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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총선과 ‘부정선거 규탄투쟁’

- 동아일보 대해부 3권 - 15장

기사승인 2022.05.11  16: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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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5월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의 승리가 확정되자 정부와 공화당은 한 달 뒤에 치러질 제7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대통령 박정희부터 선거운동 앞장서

 6월 8일로 예정된 총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은 “박 대통령 일하도록 밀어주자 공화당”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 신민당은 대선과 달리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야당의 단일화 효과가 적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공화당 의장 김종필조차도 야당이 4개로 분열되어 있었던 1963년 총선거에 비해 의석이 10여 석 줄어든 100 석 정도를 공화당 의석으로 예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핵심부는 7대 총선을 통해 개헌선인 3분의 2가 넘는 의석을 확보하여 제3공화국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철폐함으로써 본격적인 장기집권, 영구집권을 도모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중앙정보부와 내무부가 직접 막대한 자금과 공무원을 동원하여 선거대책을 마련했다. 공무원의 선거 관여가 문제가 되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967년 4월 27일 “선거운동 기간 중 국무위원이 국정을 위한 지방 출장에서 특정 후보자를 지지·추천, 반대하는 연설을 하는 것은 ‘대통령선거법’ 제32조 2항에 위배된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5월 9일 국무회의에서 ‘선거법 시행령’을 고쳐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정부위원 등 별정직공무원은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에 5월 1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을 포함한 별정직공무원의 선거 참여는 불가하며, 이 선거법 시행령 개정안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규정한 헌법을 위반한 것이므로 부당하다고 해석했다. 공화당에서는 일단 대통령과 국무위원의 지원유세를 중지하는 듯했다. 하지만 5월 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정당의 대표자인 대통령은 국회의원선거법상의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고 하여 이전의 결정을 번복해 버렸다.
  박정희는 이미 전국을 순회하며 공화당 후보들에 대한 지원유세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 박정희는 경제관료들을 대동하고 관광도시 개발, 공장 건설, 도로와 교량 건설 등을 약속했으며, 특히 목포 등 호남지역 유세에서는 많은 지역개발 공약을 내놓았다. (···) 박정희 정권은 이렇게 모든 공무원을 동원하여 여당을 지원하는 한편, 정보기관과 검찰을 동원해 야당의 손발을 묶었다. 중앙정보부는 재일동포 실업인 출신인 신민당의 전국구 김재화 후보를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였으며, 조총련 자금 유입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한때 신민당의 선거자금을 동결시키기도 했다. 또 박정희 정권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던 야당 국회의원 후보들과 운동원들을 잡아 가두었다. 1967년 5월 장준하, 오재영, 서민호 등 정치인들과 야당 선거운동원들이 선거법 위반이나 반공법 위반으로 잇달아 구속되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494~496쪽).

