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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망명 사건

- 조선일보 대해부 4권 - 53장

기사승인 2020.06.17  12: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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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2월 12일 한국전쟁 이후 최고의 북한 측 거물 인사가 망명해 왔다. 북한노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이 중국 베이징의 한국총영사관에 찾아 와 망명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1월 30일부터 일본을 방문했다가 베이징을 거쳐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 시기는 묘하게도 대통령 김영삼이 아들 김현철이 연루된 ‘한보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던 때와와 맞물렸다. 또한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이 닥쳐오던 때이기도 했다.

한국 언론들에는 일대 소동이 났다. 특히 조선일보가 더 그랬다. 황장엽 망명을 일찌감치 ‘귀순’으로 못 박은 조선일보는 2월 13일자 신문을 온통 황장엽 관련 기사들로 메웠다.

1면 머리기사(「북 황장엽 당 비서 귀순 /“인민이 굶어 죽는데 무슨 사회주의인가” / 어제 북경 한국 총영사관 찾아 요청 / 귀순자 중 최고위급… 심복 김덕홍도」「남 학생 북 참상 보게 해야: 황장엽 서신서 밝혀」를 비롯해서, “황장엽과 김정일의 관계는 밀접하다. 황장엽은 73년 9월 김정일이 당 중앙위 제5기 7차 회의에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선출된 이후 김정일에게 제왕학을 가르치고…” “황장엽은 북한 체제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체계화, 이론화한 ‘사상의 대부’로 불린다. 비동맹국가와 미수교국을 대상으로 한…” 등등 황장엽 개인에 관한 기사, 해설과 전망, 정치권과 외신 반응 등의 기사로 지면을도배질을 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사설(「주체사상의 폐기 처분」)에서 자못 흥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김일성 부자의) 최측근의 한 사람이자 주체사상을 이론화해 준 황장엽의 망명은 우선 주체사상의 메이커가 주체사상을 폐기 처분했다는 해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 북의 ‘정신’은 자살했다. (…) 북의 권력 상층부 정도가 아니라 권력 최중심(최중심) 부위까지 공황과 동요의 징후가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 그의 망명은 개혁·개방을 해도 망하지만 현재대로 나가도 망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에 감행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 황장엽의 망명은 또한 북 핵심부에 대화와 토론과 건의,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한 자체 수정과 자기 개선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이 말살돼 있음을 의미한다.
 
조선일보는 3면과 4면에 단독으로 입수했다는 황장엽의 ‘자필 고백’을 길었다. 제목은 「“김정일 세습 하늘의 뜻” 선전 / 김정일 “내 권위 때문에 인민 복종” / 농민들 양곡 3개월치 군량미 헌납」 「북 남침 땐 남한 경제는 잿더미 / 남북 차이 더 커져야 평화통일 / 통일원 북정책 일관돼야… 강한 군대 키워라」등이다.

조선일보는 그  문서를 안기부로부터 습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 친절하게 「‘황장엽 서신’ 본사 입수 과정」을 기사 말미에 붙였다. 1996년 6월 황장엽의 대리인 김덕홍과 한국인 사업가 A 씨가 북경에서 극비리에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접근해 취재 과정에서 황장엽과 김덕홍의 심정과 망명을 결심한 동기, 북한 내부의 사정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A 씨는 신뢰 관계가 쌓이면서 1996년 12월부터 황장엽과의 접촉에 대한 사실들을 털어놓았고 그 과정에서 망명 동기를 밝힌 황장엽의 친필서신과 북경 접촉 당시의 사진, 황장엽이 쓴 북한의 개혁개방에 관한 문건 등을 조선일보에 넘겨주었다는 것인데, 아무튼 ‘사업가’라고밖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조선일보는 대단한 ‘특종’을 한 셈이다.

“망명이 됐든, 귀순이 됐든, 왜 하필 이 때냐”는 의혹의 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조선일보는 2월 14일자 4면에 「“궁지 때마다 북풍” 떨떠름 야 / “안보 비난… 어느 나라냐”」라는 제목 아래 “황장엽의 귀순에 대해 여당은 ‘대환영’이라는 반응인 데 반해, 야당은 ‘귀순 과정의 의혹’을 제기하면서 ‘여권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북풍이 몰아치고 있다’며 떨떠름해 했다”고 전했다.

