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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필화 사건’

- 동아일보 대해부 3권 - 16장

기사승인 2022.05.18  10: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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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사가 발행하는 월간 <신동아> 1968년 12월호에는 「차관(借款)」이라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는 동아일보사가 독재정권을 상대로 싸우다가 수난을 당한 대표적인 경우들 가운데 하나인 ‘신동아 필화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다. 
 <동아일보사사 권3>은 그 사건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68년 11월에 일어난 세칭 신동아 사건은 60년대 언론계가 압도하는 정치권력 앞에 무참히 짓밟힌 비극이었고, 중앙정보부의 폭거에 본보가 정면으로 대결, 고군분투하다가 세 불리하여 굴욕을 강요당한 분노의 기록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월간 <신동아>가 68년 12월호에서 정부의 ‘차관 도입’의 병리현상을 과감히 해부함으로써 권력과 정면으로 혈투하다가 쓰러진, 한낱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실은 3선 개헌이라는 영구집권에의 길을 닦는 정치권력의 폭주 과정에서 그런 정치 목적 수행에서 장애요인을 하나 하나 제거하는 야수적인 정치탄압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신동아 사건은 언론을 침묵시키는 일대 결전이었고, 이 사건을 고비로 정부의 언론조작은 거칠 것 없는 대담성을 보이게 된 역사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318쪽).


 ‘신동아 필화 사건’의 발단

 신동아에 실린 「차관」이라는 특집기사는 동아일보사 편집국 정치부 기자 김진배와 경제부 기자 박창래가 공동으로 집필한 것으로서, 200자 원고지로 200장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 기사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박정희 정권이 외국에서 들여온 차관 가운데 일부를 어떻게 정치자금으로 돌려쓰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김진배가 쓴 그 내용에서 주요한 대목은 아래와 같다. 