 5월 9일 국무회의가 ‘선거법 시행령’을 고쳐 대통령, 국무총리 등 별정직공무원이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게 하자 동아일보는 5월 10일자 2면에 「국무위원의 선거운동」이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 이와 같은 현행 선거법 시행령의 개정은 한 마디로 부당한 것이라 하겠다. 첫째, 국무회의는 이 개정의 실정법상의 근거를, 대통령선거법 7조와 국회의원선거법 7조에 각각 명시하고 있는 이른바 “이 법에 규정된 공무원의 범위는 각령(閣令)으로 정한다”는 대목에 두고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에 이미 국무위원의 선거유세가 ‘국가공무원’의 자격으로서 가능한가의 시비 문제를 두고 법률상 해석의 논쟁을 거친 바도 있어, 그 미비점과 결함을 보완하여 시행세칙을 명백히 제시하는 것은 타당한 일인 줄 안다. 그러나 이번 시행령의 개정을 반드시 두 선거법의 제7조 ‘공무원의 범위 설정’에만 법 논리상의 정당성을 둘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만일 정부가 앞에 말한 제7조에 입각하여 시행령을 개정한다면 대통령선거법 32조 2항과 국회의원선거법 34조 2항에 규정된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 중 공무원을 명백히 못 박고 있고 “다만 국회의원과 지방의회의원은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예외의 규정을 단서로서 붙이고 있는데 그 ‘명문(明文)’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개정이 옳고 그른 것을 판별하는 핵심점이 여기에 있다. (·····)
  둘째, 이번 국무회의에서 결정한 선거법 시행령의 개정은 그 시기가 좋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현행 선거법 안에는, ‘공무원의 범위’의 설정 문제뿐만 아니라 선거관리위원회의 감독기관으로서의 권한 강화를 비롯하여 “선거인명부 작성‘과 ’교통시설 편의 제공의 금지‘ ’선거비용의 제한액‘ 등 현실상 가장 규제를 필요로 하는 중요 사항이 모두 극히 일반적 추상적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법률의 강제 집행 가능성마저 사실상 의심하고 있는 터인데, 하필 그동안 가장 말썽을 일으켜오고 있던 ’공무원의 범위‘의 조항만을 시행령으로써 개정을 서두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
  셋째로, 법률을 집권자가 자의(恣意)로 개정하지 않는 것이 양식과 도의다. 우리는 흔히 제정된 ‘법률’을 실존하고 있는 ‘법’과 혼동하고 있는데, 집권자는 법률을 지배수단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법률을 통하여 사리에 맞는 법을 실현하겠다는 정의(正義)에 대한 의식을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선거법에서 공무원을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 가운데 넣은 것은, 관권의 행패가 심했던 과거의 경험에서 그 설정의 의미와 정신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국회의원선거를 목전에 두고, 선거법 시행령을 개정한 것은, 합법을 가장한 형식논리를 가지고 내용에 있어 불법을 하려 하는 것이라는 의심이 짙은 것임을 지적해 둔다.

  5월 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정당의 대표자인 대통령은 국회의원선거법상의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종전의 해석을 뒤엎자 동아일보는 5월 23일자 2면 사설(「선관위의 재해석 그 뒤」)을 통해 그 결정을 국회에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바로잡으라고 촉구했다.

  (···) 이제 중앙선관위의 재해석이 불가피한 것이었든지 또는 불미스러운 것이었든지 선관위 자체의 손으로 대통령의 유세가 가능하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파동은 이것으로 현실적인 쟁점이 매듭지어졌다고 하기에는 매우 불투명하고 개운치 못한 점들을 허다하게 내포하고 있다. 정부의 시행령 개정이 그 절차와 시기가 심히 부당하였다. 선관위의 재해석이라 하는 것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뒤집어 어떤 정치적 영향력에 초연하지 못했던 느낌이 깊다. 이리하여 문제 해결의 정도는 역시 국회에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모법을 개정하는 데서 재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대통령의 유세가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구차한 과정을 밟아 그것이 실현된다고 해서는 결코 떳떳한 것일 수는 없다.
  선관위의 재해석으로 정부의 체면도 섰다. 또 대통령 자신이 유세를 반드시 고집하지 않는다고 언명한 바도 있다. 선관위로서도 국무위원의 유세에 는 아직도 못을 박은 채로 있다. 모든 것을 오늘의 상태에서 동결하여 오는 국회에서 정정당당히 해결의 길을 찾도록 하라. 이러한 착오 속에서도 그 합리적 해결을 위한 노력을 통하여 우리 헌정사를 굳혀 가는 데 기여할 길이 정부·여당에 있다는 것을 지적해 두는 바이다.

 이런 논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정희는 5월 26일 전남 목포에서 첫 번째 유세에 나섰다. 동아일보는 그 날짜 1면 머리에 관련 기사를 실었다.

