두환의 4·13 호헌 담화 등 강경책 역시 조선일보의 영향과 지지 속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는 개헌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호헌 담화가 나온 다음 날인 4월 14일 추기경 김수환은 부활절 메시지를 통해 “국민은 있어도 주권은 없고, 신문 방송은 있어도 언론은 없으며, 국회나 정당은 이름뿐이요, 힘만이 있고 정치는 없는 공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고 개탄하고 “정치의 새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했던 헌법 개정의 꿈은 기만과 당리의 술수 아래 무참히 깨졌다”고 비판했다. 5월에 들어서면서 통일민주당(민주당)이 창당대회를 열고 본격적인 개헌투쟁에 나서는가 하면 대학가에서는 호헌 철폐를 위한 연합회를 결성하고 시위를 계속했다.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이름으로 발표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조작’에 관한 성명은 대대적인 반정부 투쟁을 일으키면서 4·13 호헌조치를 무력화하는 기폭제가 되는 동시에 6월 항쟁을 부르는 결정적 동인으로 작용했다.

1987년 5월 27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과 종교계 등 재야단체들과 민주당, 민추협을 망라한 발기인 2천1백91명 중 1백50명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했다. 그들은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무효화와 직선제 개헌 등을 관철하기 위한 범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들은 민정당의 전두환 후계자 지명일인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살인 조작 범국민규탄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6월 항쟁은 그렇게 해서 시작됐다. 조선일보는 6월 10일자 1면 머리기사(「정국 중대 갈림길-6.10 아침 여야권 팽팽한 대치」)에서, 민주당과 재야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에 정국의 향방이 달려 있다고 보도했다. 또 그날은 민정당의 전당대회가 열리는 날로, 대표 노태우 대통령후보로 선출될 예정이어서 그 후 여야 움직임이 주목된다고 전망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사설(「불상사만은 없기를」)에서 여야의 타협을 강조했다. ‘4·13 호헌조치’를 지지했던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논조였다. 조선일보의 ‘변신’ 조짐이라고나 할까?

오늘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며, 그 파장은 어떠할 것인가. ‘4·13’을  정점으로 해서 완전히 양극화된 집권세력과 반대세력은 드디어 ‘6·10’의 가두에서 정면 충돌을 하려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방식의 사태 전개를 피해보려고 양측에 대해 온갖 호소와 설득을 다해왔다. 집권 측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개헌작업을 통한 민주화와 정당성 확보를 요구했고, 야권에 대해서는 점진적인 집권 전략을 고려해볼 것을 권유했던 것이다.
(…) 공권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당장의 ‘득’은 있을지 몰라도 민심을 사지는 못할 것이다. 민심을 사지 못할 때, 그 ‘득’은 국민의 마음으로부터의 수긍을 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반면에 ‘민중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오히려 더 큰 반작용과 역행의 역효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한국에서는 굉장히 크다. (…) 그러나 적어도 오늘의 시점에서는 이러한 이성의 논리보다는 피차간의 원한의 감정과 적의와 사생결단의 논리가 더 압도적이 되고 말았다.
(…) 이왕에 붙어버린 일이니 지금 우리가 무어라 말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어쨌든 하는 쪽이나 막는 쪽은 다 같이 ‘불상사 없기’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주어야 하겠다. 아울러 우리는 이것이 밀어붙이기식 정면충돌 ‘테스트’의 마지막이 되기를 희구한다(6월 10일자 사설).


역사적인 6월 10일의 항쟁

조선일보는 이후 6·29 민주화 선언이 나올 때까지 국민의 여망이 무엇인지보다는 여야의 타협만을 강조하는 데 열중했다.

6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전당대회는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선출했다. 같은 날 열릴 예정이던 국민대회는 5만여 경찰의 봉쇄와 진압작전으로 무산됐으나 전국 24개 지역 50만여 명이 참가한 가두 규탄대회로 변했다.

