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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출세할 기자의 기사 작법

- 4.19 즈음, ‘동아투위’ 결성 45주기에 즈음하여
[특별기고] 강진욱 연합뉴스 부설 동북아센터 편집인

기사승인 2020.03.19  1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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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차 크게 출세(出世)할 기자가 있었다. 이 기자는 국내 굴지의 언론사 사장을 지낸 뒤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될 재목이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 시절 자유와 민주, 정의에 목말라하던 동료 선후배들이 노조를 만들고 자유언론실천을 위해 저항다가 대량 해직될 때 자리를 보전했고, 광주 시민들을 마구 학살한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뒤 무수히 많은 기자들이 또 온갖 고초를 겪을 때 사장이 되고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됐다. 그가 오래 전 쓴 기사를 봤다.

 

당시 이기붕 일가 권총자살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지면 중 하나. 출처 = 블로그 아름다운 세상

 

1960년 4월 이승만 정권 종말의 종장(終章)을 장식한 이기붕 일가 집단 살극(殺劇)의 내막을 해설하는 기획시리즈 기사. 이기붕 일가가 4월 25일 ‘서대문 시위대’에 쫓겨 포천의 6군단으로 피신했다 4월 26일 밤 경무대 별관 36호 관사에 숨어들었다는(?) 이야기. 

[경호경찰관이 경무대 본관 비서실에 연락해 도착을 알렸다. ... 아침 일찍부터[?] 서울 시내 주요 거리를 메우다시피 한 데모 군중들의 심상찮은 동향이 라디오 뉴스를 통해 보도 ... 얼마 안 있다 공보실의 중대발표가 있으리라는 예고가 몇 번인가 되풀이 ... 그러다 난데없이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나왔다. ... 경무대 본관과 36호 관사는 지척 간 ... 더욱이 경비전화도 연결돼 있지만 대통령 하야에 관해선 단 한 마디도 사전 통고나 상의도 없었다. 이기붕의 ‘사퇴 고려’ 성명이 발표된 ... 23일 이래 경무대는 이기붕과의 연락을 일체 중단한 상태 ... ](<동아일보> 1973.6.21)

엉터리 글이다. 이기붕 일가는 25일 밤 6군단에 도착해 하룻밤을 보낸 뒤 26일 이승만 하야 소식을 들었고 이날 저녁에 6군단을 떠났다. 그런데 위 기사는 이기붕 일가가 경무대 36호 관사에 도착했다는(?) - 이들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확인되지 않는 허구다 - 4월 26일 밤이 지나고, 그 다음날인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을 들은 것처럼 썼다.

기자가 특집 기사를 작성하면서 이런 기초적인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글을 쓰지 않는다. 단순 실수?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수가 아니라 고의로 보인다. 굳이 ‘출세한 기자’의 옛 글을 시비하는 이유다. 
위 기사에는 4월 26일과 27일, 28일 등 아예 날짜 표기가 없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을 기술할 때는 하루 단위로 날짜를 명기하면서 그날그날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4월 26일 밤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아침 일찍부터”라고만 썼다.

혹시 여러 이야기를 쓰다 문장 배열이 잘 못 됐나 싶어 다시 읽어봐도 이는 단순 실수가 아니다. “경무대 본관과 36호 관사는 지척 간”이고 “경비전화도 연결돼 있지만 대통령 하야에 관해선 단 한 마디도 사전 통고나 상의도 없었다”는 말은 분명 이기붕 일가가 경무대 36호 관사에 들었음을 가정한 이야기다.

위 기자는 이기붕 일가 3명이 4월 26일 포천 6군단을 떠날 때까지 이날 발표된 이승만의 하야성명을 듣지 못했고, 4월 27일 서울로 와서야 뒤늦게 하야 소식을 들었을 것이라고 믿었을까.

아무튼, 위 기사는 분명 이전까지의 이기붕 일가 최후에 대한 이야기를 부정하고 있다. 위 장문의 글 전체 내용은 ‘이 씨 일가가 이승만의 하야 성명을 듣고 망연자실, 마지막이자 유일한 의지처를 잃었다는 상실감을 주체하지 못해 자결했다’는 각본을 깔고 있다.

이때까지의 이기붕 일가 집단 자살 스토리는 이 씨 일가가 4월 26일 낮에 6군단에서 하야성명을 들은 뒤, 이날 저녁 늦게 6군단을 떠나 경무대 36호 관사로 왔고, 4월 28일 아침에 이들 모두가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된다는 줄거리다.

이랬던 각본을, ‘이승만의 하야성명을 듣고 망연자실해 자살했다’는 식으로 줄거리를 슬쩍 바꾸기 위해 이들이 하야성명을 들은 날짜를 4월 26일 아닌 4월 27일로 조작한 것이다. 위 글 속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아침 일찍부터”의 아침은 4월 27일 아침이다.

 

2.