  행정부, 여당후보 지원 적극화 / 박 총재, 목포서 유세 / 3선 위한 개헌 않겠다

  6·8 국회의원선거를 10여 일 앞두고 선거전이 종반의 주요 국면으로 접어들자 정부는 공화당 국회의원후보자에 대한 직접 내지 측면 지원을 적극 노골화시켜가고 있어 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26일 현재 정일권 총리 등 대부분의 국무위원들이 지방 출장에 나가 공화당후보자와 발을 맞춘 지방 사업 공약과 그 실천 전망에 대해 지방 유지들과 의견을 나누는 사례가 비일비재한가 하면, 그동안 ‘지방행정 시찰’만을 계속해 오던 박정희 대통령이 26일 돌연 목포에서 공화당후보 직접 지원을 위한 선거유세를 하는 등 6·8 총선거전은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
  [목포] 지난 18일부터 지방행정 시찰을 계속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은 26일 목포에서 처음으로 공화당 총재 자격으로 이곳에 출마한 동당 국회의원 출마자를 위한 지원 유세를 했다.
  그는 이날 오전 9시 30분 목포역전 광장에 모인 수많은 청중 앞에서 연설, “대통령 혼자만으로 일할 수 없으니 국회에 공화당 의원을 많이 뽑아 안정세력을 이룩해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그는 또한 “대통령 중임을 위한 개헌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한편 “이 나라의 경제발전은 정치안정이 전제조건이며 대통령을 공화당에서 뽑은 이상 국회에도 공화당 의원을 많이 보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목포에서 불붙은 3선 개헌 논쟁

 박정희는 왜 6·8 총선거의 첫 번째 유세를 목포에서 했을까?

  가장 큰 관심을 모은 선거구는 김대중이 출마한 목포였다. 박정희는 김대중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인지 목포에 집착에 가까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에 “여당 국회의원 10명이든 20명이든 낙선시켜도 상관없다. 반드시 김대중 만은 당선이 안 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공화당은 2만여 명의 ‘유령 투표권자’를 만들어내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을 감행했다.
  목포에 출마한 공화당후보는 육군 소장 출신으로 체신부장관을 지낸 김병삼이었다. (···) 박정희는 김병삼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기간 중 두 번이나 목포를 방문했다. (·····)
  박정희가 3선 개헌 때문에 그런 몸부림을 친다고 판단한 김대중은 선거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네 여당이 이처럼 부정한 방법을 사용해서까지 선거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은 결국 헌법을 개정하여 또 다시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가? 그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 의석을 어떤 무리를 해서라도 확보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 아닌가?”
  박정희는 다음날 연설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헌법을 고쳐서 세 번이나 대통령이 될 생각은 절대로 없다. 내가 3선 개헌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정치적 모략이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3권>, 151~152쪽).

