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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 개헌에 가위 눌린 동아일보

- 동아일보 대해부 3권 - 17장

기사승인 2022.05.25  09: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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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체적 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선인 원내 의석 3분의 2 이상을 휩쓸어 간 공화당 주류세력은 1968년 5월부터 3선 개헌을 위한 정치공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박정희의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청와대 비서실장 이후락이 그 공작을 ‘진두 지휘’했다. 그리고 백남억, 길재호, 김성곤, 김진만을 중심으로 한 공화당의 ‘4인 체제’가 김종필 계열 등 개헌 반대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968년 5월에 터진 ‘국민복지회 사건’이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김종필의 측근인 국회의원 김용태가 국민복지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1971년 대통령선거에 김종필을 후보로 내세우기 위한 공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김용태 등은 고문을 못 이겨 조작된 혐의를 시인한 뒤 5월 25일 공화당에서 제명당했다. 김종필은 그 사건에 ‘사죄’하는 뜻으로 5월 30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5·16 쿠데타세력의 2인자이자 박정희의 조카사위인 김종필도 그의 종신집권 야욕 앞에서는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화당의 ‘3선 개헌’ 애드벌룬 띠우기

 공화당의 개헌추진세력은 1968년 12월 말부터 개헌 논의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공화당 의장 서리 윤치영은 1968년 12월 17일 부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이 원한다면 개헌을 단행하겠다고 하였다. 이어 사무총장 길재호는 1969년 1월 6일 헌법 개정 문제를 신중히 검토 중이라고 밝혔고, 다음날인 1월 7일 다시 윤치영이 조국 근대화라는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개헌 문제를 연구해야 하며, 민족중흥을 위해 강력한 리더십을 유지해야 하니 대통령 연임 금지 조항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1월 9일 정책위원장 백남억은 당무회의에서 다시 3선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개헌 추진파들은 현재의 야당은 퇴폐한 이합집산과 이질적 세력 간의 분파 다툼으로 집권의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므로 신민당에게 정권을 넘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며, 공화당의 경우도 권력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박정희를 대체할 지도자가 부각되지 않고 있으므로 정치적 안정과 조국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집권 연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국민주화운동사 1>, 517쪽).

 1월 10일 박정희는 연두 기자회견에서 개헌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동아일보는 그 날짜 1면 머리에 그 내용을 크게 보도했다.

  개헌 논의할 때 아니다 / 박 대통령 새해 첫 기자회견 / 국방력 강화·고도 성장에 총력 / 물가 6% 선 억제/ 일본·북괴 접근 중시 / 임기 중 개헌할 의사 없으나 / 필요하면 연말에도 안 늦어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 태세의 강화와 지속적인 경제의 고도성장을 금년도의 가장 큰 시정목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 그는 또 최근 양성화되고 있는 개헌 논의에 대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내 임기 중 헌법을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심경”이라고 언급,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꼭 있다 해도 연초부터 왈가왈부하는 것은 좋지 못하며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 얘기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밖에 새해 외교정책의 지표가 자주국방 태세 확립과 관련된 안전보장외교와 경제외교 강화라고 밝히고 특히 일본의 대 북괴 이중외교 정책에 언급, “한국의 안전이 바로 일본의 안정과 직결된다는 것을 일본 정부 지도자와 국민들이 인식해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박정희가 개헌을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 얘기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은 실질적으로 3선 개헌을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마땅한 그 특유의 어법이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1월 11일자 2면 사설(「박 대통령의 새해 포부」)에서 개헌 문제에 대한 박정희의 발언에 관해 물에 물 탄 듯한‘견해’를 밝혔다.

