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미국, 미군정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책임져야 ①

- [연재] 고승우의 ‘미국의 한반도 개입 151년’ (17)

기사승인 2022.05.11  18:12:07

공유
default_news_ad2
미군정 실시 후 등장한 미군사고문단(KMAG)은 주한미군의 하부 조직으로 이승만 정권 등장, 친일군대와 경찰 조직, 한국인 민간인 학살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가장 중요한 조직이었다. 미군사고문단에 대한 정확한 파악 없이 한국 근현대사가 제대로 정립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군사고문단, 한국 내 친일과 친미세력 등장에 핵심적 역할

미국은 2차대전 종전 이후 남한에서 시작한 미군정을 통해 남한을 소련 공산주의 저지 교두보로 삼기 위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미군사고문단을 만들어 신생 국가 정부의 필수 조직인 군과 경찰을 만들거나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는데 활용했다.

미군은 2차대전 종전 후 남한에 점령군으로 들어온 뒤 미군사고문단을 만들어 일본인 관헌을 식민지 통치 조직에 복귀시키고 일본군 장교 출신 친일인사들을 앞세워 군, 경찰 인력을 뽑도록 해 민족정기를 짓밟는 조치를 취했다. 미군사고문단은 미군정하에서 남한 내 군, 경찰 초기 기구를 조직할 때 일본군 장교 출신 친일인사를 우대하는 대신 독립군 출신 참여는 배제하면서 친미세력 확충의 기반을 만들었다.

미군정은 남한 점령의 목표를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주의 세력을 저지하고 미국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으로 새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에 두고 신생국가 정부의 가장 중요한 조직인 군과 경찰을 친미세력으로 채우기 위해 해방정국에서 응징당했어야 할 친일세력을 적극 기용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를 위해 미군정은 미군사고문단을 앞세워 광복군이나 독립국 건국을 추진하던 남한 내 모든 세력을 인정치 않고 미국의 이익 관철을 위해 만든 국방경비대와 일본군 장교 출신들을 주로 입학시켜 미국식으로 훈련한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새 정부의 군, 경찰 조직을 장악하게 만들었다.


미군정, 남한내 군경 조직 때 독립군 출신 배제

미군정은 국방경비대와 군사영어학교에 참여시킬 한국인을 선발할 때 일본군 장교 출신인 이종찬, 백선엽 등을 앞세워 인선 작업을 주로 시키면서 “광복군 출신 등은 일본군 출신과 달리 미국군대가 선호하는 기율이나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식의 기록을 남겼다. 한국군 창설이 미군과 일본군 장교 출신들에 의해 이뤄지면서 그 창군 이념 등이 부실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군정 실시 후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에서 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고 6.25 한국전쟁 직후부터 보도연맹사건, 대전교도소 집단학살 사건 등 수많은 민간인학살이 발생했다. 미군정 이후 정전협정이 맺어지는 기간 동안 미군은 한국인 학살이 발생한 군사작전을 지휘했고 학살현장에는 한국군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미군사고문단이 존재했다.

미군사고문단은 미국의 한국군에 대한 무기 등 군수품 공급과 재정지원을 집행하면서 한국군 총참모총장에서부터 대대장까지 같은 사무실을 쓰고 현장방문 등에 항상 동행해 조언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미군사고문단 소속원들은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 민간인 학살이 발생할 당시 학살 현장에서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찍어 오늘날까지 보관되고 있다. 미군사고문단 소속원들은 중대하거나 긴급한 사안은 미국 정부에 직접 보고하기도 했는데 학살 현장사진은 보고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이승만 정권 수립 이후 미군사고문단은 한국 군경에 필요한 무기와 각종 군수품 등을 미국 정부로부터 조달해 공급하는 우월한 입장에서 한국군 최고 지휘부와 전군 대대장급 지휘관과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면서 한국군의 모든 작전, 주요 사안 등에 개입했다.

