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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대선- IMF 폭풍에 휩쓸려 간 ‘북풍’(1)

- 조선일보 대해부 4권 - 55장(1)

기사승인 2020.07.01  11:3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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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은 임기 마지막 해이자 차기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해인 1997년을 맞아 1월 7일 연두회견에서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 대해 ‘적절한 시기’에 열겠다면서도, 어려운 경제 등 국정 과제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후보를 빨리 정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후보 선정에 관해 “당 총재로서 나의 입장을 분명히 당과 국민에게 전달할 것”이라고 말해, 자신이지지 후보를 밝힐 생각임을 확실히 했다.

하지만 자기가 후보 결정의 시기를 정하고, 지지하는 인물을 당 후보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김영삼 개인의 꿈에 불과했다. 1997년 봄에 한보사태가 벌어지고, 김현철과 측근들의 비리가 터져나오면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황(장엽)풍’으로 덮어 보려 했으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김영삼이 완전한 레임덕에 빠지면서 ‘9룡’이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선두주자는 신한국당 고문 이회창이었다.


이회창을 키워라

중앙일보는 일찌감치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지만 조선일보도 못지않았다. 새해 첫날부터 그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들을 쏟아냈다. 조선일보가 묘사하는 그의 이미지는 “소신·대쪽” “성격 곧고 청렴… 강렬한 인상” “부패 척결 큰 기대” “투명한 정치 기대” 등이었고 그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남북문제 미흡” “현실 정치력엔 의구심” “독단적… 융통성·정치경륜 부족”등이었다.

 이회창은 수구언론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국정 공백과 여권 분열을 막기 위해 후보를 조기에 가시화해야 한다”고 김영삼을 압박한 끝에 결국 7월 21일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이인제 등을 누르고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조선일보는 22일자 5면 머리에 「소신대로 살아온 ‘대쪽 인생’ / 선관위장 때 1노 3김에 “경고” / 법조인 가족… 5부자 경기고·서울대 동문」이라는 기사로 그의 개인사와 가족사를 알리고, 「정치 입문 1년 반 만에 여당 장악 / 발탁해준 YS와 충돌하며 급부상 / 신한국 입당서 후보까지」라는 기사를 통해 그의 정치 이력을, 「‘7인방’이 대세론 확산 앞장 / 서상목·백남치 의원 등… 초선의원들도 한몫 / ‘이마’팀·교수진 등 비정치권 조언그룹 가세」「“김윤환 씨는 정치파트너”: 이 후보 당선 일등공신 / 92년 이어 두 번째 킹메이커 맡아 / 95년 말부터 ‘이회창 지지’ 나서라는 기사로 이회창을  후보로 만든 사람들을 소개했다.

그런데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할 것 같던 ‘이회창 대세론’은 사실 허점이 많은 것이었다. 가장 심각한 것이 두 아들의 병역문제였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신한국당 전당대회 전인 7월 18일 이회창의 두 아들의 병역 문제를 공식 거론하고 나섬으로써 이른바 ‘병풍’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자체적인 취재보다는 주로 국회를 중심으로 한 공방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는 정도에서 중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여 kg씩 줄다니… 재검 생략도 의혹” 야당 / “질병 등으로 살 빠져… 지금도 53~50kg” 이 대표 / 오늘 밤 TV토론 쟁점될 듯 / 일부러 살 뺐나 부정은 없었나: 이회창 대표 아들 ‘병역’공방」「고 총리 답변: 당시 1 79 cm 이상 중 20여명 체중 미달 “이 대표 아들 신검 자료 내겠다”」「여야, 국회서 이 대표 아들 ‘병역’ 공방 / “체중 조작 의혹” 후보 사퇴 촉구 야/ “파렴치한 구시대적 행태” 비난 / 고 총리 답변 싸고 육탄전…정회…유회 / “병역기피다”(…) “정치공세다”」 〈국회 또 정회 / 여, DJ 병역 거론 (…) 야, 고의 감량 규명 요구 / 이 대표 아들 ‘병역’ 공방 확산」 등이었다.