  (···) 아마도 가장 큰 관심의 초점은 개헌 논의에 대한 박 대통령의 논평인 것으로 본다. (·····)
  개헌 시비가 양성화된 것은 근자의 일이지만 화제 자체는 실상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명백한 것은 이 나라에 3선 개헌을 적극 찬성하는 측이 있고 강력히 반대하는 층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가 조만간에 공식화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일 공식으로 그것이 제안된다면 국회에서 먼저 가부간 처리될 것이고, 만일 국회에서 그것이 가결된다면, 다시 국민투표에 붙여져 오직 국민대중만이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다. 
  우리는 개헌에 대한 찬반 그 자체보다도 그러한 과정이 빚어내는 국론의 분열, 국력의 분산을 신중히 고려해야겠다. 그것이 국방력 강화와 경제력 강화 및 사회 융화력의 강화라는 국가의 당면 과제에 미치는 영향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개헌에서 비롯되어 71년의 선거까지 정치적 동요 내지 불안이 만성화하는 일이 있다면, 민족중흥의 위대한 시기를 예기치 않는 일로 적지 않게 낭비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박 대통령이 관찰한 대로 현행 대통령제헌법이 과거의 헌법보다 나은 헌법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개헌은 자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 박 대통령 이하 모든 국민, 모든 정치인이 동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을 원칙보다 앞세워야 할 이유나 명분에 수긍할 점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박 대통령 주장대로 지금이 개헌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고 믿는다. (·····)
  따라서 개헌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하더라도 정치 변동기를 최소한으로 단축시켜야 한다는 정치적 지혜를 포기치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유는 명명백백하다.
  정치 변동기는 곧 정치의 불안을 뜻하며, 그것은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진보에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설은 실질적으로 3선 개헌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박정희의 노회한 ‘수사법(修辭法)’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개헌안이 공식으로 제안된다면 “국회에서 먼저 가부간 처리될 것이고, 만일 국회에서 그것이 가결된다면, 다시 국민투표에 붙여져 오직 국민대중만이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전망’이 바로 그것이다. 공화당이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국회에서 3선 개헌안이 부결될 가능성은 전혀 없고, 그것이 통과되어 국민투표로 넘어간다면 박 정권이 관권과 금권을 총동원해서 ‘국민대중’의 ‘승인’을 얻어낼 것은 명백한 사실 아닌가? 

 더구나 이 사설은 개헌에 대한 찬반 논의가 ‘민족중흥의 위대한 시기’에 미칠 악영향을 걱정하고 있다. 공화당의 기관지나 다름없는 논조를 교묘하게 포장해서 독자들의 판단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신동아 필화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에 대해 굴욕적으로 백기를 든 동아일보가 어떻게 변질되고 있는가를 이 사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박정희, ‘개헌 문제로 신임 묻겠다’

 청와대와 공화당,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3선 개헌 추진세력은 개헌 작업을 음양으로 밀고 나갔다. 

  이에 공화당 내 개헌반대파들은 1969년 4월 8일 신민당이 제출한 권오병 문교부장간 해임건의안에 찬표를 던져 가결되도록 했다. 4·8 항명이라 부르는 이 사건이 터지자 격노한 박정희는 주동자 색출을 엄명했고, 4월 15일 양순직, 예춘호, 김달수, 박종태 등 5명의 의원과 93명의 당원이 공화당에 서 제명되었다.  
  이들을 제거한 후 개헌추진파들은 본격적으로 반대파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5월 7일 윤치영 공화당 의장 서리는 충분한 시기를 두고 개헌 문제를 검토하겠다고 하면서, 당원을 대상으로 개헌 설문조사를 지시했다. 특히 반대세력의 핵심이던 김종필이 태도를 바꾸어 1969년 6월경부터 개헌을 설득하고 다니면서 공화당 내 반대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 드디어 1969년 7월 25일 박정희는 “1)기왕에 거론되고 있는 개헌 문제를 통해 나와 이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는다 2)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될 때에는 그것이 곧 나와 이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임으로 간주한다 3)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때에는 나와 이 정부는 야당이 주장하듯이 국민으로부터 불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나와 이 정부는 즉각 물러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같은 책, 518쪽).