한국 민간인 학살 책임문제에 대해 미군은 민간인 학살현장을 기록했을 뿐 개입하지 않았다는 입장이지만 진실화해를위한조사위원회는 미군이 통제하고 미군사고문단이 개입한 제주 4.3사건은 미국 책임이라는 결론을 제시했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직후 맥아더 장군이 유엔사령관으로 임명된 뒤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경우는 유엔과 미국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미군정의 미군사고문단 조직

주한미군사령관 겸 미군정청 군정사령관 J. R. 하지 중장은 미국 정부의 동북아 점령정책에 따라 총독부의 행정기관을 그대로 존속시키고 일본인 직원을 행정고문이라는 명칭 아래 남아 있게 하면서 남한 전체 주민의 반발을 사는 등 큰 논란을 빚었다.

미군정은 1945년 11월 미군정 법령 제28호로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산하에 경무국과 군무국(軍務局)을 두고 남한 내의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군사기구를 조직하기 위해 미군 40보병 사단 장교 18명을 차출해 남한 각 도에 하나씩 8개 자치경찰대를 조직케 했다.

맥아더 장군은 하지 준장이 자치경찰대를 군대 수준으로 무장시키는 방안을 건의하자 미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낸 뒤 자치경찰대가 미군을 대신해 치안유지 기능을 담당할 수준으로 미국 무기와 장비 등을 공급하라고 지시했다.주1) 그러나 1945년 12월 미소가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정부 수립을 결정하자 미국 정부는 맥아더에게 지시를 내려 소련이 오해할 수도 있으니 치안경찰 병력 2,500명에게만 치안유지용 미군 무기를 공급하고 군대가 보유하는 무기는 3상회의 추가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연기하라고 지시했다.주2)

개개 자치경찰대는 미 군사고문단이 제시한 인력선발 기준에 따라 지역별로 인원을 선발했다. 당시 미 군사고문단이 제시한 인원 선발 기준에 따라 일본군 출신 경력자가 주로 뽑히게 된 반면 중국 부대나 독립군 부대의 경력자들은 대부분 미국에 의해 제시된 근대적 기준에 미달해 탈락했다.주3)


미군, 군사영어학교 만들어 친일 조선인 대거 입교시켜 우대

미 군사고문단은 자치경찰대에 무기와 소요 경비 등을 제공해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미군정의 희망대로 따라줄 친일 성향의 인력이 대거 자치경찰대에 참여하게 됐다. 1946년 4월 경찰자치대가 2천 명이 되었고 1948년에는 5만 명으로 불어났다.

미군정은 군사영어학교를 개설해 일본군 장교 출신 조선인들을 대거 입교시켜 친미세력의 배출처로 삼았는데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 임명된 육군참모총장은 초대부터 18대까지 일본육군사관학교나 미군정의 군사영어학교 졸업자들이었다.

일제하에서 일본경찰은 조선인에게 악명을 떨치면서 포악하게 굴어 해방정국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자 미군정은 종래의 경찰 조직을 해체하고 조선인 중심의 경찰을 조직하려 했는데 해산된 일본 경찰의 40%는 조선인이었다.

미군정은 이들 일제경찰 출신 조선인들이 대부분 하위직이라는 점에서 경찰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해방과 함께 폐쇄된 일본경찰간부학교를 1945년 10월 다시 열어 1개월 단기코스로 경찰간부 교육을 실시했다.주4) 이는 결국 일제경찰출신들이 혜택을 보게 되고 경찰이 친일세력의 온상이 된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미군정은 남한내 치안상태가 불안해 경찰만으로 대처가 불가능하다며 군대를 육성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자치경찰대를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와 경찰대로 분화시켰다. 미군정은 미군사고문단을 만들어 이들 부대에 대한 무기 공급과 재정지원 및 조직과 훈련을 담당하도록 했다.주5) 미군정은 이어 1946년 5월 국방경비사관학교를 창설하여 간부 육성체계도 확립했다.


