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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의 등장과 집권 공작

- 동아일보 대해부 4권 - 1장

기사승인 2022.09.28  12: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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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군부와 ‘하나회’

 1979년 10월 26일 밤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 가장 주목해야 할 세력은 신군부였다. 다음 날인 10월 27일 새벽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전국의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언론 검열이 실시됐다. 국무총리 최규하가 헌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 육군참모총장을 정승화를엄사령관에 임명했다.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올린 합동수사본부 안을 승인하고 그를 본부장에 앉혔다. 

 전두환은 신군부의 핵심 인물이었다. 신군부는 박정희의 친위대로 키워진 세력으로, 10·26 사건 이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월 광주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을 통해 권력을 찬탈한 정치군인 집단을 지칭한다. 신군부의 인맥은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고 그 주도자는 전두환이었다. 하나회는 1963년에 전두환·노태우·정호용·김복동 등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된 군대 내 사조직이었다. 

 하나회의 태동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4년제 육군사관학교 첫 입학생 중 영남 출신인 전두환·노태우·김복동·최성택·박병하가 ‘5성회’를 조직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들이 1955년 임관한 뒤 1961년에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후 정호용·권익현·손영길 등이 참여하며 ‘7성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들은 1963년 다시 회원을 늘려 ‘일심회’를 만들었고 그 모임이 ‘한마음회’로 바뀌었다가 하나회로 정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들이 육사 11기의 영남 인맥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의 핵심이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군 출신 인사들을 정치권력에 충원해 통치 기반 확립에 적극 활용했다. 그들은 박정희가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하는 데 필요한 주요 자원이었다. 그는 주로 군 인사를 통해 군부를 관리했다. 박정희는 자신에 대한 충성도와 군부 내의 세력관계 등을 고려해 철저한 상호 견제의 원칙 하에서 군 주요 보직을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부 지휘계통을 공식 지휘계통(참모총장)과 정보계통(보안사령관)으로 이원화해 관리했다. 

박정희는 민정 이양 후에도 유사한 방법으로 통치 기반을 관리했다. 김종필 등 육사 8기생들을 견제하며 자신의 연고지인 영남 출신으로 새로운 군 인맥을 형성해나갔다. 그런 과정에서 박정희의 눈길을 끈 것이 육사 11기생들이었다. 그들은 4년제 정규 군사엘리트 교육을 처음으로 받으며 두각을 보였다. 특히 하나회는 지연과 학연을 중심으로 각계에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박정희의 친위세력으로 커나갔으며 10·26 사건 이후 권력 공백기를 이용하여 군의 정상적인 지휘체계는 물론 정치체제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찬탈하기에 이르렀다. 

 군내 각 요직에 배치된 하나회 회원들은 보안사 사령관 전두환의 뜻에 따라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는가 하면 그 이후 군의 핵심 요직에 올랐다. 또한 전두환은 군사 반란을 묵인한 이희성을 계엄사령관 및 육군 참모총장에, 황영시를 육군 참모차장에 임명하도록 했다. 12·12 군사반란에 참여한 하나회 회원들과 그것을 비호한 일부 장성들의 세력이 ‘신군부’로 불리게 된 동기다. 

 유신독재시대의 종말을 가져온 박정희의 죽음은 유신 통치에 순치돼온 언론에게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유신체제를 미화해온 조선일보는 박정희 사망 이후에도 박정희와 유신체제를 미화하는 논조를 보였고 박정희 개인의 업적에 대한 칭송과 찬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상대적으로 냉정하고 객관적 입장을 지키려는 태도가 역력했다. 조선일보가 지면을 총동원해 박정희를 미화하는 기사와 화보를 보도한 데 반해 동아일보는 차분한 태도로 사태를 주시했다. 동아일보는 1979년 10월 27일자 1, 2, 3, 6면 등에 ‘박정희 서거’에 관한 소식과 화보 등을 실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일생과 화보를 소개하면서도 칭송보다는 객관적 사실을 보도하는 선에서 그쳤다. 편집 또한 평소의 형태를 유지하는 냉정함을 보였다. 8개 면을 제작하면서 3~4개면 정도에 박정희 사망 관련 소식을 실었으나 나머지 면은 평소 제작경향을 유지했다. 

 그 날짜 동아일보는 「비상 사태와 국민적 각오 / 박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자율적 질서 유지를 당부한다」라는 사설을 통해 “박 대통령의 공과는 후세의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썼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인 10월 28일자부터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중간발표를 그대로 전달했다. 


