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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문익환, 임수경… 방북 러시

- 조선일보 대해부 4권 - 33장

기사승인 2020.01.22  18: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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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은 북한 방문 러시 현상이 일어난 해였다. 노태우는 신년사에서 “새해는 우리 민족사의 소망인 민주번영과 통일을 이루느냐의 여부를 결정할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밝혔고 김일성은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안했다. 북한 노동당 서기 허담이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을 초청하자 그는 1월 23일 방북했다. 조선일보는 “이 작은 변화에 대해 너무 큰 기대나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라면서도 민족경제공동체의 첫 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환영의 뜻을 표했다. 정주영의 방북은 정부 당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조선일보의 그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북’도 그랬을까. 김일성은 1월 30일 초청편지를 남측 4당 총재 및 추기경 김수환, 목사 문익환, 재야운동가 백기완 등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들이 아닌 소설가 황석영이 먼저 3월 18일 일본에서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 조선일보는 그 사실을 전혀 보도하지 않다가 3월 25일에 방북한 문익환에 관한 소식을 28일자에 전하면서 비로소 주요 기사로「황석영 씨도 평양 간 듯 / 문 목사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과 대화” / 전 조총련 간부 정경모 씨 문 목사 동행」이라고 전했다. 1면 머리기사는 「“문익환 목사 귀국 즉시 사법 조치” / 정부 “명백한 실정법 위반” / 입북 경위·접촉 인사 내사 / 사전 파악 못한 관계기관 문책키로」였다.

그 날짜 조선일보는 문익환 방북 관련 기사들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1면: 「국회 문 목사 방북 추궁, 이 내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군 수뇌 “의법 처벌해야”, 어제 국방부 회의」「〈문 목사 구속 방침 보안법 위반 혐의, 검찰 황석영 씨도」 「적극 지지 큰 성과 기대, 이부영 전민련 의장」
 2면: 「“김구·정주영 씨 북행과는 다르다” 이홍구 통일원장관 일문일답」「문익환 목사 평양 도착 성명(전문)」「민주인사 정체 노출 ‘월북’, 민정 /정부와 협의 없어 아쉬움, 평민 / 민족통일 혼선 빚는 행위, 민주 / 통일정책 창구 일원화를, 공화」
 3면: 「문 목사 독단 입북 정치권 큰 파문 / 북의 ‘정부 제외’ 책략에 이용돼」「유신 이후 반체제활동 4번 투옥, 문익환 목사 그는 누구인가」 「북한 왕래한 반한 평론가 / 문 목사 북행 길잡이역 정경모 씨」
 4면: 「문 목사 법적 처리 어떻게 하나」「“처벌 두둔 유보” 정국 냉각 우려/ 문 목사 방북 정부·정가 움직임」
 5면: 「“문 목사 서울당국의 금기 위반” 소련 / 문 목사 방북 해외의 반응」
 18면: 「놀라움과 걱정이 / 어떻게 된 일이냐/ 문익환 목사 방북 시민 반응」「연초부터 “평양 갈 거야” 자작시 낭송」「문 목사의 통일관」
 19면: 「“북한 특별기로 평양 도착” / 문 목사 동행 정경모 씨 일에 전문 보내와」

 
 조선일보 같은 날짜 사설(「그는 대한민국을 무시했다」) 제목은 문익환의 방북을 바라보는 조선일보의 심경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한 마디로 대한민국과 그 통치권 같은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투의 태도 (…) 일종의 도취요, 편집적인 사고의 소치였다고 밖엔 말할 수 없다. (…) 우리를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통일의 장애 요인이 북에는 없고 남에만 있다는 듯이 풍긴 문 씨의 전반적인 논조 (…) 우리는 편집적이고 독선적인 한 개인의 행동에 의해 돌연히 우롱당하고 뒤흔들린 느낌을 가지며, 심한 불쾌감을 금할 수 없다. (…) 도대체 국민과 국가를 어떻게 봤길래 그랬는가 말이다. 대한민국의 통치주권은 정말 있는가 없는가.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제2사설(「주목할 ‘여·야의 반응’」)을 통해서는 야당이 이 사건을 미온적으로 보고 있다고 질타했다. 정부와 여당도 조선일보의 ‘분노’를 피해갈 수 없었다.

