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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대선-‘김영삼 대통령 만들기’(2)

- 조선일보 대해부 4권 - 40장(2)

기사승인 2020.03.18  11: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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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대선에 불어닥친 ‘북풍’

노태우 정권의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는 공안몰이와 관권 개입 두 방향으로 나타났다. 먼저 공안몰이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안기부는 8월 말, 북한의 남파간첩으로부터 거액의 공작금을 받아 반체제활동을 한 혐의로 전 민중당 대표 김낙중 등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고 31일 밝혔다. 안기부는 또 북한의 공작금이 재야단체와 전 민중당의 활동비로 쓰였는지 여부를 수사하기 위해 김낙중이 고문으로 있는 민주개혁과 사회진보를 위한 협의회(약칭 민사협) 회장 장기표, 고문 이우재, 총무 이재오 등 재야인사들을 잇달아 연행했으며, 민사협과 전국연합, 반핵평화운동연합 등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관련 단체들은 “정부가 재야인사들을 연행한 것은 대선을 앞두고 운동권을 탄압하 위한 정치적 음모”라고 비판했다.

9월 30일에는 북한의 지령에 따라 남한에 노동당 강령을 추종하는 지하당인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결성한 혐의(간첩죄 등)로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인욱 형제 등 6명을 검찰에 구속 송치했다. 10월 6일 안기부는 ‘적발된 조직은 남로당 이후 최대 간첩조직’으로 중부·경인·영남·호남 등 4개 지역당 가운데 충청남북도와 강원도를 관할하는 중부지역당이 이번에 적발된 것이라고 발표했. 조선일보는 10월 7일자 1, 2, 3, 4, 5, 22면에 기사, 해설, 칼럼, 사설 들을 총동원해 그 사건을 부풀려 나갔다.

조선일보는 10월 7일에 그 사건에 관한 사설을 두 편(「기부는 무얼 했나」「적화는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이나 내보냈다. 특히 제1사설은 “이번 간첩단은 단순히 기밀을 탐지하는 간첩망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정치활동 집단이었다. 그들의 활동은 음지에 숨어서 수군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공공연히 우리의 정계 일각과 공개적인 운동권 일각에 섞여서 주사파 혁명을 고창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 우리 모두가 민주화 과도기에 정신을 못 차리며 갈등과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사이에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남한의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은 이미 그들의 남조선혁명을 정식으로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번 사건으로 입증된 셈이다.…
주사파는 항상 학문적으로 모호한 민족자주니, 통일된 조국이니, 민중주체니 하는 말들을 내세우면서 우리 쪽의 반주사 논리를 냉전적 사고니, 반통일적이니, 반민중적이니 또는 동족에 대한 적대행위니 하는 식으로 헐뜯는다. 실제로 숱한 젊은 학생들과 일부 운동권 활동가들은 물론,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까지가 이런 유의 모호한 자주논리·민족논리·통일논리에 의해 현혹 당하는 사례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어쨌든 북은 이런 식으로 해서 남한 변혁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했 고, 각계각층에 외곽그룹과 통일전선을 심으려 했고, 나아가 우리의 대선 때에는 민주연합 정부라는 것을 세우려 했으며, 그 후에는 95년 통일을 위해 점차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와 비합법·반합법·합법의 다양한 투쟁 시간표를 짜놓고 있었던 것이다.

10월 8일자 ‘기자수첩’(「이선실 충격」)은 “(간첩 3개파 95명 검거, 62명 구속. 3백여 명은 계속 추적 중)이라는 남한 조선노동당 간첩 사건의 내용이다. 충격적이다. 북한 서열 22위의 이선실이라는 거물급 공작원이 총지휘한 사건답다고나 할까. 규모부터 그 간의 어떤 사건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면서 짐짓 구멍 뚫린 안보관계 기관들을 나무라면서도 “그것뿐일까. 정말 나 아닌 남의 탓만 할 수 있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정작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생각이다. 특정 지역이나 일부 기관의 경계태세에 책임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우리 모두의 대북인식 자체가 너무나 느슨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인 것이다”라고  국민의 안보인식을 문제 삼았다.