 박정희의 ‘아바타’ 전두환

 동아일보는 10월 28일 1면 머리기사에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육군소장은 28일 오후 4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 김재규가 은연중 계획 하에 자행한 범행이었음이 수사 결과 드러났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언론에 처음 등장한 전두환이 수사 중간발표에서 10·26 사건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발표한 것이다. 시해는 신하가 왕을 살해할 때 쓰는 용어임을 감안할 때 전두환이 박정희 피살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 셈이었다. 

 전두환은 이미 육사 시절부터 사조직을 만드는가 하면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시절에 직후부터 ‘정치군인’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61년 대위 시절 육사 생도들의 5·16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중앙정보부의 인사과장을 역임하는 등 권력의 주변을 맴돌았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인연은 매우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은 1963년 박정희로부터 국회의원에 나가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와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등을 거쳐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제1공수특전단장,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1사단장 등을 역임했으며 1979년 박정희의 유신 치하에서 보안사령관에 올랐다. 전두환은 하나회와 함께 박정희의 친위대 역할을 했고 박정희 피살 사건 수사를 통해 권력에 다가갈 수 있었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 박정희는 계엄이나 전쟁 상황에서 보안사령관이 정보부나 검찰·경찰 등을 통괄할 수 있도록 하는 대통령령을 시달했다. 

 이에 따라 10·26 사태와 함께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계엄공고 제5호에 의해 계엄사 내에 합수부가 설치됐다. 합수부는 검찰, 군검찰, 중앙정보부, 경찰, 헌병, 보안사 등 모든 정보수사기관의 업무를 조정·감독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들 기관장 회의에서 전두환은 언제나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했다. 10월 27일 새벽 전두환은 보안사로 수사기관장들을 불러 합수부 첫 회의를 열었고 그 이후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다. 박정희야말로 전두환에게 유신 정권을 넘겨준 장본인이었던 셈이다. 

 동아일보는 10월 28일 전두환의 중간수사 발표 이후 사건의 추이를 보도하면서도 일상적 편집을 유지하면서 대체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 체제의 시국 대처를 지지하는 논조를 폈다. 동아일보는 박정희의 국장일인 11월 3일자에 통단사설을 실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장송함」이라는 사설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은 온 국민의 애도 속에서 3일 엄숙히 거행되었다. 
  (···) 앞으로 우리의 과제는 절대로 이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데 있다고 할 것인데, 우리는 국민 모두가 합심하고 지혜를 짜낸다면 충분히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이제 박 대통령을 떠나보내면서 우리는 동시에 한 시대의 끝남을 보고 있다. 이 중대한 역사적 순간을 당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차질 없이 새로운 한 시대를 맞도록 모든 지혜를 짜내는 일이다. 지난날의 좋은 점은 더욱 살리고 발전시키되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이를 시정할 줄 아는 용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여기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공연한 시행착오만을 초래할 것이다.
  오늘의 이 불행이 앞으로 우리 역사에 영원한 교훈이 되기를 바라면서 고 박 대통령의 명복을 충심으로 비는 동시에 그의 유족들에게 다시 한 번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이다.

 동아일보는 이 사설에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외국 언론들은 신군부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은 1979년 11월 1일자 기사(「전두환 계엄사 합수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에서 일본 외무성의 소식통을 인용해, “한국은 현재 군부가 국정과 치안의 전반을 책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또 “육사 11기가 전후방 사단장을 맡고 있고, 합수부가 10·26 사건의 수사 책임을 지고 있다”며 전두환 소장이 실권자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최규하 정부 출범과 긴급조치 해제