국민회의는 “정부가 황의 망명이라는 중대한 외교적 사건을 한보게이트로 궁지에 몰린 정권의 입지를 탈피하기 위해 이용한 것으로 보면서 귀순을 요청한지 7시간 만에 공개한 이유, 남북 긴장과 한·중 외교 마찰까지 감수하며 귀순을 결행한 이유, 서신 작성 시점, 황의 안기부법·노동법 언급, 황의 군·안기부·여당 강화 주장, 서신의 문체, 권력 핵심부에 북한 사람이 있다는 황의 주장, 서신을 전달한 사업가의 정체 등 10대 의혹을 제기했다.

조선일보는 그런 주장이 못마땅했는지 같은 날짜 ‘기자수첩’에서 “정치권 사람들은 이번 일을 어떻게 이용하면 상대편을 잘 공격할 수 있을까에 대해 열심히 궁리했던 것 같다”면서 “황의 무사에 대한 걱정도 없고 정부의 처지에 대한 고려도 없으며, 무엇보다 국가적 사안이라는 인식도 보이지 않는다”고 개탄했다. 국민회의의 ‘10대 의문’은 대변인이 주위 견해를 참고하면서 만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말하자면 공당의 간부들이 국가 중대사에 대해 ‘상식’과 ‘당파적’ 입장에서 생각나는 대로 몇 마디하고 이것을 정리해 공식입장이라고 발표한 셈”인데 “야당입장에서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대사관에 몸을 맡긴 채 떨고 있을 노인에 대해 한마디 위로나 걱정도 없이 다짜고짜 못 믿겠다고 들이대는 것은 사리로나 인정으로나 제대로 된 것 같지 않다”면서 야당의 논평을 ‘유언비어’로 치부해 버렸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사설(「황장엽의 편지」)을 통해 “그의 충고가 귀담아 들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 주민들을 오로지 수령을 찬양하는 조직생활에 묶어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북한이 하나의 거대한 광신도 집단이라고 바깥 세계가 비난해 온 그대로다. 이제 ‘김일성교’의 경전인 ‘주체사상’이 무너지고 있는 가운데서 북한 권력자들이 모든 주민을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역시 북한 식량난이다. 북한 주민들은 최악의 고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서도 농민들은 자기 식량으로 남겨놓은 몫에서 3개월분을 떼어내 군량미로 바쳐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쌀을 보낼 경우 그것이 또 군량미로 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음을 말해준다.
(…) 황의 남쪽에 대한 충고는 통일은 남북의 격차를 ‘하늘과 땅처럼’ 극도로 벌려놓는 방식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남쪽의 일부 온정론자들이 주장하는 어쭙잖은 ‘양보론’이나 ‘대북 무조건 지원론’을 무색케 하는 직격탄이다.
(…)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한의 정치·사회적 내부 태세는 그런 일관된 전략 목표를 힘 있게 추진하기에는 너무나 취약하고 무능하기까지 하다는 것이 그의 개탄이다. (…) 그는 두려울 정도로 우리 내부를 꿰뚫고 있다. 그의 관찰이 그럴진대 북한 고위층 역시 우리를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 오싹하다.
(…) 우리로선 탈북자 구출과 북의 인권 참상 고발 등 하나하나 할 일을 찾아야 하겠지만 전체적으로는 쓸 데 없이 대화하자, 지원해 주겠다, 만나자, 정상회담 하자, 쌀 주겠다 하며 어설픈 짝사랑을 하는 것은 그의 말대로 지양해야 하겠다. 우리로서는 북의 선의 가능성을 철저히 포기해야 한다. 그리하여 북의 자폐증이 자체적인 치유의 길을 찾으면 그들에게 다행이나 그러지 못할 땐 그것을 누가 막을 수 있느냐는 자세를 취하면 될 뿐이다.