(…)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안기부의 발표를 믿으려 하지 않는 분위기다. 북한이 과연 간첩을 보내겠느냐는 의문에서부터 간첩 몇 명이 우리에게 위해를 끼치겠느냐는 낙관론에 이르기까지 미덥지 않다는 반응은 가지가지다. 더러는 대선과 관련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북한과의 대화와 교류를 추진하면 할수록 우리 내부의 흔들리는 이념의 축을 다시 붙들어 매고 사상적 공감대를 굳게 다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들이다. 하지만 그 일을 맡은 여야는 모두 겉으로는 충격이라는 표현 속에 대북 성토를 하면서도 차원 높은 대책을 내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국회 상임위에서는 서로 상대 당 흠집 내기에만 열을 올리는 모습이다. 그들에게만 맡겨서는 편한 잠을 이루지 못할 게 너무 뻔하다. 결국 비상한 시기를 비상한 시기로 자각하고 해이해진 대공의식을 조이고 정비하는 일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떠맡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남로당 이후 최대의 간첩조직 적발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0월 12일 안기부 1차장 성용욱은 국회 국방위 비밀보고에서 “현재 정치인과 관련한 많은 단서와 첩보를 보유하고 있으나 앞으로 어떻게 확대될지는 알 수 없다”며 “그러나 이는 몇 개월, 몇 년이 걸리더라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말해 정치권으로의 수사 확대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조선일보는 10월 13일자 1면 배꼽기사로 그 내용을 크게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10월 14일자 사설(「국방자료 유출의 경우」)을 통해 민주당 대표 김대중의 비서관이 국방부 2급 비밀문건을 북한에 유출했다고 공격했다.

김대중 민주당 대표의 비서를 통해 국방부 비밀문건이 북에 유출된 것과 관련, 민주당 관계자들이 2급 비밀을 함부로 내 준 국회 국방위 실무자의 잘못이라며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고, 어떤 측면에서 보면 김 대표는 피해자라느니, 유출에 대한 법적인 책임은 비서관 1인에 국한된 문제라는 등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법적 책임은 역시 당사자인 비서가 져야 한다.
다음으로 남는 것이 도의적 책임이다. (…) 분신격인 비서를 잘못 채용하고 활용한 상급자의 도의적 책임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은 채,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려 하는 듯한 인상을 민주당 관계자들은 주고 있는 것이다. (…)
이번 엄청난 규모의 간첩단 사건에 과연 정치인이 관련돼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일반 국민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며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정치인 개개인의 관련 여부는 정치적 사활이 걸려 있는 중대사이다. 그렇다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 답변하는 것이 긴요하다. 단서와 첩보도 사실임에는 틀림없으나 법적 구속력은 지니지 못한다. 법적 구속력이 없어 기소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그런 내용이라면 아예 발설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마치 많은 정치인이 관련돼 있는 듯한 답변으로 불확실성을 유포·확대시키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이를 정치 목적에 이용하려 한다는 오해의 소지도 있다.

그런데도 정치적 논란이 증폭되지 않는 것이 답답했는지 조선일보는 10월 15일자 사설(「진짜 늑대가 나왔는데도」)에서 다시 그 문제를 거론했다.

지금 우리 사회 최대의 현안 문제는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것은 두말할 여지없이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이다. 대통령선거도 이것에 비하면 기실 두 번째 중대 사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치권이나 일반사회는 별로 놀라는 것 같지도 않고, 자성이나 분발의 계기로 삼으려는 기색도 딱히 없어 보인다. 참으로 큰일 날 일이다.
수백 명 또는 천여 명 규모의 간첩단들이 우리 땅 안에 버젓이 공산당을 차려놓고 각종 테러·살상 장비와 무기를 은닉한 가운데, 막대한 액수의 미화를 써가며 95년 적화통일을 향해 착착 봉기의 시간표를 카운트다운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게 보통 일이요 예삿일인가. 게다가 지금 중부지역당만 드러나 있지 다른 지역당은 하나도 드러나 있지 않다. 저들이 결코 중부에만 지하당을 만들었을 리는 만무한데 말이다. 이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김일성을 신으로 떠받들고 혁명을 준비하는 지하당원들은 지금도 각지에 우글우글할 거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도 정치권이나 사회 지도층은 그런 무서운 현실이 자기들의 근시안적인 당리당략과 안일과 방심과 소승적 이기주의의 허가 낳은 산물임을 자성하는 빛이 없다. (…) 정치인들 가운데는 또 “선거 때면 왜 밤낮 간첩사건이냐” 하면서 그 진의를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경우도 있다.
김현희의 KAL기 폭파나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은 물론 선거철에 일어난 것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리 선거철에 일어났다 해도 김현희 사건이나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 같은 것을 두고서 “왜 하필 이 때냐” 하고 힐난하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정히 묻고 싶으면 그것은 북에 대해서나 물을 일이다.
우리는 이 같은 전반적 무감각 상태를 바라보면서 이것이 과연 한 나라를 책임지고 끌고 가야할 지도층의 자세이며 정치권의 도리인가를 심각하게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 민주화 시대라 해서 국가 유지의 절대적 당위성이 희미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현안은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늑대가 나온 것이다. 정치권과 사회의 옷깃을 여미는 자세가 아쉽다.