 박정희가 ‘국민의 신임’을 명분으로 3선 개헌을 강행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밝힌 것은 그 혼자만이 항구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머물겠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한 셈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기왕에 파괴되다시피 한 헌정은 항구적으로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7월 26일자 2면 머리에 ‘통단’으로 내보낸 사설(「박 대통령의 개헌 문제 담화」)에서 그런 가능성은 전혀 지적하지 않고 박정희가 ‘루비콘강을 건넌 것’을 순순히 수긍하면서 가위 눌린 듯한 논조를 펼쳤다.

  (···) 그동안 개헌 문제의 와중에 휩쓸려 들어가기를 조심스럽게 회피해 왔던 박 대통령은 이제 비로소 스스로를 그 소용돌이 속에 던졌다. 주목될 점은 박 대통령이 이렇게 루비콘강을 건너면서도 “개헌에 대한 나의 소신과 입장에 대해서는 이미 연초 기자회견을 비롯해서 수삼차 국민 앞에 분명히 밝힌 바 있습니다”라고 여전히 강조하고 있는 사실이다. (·····)
  그러나 개헌 문제를 둘러싸고 과열 일로를 걸어온 우리나라 정치 현실은 “굳이 정치인들이 개헌을 거론해 보겠다면 연말이나 내년 초에 가서 거론을 하더라도 늦지 않지 않으냐”는 박 대통령의 의견을 그 자신이 관철키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과열된 정치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별도로 문제가 될 수 있겠으나, 연말이나 내년 초가 아니라 훨씬 앞당겨 박 대통령에게 이 특별담화를 강요했고 한국의 무덥고 숨가쁜 여름을 가져오게 한 것은 객관적인 정세의 급진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
  적어도 박 대통령의 특별담화는 그간의 정국의 불투명한 일면을 씻어버렸고, 개헌정국이 한층 더 숨 가쁘게 백열화하더라도 문제의 초점 또한 한층 더 선명한 새로운 국면을 열게 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
  구체적인 개헌안이 정식으로 발의되면 국민 누구나가 이것을 검토하고 찬반의 의견을 최종적으로 구성할 권리가 있는 것이겠지만, 이 시점에 있어서 우리는 개헌안 처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점을 희망하고 주장하고 촉구하려고 한다. 
  첫째로, 정부 및 여야는 물론이고 모든 국민이 우리가 이미 헌정 21년의 연륜을 쌓은 자치국민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
  둘째로, 개헌안 처리로 장구한 시일을 소비할 것을 우리는 원치 않는다. (·····)
  셋째로, 개헌안 처리는 시종 어디까지나 합헌적이고 합법적이어야만 한다. (·····)
  넷째로 개헌안 처리 과정에서 찬반 간의 의사 표시의 자유는 완전히 보장되어야 한다. (·····)
  다섯째로, 개헌안에 대한 찬반 간의 정당 활동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정치 테두리 안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
  한국의 숨 가쁘고 무더운 여름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앞으로 공화당이 마련하고 발의할 개헌안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지닌 것이 될 것인지를 주시하려고 한다. 

 이 사설은 “개헌 문제를 둘러싸고 과열 일로를 걸어온 우리나라 정치 현실” 때문에 박정희가 연말이나 이듬해 초로 잡고 있던 개헌 거론을 앞당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박정희 자신이 헌정을 영원히 무덤 속에 가둘 3선 개헌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면 야당이 열을 올려 3선 개헌을 반대했을 리는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사설은 ‘합헌적’이고 ‘합법적’으로 개헌안을 처리하라고 박정희 정권에 주문하고 있다. 그 뒤에 드러났듯이 3선 개헌안은 한밤중에 날치기로 처리되었다. 동아일보의 사설은 정부 기관지나 공화당 대변지처럼 3선 개헌이 현행 헌법과 법률에 따라 처리되기를 희망한 셈이다.