제주 4.3사건 발생 당시 미군 대위가 현지 경찰 통제

 

여순사건 등 한국 민간인 집단학살 현장에서 집행은 한국군경이 맡았다. 하지만 미군사고문단 소속원은 한국군 최고지휘부나 대대이상 부대 지휘관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주요 작전 수행시 동행했다는 것을 원칙으로 행동했다는 점에서 미군이 학살 책임을 면키 어렵다. 미군사고문단은 한국 민간인 학살에 대해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한 기록이 없고 맥아더 장군은 학살문제에 대해 외면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제주 4.3사건이 발생할 당시 제주도는 미군 대위가 책임자로 있던 수 명의 미군부대가 남한 경찰을 통해 통제하고 있었다. 미군은 두 대의 정찰기와 소해정 두 척을 보유하고 있었다.주6) 미 군정은 제주 4.3사건 발생 후 일 년이 지난 1949년 3월 제주도에 파견한 미군 진상조사팀을 통해 남조선로동당의 사주에 의해 발생했다고 결론 내렸다.주7)

미군은 1949년 8월 제주 산악지역 마을 전체를 파괴한 작전을 성공한 작전이라고 평가했다.주8) 미군은 민간인 학살을 기록했을 뿐 개입하지 않았다고 기록주9)했고 1949년 5월 서울에 주재하던 미국대사는 워싱턴에 제주 반란군과 동조자들이 살해되고 체포되거나 전향했다고 보고했다.주10) 6.25 전쟁이 나자 미군은 미군사고문단 단장이었던 윌리엄 로버트 준장을 제주지역 미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주11)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제주 4.3사건이 미군정 치하에서 발생했고 1948년 8월까지 미군 대위가 치안대의 책임자로 있었다는 점에서 미군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책임이라고 결론 내렸다.주12)

여순사건이 발생해 한국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이 최고 2천여 명이 사망했다. 당시 한국군 개개부대는 미군 사령관의 지휘와 미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았고 미군 항공기가 병력 이동에 동원되었다.주13)


이승만 정부 이후에도 미국이 한국군 통제권 유지

 

여순사건 등 한국 민간인 집단학살 현장에서 미군사고문단 소속원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찍어 주한미군 지휘부나 미국 정부에 보낸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집단학살을 주한미군, 미국 정부 차원에서 업무의 일환으로 규정한 것 아니냐 하는 의혹을 사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직후 1948년 8월 26일 한·미 군사안전잠정협정이 맺어져, 한미 두 나라는 미군이 철수하지만 한국 정부가 국가안보를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미국이 한국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면서 한국군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주14)

이에 따라 한국군에 대한 훈련과 무기 공급 등 병참지원 등을 담당할 주한미군사고문사절단이 설치되고 그 산하 기관인 임시군사고문단(PMAG)의 단장에 윌리엄 로버츠(W. L. Roberts) 준장이 임명되었다.

한국은 정부수립 이후 1948년 8월 16일 국방부장관 훈령 제1조에 의해 조선경비대는 '대한민국 국방군'으로 호칭되고 그 해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는 국군에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경비대는 육군으로 개편되었고, 국군조직법에 의해 국방부 내에 참모총장과 참모차장을 두고 그 아래 육군본부와 해군본부가 설치되었다.

1948년 12월 한국 정부가 국방부를 발족하면서 육해공군이 구성됐고 이응준 소장이 초대 참모총장이 되었다.주15) 미군정은 새로 발족한 한국군에게 무기를 1949년 3월까지 보병 5만 명을 무장시킬 정도만을 공급했는데 당시 한국군은 육군 65,000명, 해안경비대 4,000명, 경찰 45,000 명이었다.주16)

임시군사고문단은 대한민국 국군의 조직.훈련 및 무장을 지원하다가 1949년 6월말 주한미군의 철수가 완료되자 7월 1일부로 500명의 인원으로 미군사고문단(KMAG)으로 발족해 한국군경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행사했다.