그런데 2월 15일 북한 망명객 이한영이 정체 불명의 괴한들에게 총을 맞아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일보는 그 소식을 「귀순 이한영 씨 총 맞아 위독 / 간첩용 벨기에제 권총 탄피 발견 / 황장엽 귀순 관련 보복테러 추정 / 김정일 전처 성혜림 조카 어제 밤 분당 아파트서」라는 제목으로 16일자 1면 머리에 보도했다. 확신할 수는 없다는 전제를 깔면서도 북한이 황장엽 망명을 을 납치 사건으로 보고 있는 만큼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한영을 암살하려 한 것 아니냐는 뉘앙스가 짙게 배어 있는 기사였다. 조선일보는 3면에 「“귀순하면 보복” 공개 경고 / 북의 테러: 이 씨 피격 분석 / “고첩이 준비… 남파간첩이 총격” 추측」이라는 기사를 실어, 제대로 수사가 시작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 사건을 북한의 테러로 못 박았다.

조선일보는 2월 14일자에 「전 국민 경계태세로」라는, 성명을 방불케 하는 사설과 「‘황 망명’과 비뚤어진 시각」이라는 사설을 동시에 실어 그 두 사건의 연계를 시도했다.

첫 번째 사설은 “이한영 피격 사건을 접하는 국민들은 이것이 단순한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의한 범행이 아니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느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있다. 북한이 지금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건으로 이성을 잃고 대남 보복을 공언하고 있는 상황인데다가 이 씨가 그들의 ‘보복 1호’ 대상으로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 중요한 것은 정부와 국민이 일치된 안보의식으로 사태의 중대성에 대비한다는 자세와 실천일 것이다”라면서 정부와 국민이 철저한 안보의식으로 냉정하게 대처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두 번째 사설은 “황의 망명을 어떻게 해서든지 헐뜯으려는 풍조”를 개탄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진보를 가장한 친북세력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체제 내의 야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반응도 “이들이 과연 대한민국의 정당들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 우리는 국민회의가 항상 ‘색깔론’의 희생자라고 주장해온 것을 기억한다. 김대중 총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를 용공주의자로 모는 정부·여당의 책략을 규탄했다. 그런 국민회의가 황 씨의 망명에 내놓은 논평은 우선 ‘환영’이 아니라 ‘의심’이었으며 망명이 이루어진 첫날에 쏟아낸 말들은 속사포 같은 공격형 어투들이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구절마다 그의 망명을 의심하거나 깎아내리려는 인상이었다.
(…) 이번에는 우리가 야당에 묻고 싶은 ‘몇 가지 의혹’들이 있다. 야당들은 황 비서의 망명을 잘된 것으로 보는가, 아니면 잘못된 것으로 보는가?그들의 정치게임에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어느 나라 정당이며 어느 나라 정치인인가?

한국과 중국의 협상 결과 일단 필리핀으로 갔다가 한 달 남짓 머문 후 4월 20일 드디어 서울에 도착한 황장엽은 21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평화통일 위해 몸 바치겠다”」)에 등장했다. 덕분에 대통령 아들 김현철의 금품 수수 혐의가 포착돼 주초부터 수사를  본격화할  방침이란 기사는 옆으로 밀려버렸다.

조선일보는 「서울 온 황장엽」이라는 사설로 그를 반겼다. 김정일 정권에 대한 그의 비판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면서 “주체사상이니 북한식 사회주의니 하는 논리로 북한 정권에 대해 아직도 향수를 갖고 있는 세력들이 있다면 황 씨의 고발을 계기로 하루 속히 그 같은 미망에서 깨어났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라고 밝혔다.