 동아일보는 목포에서 불이 붙은 ‘3선 개헌 논쟁’에 관해 5월 27일자 2면에 「개헌론과 박 대통령의 목포 발언」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박 대통령이 스스로 26일 목포에서의 공화당 국회의원후보 지원연설회에 나서서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은 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는 보도다. 우리의 헌정이 늘 대통령의 재선 또는 재재선을 위한 개헌으로 크게 이지러지곤 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당연히 크게 환영받을 이야기인 것도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아직 4년이나 남은 다음 대통령선거를 놓고 벌써부터 개헌 이야기가 날카롭게 국회의원선거의 쟁점이 되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우리의 정치가 안타깝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국회의원 선거전이 열을 더해가면서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 이야기가 여야 간에 오갈 때, 실상 우리는 박 대통령 자신의 이에 대한 입장을 궁금히 생각했고, 어느 기회이든 그의 보좌자들뿐 아니라 그 자신의 입을 통해 분명한 말을 듣기를 바랐었는데, 이번 목포 발언은, 정확한 문맥이 어떠했는지는 자세치 않으나, 그런대로 ‘자유당 때 같은 짓’은 않겠다는 것은 분명히 했다고 보며, 그 뜻이 내내 선명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이는 박 대통령의 그런 뜻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통령 언저리에 있는 보좌자들도 각별한 주의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과거의 좋지 못했던 경험이나 전례를 들먹여 박 대통령의 이번 천명이 왜곡되지나 않을까 성급히 회의부터 한다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정치적 발언이 곧잘 결과적으로 번복되는 것을 너무나 흔하게 보아온 우리로서는 이 ‘중대 발언’의 앞으로의 전개를 더 주시하려는 것도 무리가 아닐 줄 안다. 가령 박 대통령이 지적한 자유당 때만 해도 대통령 출마를 않겠다는 이승만 씨를 기어코 추대한다 하여 이른바 우의(牛意)·마의(馬意)가 동원되었던 일이 있고, 가까이는 5·16 이후 당시 최고회의 의장으로서의 박 대통령 자신이 민정 불참을 선언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 그것이 뜻대로 되지 못했던 경위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늘 동기보다 결과에 의해 판정을 받는 것임을 새삼스러이 다짐할 것도 없이, 박 대통령의 개헌 않겠다는 이야기도 그 뜻보다는 결과가 그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음 대통령선거까지 박 대통령의 정치는 줄잡아 10년이 계속되는 셈인데, 여기서 권력이 오래 되면 어떻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그때는 정말 박 대통령 스스로 평화적 정권이양 또는 교체의 모범을 보일 수가 있을 것이라는데서, 우리는 4년 후를 우리 민주주의의 키를 잴 수 있는 귀중한 때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정권은 같은 당 안에서도 제대로 이양되어 본 일이 없는 초라한 민주주의밖에 못 가져 왔다. 만일 박 대통령이 임기 만료 시를 당하여 개헌 없이 그 자리를 적법한 정치적 절차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 물려주고 나서기만 한다면 그는 그의 재임기간 중에 해놓은 어떤 업적보다도 큰 업적을 그때 남기는 결과가 될 것이며, 그때 한국은 비로소 큰 정치가로서의 대통령을 얻는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임기를 4년 가까이나 남기고 있던 박정희가 마음속으로 ‘3선 개헌’을 강행할 생각을 다지고 있었다면 동아일보의 이 사설은 비수처럼 그의 가슴에 꽂혔을 것이다. 나중의 결과는 동아일보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3선 개헌안이 국회에서 한밤중에 날치기로 처리되고, 박정희가 종신집권의 길로 치닫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화당의 ‘압승’과 부정선거 규탄투쟁

 6월 8일에 치러진 제7대 총선거 개표 결과 공화당은 헌법 개정에 필요한 117 석을 훨씬 웃도는 130 석(지역구 103 석, 전국구 27 석)을 얻었다. 신민당은 44 석(지역구 27 석, 전국구 17 석)에 불과했다.

 야당은 총선거에서 부정과 불법이 판을 쳤다면서 범국민규탄대회 등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6월 9일자 1면에 그것을 크게 보도했다.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 / 야당, 6·8 총선을 규탄 / 민주주의 장송(葬送)을 예고 / 곳곳서 부정 항의 데모

  신민당은 8일과 9일 이틀 동안의 간부회의 결과 6·8 총선을 “민주반역의 반국시적(反國是的) 사상 최악의 불법부정선거”라고 단정했다. 이러한 야당 주장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투표 상황을 종합해 보면, 6·8 총선은 공개투료와 대리투표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부정선거라고 지적되어 여러 곳에선 야당에 의해 부정선거 항의 데모 소동이 벌어지는 등 어수선한 양상을 빚었다. 한 달 동안의 선거운동 기간 중 선거법 위반 사태와 과도한 금력 난무 및 여당후보에 대한 행정지원 등으로 전례 없는 ‘타락선거’였다는 지적과 함께 투표 과정에서 빚어진 부정 사태는 6·8 총선의 의의를 재평가하게 하고 있어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신민당 확대간부회의는 정치적 투쟁으로 1)선거무효 선언과 의원 등록 거부 2)부정선거 규탄 범국민운동의 일환으로 규탄군중대회 및 시위 전개 3) 원내에 들어갈 경우 1차적으로 부정선거 진상 조사 및 여당 자금 출처 규명 특위 구성 제의 4)관계 장관의 해임 건의 5)선거법 개정 추진 등 여러 방안을 계속 검토키로 했다.