 박정희의 국장 장례 절차가 끝나자 국무총리 최규하는 11월 10일 대통령선거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시국에 관한 대통령 권한대행의 특별담화’를 통해 1980년 1월 25일에 끝나는 권한대행의 잔여 임기 이전에 대통령선거를 실시해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새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 내에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 담화의 내용은 일단 유신헌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하지 않고 기존의 틀을 유지하며 이른바 과정(過政) 대통령선거를 치른다는 것이었다. 그 선거에서선출된 대통령은 전 대통령 박정희의 잔여 임기(1984년 12월까지)를 채우지 않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들어 헌법을 개정한 뒤 그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뽑아야 했다. 최규하의 담화는 유신 철폐와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의구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사설 등을 통해 최규하의 담화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담화 발표 다음 날인 11월 11일자 통단사설을 통해 담화 내용을 「질서 있는 민주 발전의 길」로 환영했다. 동아일보는 11월 12일자 사설에서 조선일보와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최 대행의 특별담화를 보고 / 개헌문제는 화합과 절충정신의 발휘로」라는 사설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10일 발표한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는 앞으로의 국가 진로와 직결되는 중대한 발표라는 점에서 국내외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 최 대행은 담화를 통해 지금까지 세간에 거론되어온 선(先) 대통령 선출론과 선 개헌론 중 전자를 정부 방침으로 확정했음을 명백히 했다. (···)
  (···) 우리는 선 개헌론과 선 대통령 선출론 두 개의 방법 중 어느 한쪽만 이 진선진미하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화합과 절충으로 국민적 합의와 결속을 기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여기에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최 대행이 밝힌 계획 및 의견에 대하여 앞으로 여야 간에 충분한 대화가 있기를 바란다. 

 동아일보는 이 사설에서 선 대통령 선출론과 선 개헌론에 관해 여야 간의 ‘충분한 대화’를 촉구하고 있다. 최규하의 ‘선 대통령 선출론’에 이의를 제기한 셈이었다. 동아일보가 이른바 ‘체육관 선거’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는 대통령 선출에 부정적 입장을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재야 민주화 세력의 견해이기도 했다. 

 최규하가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자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은 크게 반발했다. 11월 12일 ‘민주통일국민연합’ 공동의장단(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은 성명서를 통해 특별담화문을 비판하고 민주화를 위해 민주헌법을 3개월 이내에 제정할 것, 최규하 대행체제의 즉각 사퇴와 과도정부로서의 거국 민주내각 구성, 민주화 인사들 석방과 복권·복직, 그리고 계엄령 해제 등을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3권, 돌베개, 2010, 50쪽). 그밖에도 민주청년협의회 등 많은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통대 선거 반대를 천명했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 1979년 11월 24일 발생한 ‘YWCA 위장 결혼식’은 10·26 이후 재야운동세력이 계엄령 하에서 집회와 시위를 주도한 첫 사건이었다. 

 동아일보는 11월 26일 1면 머리에 그 사건을 보도했다. 「계엄사, 96명 연행 / YWCA 결혼식 위장 시국집회 관련」이라는 제목으로 계엄사의 발표 내용을 그대로 보도한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그 사건에 대한 해설이나 사설을 내보내지 않았다. 계엄사가 발표하기 3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계엄사의 보도 통제가 있었을 것이라고로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그 사건 후 집회에 참석했던 민주인사들은 서빙고의 보안사 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 내란음모 등에 가담했음을 실토하라는 협박을 받았다. 그들 중 17명은 1, 2심 군사재판을 거쳐 1980년 8월 대법원에서 징역 10월에서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런 와중에서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는 1979년 12월 6일 오전 10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전체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날 회의는 전국의 재적 대의원 2,560 명 중 2,549명이 참석한 가운데 토론 없이 무기명 투표로 진행됐는데 단독 입후보한 최규하가 찬성 2,465표, 무효 84표로 당선됐다. 동아일보는 그 내용을 12월 6일자 1면 머리기사로 다루었다. 

 12월 7일 2면 사설(「최규하 시대의 개막」)은 정치일정의 조속한 발표를등을 요구하는가 하면 “학생들이 압력단체 역할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하는 등 순탄치 않을 정치적 장래를 예고하는 듯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대로 압도적 지지를 얻어 새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 국민 가운데는 개헌과 선거의 시기에 관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있을 뿐 아니라 가장 궁금히 여기는 것 역시 앞으로 최 대통령이 처리할 정치적 일정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해 최 대통령은 취임식 때 그 일정을 밝힘으로써 항간의 구구한 억측을 막고 또 새 행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전폭적인 국민의 협조를 얻기 바란다. 
  (···) 특히 우리가 학생 제군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앞으로는 순수한 정열로 학업 연마에 전심해달라는 것이다. 학생들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이고 또 유권자인 이상 정치적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마는 학생이 앞으로 우리 사회의 압력단체 역할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하면 학생의 본분은 청년만이 가지는 정의에 입각하여 불의에 대한 항의로 끝나는 것이지 일일이 정치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엄격히 삼가야 한다.
 