  전 경제기획원장관으로서 지불보증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던 장기영 씨나 현 경제기획원장관인 박충훈 씨의 말 대로 지불보증으로 들여오는 외국 빚은 그 빚으로 공장을 세움으로써 수입대체 산업을 일으키고 수출을 촉진하여 고용을 늘리며 결과적으로 국민소득을 늘린다는 점에서 그 공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과오는 경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바로 정치자금의 가장 큰 파이프라인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집권자에겐 말할 수 없이 고마운 윤활유 구실을 하지만 야당에겐 참을 수 없는 극약으로 풀이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과연 현금차관, 외화 대부, 연불(延拂)들을 포함하여 20억 달러에 가까운 외국 빚을 얻어 오는 데 얼마의 돈이 정치자금 또는 뇌물 조로 바쳐졌을 것인가? 총체적으로 지불보증 사업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군정 말기인 63년에서 68년까지 지불보증에서 뜯은 돈은 상업차관 8억여 달러의 5%만 잡더라도 4천만 달러, 즉 1백억 원은 훨씬 넘으리라고 보는 것이 야당 의원들의 추산이다. 이 같이 엄청난 돈이 공화당이나 집권층에 흘러들어 갔다고 보는 견해는 아무 확증이 없지만 그 추산은 무리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단돈 1백만 원짜리 집을 하나 소개하는 데도 3%다 5%다 하는 복덕방 커미션이 있다. 1백만 원짜리 집을 사는 데 세금이 면제되는 것도 아니고 은행 융자를 지불보증해 주는 것도 아니다. 다른 장사거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에 반해 지불보증은 1천만 달러짜리 빚을 얻는 경우 외국의 업자와 우리 업자가 계약 당사자인 데도 빚보증은 정부가 서고 내자(內資)도 은행에서 10억 원이든 융자를 주고 공장의 기계를 들여오는 데나 물건을 파는덴 일정기간 세금이 안 붙는다. 어려운 말로 차관특혜, 면세특혜, 금융특혜라 하지만 극단의 경우 정부가 보아주기만 하면 맨 주먹으로 수십억 수백억 원의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길이 트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같은 특혜에 사례금(정치자금)이 없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그 근거다. 또 하나의 근거가 있다.
  공화당이 무슨 돈이 있는가. 공화당은 생산적인 정당으로 자처하지만 그렇다고 ‘생산적인 정치’를 하자는 것이지 물건을 만들어 팔아 돈을 버는 공장은 아니다. 지난 3년 동안 공화당의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에 의한 공식적인 수입은 중앙선관위에 기탁된 총액의 61%를 차지하지만 그것은 불과 1억4천7백만여 원이다.
  공화당이 이 돈으로 두 차례의 선거를 치렀고 거기다 3년 동안의 당 재정을 메우는 데 몇 %나 차지했을 것인가. 공화당의 67년 수입은 6억1천5백만여 원, 신민당은 3억6천5백만 원으로 돼 있다. 중앙선관위에 기탁되는 정치금이 여야 양당 수입의 단 몇 %밖에 안 되는 구우(九牛一毛)에 불과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공식적으로 보면 67년 한 해의 정치자금 수입 지출은 여야가 2 대 1의 비율을 보이고 있으나 이것도 장사들의 이중장부나 다름없는 겉치레다. 실제로는 두 차례의 선거가 있던 67년 한 해의 수입 지출은 공화당은 공식 자료에서 밝힌 6억여 원의 10배가 넘는 1백억 원 내외, 신민당은 3억여 원의 3배가 넘는 10억 원 이상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인 견해인 듯하다. 어떻든 선거 때는 여야 할 것 없이 다른 해보다 4,5배의 돈이 드는 것은 물론이지만 여야의 격차는 거의 10 대 1로 보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