‘4.19 스토리’ 가운데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이기붕 일가 집단 자살’ 이다. 특히 이들이 4월 26일 저녁 포천 6군단을 떠난 뒤 이들이 모두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계엄사 발표가 나온 4월 28일 아침까지 약 36시간의 행적에 대해서는 증언과 자료가 전무하다. 그저 누군가 퍼뜨리는 ‘∼카더라’식 스토리로 구전돼 왔을 뿐이다. 일종의 구전사화(史話).

문제는 이 ‘∼카더라’ 식으로 구전돼 온 스토리가 너무 허술하다는 점이다. 4월 26일 밤 경무대 36호 관사에 숨어들어 온 뒤 식구들이 머리를 맞대고 자살을 결심하고, 다음날 자살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28일 새벽 자살을 결행했다는 것.

안중근 의사가 히로부미를 척살하기 위해 또는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일제 강점기 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것도 아니고, 평생 호의호식하며 권세의 최고 정점에 서 있던 일가족 4명이 함께 죽기로 작정하고 집단 자살을 결행할 수 있을까? 그것도 대통령이 기거하는 경무대 별관에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이틀이나 머물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우리가 열광하는 ‘4.19’에는 이처럼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장차 출세할 기자는 이 비현실적인 스토리를 좀 더 현실적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 이 기자가 이틀 뒤 쓴 글에서도 조작의 흔적이 보인다. 전작(前作)과 똑같이 4월 26일을 4월 27일로 슬그머니 뒤바꾼 것이다.

[27일에는 ... 장남 강석이 나타나 가족과 합류했다. ... 이기붕은 ... 다시 자살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 강욱이 ... 맹렬히 반대 ...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박마리아도 함께 흐느꼈다. ... 장남 강석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기붕의 자살 주장에 찬성 ... “옳습니다. 자살하시는 게 좋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어머니, 우리 아빠가 최고죠?” 박마리아는 대꾸할 말이 없다. 이기붕도 누운 채 눈물을 ... ](<동아일보> 1973.6.23)

기자는 누구도 보고 듣지 못한 이야기를 마치 곁에서 지켜 본 듯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려면 ‘이는 기자의 상상’이라고 표기해야 옳다. 아무튼 기자는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이 세 식구와 합류한 날을 4월 27일이라고 썼다. 새로운 이야기다. 어떻게 이런 ... 정말 놀라운 일이다. 아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구전된 사화에서는 이강석이 4월 26일 가족들과 합류한 것으로 돼 있었다.

[이 씨 일가족은 ... (4월 26일) 방 안에 들어가 조금 있자 군복을 입은 강석 소위가 달려왔다. “어머니!” ... ](<경향신문> 1962.4.29)

[26일 밤 경무대에서 강석 소위의 방문을 받았다. 이들은 부둥켜안고 통곡 ... ](<경향신문> 1964.4.28)

이랬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쓰려면 새로운 팩트를 제시해야 한다. 증언이든 자료든. 아무런 팩트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역사적 사실을 제 멋대로 바꿀 수는 없다. 어차피 ‘이기붕 일가 자살 사화’가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 소설이었으니 새 소설 좀 써 보자 했을까?

훗날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될 이 기자는 이기붕 일가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 1960년 4월 27일의 미스터리를 이기붕 일가 자살 스토리에서 들어내려 했음이 분명하다. 이강석이 가족들과 합류해 ‘자살합시다!’ 했다는(?) 날을 4월 26일에서 4월 27일로 바꾸고, 이기붕 일가가 이승만의 하야 소식을 들은 날짜를 역시 4월 26일에서 4월 27일로 바꾼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기붕 일가는 4월 26일 밤 6군단을 나왔다’는 사실(팩트)과 ‘이들 모두가 4월 28일 아침 경무대 별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계엄사령부의 발표 사이의 ‘역사적 괴리’가 그런대로 메워질 수 있다.

이는 아무 것도 아닌 듯 보이지만 엄청난 역사 조작의 시작일 수 있다. 이런 일을 단지 기자 개인의 판단으로 했을 리 없다. 누군가 이기붕 일가 자살설이 더 이상 의심받지 않도록 ‘4월 27일의 미스터리’를 해소해 줄 것을 요청했을 것이고, 장차 출세할 기자는 그 요구에 응한 것이다. 이기붕 일가 자살 스토리에서 4월 27일을 지워야 할 이들은 이기붕 일가 몰살의 내막을 잘 아는 이들일 것이다.

 

3.

