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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간 직후에는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

- 동아일보 대해부 2권 - 3장

기사승인 2021.07.21  00: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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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가 복간호를 내던 1948년 12월 1일 서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환영하는 성대한 모임이 열렸다. 동아일보는 12월 2일자 1면 머리에 관련기사(「임시정부 봉영(奉迎) 성식(盛埴) / 작일(昨日) 훈련원에서 장행(壯行)」)를 크게 실었다.

  조선의 심장인 서울시의 백만 민중은 감격과 흥분에 싸여 12월 1일을 맞이하고 있다. 이날은 36년 만에 연합군의 영웅적 승리에 호응하여 만리 이역에서 칠전팔기의 경(境)에서의 혈투로 우리 강토를 찾아 3천만 민중과 함께 기별하려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환영하게 된 성스러운 서울시민의 향연일이다.
  오전 12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시내 남녀중등 이상 전문대학생, 조선건국군과 시민 일반의 훈련원두 운집은 순식간에 10만을 넘게 되었는데 장엄한 악대에 맞추어 오후 1시 반에 시민 주최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봉영식이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 씨 사회로 개막되었다. 이어서 오세창 씨의 개회사, 이인 씨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 씨의 만세3창으로 막을 닫았다. 봉영문을 권동진 씨, 김성수 씨, 이인 씨 3 씨를 통하여 김구 주석께 봉정하기로 하고 건국군을 선두로 이 역사적 성전(聖典)인 가두행렬로 올랐다.

 동아일보는 1937년 7월 일제가 중국침략전쟁(‘지나 사변’)을 일으킨 이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는 물론이고 그 움직임을 전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일본군이 북경과 천진을 점령한 뒤 상해에 이어 장개석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을 함락하자 임시정부는 국민정부를 따라 멀리 중경까지 고달픈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일본이 ‘동아 신질서 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전멸시키려고 하던 장개석 정권은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를 음양으로 돕고 있었다. 그래서 가뜩이나 대한민국의 정통을 이어가면서 일제의 극렬한 공격에 시달리고 있던 임시정부는 국민정부와 더불어 ‘대일본제국’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지’를 자처하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게도 임시정부는 ‘대일본제국’의 ‘성전’을 방해하는 성가신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1945년 11월 23일 주석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자 한민당을 주도하던 ‘동아일보 사람들’은 그들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한민당은 임시정부에 앞서 10월 4일 귀국한 이승만에게도 잽싸게 접근하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복간된 바로 그날 열린 임시정부 봉영식을 위의 기사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36년 만에 연합군의 영웅적 승리에 호응하여 만리 이역에서 칠전팔기의 경에서의 혈투로 우리 강토를 찾아 3천만 민중과 함께 기별하려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환영하게 된 성스러운 서울시민의 향연일”이라고.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천황’에게나 올리던 ‘성(聖)’이라는 글자를 임시정부 봉영식에도 바쳤다.

 12월 3일자 동아일보 1면은 「임시정부 잔류 요인 작석(昨夕) 입경(入京)」이라는 제목 아래 관련기사들로 도배되었다.

  일행 22 씨 안착 / 전 각원(閣員) 합석 금조(今朝) 초(初) 각의 / 악천후로 개선 지지(遲遲) / 입경 전야는 논산서 일박

  한외(寒外) 풍상 27년 만에 새날을 맞이하여 환국 도정에 오른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진 일행 홍진 의정원장 이하 22명은 작 2일 하오 5시 때마침 내리는 서설에 은세계 이룬 오침불망(悟寢不忘)의 고국 김포공항에 안착하였다. 이로써 전 각원은 전부 입성하였는데 정부에서는 금 3일 상오 11시 전원이 경교동 숙사에 모여 초 각의를 개최할 예정으로 그 내용은 자못 기대된다. 그리고 제2진은 각원이 14명, 수원(隨員) 5명과 중국 무전기사 3명인데 씨명은 아래와 같다.
  의정원의장 홍진, 국무위원 조성환, 황학수, 장건상, 김명준, 성주식, 유림, 김성숙, 조00, 겸임국무위원 재무부장 조완구, 외무부장 조소앙, 군무부장 김약산, 법무부장 최동왕, 내무부장 신익희, 비서 안우생, 경위대 서상렬, 비서 이계식, 안우생, 노능서, 윤재견, 수원, 왕용성, 유용치, 육은행.
  일행은 김구 주석 일행에 뒤떨어져 천후 관계로 환국이 지연되다 1일 상해를 떠나 천후 관계로 하오 3시 군산공항에 불착(不着)을 하였다. (·····)
  (···) 동 5시 50분경 경교장 김 주석 숙사에서 선후진이 밖에 가족들의 환호리에 감격의 대면을 하고 일단 여장을 풀었다. 일동은 소게(小憩) 후 석반을 마치시고 동 7시 45분 호텔로 입성, 제1야를 흥분과 감회 속에 마치었다.

 이 기사 옆과 아래에는 임시정부 각원 14명의 사진과 서명, 그리고 ‘요인들의 귀국 제1성’이 실려 있다.