11월 2일 총리 현승종은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간첩과 접촉한 정치인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며 “ 대선 전이라도 정치인 관련 여부의 수사 결과가 나오면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2일자 4면에 “남조선노동당 사건이 아무래도 이번 대선 주요 변수 중의 하나로 등장할 것 같은 조짐이다”라는 해설기사를 실었다. 민주당 의원들이 한동안 예산 심의 거부 행동까지 보였던 것은 그 사건이 대선 전략에 미칠 악영향을 민주당이 얼마나 우려하고 있느냐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대표 김대중 의 비서가 사건에 연루돼 있고 북한이 간첩들에게 대선에서 민주당을 지원하라고 지령을 내린 데다 현재 정치권에 나돌고 있는, 사건 연루 정치인 명단이 거의 모두 민주당 인사라는 점 등으로 커다란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 해설기사의 요지였다.

민자당 후보 김영삼의 한 측근은 김영삼이 “간첩 사건으로 얻을 상대적 이익 없이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면서 “간첩 사건이 대선 전에 발표되고 민주당이 이에 반발해 대선이 자칫 변질될 경우, 승리 후에도 상당한 후유증이 남게 될 것”이라고 대선 전 발표를 반대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만약 대선 전에 발표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정부의 판단일 뿐”이라는 입장을 덧붙였다.

남조선노동당 사건을 키우기 위한 조선일보의 조바심은 11월 4일자 사설( 「간첩 마무리 지을 때」)에  극명하게 나타났다. 조선일보는 그 문제에 대해 가급적 신중한 관망의 자세를 취해 왔으나 총리와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그 문제를 쟁점화시켰으니 국민의 입장에서도 이제는 알 권리를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수사가 어디까지 와 있으며 각계 인사 관련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 정부는 지금까지의 내사 내용이 무엇이고 그 수사를 앞으로 어떻게 어느 시점에서부터 할 것인지 이제는 밝혀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소문만 무성한 채 실체는 알쏭달쏭한 안개 속에 파묻혀 있는 상황은 공연히 분위기만 탁하게 하고 대선정국의 혼미만 가중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대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해서 발표를 선거 뒤로 미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양인데, 설령 그런 흠이 있다 하더라도 국가안보의 막중한 사안의 공표를 선거 때라 해서 미룬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 우리는 이 문제가 대선 등 정치에 악용되어선 안 된다는 데에도 동감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 문제를 지금 발표하면 그것은 곧 현 정부가 중립이 아니란 식으로 모는 논리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전날 김대중은 “정부와 수사기관이 간첩단 사건을 대선에 악용할 경우 우리는 나름대로 중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며 정치권도 이의 선거 쟁점화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면 전직 의원 모임인 헌정회의 원로자문위원회(의장 윤치영)는 18일 대통령 노태우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남한 조선노동당 간첩단 사건의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하고 그 전모를 즉각 공표하라고 요구했다.

조선일보는 간첩사건 외에도 김대중을 직접 색깔론으로 공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11월 26일자 사설(「뉴 DJ 와 운동권」) 대표적이다.