 박정희의 ‘우국충정’과 ‘치적’ 찬양하며 ‘개헌안 반대’

 1969년 7월 28일 공화당 당무회의는 개헌안을 의결했다. 29일부터 열린 공화당 의원총회에서는 여러 의원이 반대토론에 나섰다. 토론은 18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결국 이만섭이 제안한 정부·여당 개편, 부정부패 척결, 청와대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교체, 정치공작 배제, 제명된 의원 복당 등을 전제조건으로 의원총회는 개헌안을 30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통과된 개헌안의 골자는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라는 조항을 “2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로 고쳐 3선 연임을 허용하고, 국회의원의 각료 겸직을 가능하게 하는 것 등이었다. 이어 8월 7일 윤치영 외 121명의 국회의원(공화당 108명, 정우회 11명, 신민당 3명)의 명의로 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이 개헌안에는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로 한다”라고 하여 3선을 가능하게 했으며, 국회의원의 각료 겸직을 허용하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국회의원 50명 이상의 발의와 재석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같은 책, 518~519쪽).

 공화당이 8월 7일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하자 동아일보는 8월 8일자 2면에 다시 ‘통단사설’을 올렸다. 「헌법 개정과 우리의 견해」라는 사설은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이룬 ‘치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계속 집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우리는 개헌 문제가 국가의 안전과 활력을 증진시키려는 의도에서 제기되어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가중되고 있는 적의 도발을 막고 바야흐로 궤도에 오른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하려는 데 있어 박정희 대통령의 계속 집권이 필요할 것이라는 우국충정을 결코 낮게 평가하지 않는다.
  엄연한 사실은 지난 8년간 박 대통령은 국방과 건설에 남다른 영도력을 과시하였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며 국가의 위신과 활력을 내외에 널리 선양하였다는 그의 치적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치 못할 것이며, 관권의 독주와 부정부패 및 국회의 시녀화 등을 크게 개탄하면서도 그런 것들이 근면하고 성실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흐리게 하지는 못하였다고 믿는다. 
  시(是)는 시, 비(非)는 비다. 개헌을 찬성하든 개헌을 반대하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흑과 백을 구분하는 식별력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볼 때 1960년대를 자학과 좌절감의 계곡에서 미래와 기약에의 기슭으로 끌어올린 그의 업적을 전적으로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계속 집권케 하여 국가를 영광의 언덕에까지 끌어올리게 하자는 주장에 응분의 이유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는 것이고, 특히 “내 임기 중에는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내 희망”이라고 선언했던 박 대통령 스스로 개헌 발의를 요청하여 적어도 제3차 5개년경제계획까지를 그의 손으로 완성시켜 국민경제의 기초를 반석 같이 다져놓은 다음에 물러서겠다는 그의 충정을 충분히 이해하려 한다. 적어도 박 대통령 스스로 개인의 영달이나 야망으로 집권 연장을 기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오직 순수한 애국심과 조국중흥의 집념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듯 동기의 순수함과 애국충정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본보는 개헌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백히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개헌을 주장하는 측이 애국충정에서 출발했듯이 우리의 주장 역시 당파의식을 떠나 순수한 애국충정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모든 국민이 이해하리라고 믿고 싶다.
  이유는 오히려 명백하다. 즉, 우리는 개헌 주장의 동기가 결코 결과와 합치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의 안전과 활력을 기대하는 데서 헌법을 고치겠다고 출발한 그 동기나 그 충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개헌은 그런 목적을 오히려 위태롭게 할 염려가 다분히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지금, 우리 모두에 필요한 것은 지혜와 용기다. 특히 정치지도자에 있어 그러하다. 가장 현명하고 용기 있는 선택은 모든 것을 백지화하고, 박 대통령을 구심점으로 하여 국가의 안전과 건설에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는 길이다. 혹자는 71년 여름 사태를 염려하겠지만, 그동안에 박 대통령을 후계할 지도자가 국민 가운데 부각될 것으로 기대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이 시점에서 단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때 가서 신중히 그리고 현명하게 고려될 수는 있을지언정, 지금 이 시각에 그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경제건설과 대공방위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
  (···)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이 1796년 여름, 여야 정치지도자와 다수 국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건국 초에 대내적으로 다난했고, 대외적으로 유럽의 식민세력의 위협을 받고 있는 난국에 직면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3선 할 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데 발휘된 현명과 용기야말로 미국의 오늘과 같은 민주번영의 기틀을 잡게 한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이 사설의 전반부는 박정희에게 바치는 ‘용비어천가’나 다름없다. “가중되는 적의 도발을 막고 바야흐로 궤도에 오른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하려는 데 있어 박정희 대통령의 계속 집권이 필요할 것이라는 우국충정” “지난 8년간 박 대통령이 국방과 건설에 남다른 영도력을 과시하였다는 것” “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계속 집권케 하여 국가를 영광의 언덕에까지 끌어올리게 하자는 주장에 응분의 이유가 있다는 것” 등이 그런 대목들이다. 