‘병역 수렁’에 빠진 이회창 구하기

조선일보는 이회창 아들의 병역문제에 관한 논란이 무성하던 7월 30일자‘기자수첩’(「‘신검 답변’ 파문」) 통해 야당 측이 국회에서 질의한 대 대해 국방부가 제출한 자료와 총리 고건의 국회 답변 내용이 정반대라면서, 국방부의 해명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실무자의 사소한 실수로 인한 해프닝에 불과한 것 같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주장했다.

(…) 김동진 국방장관은 지난 24일 국회 답변에서 두 아들의 1차 신검  결과는 밝히지 않고 부대에 입영했을 때의 신검 결과만을 언급했다. 그 뒤 야당 의원에 의해 장남 정연 씨가 지난 83년 첫 신검 때 몸무게가 63kg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고, 결국 고건 총리가 28일 국회에서 병적기록표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 때문에 국방부와 병무청이 숨겨오던 병적기록표를 마지못해 밝혔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국방부 실무자는 병무청 실무자에게 이 대표 아들들의 병적서류 문제를 문의했으나 병무청 측이 명쾌하게 설명을 해주지 않아 착오를 일으키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을 과연 누가 납득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국방부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줄서기와 눈치 보기의 행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조선일보는 이회창의 장남 정연과의 인터뷰를 통해 해명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7월 31일 그를 심야 인터뷰해 “아버님 괴롭혀 죄송… 진실 밝혀질 것” “억지로 몸무게 뺀 적 한 번도 없어” 등의 내용을 사회면(27면)에 보도한 것이다. 기자가 보는 앞에서 재보니 체중이 53.8kg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8월 1일자에는 「이 대표 두 아들 어떻게 지내나 / 장남 정연 씨 휴가 내고 칩거 중… 친구들에 “억울하다 ”  차남 수연 씨 올 초부터 유학준비… 6월 말 미로 떠나」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8월 6일자 사설(「병역 의구심」)은 “이회창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아들들의 병역문제를 계기로 병역에 대한 의구심이 (…) 지도층에 대한 실망과 계층 간의 갈등이 증폭되지 않을까 우려한다”고 했다. “병역에 대한 의구심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도 반성하고, 그것이 국가 안보에 얼마나 심각한 위해로 작용하는지도 새삼 깨달아야 (…) 누구를 막론하고 병무제도를 악용한다는 생각은 불식해야 (…) 지도층의 각성이 특히 요구된다”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병역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변명하기 앞서 부끄럽게 생각할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이회창 아들들의 병역 의혹 진상이 분명히 가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도무지 요령부득인 사설이 었다.

사태가 이회창과 신한국당에 점점 더 불리해지자 조선이로는 8월 19일자 에 「“여 비상벨 울려도 끄는 사람 없다” / 무기력증 확산… 권력누수 겹쳐 / 중진들 “뒷짐”… 대안론까지 불거져」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회창의 신한국당호’는 출범 1달이 돼 가는데도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어둠 속을 헤매고 있고, 후보 결정 직후 하늘을 찔렀던 인기는 두 아들 병역 기피 공방을 거치면서 곤두박질을 거듭하고 있다는 탄식이었다.