  문제는 집권층과 외자도입업자와 관련된 정치자금의 파이프라인이 얼마냐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돈은 업자 쪽에서 집권자 쪽 다시 말하면 혜택을 받는 쪽에서 혜택을 주는 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은 상식이다.
  공화당 원내총무실의 연(年) 경상비만 해도 6천만 원, 중앙당의 연 경상비는 5억 원 내지 10억 원, 거기에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주요 부처와 관계기관 등에의 예산 외에 상당한 정치자금이 쓰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돈은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안정의 주춧돌로, 반공업무의 일환으로, 당의 조직 강화로, 대야공작으로, 민심 안정에 쓰일 것으로 보고 있다. 뒷거래 되는 돈은 흔히 의혹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수금의 방법과 관리하는 사람에 따라 그것은 정치체제 자체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까운 일본의 예만 보더라도 파벌의 보스가 정치자금의 수익 성적에 따라 그 권력의 소장(消長)에 영향을 미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이와는 다르다.
  작년 여름 집권층 정치자금의 관리인이 누구냐는 의문이 제기된 일이 있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일부에서는 공화당의 정치자금은 누구 혼자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4인이 공동 관리하는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4인 공동관리설도 구체적으로 4인 공동관리가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 지는 밝히지 못했었다.
  공화당 정치자금의 정확한 출처와 액수는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지고 다만 그 일부만이 어림짐작으로 수입 면에서가 아니라 지출 면에서 노출된 셈이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하는 속담처럼 문제는 이 연기가 아니라 아궁이에서 타는 연료가 얼마의 ‘달러’이고 얼마의 ‘원’이냐는 데 있다. 이것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이유의 하나는 정국이 안정되고 더구나 실질적으로 집권자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업자는 안심하고 혜택을 받을 만큼 성의 있게 바치게 되고 또한 정치적 중간보스가 없는 체제인 만큼 자금관리자들도 또한 일사불란하게 단일 루트를 통해 수금하고 분배하며 조금도 혼잡이나 차질이 없는 데도 있다. 지난 외자도입 특감 때 신민당의 정해영 의원은 외자도입 문제를 정치자금과 관련, “만약 이대로 나간다면 경제적인 부작용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것이 독점적 파이프라인으로 집중되는 한 권력과 재벌과의 결탁은 더욱 강화될 것이며 이 권력체계가 무너진다면 국민의 규탄은 권력층보다 오히려 재벌에 미칠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정 의원은 정치와 재벌과의 함수관계는 자본주의체제에서는 불가피한 현상이지만 여야 비율이 그래도 7·3제 정도라도 균형이 맞아야지 이 같은 독식체제에서는 공평한 정권 경쟁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정치권력과 외자도입뿐만 아니라 정치인과 외자도입을 보아도 이 같은 정 의원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을 갖고 있다. 국회의원의 겸직 금지가 사실상 휴지로 되고 있는 한국에 국회의원이라 해서 재산소유권을 포기하거나 외자도입을 단념할 수는 없겠지만 그 일부가 모두 앞에 지적한 대로 공화당의원 출신이거나 부자 간 또는 형제 간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데 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동아일보사사 권3>, 327~330쪽).