우선 평민당은 ‘그 충정은 이해하고 절차 미비는 아쉬워하는’ 입장을 밝히고 정부는 “문 목사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면서 정부의 반응을 ‘이상 반응’이라고 오히려 정부를 공격하고 나섰다. 민주당의 논평은 문 목사 집적, 정부 집적의 두루뭉수리였다. 공화당의 논평 역시 문 목사에 대한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극히 상식적인 한 줄 뿐이고 나머지 3분의 2 이상을 대정부비난에 할애했다.(…) 평민당도 문 목사처럼 대한민국의 존재를 무시하고 우리나라의 헌법과 법률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천명할 수 있어야 앞뒤가 맞는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각 정당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노선과 입장을 대내외에 밝힐 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정부의 권위를 그렇게 떨어뜨렸는데도 문 목사 사건에 신이 난 듯이 떠들며 희색을 보인다면 정부·여당은 어떤 ‘음모설’에도 맞설 자격이 없다.

대서특필은 계속됐다. 3월 29일자에만 해도 1면에 「문 목사 김일성 면담 / 일행 모두 4명 황석영 씨도 함께 점심」「김대중 총재와 ‘북행’ 사전 논의/ 민정 대변인 “문 씨 두 번 만나 정부와 협의 종용”」「황 씨 방북 의사 피력, 민정 이 총장에」「판문점 통해 귀국, 문 목사 밝혀」, 2면에 「문 목사 파란의 정치 역정」「문익환 목사 동행 유원호 씨」, 3면에 「문 목사 파장 미묘한 여야」「북한 ‘문 목사 카드’로 대화 공세 펼 듯」, 15면에 「“황 씨 등 방북 지지” 자실·민예총 성명」「문 목사 입북 협조자 처벌: 공안합동회의 / 동행 유원호 씨 국내 행적도 수사」「대학가 “방북 지지” 대자보」 같은 기사들이 나왔다.

30일자 1면에는 「문 씨 김일성 생가 참관 / 허담과도 만나」「문 목사 판문점 귀환 불허 즉각 구속 확정, 금강산 개발 보류, 당정회의」「“북한 국론 분열 획책 말라 개별적 접근은 체제전복 책략” 이 통일원 성명」「문익환 씨 입북 모른 관계기관 곧 문책인사」, 2면에는 「문 목사 체포 방침 비난, 중국주재 북한대사」「“문 목사 돌연 북한행 한국 상황 악화될 것” 불 르몽드지 논평」「문 목사 김일성 포옹」, 3면에는 「“문 씨 육로 귀국 땐 악선례” 강경 / ‘문 목사 입북’ 당정협의회 안팎」「국가정보망 구멍 이대로 좋은가, 당국 문제점 의문점」「김대중 총재 문 목사 밀담 미스터리 / 김대중 총재 시각」이라는 기사들이 실렸다.

31일자 조선일보는 도 현대중공업에 경찰이 들어가 파업하던 노동자들을 강제로 해산시킨 중대한 뉴스를 밀어내고  민주당 총재 김영삼이 문익환의 방북에 관해 기자회견을 한 내용을 1면 머리에 올렸다. 제목은 「“문 목사는 국민 앞에 책임져야” / 김영삼 총재 회견, 밀실 북방외교 지양을 / 통일문제 국민적 합의 필요 / “이런 상황선 북한 방문 않겠다”〉이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사설(「김영삼 총재의 선택」)을 통해 그를 극구 칭찬했다. 2면 사설 옆의 머리기사 제목은 「순항 평민호에 ‘문 목사 암초’ / 중평 보류로 강화된 정국 주도력 훼손 / 김 총재와 방북 밀담 싸고 당내 이견도」이다.