그 사설은 또 “황 씨에 대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은 그가 갖고 있을 북한정보일 것”이라면서 “정부는 특히 황 씨를 한보 사태와 관련해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은폐해서도 안 될 것이다. 황 씨에 대한 조사 내용은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도 정직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공개해야지 너무 쉬쉬 하다간 정치·사회적으로 혼란만 초래하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조선일보는 4월 22일자에 황장엽이 ‘귀순’하기 전에 쓴 논문(「조선 문제」)을 단독 입수했다며 「“설마 전쟁 일으키랴” 방심하면 민족의 죄인 / “북 핵·화학·로켓무기로 남한 초토화 할 수 있다” / 황장엽 씨 “비극 다가온다” 전쟁 경고」라는 살벌한 제목을 달아 그 내용을 1면 머리에 올렸다. 논문의 상세한 내용은 「“남한의 북 지하조직 뿌리 뽑기 어려울 것” / 무력통일 의심하면 머저리 중 상머저리/ 학생 소요 잇따르는 게 ‘내부의 적’ 증거 / 개방 유도 땐 오히려 우환… 붕괴시켜야 / 식량 주어 인민 구원을… 나진 투자 반대 / 김정일은 히틀러 숭배 / ‘전격전’이란 말 즐겨 써 / 고생 몰라 참을성 없고 누구와도 협의 안 해/ 민족의 비극이냐 굴복이냐 / 북은 지금 기로에 섰다」등의 제목을 달아 4면 전체에 실었다.

같은 날짜 사설(「황장엽 씨를 어떻게?」)은 기이하게도 그동안 황의 망명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한다던 조선일보의 논지와는 크게 달랐다.

하지만 그의 귀순 동기와 태도에 대해서는 의아하고도 모호한 점이 여러 가지다. (…) 그러므로 서울에 온 황장엽 씨는 먼저 자신의 귀순에 따른 미스터리를 풀어주어야 하고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말뜻을 설명해주어야 한다. 황장엽 씨는 이 점을 인식하여 자신의 생각과 자신이 갖고 있는 북한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 황 씨가 선택적으로 정보를 전달케 만드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의 귀순으로 인한 우리 쪽의 소득을 공연히 앞질러 평가절하해서도 안 되겠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존재를 너무 부풀려서 극화시켜도 안 될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구현하는 데 실패했다고 자인한 인물이다. 이제 환경이 정반대로 달라진 한국에서 그가 남북관계에 기적 같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지나치게 기대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안기부장 권영해는 5월 9일 국회에서, 황장엽이 조사 과정에서 “김정일의 전쟁 의지가 확고하고 92년에 ‘3 일내 부산점령’을 기도했다”고 진술했다고 보고했다. 조선일보는 10일자 사설(「“3일 만에 부산 점령”」)에서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언제나 그러했듯 ‘우리의 허술한 안보태세’를 개탄했다. 그날 권영해는 국회 정보위에서 조선일보의 잇단 ‘특종’인 황장엽의 편지와 「조선 문제」 등 논문은 모두 본인이 직접 쓰거나 구술한 것이라고 ‘품질’을 보증해 줬다.

안기부 조사를 마친 황장엽은 7월 10일 기자회견에서 「“북은 꼭 전쟁 일으킨다” / “남은 너무 행복해 남침 위협 잊었는가” / 5분 내 서울 잿가루 만들 전략 / 북선 모두 핵 보유 믿고 있어/ 92년 남침 기도 김일성이 유보」등의 강력한 발언으로 다음 날짜 조선일보 1면을 장식했다.

조선일보는 황장엽의 기자회견 내용을 4면 전체, 5면의 4분의 3, 6·7·8면 전체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그의 발언에 불안감 조성의 우려가 있다거나 구체성이 없다는 의견은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8면 귀퉁이에「우리 대응 자세 경고… 불안감 조성 우려도」「구체성 없어… 북 권력구조 발언 경청할 만」이라는 딱 두 줄 제목으로 내보냈을 뿐이다.