그날 시위는 하루 전인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하던 학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이 됐다는 소식으로 더욱 격렬해졌다. 경찰에 따르면 그날 전국적으로 4천1백명이 연행됐고, 그중 3천2백여명이 훈방됐다. 또 수백명의 경찰과 시민이 부상했으며 시청 1곳, 파출소 15곳소, 민정당 지구당사 2곳 등이 화염병과 투석 등으로 파손됐다.

특히 그날 이후 명동성당은 6월 항쟁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게 됐다. 조선일보는 6월 10일의 항쟁을 많은 지면에 걸쳐 보도했다. 그러나 6월 12일자 사설(「자 이제는… ·/ 6·10 다음에 기대한다」)은  ‘6·10 항쟁’을 다루되 시위 현장의 민심을 보수세력에 유리한 방향으로 교묘하게 이끌어가는 논조를 보였다.

1987년 6월 10일에서 시간이 멈추지 않고 새 날이 밝았다는 자연의 섭리에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그날은 긴장과 불안 속에 애태운 지루한 하루였다. 다시는 그런 날이 되풀이되지 않길 빌어마지 않는 하루로 기억될 것이다.
(…) 그런 민심은 서울뿐 아니라 전국의 ‘현장’에서 불을 보듯 훤하게 볼  수 있었다. 절대다수인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있음인지도 쉽게 읽을 수가 있었다. 그런 현장의 보이지 않는 소망이 이심전심으로 널리 퍼져갔을 것이다. 그러하여 과격한 폭력행위로 말미암아 난장판이 벌어지고 희생이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간절한 마음들이 절실히 자리하고 있었다.
(…) 그러므로 솔직히 말해서 정권을 경찰봉과 최루탄으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구시대적 착각이다. 또한 정권을 거리의 데모로 탈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더욱 더한 망상이 될 것이다. 여와 야는 자기편 아닌 국민 대다수의 바람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파악하여야만 했고 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 그 파악한 내용을 정치의 정궤에서 실천해야 한다. 6월 10일은 그런 뼈저리고 소중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었다.
(…) 이제야말로 여야 정치인들이 발 벗고 나서서 절대다수인 ‘우리’의 뜻을 받들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때다. (…) 제3세력으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해가고 있는 절대다수 국민들은 삶의 일부인 오늘의 정치에 시달리고, 그래서 정치를 불신하면서도 대의의 길을 가는 정치밖에는 이 정치적 난국을 풀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정치인들이 손해를 보게 되는 이른바 ‘일보 후퇴’가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이보 전진’이 된다면, 기꺼이 자기희생에 나서라고 통절하게 권유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의 도시와 거리에서 시위의 물결은 계속됐다. 서울지검은 6월 13일 ‘6·10 대회’와 관련해 국민운동본부 간부인 민주당 부총재 양순직 등 12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했다. 강경책의 일환이었다. 정부는 “이번 6·10 불법집회 및 폭력시위는 국법질서를 파괴하고 사회 혼란을 조성함으로써 폭력혁명을 유도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정부 대변인의 발표를 6월 13일자 1면 주요 기사로 보도하고 6월 14일자 사설(「랑에 섰다 / 다음에 올 것을 오지 않게 하려면」)에서는 ‘헌정 중단’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며 시위 자제를 촉구했다. 계엄 선포 등 ‘일종의 협박’으로 읽히는 내용이었다.