이인제 때리기

이회창의 하강과 맞물려 이인제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이 대표로는 어려운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경선에서 2위를 한 이인제의 몸값이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9월 13일 신한국당 경선 결선에서 이회창에게 패했던 경기도지사 이인제가 대선 독자 출마와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보수세력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조선일보는 9월 14일자 1면에 3단 기사로 이인제의 출마 선언을 보도하면서 그보다 더 큰 5단 기사로 “신한국당은 이인제 경기지사의 대선 출마로 정권 재창출에 적신호가 켜졌다고 판단, 정계 재편을 포함한 다각도의 대책 마련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자민련 총재 김종필, 민주당 총재 조순 등과 손을 잡는 후보 간 연대는 물론, 박태준 등과 손을 잡는 보수대연합, 개혁세력의 확대 등 다각적인 방안이 모색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2면에 「이 지사, 출근 전 총재에 마지막 전화 보고/ 출마 통보받은 YS “안타까운 일”: 청와대 반응」, 3면에 「이 지사 인기 유지 여부가 최대 변수/ 여, 단독 승부 한계 느끼면 정계 재편 가능성 / 이 대표·DJ ‘JP 끌어안기’ 경쟁 벌일 듯 / 대선 판도 예측 불허 구도…안개 낀 ‘청와대 길’: 이인제 출마 선언」「〈이인제 지사 일문일답: ‘3김 청산’ 열망을 저버릴 수 없어 / “뜻 같이 하는 세력·후보와 언제라도 연대”」「탈당 이후 위상: “거품 빠질 것” “기반 확고” 전망 엇갈려 / 여 차세대 주자서 ‘제5후보’로」, 4면에 「여 반응: “ 민주적 절차 파괴” 비난/ 집안 단속 등 대책 부심 / 놀라움…배신감…“반전 계기 삼자”」「‘국민정당’ 내세워 조직·자금 열세 만회 / 당명·정강 등 구체 내용 연휴 동안 가닥: ‘이인제 신당’ 구상 / “민주당·통추-반이회창 세력 규합”」 등의 기사로 관련 소식을 상세히 전달했으나 그 기조는 역시 ‘비판’과 ‘우려’였다.

「이 지사의 ‘말바꾸기’」라는 제목의 ‘기자수첩’은 국민 앞에 했던 자신의 약속을 뒤엎고 독자 출마를 선언하면서 그 이유를 “국민들이 저를 불렀다”고 자신 있게 답한 이인제의  공언은 용기인가, 만용인가를 물었다.

같은 날짜 사설(「이인제 씨의 ‘마침내’」)은 더욱 혹독하게 그를 비판했다. 호칭은 이인제 ‘지사’가 아닌 ‘씨’였다.

(…) 이인제 씨의 신한국당 탈당과 대통령 출마는 한마디로 한국 민주주의의 타락을 의미한다. (…) 구체적으로 말해 경선에 나선다는 것은 거기서 이기지 못하는 한, 비록 자신의 당선 가능성이 절대적이라고 하더라도 독자적으로 출마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이 게임의 규칙이다.
(…) 그런데 이 씨는 이 규칙을 어겼다. (…) “정치는 규범이나 약속이 반드시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다”라는 그의 논리는 실로 방약무인하기 짝이 없다. (…) 우리가 지금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지도자는 믿을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 비록 자신의 선택이 잘 못 됐더라도 그 선택을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 더 큰 것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도덕과 윤리와 상식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 그리고 이랬다저랬다 갈팡질팡하지 않는 사람이다 .
이 씨는 지금 오늘도 잃고 있고 어쩌면 밝을 수도 있는 5년 후도 잃고 있다. 그는 정치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고 국민을 너무 업수이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대중 때리기

역대 선거에서 조선일보의 ‘김대중 때리기’는 색깔론, 불투명한 정치자금, 지역주의의 화신, 신뢰할 수 없는 정치인 등으로 덧칠하는 것으로 나타나곤 했다.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는 건강문제와 IMF 사태에 대한 입장이란 새로운 ‘꺼리’가 생겼다.