 
 최규하는 대통령 당선 다음 날인 12월 7일 오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유신헌법 반대 금지 주요 내용으로 하는 긴급조치 9호 해제를 결정했다. 12월 8일 0시를 기해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됨으로써 복역 중이던 68명의 위반자가 당장 석방됐으며 사면과 복권 및 복교 조치가 이어지게 됐다. 긴급조치 9호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국가폭력이었다. 

 긴급조치 14개 항 중 1·2항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다음 각 호의 행위를 금한다. 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나) 집회, 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도서,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청원, 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다) 학교당국의 지도, 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의례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 시위 또는 정치관여 행위. 라)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등.” 그리고 2항은 제1항에 위반한 내용을 방송·보도·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하거나 배포·판매·소지 또는 전시하는 행위를 금한다고 돼 있다. 14항은 이 조치는 1975년 5월 13일 15시부터 시행한다고 정했다. 긴급조치 9호는 무려 4년 7개월이나 계속되었다.  

 동아일보는 긴급조치 9호 해제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고 3, 6, 7면 등에  관련기사를 다루었다. 「구속인사 68명 석방 / 문익환·함세웅 씨 등 포함」이라는 기사는 “유신헌법 반대를 누르기 위한 구 정권의 응급수단으로 내려졌던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가 4년 7개월 만에 종언을 고했다”로 시작된다다. 동아일보는 이어 3면에 긴급조치 4년 7개월의 일지를 소개하면서 그 조치의 ‘악행’을 적시했다. 6, 7면에서는 긴급조치로 투옥되었던 사람들의 석방소식을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조선일보가 그 사건을 대통령 최규하의 치적 중 하나로 다룬 데 비해 동아일보는 구 정권의 악행을 되새기는 보도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12·12 군사반란과 이후의 정국

 10·26 사태 이후 정국은 유신세력과 민주화운동 세력의 대립 구도로 전개되었지만, 유신세력과 민주화 운동 세력 내에서도 향후 정국에 대한 대처 방안을 놓고 분화가 진행됐다. 유신세력을 대표하는 집단은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소장파 신군부였다. 신군부를 이끄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합수부장을 겸하며 10·26 정변 이후 정보를 독점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변 후 공식 지휘계통을 맡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등은 온건파로 분류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민간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신군부는 10·26 정변 이후 자신들이 제거될 가능성이 있음을 감지했다.  자신들과 대립적인 군 장성들이 핵심 보직에 임명된다거나 전두환이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좌천된다는 설 등으로 위기감을 갖게 된 것이다. 11월 중순경부터 전두환, 노태우(9사단장), 황영시(1군단장), 유학성(국방부 군수차관보) 등 군내 강경파는 군권 장악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결국 그들은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그날은 최규하 정부의 새로운 조각 발표가 예정된 전날이기도 했다. 신군부는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모여 반란을 지휘했다. 그 과정에서 반란 주동자들은 임의로 부대를 이탈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군 지휘계통을 무너뜨렸다(같은 책, 44쪽).