민주당이 전대협·전노협·전교조·전빈련 등 재야·운동권과 합작하기로 한 것은 분명히 화제가 될 만한 사건이다. (…) 다 알다시피 예컨대 전대협의 다수파는 NL 즉 민족해방론자들이며, 이른바 주사파적 요소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스스로 중도우파임을 표방한 김대중 씨의 뉴 DJ의 위상은 이것과 과연 어떻게 합작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전교조와 전노협은 물론 전대협하고는 다른 단체다. 그리고 그런 그룹들의 사정 가운데는 이해해줄 만한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다른 당들도 그에 대한 대책 마련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민주당이 일단 전교조나 전노협과 합작을 한 이상에는 이 다음에 그들 단체들의 합법화와 해직자 복직에 있어 찬성을 하면 했지 반대는 못할 처지가 될 것이고, 그럴 경우 뉴 DJ가 노리는 보수적 학부모나 보수적 중산층의 태도가 어떻게 될지는 민주당도 계산해야 할 것이다.
(…) 우리는 결코 민주당이 어떤 선택을 한 것에 대해 시비하는 것이 아니며, 민주당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민주국가의 정계에선 전적으로 자유이며, 진보 측과의 공동과제를 발굴한 것 역시 우리 정치사의 한 변모 (…) 그러나 문제는 민주당이 그런 것을 적당히 양다리 걸치는 식으로 얼버무린다거나 (…) 모호성이나 2중성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보수진영의 분열에 대한 조바심

보수진영으로서는 국민당 후보 정주영이 여간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김대중은 색깔론으로 공격한다지만 보수세력의 분열은 별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10월 24일자 사설(「보수진영의 분열인가」)이 그 고민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국 정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양김 대결 구도로 예상됐던 정국이 국민당의 출현에 이어서 새한국당의 등장으로 계속 변수를 파생시키고 있다. 국민의 입장에서 최종적인 태도 결정을 하기에는 여러 갈래로 나뉘는 요즘의 정국이 너무나 현란하고 어지럽다.
(…) 우리의 입장에서 국가 발전이나 21세기 준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의 선택의 폭은 결코 넓지가 않다. 그야말로 몇 개 안 되는 것이고 빤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 빤한 것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제각기 당을 따로 만들어 가지고 대선에 뛰어드는 이게 과연 잘 되는 일인지 어리둥절해진다. 단순하게 말해서 민자당이나 국민당 및 새한국당은 모두가 노선 상으로는 합당을 한대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보수당들이다. (…) 더군다나 지금의 대선 정국은 내각책임제 하가 아니라 대통령 중심제임을 상기할 때, 범 보수가 이처럼 제각기 당을 따로 차려서 대통령후보를 서로 낸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다.
이 점에서 제3당이나 제4당은 적어도 자신들이 대의명분에 충실할 생각이라면, 반 양김 정당이 한 개도 아닌 두 개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과연 뭐라고 설명할 것인지부터 유념해야 한다. (…) 어쨌든 국민을 더 이상 헷갈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양 김 씨와 정주영 씨 및 새 당 후보는 하루 속히 국민의 선택 결정에 도움이 되는 분명한 컬러와 정책 노선을 제시해서 보다 안정적인 대선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직접적으로 사퇴하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끝났지만 보수진영의 분열에 대한 조선일보의 조바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사설이다. 이런 조바심은 선거가 다가오면서 더 심해져 11월 28일자에 「정주영 변수」라는 ‘류근일 칼럼’까지 나왔지만 이것 역시 하나마나한 소리가 돼버렸다.