 동아일보는 6월 10일자 2면 사설(「5·16 정신 어디로 갔나」)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부정선거를 강한 논조로 비판했다.

  총선거의 대세가 거의 판명된 뒤 정부대변인은 “온 국민이 하루속히 선거의 과열 상태에서 냉정을 회복하여 조국 근대화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지금 국민 다대수의 심정이 그처럼 쉽사리 냉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선거에 뒷말을 남길 여지가 없었던가, 조국 근대화의 과업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국민의 단결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거를 치렀는가, 우리는 먼저 정부에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여당 의석이 3분의 2를 넘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공명한 과정을 밟아서 된 결과라면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문제는 의석의 분포가 어떠한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거 과정의 저 타락선거·난동선거라는 말로 대표되고 있다시피 우리 선거사상 유례가 드문 불공명으로 지배되고 말았다는 데 있다.
  부패한 정치풍토를 일신해 보겠다는 것을 최대의 목포의 하나로 해서 군사혁명까지 일으켰던 박 대통령의 정부, 이제는 ‘안정’을 스스로 자랑하며 두 번째 대통령 임기로 들어가는 박 대통령의 정부인지라, 올바른 민주정치의 가장 밑바닥 조건이 되는 선거에서 이제는 좋은 전통의 수립을 위해 힘써줄 때가 되었고 또 그럴 능력을 가진 것으로 우리는 기대해 왔다. 그러나 이번 국회의원선거는 한 마디로 이 나라의 정치풍토를 저 3·15 부정선거 이전으로 역전시키고 말았다. 그 값진 4·19나 5·16의 시련이 너무도 가석(可惜)한 역전이 되고 말았다.
  지난번 대통령선거의 득표로 보아 이번 국회의원선거에서도 공화당이 승리하리라는 것, 다시 말하여 공화당이 모범적인 공명선거로 이끌고 나가더라도 과반수의 의석을 얻기는 무난하리라는 것은 거의 누구나의 일치된 관측이었다. 말하자면 현 정부나 여당에서는 명실을 갖춘 공명선거를 통하여 민주정치의 좋은 전통을 구축해 가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 기회를 놓쳤다. 놓쳤다기보다 포기했다. 정부와 여당은 일신해야겠다던 그 정치풍토의 구렁으로 스스로 빠져버렸고, 이 나라의 민주정치는 그 옛날과 같은 혼탁을 되풀이할 불행한 요소를 또 다시 잉태하고 말았다.
  5·16 날 아침, 당시의 군사혁명정권은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내세웠었다. 그 제3항에 일러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고 했다. (···) 국회의원선거가 오늘과 같은 혼란과 불결로 끝난 것을 보고 우리는 5·16 정신 어디로 갔나, 의아하고 통탄하게 되는 것이다.
  (···) 행정력이 부당하게 선거에 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데가 제1차적으로 정부요, 선거법규를 짓밟는 온갖 부정과 부패를 막을 수 있는 데가 제 1차적으로 정부였건만, 정부는 그것을 방치하다시피 했고 결과적으로 조장한 대목조차 있기도 했다. 헌법 전문에까지 명문으로 박아 넣은 5·16의 정신은 벌써 그새에 죽어 없어졌는가. (·····)
  이번 국회의원선거는 이런 불행한 결과로 끝났다.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불행한 결과가 원인이 되어 자칫하면 이 나라의 정치풍토를 더 큰 혼탁으로 몰고 갈는지도 모르는 소인(素因)이 생겨났다. 의석 3분의 2에 도취하는 여당의 그늘에는, 선거는 해서 무엇 하는가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민중의 좌절감과 허탈이 있다. 이 민중을 이끌고 ‘조국 근대화의 과업에 총력’이 얼마만큼 동원될 것인지도 아울러 생각해 볼만하다.

 신민당은 6월 12일부터 장외투쟁을 시작했다. 중앙당에서 당수 유진오와 국회의원 당선자 44명을 포함한 당원 1백여 명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종로구 관훈동의 당사에서 광화문 중앙청까지 시위를 하다가 경찰기동대에 의해 해산당했다.