 동아일보는 12월 13일자 1면 머리에 통단제목(「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으로 12·12 군사반란 제1보를 보도했다. 부제는 「김재규 범행 관련 혐의 / 일부 장성도 구속수사」 「육참총장 공관서 수사관·경비병 충돌 / 국방부서 증원계엄군·초병 오인 총격」 등 군 내부의 심각한 갈등을 시사했으나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계엄사의 보도 통제가 그 이유라고는 하지만 언론 보도의 한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의 주요 내용은 국방부장관의 특별담화문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13일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 군 수사기관이 체포하고 정부는 새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육군대장(중앙정보부장서리)을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노 장관의 특별담화에 따르면 군 수사기관은 12일 저녁 7시경 대통령 시해 사건의 주범 김재규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김이 숨기고 있던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어 그 진부를 확인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출동, 정 총장을 연행 조사 중인데 그 과정에서 공관 경비병과 충돌이 있었으나 정 총장의 신상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노 장관은 시해 사건에 관련된 일부 군 장성도 구속 조사 중이며 13일 새벽 2시 국방부 청사에서 증가 배치된 계엄군과 초병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고 발표하고 수도권 경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일부 계엄군이 증가 배치된 곳도 있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1면 머리기사와 함께 ‘’ 워싱턴 특파원 발 2단 기사로 미국 국무성의 발표를 보도하면서 이번 사태가 정치적으로도 심각한 상황임을 시사했다. 「민주화 저해면 한미관계 차질」이라는 제목의 그 기사는 국무차관 워런 크리스토퍼의 말을 인용해 “우리는 지난 몇 주일 동안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움직임에 고무받았다. 이번 사건은 이러한 민주화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에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또 그 기사는 12일 밤 사건 후 미 행정부가 주한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에게 민주화 과정을 저해하는 한국 내의 어떠한 세력도 그들의 행동이 한미관계에 심각한 역효과를 초래할 것임을 한국 내의 모든 세력에 주지시킬 것을 훈령했다고 밝힌 것으로 전했다. 동아일보는 12월 14일일자에 계엄사령관 정승화 연행 사건과 관련해 북한에 대한 경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사설(「대 북괴 경계에 만전 태세를」)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 사건은 국민에게 비상한 충격을 주었다. 
  정 사령관이 연행된 데 대해서는 앞으로 그 자세한 경위가 밝혀지겠지마는 우리 내부 사정이 어떻든 북괴에 대한 경각심과 경계 태세에는 추호의 변화도 있을 수 없다. 북괴 김일성 집단은 무분별한 호전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망상과 착각을 가질지 모르며 우리 내부에 혼란을 조성하기 위하여 어떤 수법을 쓸지도 모른다. (···)
  우리가 북괴에 경고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최근 일련의 사태를 오판하여 우리를 넘볼 수 있는 사태라고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군을 비롯한 우리 모든 국민은 철통같은 반공정신으로 뭉쳐 있으며 어떠한 북괴의 도발이라도 이를 격퇴할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북괴는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군은 12일 저녁을 기해서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으며 주한미군 역시 경계령을 내렸다. 또한 미국 정부는 북괴가 한국의 새로운 사태를 이용하여 모험을 하지 말도록 강력히 경고하였다. (···)
  우리는 지난번처럼 전방을 비롯한 모든 지역에서 물샐틈없는 경계 태세로 별다른 일없이 난국을 극복해갈 것으로 믿으며 또 반드시 그래야만 될 것이다. 우리는 차제에 우리 군의 모든 지휘관들이 국군의 신성한 임무는 첫째도 국토 방위요 둘째도 국토 방위라는 점을 명심해 주기를 다시 강조하고 싶다. 

 언론이 12·12 군사반란 사태를 맞아 북한의 돌발행위를 경고를 해야 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있을 수 없는 일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2·12 군사반란은 한국 사회에 심각한 위기감을 일으켰다. 신군부가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고 무장군인을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의 공관에 난입시켜 정승화를 연행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으니 향후 무슨 사태가 계속될지 모를 일이었다. 신군부는 반란 직후 육군참모총장과 수도경비사령관 그리고 특전사령관 등 군내 핵심 요직들을 모두 장악했다. 신임 육참총장 이희성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신군부의 ‘정치 불개입’ 연막 전술

 그러나 국무총리 신현확은 12월 15일 12·12 사태는 진정, 해결됐으며 정치발전 스케줄에 어떤 차질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3일 후인 12월 18일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이희성은 담화문을 통해 “군의 기본 사명은 국토 방위에 있으며 정치는 군의 영역 밖의 분야이기 때문에 군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확고한 원칙이며 애국심과 양식 있는 정치인에 의해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 한결같은 군의 소망임을 천명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신군부의 이와 같은 연막 전술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동아일보는 그들의 주장을 1면 주요 기사로 보도하는가 하면 12월 19일자에서는 「이 계엄사령관 담화를 보고」라는 사설을 통해 그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군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결국 신군부의 연막전술을 받아들인 셈이었다.  사설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희성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은 18일 취임 후 처음으로 담화문을 발표하고 12·12 사건에 관련된 군의 입장과 앞으로 자세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였다. 
  (···) 10·26 사태 이후 국민의 정치의식이 높아진 상황에서 12·12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사태가 군부 내에서 발생하였으므로 국민이 군의 동정에 지대한 관심을 쏟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때에 이 계엄사령관이 정치는 군의 영역 밖의 일이라고 못 박은 것은 우선 정치 발전을 염원하는 우리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는 것으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후진국들 같이 군이 정치를 좌우해서는 안 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히 6·25 남침의 쓰라린 역사를 경험한 우리나라는 국토 방위에 허점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온 국민의 염원이고 따라서 군은 국토 방위에 전념해달라는 것이 국가적 소명이기도 하다. 