 중앙정보부,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을 연행

 박정희 정권이 외자도입에 대한 지불보증을 해주고 일정액의 커미션을 뗀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당시 어느 신문이나 방송도 그것을 심층적으로 보도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월간지인 신동아가 차관을 둘러싼 암거래의 내막을 과감하게 보도하자 박정희를 비롯한 정권 수뇌부가 대경실색했을 것은 분명하다.

  (···) 잡지가 나간 지 며칠 후인 11월 23일부터 「차관」 기사 필자들과 <신동아>지 실무진이 차례로 검거되기 시작했다.  
  필자의 한 사람인 경제부 박창래 기자는 23일 오전 11시 23분 출입처인 수산청 기자실에서 정보부원에 연행되었고 (···) 수사당국은 26일 낮 12시에 신동아부에 보관 중인 동 「차관」 원고를 임의 제촐 형식으로 가져갔다.
  다른 필자인 정치부 김진배 기자는 한국기자상 수상을 계기로 가지협회가 마련한 동남아 순방여행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25일 낮 12시께 김포공항에 도착 즉시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 기사의 취재 경위를 조사받았다. 
  <신동아>지 발간 주무부인 신동아부 손세일 부장도 25일 오후 4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 게재 경위 등을 심문받았으며 신동아부 심재호 기자와 이정윤 기자도 자진출두 형식으로 28일 오전 10시에 정보부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다.
  <신동아>지 주간인 홍승면은 29일 중앙정보부로부터 참고인으로서의 출두요구서를 받아 연행되었다.
  정치부 유혁인 차장도 29일 반공법 위반 혐의라는 이유 아래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
  (···) 김진배는 연 10여 일간 심문을 당하는 가운데 정치자금의 징수 및 배분 등에 ‘4인 공동 관리’ 운운하여 대통령비서실과 중앙정보부의 장을 들먹거렸다는 데 조사관들의 힐난을 받았고, 또한 차관 기사가 밝힌 정치자금의 조달방법, 차관에서 떼는 비율 등이 대체로 정확한 것임에 주목하여, “누구한테서 이런 국가기밀을 들었느냐”의 추궁이었다. 권력층 안에서 누군가 정치적 거래 등 국민에 알려서는 안 되는 것을 동아일보에 제보하는 자가 있지 않으냐를 캐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차관망국론을 펴고, 차관경제로 우리는 밖으로는 일본이나 미국의 경제에 예속시키고, 안으로는 소수 재벌들을 살찌게 함으로써 계층 간의 빈부격차를 촉진한다는 주장을 퍼뜨려 결과적으로 북괴에 이득을 주고 있으니, 이는 반공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수사관들의 입장이었다(같은 책, 330~332쪽).


 동아일보의 반격

 중앙정보부의 강압적 연행과 수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던 동아일보는 11월 29일자 1면에 그 사실을 알리는 기사를 5단으로 크게 올렸다. 동아일보가 반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본사 기자 5명 심문 / 정보부, 신동아지 ‘차관’ 기사 관련 / 보관 원고도 제출케 

   중앙정보부는 본사 발행 월간 <신동아>지 12월호에 실린 「차관」 제하(題 下)의 기사 내용과 관련, 필자인  동아일보 정치부 김진배 기자와 경제부 박창래 기자를 비롯, 신동아부 손세일 부장 및 심재호 기자, 이정윤 기자 등 5명을 차례로 연행 또는 자진 출두케 하여 지난 23일부터 그 중 몇 사람에 대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벌이고 있다. (·····)
   문제가 된 신동아지의 동 「차관」 기사는 김·박 두 기자의 공동집필로 방대한 규모의 외국차관 도입의 실태와 공과 및 그 정치적 경위 등에 얽힌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 2면에는 「신동아 필화」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통단(通 段) 사설이 실렸다.