계엄사가 발표한 이기붕 일가의 자살 스토리는 허구다. 시신에 난 총상 위치도 신문들마다 달랐다. 어떤 기자는 이들이 매트리스에 누워 있었다고 썼고, 누구는 소파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고 썼다. 누구는 방안에 피가 흥건했다고 썼지만, 이강석의 몸에서만 많은 피가 흘렀다. 이기붕과 박마리아, 이강욱 세 사람은 독살당한 상태에서 총을 맞아 피가 거의 흐르지 않았다. 이강석이 식구들을 쏘고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난 60년 동안 이런 엉터리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 왔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그동안 이기붕 일가 몰살 사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이들이 더러 있었지만, 언론계에서 이를 정면으로 다룬 것은 1996년 4.19 36주기에 KBS가 제작한 다큐프로가 유일했다. 이때 놀라운 증언이 나왔다.

[당시 검사로 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조태형 변호사 ... 수사진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그는 “사건 현장에 갔을 때 이미 주변이 정리 돼 지문 감식 등 기초 조사를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지금도 자살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한겨레신문> 1996.4.19)

36년 전 이기붕 일가의 시신을 검안했다는 당시 서울지검 부장검사 조태형(趙台衡)이 마침내 입을 연 것이다. 이후 2000년대 들어 군소 인터넷 매체들이 이기붕 일가의 죽음에 대해 타살설을 제기했지만 심층적 문제 제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기붕 일가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가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아예 없거나 크지 않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4.19를 ‘성공한 시민혁명’으로 자타가 인정한 마당에 굳이 이기붕 일가의 죽음을 논하는 것 자체가 도로(徒勞)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학생 또는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을 몰아냈다는 믿음이 과하다 보니, 이승만의 하야 전말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인식이 부족하다.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성명을 내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미국의 전방위 압력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하야성명을 발표해 놓고도 4월 27일 국회에 사임서를 내지 않으려 버텼다. 그렇게 그는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경무대에 눌러 앉아 있으려 했다. 그런데 4월 28일 아침, 자신의 거처인 경무대 한켠에서 ‘이기붕 일가가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계엄사 발표에 화들짝 놀라 경무대를 도망치듯 나갔다.

[국회에서 이 대통령의 사퇴서가 수리된 후에도 이 박사는 이화장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 그러나 [강조]28일 새벽 이기붕 씨 일가의 자살을 보고받은 이 박사는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이화장으로 향했다 ... 이렇게 해서 10년 독재의 이 박사는 극적인 사임을 했던 것이다.](「한 시간만 늦었더라도 ... 하야. 망명 비화」<경향신문>1965.7.20)

4.19 당일부터 이틀, 4.25 하루 이기붕 일가가 피신했던 포천 6군단의 군단장이었고 훗날 국무총리가 된 강영훈(姜英勳) 씨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4.19 혁명은 1960년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28일 이화장으로 물러나면서 마무리됐다. 그러나 실제는 4월28일 새벽 경무대 부속 가옥에서 이기붕 국회의장 일가족이 자결하면서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나라를 사랑한 벽창우’ 강영훈 전 총리」<신동아> 2008년 7월호)

이기붕 일가의 몰살은 미국이 이승만 정권을 폐기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 최후의 카드가 아니었을까? 이승만 정권 시절 장차관을 지낸 이들 가운데 건실한 세계관을 갖고 있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인 변영태(卞榮泰) 전 외무장관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26일에는 이 대통령이 주위 정세의 압력 하에 드디어 하야선언을 하고, 27일 중 국회에 하야를 정식으로 통고 ... [강조]일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이면에는 당시 미 대사의 공작과 유엔군사령부의 지휘를 받은 국군의 태도가 우리가 인정하고 싶어하는 이상으로 큰 비중을 띠고 있었음은 후대 역사에 오를 일이다. 여기서 깊이 파 보려 하지 않거니와 필자는 4.19 혁명이란 용어에는 다소 이의를 가진 자의 하나이다. 4.19 의거라 부름이 그 본질을 더 잘 나타낼 뿐 아니라 ... ](「나의 4.19 회상(완) - 4.19는 민족적 의거」<경향신문> 1962.4.26)

변 씨의 말대로 이승만 정권 붕괴 공작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됐다. 미군의 지휘를 받는 계엄사령부와 그 뒤를 받치는 1군사령부가 한 갈래를 맡았고, 다른 한 갈래는 미 국무부의 지휘를 받는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와 그의 메신저 역할을 한 김정렬 국방장관이 맡았다.

월요일인 4월 25일 교수 시위로 데모의 불씨를 살리고 이날 저녁 ‘서대문 시위대’가 이기붕 일가를 집에서 쫓아내고, 4월 26일에는 계엄군이 시위대와 함께 - 시위대를 몰고 - 경무대로 진격하는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매카나기와 김정렬이 경무대로 가 이승만의 하야 성명을 받아 낸 것이다. 

출세한 기자의 ‘역사 조작’은 바로 “미국의 이승만 하야 공작” 특히 그 공작의 대미를 장식한 이기붕 일가의 죽음의 비밀이 “후대 역사에 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4월 27일’에 쏠리는 의혹은 자칫 미국의 이승만 하야 공작의 내막을 들춰 낼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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