미국은 남한에서 미군정을 종식시키고 미군 철수를 결정했지만 남한의 경제 성장이 일본 경제와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부합한다면서 남한에 대한 경제 지원을 계속할 입장을 밝혔다.주17)

미군사고문단은 한국에 대해 군사원조의 집행, 미군장비 및 무기의 이양, 한국군의 편성 및 훈련지도 등의 업무를 주관하였고 한국 육군, 해안경비대, 경찰로 구성된 한국치안대를 조직, 관리, 무장,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미군사고문단, 한국군 조직훈련과 불순세력 제거 임무

미군사고문단은 한국 육군. 해안경비대. 경찰로 구성된 한국치안대를 조직, 관리, 그리고 무장,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고, 추가하여 한국국내 치안과 질서 유지, 38도선의 방어. 불순세력 제거. 게릴라 침투방지와 방어전쟁 수행, 그리고 해안질서 및 치안유지 등에 관하여 자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미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초, 북한군이 기동력을 갖춘 8개 사단과 기갑여단, 2개 보병사단과 T-34 탱크 부대 등을 보유하고 소련의 지원으로 전면전을 개시할 태세였지만 남한 전력은 매우 열세라면서 미 정부에 한국군 전력 증강을 강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전쟁이 날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주18) 1950년 8월 맥아더는 한국군 병력을 필요한 만큼 증원하도록 주한미군에 지시했다.

미군사고문단은 전쟁이 발생한 직후 한국군이 한강교에 폭약을 설치하는 작업을 지휘하고 서울을 포기할 경우에 대비했으나 한국군이 사전통고도 없이 폭파해 버리자주19) 서울을 탈출하는데 큰 곤욕을 치렀다. 당시 수많은 피난민이 교량을 건너는 상황이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군사고문단은 그 후 1951년 중반까지 한국군 상대역에 대한 직접적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패퇴하는 한국군 병력을 규합해 북한군의 전진을 막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주20)

1952년 6월 23일 소련이 정전 협상을 시작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고 미국은 한국군이 자체 방위력을 갖도록 집중 지원했다.주21) 미국은 미군 대신 한국군이 더 많이 전선에 투입되어 자체 방위력을 갖춰야 한다면서 미군사고문단이 한국군에 대한 밀착강도를 높기 위해 그 인력을 1951년 12월 종래의 800명에서 1,800명으로 대폭 증원했다.

또한 미군사고문단 소속원이 한국군 지휘관과 더욱 긴밀히 접촉토록 조치했는데 예를 들어 미군사고문단 단장의 경우 한국군 참모총장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동행했다.주22) 한국군은 1953년 20개 사단, 병력 50만 명으로 급성장했는데 이는 미군사고문단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평가됐다.주23)


미군사고문단, 남한 군과 경찰의 실질적 감독기구

주한미군은 1949년 4월 2일 남한에서 철수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면서 미군사고문단은 그 조직을 확대 개편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에 따라 미군은 한국군 부대의 대대까지 한국군 경찰에는 지구대 사령부까지 해안병비대는 전체 부대에 미군사고문단 소속원을 파견할 조치를 취했다.주24)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사고문단은 맥아더 장군의 극동사령부로 편입되었다가 다시 제 8군의 지휘통제를 받게 되고 1953년 협정체결로 임시 주한 군사고문단, 그 해 9월에 임시 주한 미국 합동군사원조고문단으로 통합되었다. 1956년~1963년까지 인원이 2,878명으로 늘었다. 1971년 4월 1일 주한 미군 합동고문단으로 정식 조직이 되었다.