  (···) 문제된 기사의 큰 줄거리를 살펴보면, 현재까지의 차관의 실태, 차관의 도입과 병행하여 생성된 재벌의 생태, 그 정치세력과의 관련과 특히 정치자금의 문제들에 관하여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정리한 뒤, 그러나 차관이 가져온 경제성장의 성과를 충분히 인정하여 이를 자세히 설명하는 한편으로, 정치에 결부된 차관의 무원칙하고 특혜적인 일면이 여러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왔다 하면서, 일반 소비자의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는 차관업체의 폭리, 차관을 얻고도 주체 못하는 업체를 위한 현금차관이나 대불(代拂) 같은 또 하나의 특혜, 닥쳐올 원리금 상환에 즈음하여 따라 나올 국제수지의 비관적인 전망 등을 역시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된 이 기사가 말하는 대로, 차관에 따르는 부정적인 부작용들을 억제하지 못하는 한 “흥하면 업자가 부자가 되고 망하면 국민이 망한다”는 뜻에서, 그것은 국민 전체의 절실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으며, 또 기사가 말하는 대로, “외자도입의 ‘공’을 쉽사리 부인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차관이 가져온 ‘과’는 불가피한 것이었느냐, 제거하거나 감소시킬 수는 없는 요소들이었느냐, 다시 말하여 차관 도입에 주도된 고도성장은 과연 그러한 희생 위에서만 가능하였느냐”라는 국가적인 절실한 반성이 필요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이 기사에서 다루어진 대부분의 자료와 논거는 이미 그때 그때  보도 논평된 것들이고, 이 기사가 크게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개별적인 보도의 내용이나 논평의 취지를 종합하여 차관과 그에 관련되는 사상(事象)의, 되도록 전모를 독자들 앞에 정리 제공한 점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차관이 가져온 부정적인 부작용들은 곧 우리 경제발전 자체를 저해하고 나아가 정치적 사회적인 부패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전 국민적인 지대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차관에서 온 긍정적인 성과를 종합 선전하는 그만큼의 성의를 가지고, 차관에서 오는 부정적인 부작용도 인정해야 마땅할 것이며, 만일 그러한 부작용이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소신이 정부에 있다면 그 소신대로 국민을 합리적으로 납득시켜야 할지언정, 그것은 결코 차관의 당사자들이나 정책수립자들 사이에서 어둠에서 어둠으로 은폐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정부가 아니 한 일을 기자가 한 것이다. 그들에게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벌을 주겠다는 것인가.
  정치자금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문제의 이 기사가 말하는 대로, “정치자금의 문서를 만드는 사람도 없거니와 그것을 밝힐 기관도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인 우리 사회에서, 정치자금에 다소 언급했다 하여 그 증거를 제시하라 한들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일부 업자에게만 치부할 수 있도록 특혜를 베풀고 있다”는 판단, “이들 혜택을 받은 업자로부터는 그 시혜의 반대급부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 공급을 받고 있다”는 판단은, 그 특혜를 주고받는 이들은 어떻게 볼는지 모르나, 그 밖의 제3자 어느 누구에게 묻더라도 이것을 통념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정치자금의 공개 내지 정화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다소의 차는 있을지언정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부정(不淨)하고 은폐된 것일수록 그 나라는 부패한 나라인 것도 물론이다.
  기자는 그 부패의 생태, 정치자금의 생태에 한 걸음 접근했다. 그것도 단정적인 서술일 수 없어서, 그 나름의 근거에서 조심스러운 서술로 시종(始終)했다. 정치자금의 생태를 완전한 증거 위에서 제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환경 속이라 하여 정치자금의 생태에 한 걸음 접근했다는 것만으로, 역시 상을 받지는 못할지언정 벌을 받는다 하면, 이것은 어느 기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언론의 사명을 질식시키는 일이요 부패를 방치 조장하는 일이요 사회정화의 싹을 자르는 일이요 따라서 우리의 반공역량을 약화시키는 일이 된다.
  소환되었던 몇몇 기자에 대한 출두요구서에 의하면, ‘반공법 위반 혐의’에 관련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어, 이 필화에 중앙정보부 직무의 제3항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되지만, 수사가 시작된 지 여러 날이 지나도록 구속영장도 발부받지 아니하고, 반공법 위반이라는 중대한 혐의를 거는 것이 과연 반공법 위반이라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어서의 수사인지 얼른 납득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정부의 차관정책을 비난한 기사가 계기로 되어 새삼스럽게 반공법 위반의 혐의를 건다는 것도 정부기관으로서 심히 떳떳해 보이지 않는 일이다. 국민 일반이,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이 공산주의의 준동을 막는 입법임을 알면서도 그것이 귀걸이 코걸이로 남용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는 수가 많은 것은, 중앙정보부 자체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구속영장 없이 오래도록 사실상의 구속 상태에 두고, 혹은 구속영장 없이도 얼마 동안은 소환할 수 있다 해서 무더기로 출두를 요구하여 여러 사람에게 막연한 불안을 주는 것이 반공법의 정신일 까닭은 없다. 더구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공공이 알아야 할 일을 알리는 기자에 대하여는 더욱 신중을 기한다고 하는 것은 종래에도 정부당국이 여러 번 다짐했던 일이다. 그것은 기자라 해서 특권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언론자유라는 국시가 저상(沮喪)됨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에서였던 것이다. 
  민중은 알 권리가 있고 매스컴은 알릴 권리가 있다. 차관으로 자립경제를 내다보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한다면, 차관이 부패나 국민 간의 지나친 불균형에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가도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한다. 민중이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알리지 않으려 하고, 매스컴이 당연히 알려야 할 것을 알리지 못하도록 하는 압력이 집요하다면 그럴수록 그런 독선과 이기(利己)는 전 국민의 이름으로 배격되어야 한다. 우리가 암흑 아닌 광명의 민주주의를 키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승공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면, 알 권리, 알릴 권리는 모든 무엇에 앞서 완전히 전취되어야 한다. 