9월 20일자 조선일보에는 느닷없이 정치인의 건강 문제를 제기한 ‘김대중 칼럼’이 실렸다. 「납세와 건강 문제」라는 제목을 단 그 칼럼은 미국의 예를 들며 정치인의 건강 문제에 대해 아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므로 후보자는 자신의 건강에 관한 자료를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 미국에서는 대통령직에 도전하는 후보가 국민에게 반드시 보고해야 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자신의 납세에 관한 자료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건강진단서다 .(…) 미국 대통령이 고위 공직에 지명한 사람도 의회의 인준청문회에 자신의 건강과 납세, 재산에 관한 자료를 제출하고 청문에 응해야 한다.
(…) 이 같은 미국 제도의 단점은 아무리 공직에 나아갈 사람이라도 그의 사생활 또는 과거가 낱낱이 공개된다는 것이고, 장점은 이 청문 과정을 거치고 나면 또는 국민의 심판을 받고 나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다시는 그 문제로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도 이런 제도를 도입했으면 어떨까 싶다. (…) 대통령후보의 납세자료 및 건강에 관한 자료의 공개는 이번 선거부터 실행에 옮겼으면 하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의 건강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 군통수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의 안보상의 판단은 수정이 불가능하고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하게 마련이다.
(…)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대통령의 건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별로 비중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군인 출신이거나 운동을 열심히 한 사람들이었기에 대통령의 건강에 크게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 자신의 재산과 수입 규모에 맞게 세금을 제대로 냈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료의 공개도 필수적이다.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는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가 있는 만큼 여기서 따질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재산의 형성 과정이며 더 중요한 것은 세금을 냈느냐의 문제다. 이런 것들이 사전에 알려져야 할 필요성은 경선 이후에 터져나온 신한국당 후보의 아들 병역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게 전개됐는가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 각 후보들이 스스로 이런 자료들을 국민 앞에 내놓기를 기대한다.

대통령의 건강이 중요하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김대중 칼럼’이 제기한 대통령 후보의 건강 문제가 겨냥한 대상이 누구인지는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군인 출신이거나 운동을 열심히 한 사람들이었기에 대통령의 건강에 크게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을는지도 모른다”는 대목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후보의 재산이나 세금 문제는 이미 1992년 대선 때 정주영이 김영삼과 김대중을 상대로 제기한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짜 조선일보는 발 빠르게 7면 상자기사로 「대선 이슈 ‘납세와 건강’」을 다루면서 「이회창 DJ 겨냥 “자진 공개 하겠다 ” / 김대중 “이 대표 얘기는 약세 만회용일 뿐” / 김종필 “명분엔 공감하지만…”시큰둥 / 조순·이인제 “언제든지 공개 용의” 대환영」 등 각 후보의 반응을 실었다. 이 기사는 “이회창 후보가 자신의 건강지수와 세금 납부 상황을 빠른 시일 내에 공개하겠다고 말한 것은 주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를 겨냥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해석함으로써 ‘건강과 납세 문제’가 김종필과 함께 고령인 김대중의 아킬레스건을 찌른 것임을 암시했다.

(…) 이 대표 측은 또 공직자와 변호사를 지낸 이 대표가 평생 야당 정치인으로 일관한 김대중 총재에 비해 세금을 내도 훨씬 많이 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두 아들 병역 면제 파문으로 곤욕을 치른 이 대표의 반격수인 셈이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대체로 이 대표의 명분에는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우리도 얼마든지 밝힐 용의가 있다”면서도 “이 대표의 얘기는 약세 만회를 위한 술수”라고 말했다. 자민련 이규양 부대변인은 “자진 공개한다고 해서 대단한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후보자의 건강과 세금 공개는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 20일자 칼럼에서 제시한 방안이다.

결국 ‘김대중 칼럼’은 이회창의 선거운동을 도운 셈이며 조선일보는 특집 상자기사로 그것을 인정한 셈이다.