미군사고문단은 맥아더 사령부와 긴밀히 접촉하면서 대표가 주기적으로 동경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해 한국군 교육 문제 등을 조율하면서 남한내 정치군사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주25)

미군사고문단은 당시 무초 대사의 지휘를 받고 있었지만 로버트 대장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주한미국대표부(AMIK)와 미군사고문단은 남한에 대한 군사원조 문제를 협의 결정해야 하는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군사고문단은 남한 군정과 관련한 군사 및 행정 문제의 경우 미 국방부에 직접 보고했다.주26)

미군사고문단과 그 소속원들의 법적 지위는 한미 정부간 협정으로 보호하고 있었는데 미군사고문단 간부와 그 가족들은 주한미국대표부 외교관에게 부여된 면책 특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형식상 미군사고문단은 주한미국대표부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주27)

미군사고문단은 그 소속원을 한국 국방부 장관, 참모총장, 각 군 총사령관 실은 물론 일반 기술 및 행정군 부대와 해안경비대, 경찰에까지 파견했다. 이론적으로 미군사고문단 소속원들은 파견된 한국군 부처 책임자들의 도움을 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형식을 취했다.

로버트 장군은 미군사고문단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남한군 상대역과 같은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면서 부대원을 점검하거나 매일의 업무 또는 문제를 공유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미군사고문단은 별도의 지휘부 건물을 마련치 않고 한국군 사령부에서 상대역 옆에서 업무를 보는 방식을 취했다. 단지 로버트 장군과 그 참모 행정요원 등만이 별도의 사무실을 사용했을 뿐이다.주28) 미군사고문단은 남한 군과 경찰의 실질적 감독기구였다. <계속>

 
주)

1) Incl to Ltr, Hq USAFIK, 18 Nov 45, sub: Report of Proceedings of Board of Officers, USAFIK files. (2) Rad, CAX 55238, USAFPAC to War Dept, 26 Nov 45.

2) JCS 1483/20, 30 Dec 45. JCS approved the recommendations on 9 January 1946

3) Sawyer, Robert. Military Advisors in Korea: KMAG in War and Peace. Washington: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1962.

4)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 Summation of NonMilitary Activities in Japan and Korea, No. 1, September and October 1945, pt. V,

5) Hereafter cited as Summation. (2) Hq, Far East Command, History of Occupation of Korea, pt. III, ch. IV, pp. 9-10, MS in OCMH files. (3) Interv with CoArgo, 21 Nov 51. Unless otherwise cited, all interviews, letters, and notes are in OCMH files.

6) Johnson, Chalmers (January 23, 2001). Blowback: The Costs and Consequences of American Empire (2000, rev. 2004 ed.). Owl Book. pp. 99–101. ISBN 0-8050-6239-4. According to Chalmers Johnson, death toll is 14,000–30,000 / Col. Jimmie Leach, as told to Matt Hermes (January 10, 2006). "Col. Jimmie Leach, a former U.S. Army officer, recalls the Cheju-do insurrection in 1948". beaufortgazette. Retrieved March 29, 2009

7) The National Committee for the Investigation of the Truth about the Jeju April 3 Incident (December 15, 2003). "The Jeju April 3 Incident Investigation Report" (PDF). Office of the Prime Minister, Republic of Korea. p. 144. Archived from the original (PDF) on September 21, 2015. Retrieved August 17, 2015.

8) Michael J. Varhola (2000). Fire and Ice : The Korean War, 1950–1953. Da Capo Press. p. 317. ISBN 1882810449.

9) Hideko Takayama (June 19, 2000). "Ghosts Of Cheju". Newsweek. Retrieved March 30, 2009.

10) Johnson, Chalmers (January 23, 2001). Blowback: The Costs and Consequences of American Empire (2000, rev. 2004 ed.). Owl Book. pp. 99–101. ISBN 0-8050-6239-4. According to Chalmers Johnson, death toll is 14,000–30,000

11) "U.S. Gen. Roberts, center, back, commanded the operation in Jeju. Image courtesy Yang Jo Hoon". Jeju weekly. Retrieved May 4, 2013.