여야의 모든 정치인들과 재야와 학생, 종교인 및 공권력과 시민 제위에 깊은 시름을 안고서 마지막 절실한 호소를 하고자 한다. 이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천 길 낭떠러지 끝에 와 서 있다. 한 치만 더 나아가도 우리는 또 다시 저 무서운 추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시위대가 곳곳에 출몰하여 이를 경찰력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될 때, 그 다음 올 것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다. 공격을 할 때는 항상 상대방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것인가의 그 정도를 정확하게 재야 한다. 그러지 않고 무턱대고 계속 밀어붙여서 깜박할 사이에 적정선을 넘으면,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상대방의 역공으로 사태가 순식간에 악화된다. 야권과 학생들은 이 절묘한 ‘정세의 동학’을 무시하지 말기 바란다.
그리하여 지금이야말로 벼랑의 끝에 섰음을 감지하고서, 다음에 ‘올 것’을 어떻게 해서든 오지 않게 하도록, 야권과 학생들은 최대의 슬기와 절제 그리고 온유함의 자세로 되돌아갈 것을 당부한다. (…) 어쨌든 우리는 올림픽도 해야 하고 민주화도 해야 하고 개헌도 해야 한다. 이러자면 지금 필요한 것은 여야의 동시적인 대안 제시에 의한 국면 전화-즉 ‘큰 정치’가 절실한 것이지, “올 것이 왔다”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다.

시위가 더욱 격렬해지자 민주당 총재 김영삼은 6월 19일 난국 타개를 위한 전두환과의 회담을 공식 제의했고 6월 24일 두 사람이 만났다.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3시간 동안 김영삼과 회담을 갖고 개헌 논의 재개를 다짐하는 한편 김대중 등의 연금 해제에 관해서도 긍정적 자세를 보였다.

조선일보는 6월 25일자 1면 머리기사(「4·13 사실상 철회 / 김대중 씨 어젯밤 연금 해제」)에서 회담 결과를 전하고 2면 사설에서 “민의를 대폭 수용하라”고 촉구했으나 직선제 개헌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4·13 조치의 즉각 철회, 직선제 및 선택 국민투표 실시, 시국사범의 전면 석방과 사면 복권 등의 요구가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며 6월 26일로 예정된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전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의 청와대 회담 결과는, 어떻게 보면 막혔던 협상의 물꼬를 튼 것도 같고, 또 어떻게 보면 무엇을 속 시원하게 확 풀은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최고위 수준에서 이런 만남과 대화를 허심탄회하게 성사시켰다는 사실 자체다.
(…) 그러나 적어도 ‘4·13’의 철회라는 언질 자체가 있었든 없었든, 이제 개헌 논의의 사실상의 재개만은 정상 수준에서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권력구조 문제와 정치일정의 문제들, 개헌작업의 본질사항에 관해서는 이번의 회동은 분명한 합의를 결실맺지 못했다. 다만 이 문제는 노(태우)·김 회담으로 이관되었으나, 김 총재는 노 대표와의 회담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이번의 회동은 개헌 논의를 재개한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 헌법 논쟁 자체는 오히려 이제부터 다시 시작됨을 시사한 셈이다.
(…) 이러한 상황을 맞아 우리는, 정부 여당이 노·김 회담의 성사 여부와 상관 없이라도, 하루빨리 우선 그 자체의 안을 내놓을 것을 촉구한다. 예컨대 권력구조 논쟁의 결판 방식, 개헌일정과 정치일정, 차기 정권의 성격과 시한, 이런 사항들의 확정을 위한 국민적 동의의 획득방식 등에 관해 여측은 우선 그 자체의 안을 최대한으로 민의와 민심에 순응하는 형태로 일단 제시해봐야 하는 것이다(6월 25일자 2면 사설).

이 사설을 보면 정부와 여당을 끈질기게 지지해온 조선일보가 얼마나 긴급하고 답답했으면 여당의 개헌안을 촉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태는 다시 ‘4·13 호헌조치’ 이전으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조선일보는 다음 날인 6월 26일자 2면에 그날 저녁으로 예정된 민주당과 재야세력의 ‘6·26 국민평화대행진’을 겨냥해 ‘비극적 유혈 사태’의 가능성을 경고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평화대행진은 6월 항쟁의 절정을 이루었다. 전국의 37개 도시 2백69곳에서 1백80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보도됐다. 특히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중산층과 사무직 시민들의 참여는 전두환 정권은 물론 해외언론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래서 국민평화대행진이 벌어진지 3일 만에 이른바 ‘6·29 민주화 선언’이 나온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