문익환은는 4월 2일 허담을 만나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에 대한 9개 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반도 통일은 남북의 주도로 ‘자주· 평화·민족대단결 원칙에 기초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과 점진적 연방제 통일 등 주목할 만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 조선일보는 4일자 2면에 「‘김일성전략 지지’ 또 한 번 충격」이란 제목의 해설기사를 싣고 교차 승인 거부 등 정부정책에 정반대 주장을 펼쳐 남북관계와 통일 접근에 악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자수첩’을 쓴 이혁주는 “북한에서의 문익환 목사의 행적과 그에 대한 북한 측의 ‘접대’ 등은 (…) 그야 말로 민족통일에의 큰 진전이 아니라 북한이 노리는 바 ‘남쪽의 혼란’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며 문익환에 대한 김일성의 극진한 환대를 비난했다.

문악환은 4월 13일 일본을 거쳐 귀국한 뒤 바로 구속됐다. 그 다음 날 안기부는 한겨레신문사의 북한 취재 계획과 관련해 그 회사 논설위원 리영희 수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4월 15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 제목은 「“김일성 면담 추진” 혐의 / 리영희 교수 구속 / 비밀 입북계획 철야 조사/ 한겨레신문 부사장 연행 / 리 교수와 방북취재단 구성 혐의/ 편집국장 가택 수색」이었다. 또 다른 1면 기사는 「‘방북’ 수사 언론 비화 파문 / 여 “실정법 위반” 야 “언론탄압이다”〉였다. 리영희는 그해 9월 25일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6월 27일 평민당 소속 의원 서경원의 방북 사실이 밝혀져 구속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는 전 해인 1988년 8월 2박3일 동안 평양을 방문해 주석 김일성을 만나 통일문제를 협의했다. 현역 의원의 밀입북 사건인 만큼 사회적 파장과 논란이 적지 않았다. 당국은 그를 간첩으로 지목했으나 서경원은  부정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상고이유서에서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 진솔한 대화를 하고 싶다는 소망”에 따라 방북했다고 진술했다.

조선일보는 6월 30일자 2면에 「평민 ‘서경원 파동’ 오래갈 듯 / 총력 진화 불구 ‘이미지 실추’ 심각 / 평민연 입지 잃어 보수 강화 예상」이라는 제목의 해설기사를 싣고 사설(「평민당은 좌정하라」)을 통해 평민당 전체에 대한 ‘색깔론’을 제기했다. 오락가락하지 말고 당의 색깔과 자리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임수경 평양행으로 최고조에 이른 방북 열풍

1989년의 방북 열풍은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축전(평양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에 의해 최고조에 이르렀다. 1988년 12월 26일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는 평양축전에 전대협 대표를 공식 초청하면서 남북학생회담을 1989년 3월 초순 판문점에서 열자고 제안했다. 정부는 전대협 앞으로 온 서한을 접수했으나 ‘창구 단일화의 원칙’ 아래 그것을 전달하지 않았으며, 6월 6일 최종적으로 ‘참가 불허’를 공식 발표했다. 야당들의 수용 촉구와 각종 단체들의 참가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평양축전의 정치적인 성격에 비추어 어떠한 형태든 참가한다는 것은 우리 체제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허용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6월 29일 전대협은 임수경의 평양 파견 사실을 공개했다. 7월 1일부터 8일까지 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은 7월 7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관한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남북의 청년학생들이 “1995년까지 조국통일 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공동투쟁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조선일보는 6월 300일자 1면 머리기사(「“전대협 대표 1명 오늘 평양에” 전대협 발표 / 외대 여학생 일 거쳐 동베를린 대기」)로 그 소식을 전했다. 3면 해설기사 제목은 「‘평양커넥션’의 가능성」으로, 입북 러시와 주사파 준동은 같은 맥락이며 당국은 “북에 끈 닿은 인물이 국내에 암약하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7월 1일자에서도 ‘평양의 임수경’을 중계방송했다. 「임(수경)양 평양 도착, 전대협 평축 대표」「“전대협에선 나만 오게 됐다”, 1백여 외신기자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10일간의 여행 감격스럽다” 울기까지」「임 양 2차 회견 통일 언급, “북노선 지지” 주장」〈남북학생 공동선언문, 임 양 전대협 대표 서명」「임 양 김일성대학 방문」「임 양 ‘명예학생’ 등록, 김형직사범대서」「정부 임수경 양 판문점 통과 불허」….