이번 선거의 뇌관은 정주영 후보가 쥔 꼴이 됐다. 그가 만약 굉장히 많이 득표를 하면 그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된다. 반면에 그가 적당히 많이 득표를 할 경우엔 그는 김영삼 씨를 떨어뜨리고 김대중 씨를 당선시킬 것이다.
(…) 이러한 판세인지라 김영삼 씨에겐 우선 당장엔 김대중 씨보다도 정주영 씨의 존재가 더 급한 불인 셈이고, 반대로 김대중 씨는 정주영 씨가 실컷 잘 싸워주기를 바랄 것이 뻔하다. (…) 그렇다면 이젠 중부권과 경북 일부, 서울 일부의 미정표 유권자들이 마음을 정해야 할 차례다. 미정표란 누구들인가. 그들은 우선 양 김 씨를 썩 흡족해하진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아파트 값 절반으로 내려주겠다”고 하는 말을 한결 재미나다고는 생각하면서도 “글쎄, 그래도 어째 좀”하며 주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수치로는 이런 사람들이 지금 한 40% 가까이 된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과연 어떻게 마음을 정해야 할 것인가.
우선 정해야 할 것은 양 김 씨 중 누구를 고를 것인가 위주로 판을 봐야 할지, 아니면 양 김이냐 정 씨냐 위주로 판을 봐야할 지를 가름하는 일이 다. 만약에 전자의 경우로 정해진다면 그땐 정 후보는 아예 계산에서 빼버리면 된다. 그리고 양 김 씨 중 누가 덜 나쁜지를 가려내면 된다.
(…) 심사와 비교의 기준은 인품의 차원에선 공사 간의 도덕성·진실성·공익성을 위주로 설정돼야 할 것이다. (…) 반면에 공약의 차원에서는 그 화려한 선심들이 과연 말 되는 것인지를 차분하게 따져봐야 한다. 지금 각 후보들의 공약대로만 된다면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지상낙원의 모조품쯤은 곧 될 모양이다. (…) 이런 이유에서 우리들이 할 일은 후보들의 대문짝만한 신문광고와 유세장 연설의 달콤한 내용에 현혹돼서 우왕좌왕 할 게 아니라고 믿는다.
(…) 이런 식으로 해서 40% 안팎의 미정표 유권자들은 이제 정주영 변수가 작용하는 3자 대결 구도에서 자신의 선택을 좁혀가야 한다. 정주영 씨에게 굉장히 많은 표를 허락함으로써 그를 당선시킬 것인가, 또는 그에게 적당히 많은 표가 가게 함으로써 김대중 씨를 당선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에게 아주 조금만 표를 줌으로써 김영삼 씨를 당선시킬 것인가. 이 세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유권자들은 투철한 판별력으로 그들의 도덕성과 진실성의 높낮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아야 할 것이다.


‘초원복국집 사건’ 뒤집기

거기까지는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조선일보가 펼친 ‘대활약’의 예고편이었다. 결정적 활약은 선거를 불과 하루 앞두고 전 법무부장관 김기춘과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총동원된 ‘관권선거 모의 사건’을 ‘도청 사건’으로 뒤집은 것이었다.

대통령선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92년 12월 11일, 김기춘이 부산 초원복국집에 부산시장·검사장·경찰청장·안기부지부장·교육감·기무부대장·상공회의소장 등 기관장을 모아놓고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겨 민자당 후보김영삼을 지원할 것을 모의했다. 단순히 관권선거 모의뿐 아니라 그 방법에 대한 대화 내용이 더 악질적이었다.

그날 김기춘은 “중립내각이 나왔기 때문에 마음대로 못해서 답답해 죽겠다”면서 “부산·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니 하면 영도다리에서 칵 빠져 죽자”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 “훗날 보면 보람있는 시민이라고 다들 느끼게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지역감정을 부추기자고 충동질을 했다.