 ‘임시정부에 유일의 정통성 있다’

 위 기사가 실린 동아일보 12월 3일자 1면에는 「독립 촉성(促成)의 첩경」이라는 사설이 자리 잡고 있다. 독립을 이루려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국민이 함께 나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피압박의 질곡에서부터 자유해방에로 우리는 확실히 자유권 향유의 민족적 자격을 획득하였거니와 이로써 우리는 감격과 흥분 속에서 벌써 3개월 여를 경과하였다. 30여년의 울분도 자유해방의 감격도 이제는 완전 독립 촉성에로 추진하여야 할 긴급한 단계에 이르렀다. ‘포츠담회담’과 ‘카이로선언’이 약속한 조선의 자주독립은 언제까지나 실현될 것인가. 이것이 우리 3천만 겨레의 대망(待望)인 것이다. 38도의 장벽 문제나 38도 이남의 미군정 실시 문제 등의 대외문제는 물론 대내적 일체의 체제문제까지도 독립 완성이 이를 해결하는 요체인 까닭이다. 우리는 해방이라는 기분에만 도취하여 당면의 긴급문제를 어디까지나 준순(浚巡)하면서 있을 것인가.
  무릇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우회와 직경(直徑)의 두 갈래가 있을지니 우리는 모름지기 그 목적에 통한 직경을 밟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당면의 긴급문제가 독립 완성이라는 것에는 3천만의 한 사람도 이론이 없을 것이며 그리고 우리의 총의는 이 문제 달성의 직경이 무엇일까 함에 집중되어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금(爾今) 국내에는 정당의 난립으로 정정(政情)은 착종(錯綜)하여 파쟁을 위한 파쟁, 이론을 위한 이론을 번복(飜覆)하는 것만으로 8월 15일 이후 벌써 시일이 경과했으나 의연히 이 상태가 계속될 뿐이다. (·····)
  이미 우리는 해외임시정부의 환국을 맞이하였다. 우리는 비록 해외임시정부를 그 소위 임시정부로서 맞이 못하였음이 한낱 유감이기는 하나 이는 일시적 국제정세에 의하였을 뿐이요 임시정부가 우리의 정부로서 기미운동 당시에 우리의 총의에 의하여 성립되었고 그 후 상해, 남경, 그리고 중경으로 전전하면서 한국정부로서의 국제적 활동은 역연한 바가 있으며 또 다시 금차 대전에는 정부로서 8·15 이전까지의 우리 3천만은 거개가 우리 정부로서 이를 지지, 확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8·15 이후 정당의 난립과 소리적(小吏的) 고집으로 인하여 오히려 반역적 잡음이 났던 것으로 민중의 지향을 혼미케 하여 우리의 자주독립은 정체된 감이 있는 것이다. 38도선으로 국토가 양단되었고 민족이 양분되었으며 그리고 이 선을 남북 하여 미·소군의 진주가 부정기한(不定期限)에 있는 한 우리의 자유도 생활도 있을 수 없다. 이론도 투쟁도 추후로 미루고 이미 국제적으로도 승인될 단계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를 차이무이(遮二無二) 지지하는 것 외에 독립 촉성의 첩경은 없을 것이다.

 미군정은 주석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이 11월 23일 환국하기 전에 ‘개인 자격’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통보한 바 있었다. ‘한반도 유일의 정통 정부’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미군정과 밀착하고 있던 한민당의 핵심 인물들이 경영하는 동아일보는 무슨 까닭인지 12월 3일자 사설에서는 “국제적으로도 승인될 단계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를 유일하게 지지하는 것 말고 “독립 촉성의 첩경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임정은 건국의 공구’

 1945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는 임시정부 대변인의 담화를 보도했는데 제목은 임시정부를 절대로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임정은 건국의 공구(工具) / 민족주권은 한민족 만이 가진 권리 / 각의 후조 외무부장 언명 / 국무회의 직후 각원 일동

  오후 2시 국무회의를 마치고 난 조 외무부장은 기자단과의 회견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하였다.
  “임시정부가 해외에서 투쟁하여 온 바는 한국민족의 주권은 우리 한국민족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이므로 이를 약탈한 일본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민족운동의 공구요 건국운동의 공구로서 국내인민과 합작하기 위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특히 명칭에 있어서도 중국서 기자조선이라고 하여 이태조가 중국 주원장에게서 얻은 식민지적 명칭을 버리고 대한이란 명칭을 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의 주권을 한국민족에게 상속시키기 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기관으로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을 이 기관의 산하에 넣어서 우리 강토 안에 건국할 소임을 가지고 세계 정치무대에 차지(此旨)를 전하여 한민족의 우수성이 소개되었고 임시정부는 오직 하나뿐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도 알리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여사한 투쟁을 통하여 입국하였으므로 국내에 자본주의정치를 옮겨놓으려는 것도 아니고 보수정권의 수립을 목적한 것도 아니다. 오직 민중이 요망하는 정부를 수립하여 여러분이 이끌고 나가는 데 불합리한 점이 없는 정권의 수립을 할 것인데 세칭 임시정부는 정치의 낙오자가 아닌가 또는 구성인물이 노령인물인데 부적 운운하는 경향도 있는 듯하나 이는 인식 착오로 안다. 정부는 개인 신경이 아니고 한 집체적 신경일 것이다. 즉 정치기관으로서 활동하는 것이요 구성인물의 개인으로서 활동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오직 발표되는 정강정책의 문자를 통한 분석이라 할 것이요 인물을 통할 바는 아니다. 우리가 수립하려는 정강정책은 영국의 애틀리의 그것보다는 우수할 줄로 안다.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19일 서울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식’에 관해서 20일자 1면 머리에 「전 민족의 환호 충천 / 한풍(寒風)의 훈련원두, 열광의 봉영 / 장중한 임정 환영의 성전(盛典)」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그 기사 이후 동아일보의 기사와 사설은 ‘신탁통치’를 둘러싼 국내외의 움직임으로 초점을 옮겨갔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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