12) The National Committee for the Investigation of the Truth about the Jeju April 3 Incident (December 15, 2003). "The Jeju April 3 Incident Investigation Report" (PDF). Office of the Prime Minister, Republic of Korea. p. 654. Archived from the original (PDF) on September 21, 2015. Retrieved August 17, 2015.

13) Hart-Landsberg, Martin (1998). Korea: Division, Reunification, & U.S. Foreign Policy. Monthly Review Press. pp. 87–88. ISBN 978-0853459279

14) House Report 2495, Background Information on Korea, Report of the Committee on Foreign Affairs, Union Calendar 889 (Washington, 1950), pp. 15–16.

15) MHK, pp. 21–22. (2) Ltr, West to author, 2 Sep 52.

16) DA Rad, WARX 86359 to CINCFE, 29 Mar 49. 24 (1) Notes attached to Ltr, Roberts to Smith, 26 Jan 54. (2) Hq USAFIK,
Hist of the G–3 Sec, 15 Jan–30 Jun 49.

17) Millett, Allan. The War for Korea, 1945-1950: A House Burning. 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172

18) Appleman, Roy. U.S. Army in the Korean War: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Washington: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61. 8

19) (1) Interv, Col Wright. (2) Interv, Col Lewis D. Vieman with Col Appleman,
16 Jun 54. (3) MS prepared by Lt Col Lewis D. Vieman, 15 Feb 51, in OCMH files. (4) See also Ltr, Col Sedberry.

20) Sawyer, Robert. Military Advisors in Korea: KMAG in War and Peace. Washington: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1962. 125 - 143

21) Gibby, Bryan. “Fighting in a Korean War: The American Advisory Missions from 1946-1953.” PhD diss., The Ohio State University, 2004. 185

22) Gibby, “Fighting in a Korean War”, 193

23) Hausrath, Alfred H. The KMAG Advisor: Role and Problems of the Military Advisor in Developing an Indigenous Army for Combat Operations in Korea. Chevy Chase,
Maryland: Operational Research Office, Johns Hopkins University, 1957.

24) (1) DA Rad, 86379, CSGPO to CINCFE (info CG USAFIK), 24 Mar 49.
(2) DA Rad, 86425, CSGPO to CINCFE, CG USAFIK, CG USAFPAC, 30 Mar 49.
(3) Hq USAFIK, Hist of the G–3 Sec, 15 Jan–Jun 49.

25) DA Rad, WARX 90992, 1 Jul 49. (2) KMAG Relationship With FEC,
Orientation Folder (OFldr), sec. I. This folder, undated, was compiled in the
spring of 1950 by General Roberts for his successor. Copy in OCMH files.

26) Interv, Col Wright, former CofS, 미군사고문단, 5 Jan 53. (2) Advisor’s Handbook, 17 October 1949, an. 3 to Semiannual Report, Office of the Chief, U.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 period ending 31 December 1949.
Hereafter this semiannual report and the 미군사고문단Semiannual Report, dated 15 June
1950, will be cited as SA Rpt, 미군사고문단, and will carry appropriate date.

27) HR–미군사고문단, an. 15, pp. 14, 15. According to this report, from 1 July 1949,
when the interim military agreement expired, to the end of 1949 (and presumably
until the 미군사고문단agreement was signed on 26 January 1950), the advisory group
“continued with the status of diplomatic immunity [previously] existing.”

28) (1) SA Rpt. 미군사고문단, 31 Dec 49, sec. I, p. 3 (see also an. 3, Advisor’s Handbook, pp. 1–5). (2) 1st Lt. Martin Blumenson et al., Special Problems in the Korean Conflict (hereafter cited as Blumenson, Special Problems), Hq EUSAK, III, pt. 14, ch. 1, 2, in OCMH files. (3) Ltr. Col Hansen, 2 Aug 52.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