남쪽에서의 사태 진전도 빠짐없이 전했다. 「가족들 “남해 여행이 평양행일 줄이야” / 전대협 대표 임수경 양 집 2~3차례 전화 30일 귀가 / 외국여행 한 적 없어 여권 만든 사실 몰라」「서 의원·외대 여학생 밀입북 서독 내 북 조직 소행, 로테여행사 대표 ‘이영준’ 두 사건 모두 관련」「임 양 집 수색 부모 조사」「12일 관광여권 받아」「‘북경 경유’ 예정 바꿔 베를린 행, ‘평양밀사’ 임수경 양 행로 추적」….

1989년 7월 초는 임수경과 서경원의 방북에 대한 수사가 맞물려 정국이 온통 그 문제를 두고 소용돌이 치던 시기였다. 조선일보는 7월 1일자 사설( 「나라를 누가 움직이나 / 여대생 입북으로 또 벌컥」)을 통해, 문익환 방북 때 “그는 대한민국을 무시했다”며 드러냈던 분노와 불안을 그대로 반복했다. 다음 날인 2일자 사설 (「남한 내의 북한 징후군 / 입북 시리즈와 전대협과 ‘평축’」)에서는 문익환·황석영·서경원·임수경의 입북 러시는 “북한 당국의 치밀한 대남공작의 연속적인 수확이었음을 이제는 부정할 길이 없게 되었다”고 분석하면서 “전대협의 객관적 기능은 남한 내에서 공공연히 작동하고 있는 북한 대남 공작의 접합점이라는 논리적 귀결이 가능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임수경의 평양행은 문익환 방북에 이어 정부의 ‘창구 단일화 논리’를 둘러 싼 논쟁으로 비화되었으며, 학생들의 적극적 통일운동에 대해서도 격렬한 사회적 논란이 야기되었다. 천주교 신자인 임수경의 귀환을 돕기 위해, 6월에 방북했던 신부 문규현이 재방북하여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함께 귀국함으로써 세계 언론에 한국의 분단 현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8월 17일자 2면에서 임수경·문규현 두 사람의 판문점 귀환이 “임수경을 장기 억류하는 것이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북한 측이 남한 내 친북세력의 유지를 겨냥해 ‘협정 위반’의 부담을 끌어안고 북한이 강행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설(「주사파의 ‘8월 공세’」를 통해 “주사파의 ‘8월 공세’를 분쇄하자고 외쳤다.

임수경· 문규현 양인이 ‘법을 고의적으로 어김으로써 그 법의 권위를 허물어 뜨리려고’ 휴전협정을 위배하여 남쪽으로 내려 왔다. 이 배후에는 대한민국의 존립 기반을 뒤흔들려는 북쪽 김일성 집단과 남쪽 주사파의 집요한 혁명전략이 작동하고 있다.
(…) 북한 주사파와 남한 주사파의 가시적 제휴를 공연화한 것이 우선 그 첫 번째 목표 (…) 둘째로 대한민국 현 체재의 파괴를 의미 (…) 셋째로 대한민국 자체를 우습게 만들려는 것 (…) 두 사람을 ‘통일 열망’의 순교자나 되는 것처럼 미화시켜 그 어떤 지지운동이라도 일으켜 보려고 백방으로 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 도대체 이 세상의 어떤 나라가 확신에 찬 실천적 혁명가를 입건하지 않는 사례가 있단 말인가. 남한을 향해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라고 매도하고서도 이 땅에서 소추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리한 과욕이다.
(…) 임수경· 문규현 현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북의 주사파가 주도권을 잡는 통일전선의 형성과, 그것에 의한 남한의 ‘민족해방 민중(인민) 민주주의 혁명’의 추구인 것이다. (…) 남북 볼세비키 파의 총력 공세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판이다. 자유시민들의 투철한 자위력 앞에 주사파의 이 ‘8월 공세’는 분쇄되고야 말 것이다. 한국은 결코 베트남이 아니기에.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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