 그런데 이 사설은 후반부에 들어서서 독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보인다. 박정희가 3선 개헌을 하려는 “동기의 순수함과 애국충정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본보는 개헌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백히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개헌 주장의 동기가 결코 결과와 합치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가 때문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것을 서론으로 내세우고 3선 개헌의 부당성을 지적했더라면 독자가 혼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훌륭한 치적’을 쌓은 박정희지만, 3선 개헌은 명백히 헌정질서를 다시 한 번 무너뜨리는 것이고 민주화에 역행하는 일임을 지적하면서 반대 의견을 당당하게 펼쳐야 하지 않는가.

 하기야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기관원’이 상주하는 동아일보에서 이만한 사설이라도 내보낸 용기가 가상하다고 평가한 이들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개헌안 날치기 통과와 동아일보의 ‘양비론’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위한 정치공작을 계속하던 1969년 6월 5일 신민당과 재야세력은 서울 YMCA 강당에서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학생운동권은 6월 12일부터 1967년의 6·8 부정선거 규탄투쟁에 못지않게 치열한 3선 개헌 반대투쟁을 시작했다. 그날 서울대 법대 학생들이 불을 댕긴 투쟁은 전국의 대학들과 교등학교로까지 번져 9월 하순까지 계속되었다. 

 7월 17일 신민당과 재야세력은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발기인대회를 열고 본격적인 투쟁에 들어갔다. 목사 김재준이 위원장으로 윤보선, 함석헌, 유진오, 박순천, 이희승, 김상돈 등이 고문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학생들과 재야인사들이 치열하게 펼친 3선 개헌 반대투쟁을 기사로만 보도했을 뿐, 본격적인 사설로는 한 번도 다루지 않았다. 8월 27일자에 「학원의 평온화를 위하여」라는 우회적 사설을 실은 것이 유일했다. 

 7월 29일 신민당 소속 의원 성낙현과 조흥만이, 30일에는 연주흠이 3선 개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신민당은 세 사람이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넘어갔다고 단정하고 그들의 의원직을 박탈하기 위해 9월 7일 당을 해체한 뒤 신민회라는 이름으로 원내교섭단체 등록을 했다. 

 9월 9일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9월 14일 새벽 한국정치사에 큰 오점을 남긴 사건이 터졌다. 그 과정은 아래와 같다. 

  (9월 13일) 오후 3시 50분경 국회의장 이효상의 세 번째 정회(停會) 신호로 공화당 의원들은 모두 본회의장에서 퇴장하고 신민당 의원들은 단상을 점거한 채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본회의장을 빠져나온 공화당 의원들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각 상임위 단위로 몇 개의 호텔에 투숙하였다. 14일 새벽 1시, 지휘본부로 지정된 반도호텔에 모인 당의장 윤치영 등 지휘부는 2시 정각에 국회 제3별관에서 모이라고 알렸다.
  14일 새벽 2시 50분, 공화당 및 무소속 의원 122명은 야당 의원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는 국회 본회의장을 버리고, 길 건너편에 있는 국회 제3별관 3층에 있는 특별위원회실에 집결해서 개헌안을 25분만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국회의장 이효상은 의사봉이 미처 준비돼 있지 않자 국회 직원이 가져다 준 주전자 뚜껑으로 탕탕탕 책상을 쳤다. (·····)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날치기 처리’가 ‘개헌안 처리’로 신문에 보도되도록 하라고 신문사 파견 요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동아일보의 경우 기자들이 울분을 느껴 정보부원의 압력을 뿌리치고 ‘개헌안 변칙처리’로 제목이 나갔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타난 정보부 요원의 얼굴엔 여기저기 멍이 들어 있었다. 정보부에 들어가 흠씬 얻어맞은 것이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대편 3권>, 328~330쪽).