색깔론-간첩단과 오익제 편지 사건

IMF 사태의 어마어마한 파고에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김대중을 겨냥한 안기부와 조선일보의 색깔론 공세는 제15대 대선에서도 여전했다. 선거철만 되면 간첩단이 적발되는 것도 다르지 않았다. 11월 21일자 조선일보 1면에는 「지하철 간부 등 ‘고첩’ 6명 적발: 안기부 발표 / 황장엽 씨 거처 파악 등 임무… 여자는 자살/  이한영 씨 살해 북 공작원 소행 / 78년 실종 고교생 3명은 납북 / 남파 부부간첩 조사 중 확인 / 서울대 고영복 교수 36년간 간첩 활동」이란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다음 날짜 ‘기자수첩’(「안기부와 고첩」)은 “고정간첩으로 밝혀진 서울대 고영복 명예교수는 안기부와 밀접한 관계라면서 안기부가 발표 자리에서 ‘자기들도 놀랐다’느니 ‘보수인사로 알려진 인사가 간첩 활동을 할 줄이야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느냐’느니 했다”고 전했다. “간첩에 표시 없다는 말을 누누이 강조해온 안기부마저 고정간첩을 지원하고 계속 접촉하는 허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의아하고 불안할 뿐”이라고 했지만 그만큼 국민이 받은 충격파도 컸다.

선거일을 채 보름도 남겨 놓지 않은 12월 6일자 조선일보 2면에는 「“오익제, 김대중 총재 앞 편지”」라는 기사가 실렸다. “국가안전기획부와 검찰은 월북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앞으로 보낸 편지가 발견돼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수사하고 있다고 5일 밝혔다”는 내용이다.

안기부 공보관 이광수는 “편지는 11월말 쯤 서울 목동 국제우체국에 도착했으며, 겉봉투에는 북한 우표가 붙어 있고, 보내는 사람 난에 오익제 씨 이름과 북한의 ‘평양시 중구역’으로 받는 사람 난에 직함 없이 ‘김대중 귀하’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3의 4 한양빌딩’으로 적혀 있다”고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편지 내용과 관련해 “4장 가량의 편지에는 ‘떠날 때 인사를 못해 죄송하다’ ‘그동안 보살펴 주어서 고맙다’ ‘북한에 오니 생각보다 살기가 좋다’ ‘후광(김 총재의 호) 선생께서 당선되면 통일이 빨리 되리라 믿는다’ ‘김정일 주석이 쓴 책이 노작이니 한번 읽어보라’는 등의 내용이 들어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12월 7일자 사설(「오익제 ‘편지’와 국민회의」)는 재빨리 그 사안을 뒤틀었다. 북이 편지를 보낸 의도가 문제가 아니라 국민회의 측의 반응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 북이 이 시기에 그로 하여금 김대중 총재에게 편지를 보내게 한 그 의도가 더 의아하다.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인 때 북이 그를 통해 김대중 후보를 격려하는 것이 김 후보의 득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라도 보통 착각이 아니다. 김대중 후보는 과거에도 ‘북풍’에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문제는 북이 김대중 후보에게 이로울 것이 없는 ‘북풍’을 일으키는 데 대해 국민회의 측이 보이는 반응이다. (…) 국민회의는 오익제가 편지를 보낸 그 자체의 문제점을 규명하여 국민의 이해를 구하려 하지 않고, 조작 운운하며 당국이 그 편지를 처리한 방법만을 규탄한다. 안기부가 지난 1일 국민회의 측에 문제의 편지 사본을 전달하고 5일 그것을 공개한 것을 가리켜 “이제 와서 처음 발견한 양…” 하며 몰아치는 것은 문제의 본질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오히려 박지원 특보의 말처럼 이 편지가 김 후보에게 불리할 것을 아는 북이 그의 당선을 방해하려는 것이라는 해명이 더 적절했을는지 모른다. ‘김 후보를 음해하기 위한 조작극’이라는 국민회의의 반박은 안기부를 향하기 전에 북과 오익제를 향한 것이어야 했다.

‘괴편지’가 김 후보에게 보내진 시점과 그 내용, 이를 안기부가 발표한 시점에 대한 국민회의 측의 의혹 제기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사실 ‘오익제 월북사건’은 훨씬 전인 8월에 한 번 폭풍우가 되어 정치권을 휩쓸고 지나간 사안이었다. 왜 뒤늦게 선거일을 앞두고, 전혀 앞뒤 정황에도 맞지 않는 편지로 인해 지난 문제가 또 튀어 나왔느냐는 의혹 제기는 유불리를 떠나 당연한 것이었다.