 신군부는 이미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한 뒤 정권의 막후 실세로 등장했다. 외신들은 이전부터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전했지만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은 군사반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였다. 정치권은 그것을 군 내부의 강온파 간 충돌로 보고 부정적 판단을 유보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미국은 12·12 군사반란 이후의 권력상 황을 최규하를 수반으로 하는 ‘형식적 정부’와 신군부의 ‘실질적 권력’이 작동하는 ‘이중 권력구조’로 지칭했다(같은 책, 45쪽). 


 민주화 기대와 개헌 논의 

 동아일보는 1980년 1월 1일자 1면 머리기사에서 “80년대 한국 정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권과 자유의 신장”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의 의뢰로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가 실시한 ‘80년대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관한 조사 결과라는 것이었다. 그 기사는 “경제 성장을 다소 늦추고 생활 수준 향상을 지연시키더라도 자유선거에 의한 국민의 정치 참여와 인권을 신장시키는 민주화가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이어 2면 머리에 「민주 발전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는 신년사를 실었다. 조선일보의 1980년 연두사 주제가 ‘순리’인 것과는 대비를 이룬다. 조선일보는 1980년 1월1일 1면 머리에 통단으로 「오늘의 한국을 사는 한국인의 상식」이라는 연두사를 내보냈다. 부제로는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무리 않고 착하게 사는 것」을 내세웠다.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순리’는 주어진 상황에 맞게 살라는 ‘순응’의 의미다. 이에 비해 동아일보는 나름대로 1980년의 의미를 ‘민주 발전’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장애 요인으로 정치적 극단주의와 함께 군부를 지목하고 있다. 동아일보 신년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류의 역사가 진보하는 것은 생존과 발전을 희구하는 인간의 강렬한 의지 때문이다. 이것 없이는 인류 역사는 전진 대신 후퇴를 보일 수밖에 없으며 한 민족, 한 국가의 역사와 운명도 마찬가지다. 
  (···) 새해의 당면 국내 과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헌법  개정 작업이다. 국회 헌법개정심의특위는 새해 들어 1월 중순부터 시도별로 공청회를 개최할 것이라 하는데 개헌 작업을 촉진하여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새 헌법안을 완성하여 대통령에게 이송할 수 있도록 하기 바란다. 개헌 작업이 정부 주도냐 국회 주도냐 해서 지난 연말에 설왕설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마는 국회를 토론과 여론의 광장으로 하고 정부가 긴밀히 협조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기회에 후세에 모범이 될 수 있는 정치 역량이 발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앞으로 참다운 민주 발전을 위해서는 개헌 작업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가 있다는 점이다. 헌법만 잘 만들고 선거만 실시하면 당장 민주정치가 꽃필 것으로 생각해서는 잘못이다.
  ‘바이마르’헌법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헌법전이었지마는 ‘바이마르’공화국은 몇 년을 지탱하지 못하고 붕괴하고 말았으며 우리나라의 예로는 4·19 이후의 개헌과 민주당 정권의 운명을 들 수 있다. 정치적 극단주의 출현을 방지하지 못하거나 군에 대한 문민통치가 이룩되지 못할 때에는 민주정치의 전도는 밝지 못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1월 4일자 1면 머리에 본격적인 헌법개정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는 내용의 기사(「대통령 중심제 직선으로」)를 올렸다. 그 기사는 한국공법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였다. 핵심은 국민 직선에 의한 대통령 중심제이며 국회는 소선거구제에 의한 단원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국내 공법관계 권위자를 망라한 한국공법학회 회원들의 3분의 2 이상이 새 공화국의 정부 형태로 국민 직선에 의한 대통령중심제를 희망하고 국회는 1구 1인의 소선거구제에 의한 단원제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 다. 
  (···) 동아일보사가 한국공법학회 회원 전원을 대상으로 새 헌법의 내용과 개헌 시기, 절차 등에 관한 의견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7.1%가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했으며 대통령제를 전제했을 경우의 대통령 선출 방법에 관해서는 90.8%가 국민 직선을 바라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대통령을 임기 4년(67.1%) 또는 5년으로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 81.6%였으며 나머지 18.4%는 임기 5년 또는 임기 6년의 단임을 지지했다. 
 회원들은 그러나 대통령의 권한은 축소 견제돼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82.6%가 대통령 긴급조치를 헌법적 효력이 아닌 법률적 효력에 국한시키거나(53.3%) 재정상의 긴급명령권만 인정(29.3%)하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4%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이 ‘전연 필요 없다’고 응답했으며 부통령을 둘 것인가에 대해서는 55.3%가 ‘필요 없다’는 반응이었다. 