 동아일보는 9월 15일자 2면에 「가슴 아픈 정치풍토」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올렸다.

  우리 역사는 또 하나의 슬픈 페이지를 기록했다. 14일 새벽 국회는 이윽고 이번 개헌안도 변칙적으로 처리하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본란은 이 개헌안이 민주 국운(國運)을 좌우할 만한 것인 만큼 신중하고도 예의(銳意)한 심의를 거쳐서 가부를 결정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그러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국회 운영을 여야 쌍방이 서로 협력해서 여행(勵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이 주장은 개헌안에 대하여 심심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국민의 소리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도 국회가 그러한 국민의 소리를 저버리고 종래와 같이 이처럼 중대한 안건을 변칙적 운영에 의하여 처리한 것은 호곡(號哭)을 해도 속은 후련해지지 않는다. 개헌안의 그러한 변칙처리는 물론 여당만의 책임은 아니요 야당도 이에 대하여 응분한 책임을 느끼지 않아서는 안 될 줄 안다. (···)
  물론 야당 측이 극한투쟁에 호소한 것은 여당 측이 개헌안을 다루는 자세에 있어서 보여준 여러 가지로 납득하기 어려운 점에 분격한 까닭이라고 이해되거니와 그러나 민주주의란 목적보다도 수단에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야당 의원들이 폭력으로써 개헌안 통과를 막자고 한 것은 잘했다고 하기 어렵다. 특히 그러한 의사당의 점거가 여당 측에 제3별관의 변칙처리의 구실을 제공한 데 있어서랴. (·····)
  무릇 의회정치란 여야가 서로 상대편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해시키기 위하여 참을성과 너그러움을 지니고 꾸준한 대화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만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은 동자(童子)의 상식이려니와 그런데도 한국의 정치인들은 그러한 상식을 범하는 것을 다반사로 알고들 있으니 도대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갈 것인지 가슴 답답해진다. (···)
  물론, 외국들에서는 자명한 것이어서 문제가 되려야 될 수 없는 것이 유독 한국에서만 복잡하고 미묘하고 유동적이어서 그 해석이 구구한 문제로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한국만의 독특한 정치풍토의 소산이려니와 그러한 정치풍토는 국회가 이번 개헌안을 변칙적으로 다루는 데서 보여준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작풍에 의해서 조성되었으며 앞으로도 정치하는 사람들의 일거수와 일투족에 의해서 조성되어 갈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촌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줄 안다.  

 동아일보는 공화당 의원들과 그 ‘들러리들’이 날치기로 개헌안을 통과시킨 것이 우리 역사에 ‘또 하나의 슬픈 페이지를 기록했다’고 탄식하면서도 그런 결과가 나온 데 대해 여당과 야당 모두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양비론’을 제기한다. 물론 여당의 책임이 몇 배나 크다고 지적하지만, 결론은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작풍’ 때문이라고 내린다. 

 야당인 신민당은 당시 3선 개헌안을 저지하지 못하면 박정희의 계속 집권과 독재를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국회 본회의장 점거라는 극한수단을 택한 것이었다. 박 정권이 온갖 술수와 정치공작을 자행하는 마당에 의석의 3분의 1도 갖지 못한 신민당이 다른 어떤 방법으로 개헌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동아일보의 양비론은 공정성과는 한참 거리가 먼 소리로 들릴 뿐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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