국민회의 언저리에서 놀던 천도교 전 교령 오익제의 월북 소식이 처음 전해진 것은 8월 17일이었다. 조선일보는 18일자 1면에 「〈“북 포섭 간첩활동 가능성” / ‘ 황파일’ 인사 앞당겨 수사 / 오 씨, 국민회의 고문 지내… 김일성동상 참배 / “ 김대중 총재는 월북 몰랐나”: 신한국당 / “ 현 정부서 5년째 평통위원”: 국민회의」라는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신한국당은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의 ‘사상 의혹’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고, 국민회의 등 야권은 ‘정치공작’이라고 반박했다.

조선일보는 색깔론을 부추기는 데 앞장섰다. 「두 얼굴의 친북자들」이라는 사설은 오익제의 월북 이유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우리 사회는 친북세력을 위해 놀이마당도 되고 활동무대도 되며 더없이 안전한 은신처도 되고 있는 셈”이 분명하다며 “그런데도 관계당국은 수사는 빨리 끝내되 발표는 대통령선거 이후로 미룰 것이라고 한다. 선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뜻이겠지만, 국민은 그런 정치적 고려 때문에 증폭되는 안보상의 약점을 더 걱정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수사’ 자체가 정치적 목적을 둘러 싼 논쟁거리가 됐다. 8월 19일자 조선일보는 공안 당국이 오 씨의 월북에 따라 ‘황장엽 파일’에 오른 정치권 등 각계 인사들에 대한 수사 일정을 앞당겨 극비 내사를 벌이고 있다고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면서 3면 전면을 털어 정치권의 논점을 정리했다.   조선일보는 8월 20일자 사설(「‘오·황’ 정쟁거리인가」)에서 “여야 정치권은 오익제 월북 사건과 ‘황장엽 파일’을 정치적으로 다루고 이용하는 데에만 혈안이 돼있는 양상”이라며 “서로 손가락질하며 이전투구를 벌이는 것은 국민을 식상하게 만들 뿐이며 그 결과는 공멸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질타했다. 조선일보의 의도는 명백했다. “여야는 당국의 수사에 협조함으로써 안보에 관한 한, 여당과 야당이 따로 없다는 초당적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 공안당국도 더 이상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며 “‘황 파일’에 대해 내사는 하되 그 결과는 대선 후에 발표하게 될 것”이라는 등의 어정쩡한 태도를 보일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수사에 착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오익제 월북 사건은 ‘황 파일’ 관련 인사들에 대한 수사를 촉진시키는 계기로 삼기에 충분하다. 정치권을 비롯한 우리 사회 지도층 내부에 간첩을 비롯한 친북인사들이 뒤섞여 암약하는 것을 방치할 경우 우리의 안보체제는 근본적으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철저한 수사를 촉구함으로써 무엇보다 안보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그 사건을 어떻게 하든 대선과 연결해 정쟁화하려는 안간힘이었다. 국민회의 대변인 정동영은 그 사건에 대해 안기부의 ‘기획설’을 제기했고 조선일보는 8월 22일자 사설(「‘기획입북’ 조사에 응해야」)에서 “안기부가 ‘오익제 기획입북’ 운운의 발언을 한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을 조사키로 한 데 대해 국민회의 측이 적극적인 협조 자세를 보이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정 대변인 발언 내용의 중요성에 비추어 안기부가 사실 여부를 가리려는 것은 당연한 처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안기부가 ‘기획입북’의혹을 받고 있는 당사자여서 다른 기관의 조사를 요구한다면 몰라도 국민회의측이 조사 자체에 대해 기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올바른 공당의 처신이 아니다”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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