 이 사설은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1961년의 5·16 쿠데타 이래 이렇게 강경한 논조로 집권세력, 그 가운데서도 특히 중앙정보부를 공격한 사설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신문사의 ‘공식 견해’인 이 사설은 동아일보가 독재자 박정희를 향해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앙정보부의 역공과 동아일보의 굴복

 11월 29일 신민당은 신동아 사건은 “관변 측이 음성적으로 언론을 탄압하던 수법의 일단이 노출된 것으로 보고 국회에서 진상을 규명할 작정이며 정부 측에도 해명을 요청하겠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사건 발생 1주일에 두 가지 점이 차차 명료해졌다. <신동아>가 심층취재한 「차관」 기사 내용이 허위사실도 왜곡보도도 아닌 것일 뿐 아니라 대부분 국회가 조사하고 논의한 것이므로 전혀 문제 안 되는 것인데, 정치자금을 뜯어내는 데 악용되고 있고 여기에 재벌과 정치권력이 유착되어 있다는 게 심히 정부·여당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 중앙정보부는 「차관」 기사를 아무리 따져도, 반공법에 얽어 공소할 수 있는 자신이 없는 한 그 이상 신동아 사건을 끌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중앙정보부는 사건을 매듭짓지 않았다. 오히려 확대하여 발행인 겸 부사장 김상만, 편집인 겸 주필 천관우, 신동아 주간 홍승면, 신동아부장 손세일을 연행하는 등 사태를 극한상황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차관」 기사로는 어느 모로 보나 그 이상 문제 삼기가 어렵게 되자 이를 덮어두고, 그 대신 그 무렵 <신동아> 잡지를 샅샅이 뒤져 정밀 검사한 끝에 1968년 10월호에 실린 미국 미주리대학 교수 조순승의 「북괴와 중·소 분열」에서 트집 아닌 트집을 잡아내, 이를 구실로 일대 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
  (···) 조순승 논문의 학술적인 가치는 차치하고, 이 논문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조순승이 김일성을 서술하는 데 있어 “1945년에 남만주 빨치산 운동의 지도자 김일성과 그 추종자들은 소련 태생이고 소련서 훈련받은 한국인들과 함께 소련점령군을 따라 북한에 들어왔다”는 구절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 구절 가운데 ‘남만주 빨치산 운동의 지도자 김일성’에 트집을 잡은 것이다. (·····)
  12월 2일 중앙정보부는 서울지검 이규명 검사가 청구, 서울형사지법 유태흥 부장판사가 발부한 압수수색영장에 따라 <신동아>지의 68년 10월호 소재(所載) 「북괴와 중·소 분열」의 영문 원고(필자 조순승)와 동 번역문 등을 비롯, 신동아부 월요회의록, 동 송고장, 서신, 영수증 등을 압수해 갔다. 
  그 이튿날인 12월 3일 오후에는 발행인 겸 부사장 김상만과 편집인 겸 주필 천관우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당초 이 두 사람에 ‘임의동행’을 요구했으나, 김상만과 천관우는 모두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당국은 김·천 두 사람에 대한 구인장을 서울지법에서 발부받았다(같은 책, 337~340쪽).

 동아일보사 부사장 겸 발행인 김상만은 「차관」 「북괴와 중·소 분열」에 관해 조사를 받은 뒤 12월 4일 오후에 석방되었다. 11월 29일자 사설을 집필한 편집인 겸 주필 천관우는 여러 날 동안 심문을 받은 뒤 12월 7일 풀려났다. 
 중앙정보부는 12월 1일 신동아 주간 홍승면과 부장 손세일을 연행해서 조사한 뒤 6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12월 7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아래와 같은 「사고」가 실렸다.

  본사 간행 <신동아>지 1968년 10월호에 게재한 논문 「북괴와 중·소 분열」(조순승 기고)에 관하여 동 영어 원문 중 일부의 오역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일반사회 독자 여러분에게 크게 심려를 끼쳐 드린 데 대하여 충심으로 사과의 뜻을 표합니다.

 <동아일보사사 권3>은 ‘신동아 필화 사건’의 결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2월 7일자 사고는) 굴욕적 타협의 신호탄이었다. 
  이틀 후인 9일에는 구속 중이던 홍승면과 손세일이 석방되었다. 그동안 본사 사장 고재욱과 문화공보부장관 홍종철 사이에 신동아 사건을 에워싼 담판이 벌어졌는데, 당국이 본사 관련자에 대한 법적 소추를 포기하는 대신 본보는 천관우·홍승면 및 손세일을 물러가게 한 것이다. 12월 10일 오전 11시에 소집된 본사 이사회는 ‘이사 겸 주필 천관우의 사표를 수리하기로’ 의결하였다. 이에 앞서 홍승면과 손세일은 석방되는 날로 ‘의원 해임’되었다. 그들이 구속 중에 측근자가 대신 사표를 제출하였던 것이다. 「차관」 기사의 필자인 김진배는 출판국 출판부로 자리를 옮겼다(343~344쪽). 

 1968년 <신동아> 12월호에 특집기사 「차관」이 나간 뒤 중앙정보부가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에게 탄압을 가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그 회사의 경영진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천관우가 쓴 11월 29일자 사설이 지면에 실린 것은 경영진의 동의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탄압의 손길이 실질적 사주인 김상만에게까지 뻗치자 사장 고재욱은 정권의 대리자인 문화공보부장관 홍종철과 밀실 담판을 하면서 천관우와 홍승면, 그리고 손세일을 제물로 삼아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궁지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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