  (···) 광주, 충무, 보성, 영천, 장흥, 대구, 울산, 양평 등 각지에서 신민당원들이 민주주의의 상여를 메고 시위를 벌이면서 부정선거에 항의했다. (···) 다음날에는 운영위원회를 열고 6월 8일의 선거를 선거쿠데타로 규정하고 ‘6·8선거무효화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전면 재선거를 요구했다. 신민당 선거무효화투쟁위원회는 6월 16일 국민대회와 병행하여 전국에 부정선거조사단을 파견했다. 이날 경기도 화성지구에서 재검표 결과 공화당과 신민당 후보자의 당락이 뒤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6·8 부정선거 규탄투쟁에서 중심이 되었던 것은 학생들이었다. 2년 뒤 3선 개헌 반대투쟁에서도 그랬지만 1967년의 6·8 부정선거 규탄투쟁에서도 학생들은 재야나 정치권과 특별한 연계 없이 반독쟁투쟁을 전개했다. 이번 선거가 총체적 부정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던 학생들은 “허약한 후진국의 민중을 대변할 사명감이 있고 타협을 배제한 순수한 정의감의 발로에서 민중의 힘을 과시하는 시위”를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
  학생운동 진영은 6월 12일경부터 본격적인 집회와 시위로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시작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498~499쪽).

 6월 13일부터 박정희 정권이 차례로 여러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지만 학생운동권의 부정선거 규탄투쟁은 7월 초까지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7월 8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 뒤부터 언론의 보도는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9월 11일 서울대 상대에서 시위가 일어난 것을 마지막으로 1967년 2학기에 대학가에서는 부정선거 규탄투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8월 말까지도 강경한 태도로 부정선거 규탄투쟁을 벌이던 신민당은 내부에서 협상론이 강해지자 방향을 그쪽으로 틀었다.

  10월 30일 김종필이 국회 정상화를 위한 대표회담을 제의하자, 신민당은 이를 수정하여 전권대표자회담을 제의했다. 1967년 11월 6일 공화당의 백남억·김진만과 신민당의 윤제술·김의택 사이에 회담이 열렸다. 그 결과 11월 20일 여야의 공동성명서와 의정서가 합의되었다. 의정서의 내용은 지역구 선거관리위원회를 여야가 추천하는 각 3명씩으로 할 것, 각급 선관위의 권한 강화, 선거법 조항 검토와 개정, 기탁된 정치자금의 의석별 배분, 6·8 선거부정조사 특별위원회 설치 등이었다. 한편 신민당은 내부에서 원래의 투쟁 원칙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반발도 있었지만, 일단 등원하기로 결정했다. 1967년 11월 29일 신민당 당선자들은 국회에 등원하여 의원선서를 마쳤다(같은 책, 515쪽).

 동아일보는  11월 29일자 2면 사설(「국회 정상화의 조건」)을 통해 6·8 부정선거 규탄투쟁 이후 정치권이 할 일을 이렇게 정리했다. “어떤 위헌적 불법적인 짓을 해도 그저 힘만 세면 별 일 없이 넘어간다는 관례를, 힘 아닌 법을 만드는 국회가 남겨서는 안 된다면, 사리는 자명하다. 국회의 정상화는 실로 원의 구성 그것의 정상화에서 비롯한다고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다. (·····) 여야 협상의 합의의정서를 확인하고 실천하는 일이 다시금 국민적 주시를 받을 대목인데, 벌써 여당 쪽 대표 또는 간부들이 엉뚱한 말을 하곤 한다는 보도는 우리를 몹시 불쾌하게 만든다. 제7대 국회는 그 임기 개시 이래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을 자성하고, 또 국회가 여야의 흥정의 자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해야 할 줄 안다. 우리는 원의 새로운 구성, 국정감사 및 세법과 예산의 심의다운 심의는 국회가 정상화의 표시로서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내야 할 조건이라고 믿는다. 국회 정상화가 바로 정상적인 국회 운영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어야 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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