 개헌 논의는 1980년 1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첫 공청회가 열린 이후 광주·대전·부산 등 전국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계속됐다. 동아일보는 1980년 벽두부터 개헌문제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이는 편집 경향을 보였다. 이 신문은 새해 첫 신문인 1월 4일자 1면 머리기사에 한국공법학회 회원들을 상대로 한 개헌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한 후 1월 8일자 1면에는「대통령 선거 방법 쟁점으로」라는 기획기사를 실었다. 「신민 재야 직선주장에 공화 반론」이라는 부제를 단 이 기사는 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직선제에 대한 반론을 펴자 그것을 직선제 논란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어 1월 9일자 사설(「대통령의 선출방법」)을 통해 양측의 논란을 소개하고 “직선제로 하되 그 부작용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연구를 하는 것이 원칙이고 순리”라며 직선제를 지지했다. 두 보도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직선제냐 간선제냐. 대통령 선거방법론에 대한 논의들이 ‘개헌의 해’인 1980년 벽두부터 쟁점으로 등장,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개헌 논의가 활발해짐에 따라 새 공화국의 권력 구조를 대통령중심제로 한다는 데는 각 정당과 재야 측의 견해가 대체적으로 접근하고 있으나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이 대립, 국민적 합의를 이루기까지 진통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몇몇 보도기관과 단체가 조사한 각종 여론조사가 대통령 직선 우위를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재야 측이 그동안 대통령직선제를 주장해왔으나 이 문제에 대해 언질을 피해오던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7일 직선제에 대한 반론을 폄으로써 이 문제는 정국의 쟁점요소로 등장하게 됐다(1월 4일자 1면 머리기사).

  개헌 논의가 본격화함에 따라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느냐 간선제로 뽑느냐에 관하여 논쟁이 일고 있는 것 같다. 
  즉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는 7일 대통령을 직선제로 하는 경우 과다한 선거비용, 지역분열, 선거 준비 기간의 조속한 도래에 따른 소신 있는 국정 운영 기간의 단축 등의 단점 때문에 간선제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하여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는 대통령의 임기는 4년제로 하고 1차에 한하여 중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과거 10여 년 동안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지 않아 국민들이 직선제로 할 것을 열망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은 직선해야 한다고 언명하였다. 
  (···) 만약 앞으로 우리가 택할 정부 형태가 대통령책임제라면 현재의 국민의 여망을 고려하여 직선제로 하되 그 부작용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연구를 하는 것이 원칙이고 순리라고 본다. 부작용이 우려된다 하여 우리가 원칙을 포기한다면 민주 발전은 언제 될지 아득한 이야기가 된다(1월 9일자 사설).  

 동아일보는 이후에도 개헌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1980년 1월 28일부터는 종합면인 3면에 개헌에 관한 시리즈(「새 헌법에 새 정치」)를 시작했다.   시리즈의 발제문은 “지류가 모여 대하가 되듯 새 공화국의 헌법에 대한 무성한 논의가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그 동안의 논의에서 새 헌법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에 총동원돼 새 정치에 대한 갈구와 열의가 뜨거움을 보여주었다. 국민적 합의의 조속한 정립을 위해 새 헌법의 초점과 쟁점으로 드러나고 있는 항목들을 차례로 간추려본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이와 함께 새 헌법의 언론조항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더 적극적인 ‘언론의 자유’ 조항을 헌법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었다. 동아일보가 2월 29일자2면에 실은 통단사설(「새 헌법과 언론조항」)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부의 헌법연구반은 새 헌법에 언론자유에 관한 조항을 강화하여 법률 유보 규정을 삭제하기로 대체적인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한다. 즉 헌법연구반은 현행 유신헌법 18조가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 한다”고 되어 있는 것을 소극적 규정이라고 보고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받는다”고 고쳐 법률 유보 조항을 삭제한다는 것이다. 
  (···) 언론이 자유롭고 독립된 언론으로서 권리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헌법이나 법률에 아무리 좋은 규정을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언론 스스로가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는 하나 언론 스스로의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서나, 또 보다 근본적으로는 언론이 국가적 문제라는 점에서나 언론정책의 기본방향을 헌법상으로 선언하고 또 헌법상 근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새 헌법에는 언론·출판 등에 의한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민주주의 창달을 위한 적극적 개념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국민의 알 권리를 기본권의 하나로 명문화하여 국민의 정당한 알 권리를 침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반헌법행위로 규정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언론자유를 신장케 해야 한다. 
  (···) 앞으로 80년대 이후의 산업화 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언론이 진정한 자유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허가제나 검열제의 폐지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보다 미래지향적이고 참신한 조문화 작업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렇듯 활발한 개헌 논의는 김영삼·김대중·김종필 의 회동으로 이어지면서 향후 정국을 낙관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2월 25일에는 동아일보 회장 김상만의 주선으로 서울 계동의 인촌기념관에서 3김이 자리를 함께했다. 또 그 자리에는 주한 미국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과 일본·캐나다 대사 및 저명인사들이 참석했다. 이어 2월 29일에는 정부의 민주인사들에 대한 복권조치가 단행됐다. 전 대통령 윤보선 등 6백87명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졌는데 그중 학생이 3백73명으로 가장 많았다. 최규하 정부의 복권조치로 해직교수와 학생들이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신학기가 시작되자 대학에서는 학생회가 부활하는 등 활기가 일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 오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2월 29일의 복권조치에 대해 ‘시기적으로도 늦었을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부족하다’는 사설(「복권 조치를 보고」)을 게재했다. 사설 내용의 일부가 검열로 지워진 흔적이 남아 있다. 