반면 같은 날짜 사설(「문제는 우리 쪽에 있다」)은 “황 씨의 기자회견을 지켜본 우리의 소감은 (…) 북이 말하는 ‘평화적·자주적 통일’이란 통일전선 공작에 의한 ‘남 한흡수’임이 간단명료한 진실 그 자체인데도, 남쪽에서는 아직도 북의 그런 저의에 대해 갖가지 희망적이고도 환상적인 해석들이 분분 (… ) 당국의 대공부서는 이미 ‘3D업종’인양 공무원들의 인기를 잃었고, 문무를 겸전해야 할 남북 대치 상황인데도 근래에 와 무의 기상이 현저히 평가절하된 게 사실이다. (…) 일부 논자들은 대북 경각심 강조를 툭하면 ‘냉전적 사고’라고 몰아붙이며 (…) 정신적 대북 무장해제론을 마치 가장 지식인적인 관점인양 피력하곤 한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 이 적나라한 현장 설명 앞에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알쏭달쏭한 현학적 논리로 진실을 덮거나 혼란시키며 허송세월할 일이 아니다. 우선은 우리 안의 친북 내통자들부터 색출해 내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억지력과 사회 태세로 민주체제와 평화를 지키고 대한민국을 더욱 융성케 하는 것만이 김정일 지배권을 부산과 제주도까지 확장시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길임을 재확인해야 할 때라 믿는다. 전쟁에 대비하는 자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

4월 12일자 ‘김대중 칼럼’(「1% 가능성 대비를 / 왜곡된 인식 고쳐야 / 위험한 ‘설마론’」은 ‘황장엽 씨의 답답함’을 대신 풀어 주겠다고 나섰다.

(…) 황장엽 씨와 김덕홍 씨가 한국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 이대로 가다가는 ‘북한 사람은 굶어 죽고 남한 사람들은 폭탄으로 죽어’ 우리 민족이 말살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기자회견에서 자주 쓴 어투를 보면 (…) 자기들 발언에 의문을 갖는 남쪽 사람들에 대한 반발이며 답답함이며 약간의 한심스러움 같은 것이었다.
(…) 물론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황·김 씨가 말한 내용을 액면 그대로 전부 믿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들의 발언 가운데도 검증해야 할 부분도 있을 것이다. (…) 다만 이날 이들과 기자들과의 입씨름(?)은 헐벗고 굶주리고 경제가 피폐한 북한이 어떻게 ‘잘 사는’ 남한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겠느냐는 탁상논리와, 개혁·개방이냐 전쟁이냐의 막다른 기로에 선 김정일은 전쟁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상황논리의 대립 같았다. 황·김 씨의 논리대로 전쟁은 %의 개념으로 파악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1%의 가능성이라도 그것의 파괴력은 나머지 99%를 능가할 수 있는 것이 전쟁이며 (…) 그렇기에 세계의 모든 나라는 어쩌면 영구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 매년 국가예산의 30% 가까이를 국방비에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황·김 씨의 증언이 없더라도 일단 김정일 정권이 발악의 한 방편으로 남쪽에 대해 기습전을 펼 것이라는 전제 아래 준비를 해야 한다. 전쟁은 그 궁극적인 승패와 상관없이 우리 민족이 애써 이루어놓은 모든 것의 궤멸을 의미한다. (…) 북한정권에서 우리는 어떤 상식적 판단과 논리적 사고를 기대할 수 없다. (…) 우리는 당분간 북의 진로 선택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김정일의 북이 어디로 가든 우리는 냉철히 관찰만 하면 됐지 공연히 끼어들 필요가 없다. (…) 다만 우리는 황 씨가 주장한대로 북한 동포의 굶주림을 구제하기 위해 최소한의 도움을 주고 북의 전쟁 도발에 만반의 대비를 하면서 우리 경제 발전에 매진하는 것이 우리가 나갈 길이다.
황장엽 씨와 김덕홍 씨의 남행은 (…) 남한 땅에 뿌리 깊게 퍼져 있는 친북성향으로부터 ‘동포애’로 포장된 막연한 리버럴리즘에 이르기까지 북한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쐐기를 박는 계기도 돼야 한다. 그리고 황·김 씨를 우리 속에 포용하면 된다.

이 글은 1%를 0%로 만들려는 노력에 대한 모색도 없고, 99%의 희생 없이 어떻게 1%를 대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도 없는 ‘묻지마 대북강경론’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은 그 궁극적인 승패와 상관없이 우리 민족이 애써 이루어놓은 모든 것의 궤멸을 의미한다”면 북의 전쟁 도발에 대한 만반의 대비 자체가 불가능한 것 아닌가.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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