그런 대화 내용을 국민당 후보 정주영의 아들인 국회의원 정몽준원 쪽에서 도청해 녹음한 테이프를 12월 15일에 공개했다.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 다음 날 조선일보의 편집이 기묘했다.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사건 발생에 관한 내용은 「부산시 기관장 7명 민자 후보 지원 논의 / 음식점 아침식사 대화 녹음테이프 공개」라는 제목으로 ‘국민당 주장’이란 단서를 붙여 1면 배꼽에 3단으로 보도한 데 반해, 모임 장소에 있었던 부산시장 등을 해임했다는 등 노태우 정권의 기민한 대응은 「기관장모임 4명 전격 경질 / 부산 시장 해임·경찰청장·기무대장 등 직위해제〉라는 제목으로, 「관련자 단호 조치 지시: 노 대통령」「엄중 문책 요청: 김영삼 후보」 등의 기사를 붙여 1면 머리에 올린 것이다. 게다가 머리기사보다 더 큰 주요 기사로 〈비방·폭로전 절정 / 각 당, 투표 전야 금품 감시 비상 / 탈법 사례 무더기 고발」이라는 기획기사를 실어 초원복국집 관권선거 모의도 마치 여러 비방 폭로전의 하나에 불과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같은 날짜 사설(관권 버릇〉)은 초원복국집 모임이 “공식적인 대책회의라기 보다는 김기춘 전 법무장관의 초대에 응한 회동이었을 수도 있다”고 전제하면서 그들이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음을 자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로 선거 막바지의 중요한 시기에 특정 지역의 핵심 기관장들이 회동을 가짐으로써 대외적으로 관권 개입의 의혹을 샀다는 점이다. (…) 더욱이 공정선거를 위해 중립내각이 들어선 가운데 실시되는 선거인만큼, 일선 공직자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리라는 것은 물어보나 마나 자명한 일이다. 자신들보다 상위에 있었던 전 법무장관의 부름에 응했을 뿐이라고 해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둘째로는 이들의 대화 내용이다. 설사 이들이 참외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 매는 식의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서로간의 대화가 신변잡사로 끝났으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이들은 온통 선거 얘기로 일관하다시피 했으며, 그 내용도 김영삼 후보에 편중된 것이거나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공무원의 자세를 일탈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대통령선거법은 제52조에서 누구든지 선거운동 기간 중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 추천하거나 반대하는 선전행위를 이 법에 규정된 이외의 방법으로 할 수 없다고 명시해 놓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선거법까지 위반한 셈이다. 따라서 정부는 이들에게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다.

그러면서도 이 사설은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보안을 생명으로 하는 안기부·기무사 책임자들의 행적까지 그대로 노출된 점이다. 정보기관 책임자들의 언행이 일반인에 노출돼 녹음 상태로 공개됐다는 것은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사건에서 정보기관 책임자들이 관권선거 모의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보다도 그들의 행적이 노출된 것이 더 문제일 수 있다는 괴상한 인식을 드러냈다.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공권력을 동원하여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방법으로 파렴치한 부정선거를 모의한 사건을 불법적이고도 반인륜적인 도청 사건으로 둔갑시키는 조선일보의 신공이 선거 당일인 12월 18일자 사설(「부산 모임과 도청과…」)에서 여지없이 발휘됐다.

부산의 기관장 모임과 이들 대화를 속속들이 녹취한 도청 사건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병폐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기관장 모임의 대화 속에서 그들 기존의 실권자들이 어떻게 하면 자리를 더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사고에 젖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이들은 중립정부의 취지도, 지역감정의 악폐도, 민주화의 국민 여망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많은 개혁과 쇄신이 강조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헛되게 하는 고인 물의 표시를 우리는 부산 모임에서 본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이 모임을 도청한 공작정치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들은 그간 정보기관의 도청에 적지 않게 시달려 왔다. 전화 도청, 사생활 감시 등으로 인권 침해 문제가 앰네스티 등 국제기관에서까지 지적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당국은 안보와 범죄 예방을 그 필요 이유로 들었으나 그런 목적이 도청이라는 수단을 정당화 한다고 생각한 국민은 없었다.
이번의 도청 사건은 목적과 관계없이 부도덕한 것이며, 앞으로 우리 사회의 관행과 시민생활에 적지 않은 부작용을 파급시킬 것이다. (…) 시민의 사회생활과 조직생활에서 개인 인권은 송두리째 말살될 것이다. 또 그런 행위를 서슴지 않는 집단적 사고방식이 지배한다면 우리나라는 자칫 공포와 전율의 나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 기관장 모임을 도청함으로써 국민당은 선거 전략 상 호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공사회의 국민생활에 미칠 정보정치의 악영향을 고려할 때 도청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선거가 김영삼의 승리로 끝난 후 검찰은 초원복국집에 모였던 기관장들을 “공식 석상이 아닌 사적 모임에서 나눈 대화를 가지고 처벌할 수는 없다”며 무혐의 처분하고 모임을 주재한 김기춘만 불구속 기소했다. 김기춘은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1993년 3월 “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을 규정한 구(舊) 대통령선거법 제36조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참정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어 위헌”이라며 법원에 위헌 제청을 했다. 결국 1994년 여름 헌법재판소는 그 조항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고, 김기춘에 대한 재판은 공소 취소로 없던 일로 끝났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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