  정부는 29일자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공민권이 제한되어왔던 윤보선·김대중 씨 등 도합 6백87명에 대해 복권을 단행하였다. 
  복권의 형식은 긴급조치 위반 죄목만 적용된 인사 중 형의 집행이 끝났거나 면제된 사람 전원에 대해서는 일반복권을 하고, 긴급조치 위반과 다른 죄목의 경합자 그리고 일반 수형자에 대해서는 반공법 위반자 등을 원칙적으로 제외하고 특별 복권하였다. 
  시기적으로 좀 더 일찍이 복권조치가 취해졌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소감이지마는, 이제나마 정부가 우선 6백87명에 대해 권리 회복 조치를 단행한 것은 국민적 단합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다. 작년 말 긴급조치 해제와 더불어 당연히 뒤따랐어야 할 논리적 귀결이다. 
  (···) 과거 유신체제 아래서 정치적 이견 때문에 구속된 인사 중에는 긴급조치뿐 아니라 선거법 기타 형법의 일반 죄목 위반으로 소추된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반체제 정치범의 체포 구금이 형식적으로 어떤 죄목에 의하였든 정치적 동기로 인하여 수난을 받은 경우라면 마땅히 이들 인사들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판단할 일이지 법조문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 추진

 민주화 바람에도 전두환의 신군부는 1980년 1~2월에 보안사령부에 정보처를 복원하여 기구를 대폭 확대한 뒤 정치·경제·사회·언론·종교에까지 치밀한 공작을 전개했다. 보안사는 2월 정보처 내에 언론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언론계를 두는 한편 이와는 별도로 이상재를 책임자로 하는 ‘언론반’을 가동했다. 이상재는 보도검열단을 실질적으로 조종·감독하고 언론사 간부들의 성향을 파악해 그들을 회유했다. 신군부의 방대한 시나리오 중 언론 분야에 해당하는 자료로 ‘K-공작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왕(King)의 앞 글자 K를 딴 것으로 전두환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김주언, <한국의 언론통제>, 리북, 2008, 190~203쪽).

 그 공작은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여론 조작 방안에 다름 아니었다. 주요 시나리오는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을 민주정치세력, 신군부를 안정구축세력으로 차별화하여 안정론을 확산시키고 언론계 사람들을 포섭하여 여론을 신군부에 유리하게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학생운동과 노동쟁의에 대한 국민 여론을 악화시키고 3김의 경쟁을 구태 정치의 파벌싸움으로 모는 방향으로 언론의 논조를 이끌어 나갔다. 특히 ‘K-공작계획’에 따르면 신군부는 언론사의 간부들을 회유대상자로 선정해 적극 활용한다는 등의 세부계획을 만들어 실천에 옮겼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최규하 정부를 압박해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됐다. 그는 실질적으로 정보와 정치적 자금줄을 틀어쥐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는  4월 14일자 1면 머리기사로 그 소식을 보도했다. 전두환이 정보부장 ‘서리’로 임명된 것은 ‘부장 차장 및 기획조정관은 일체 타직을 겸할 수 없다’는 중앙정보부법 7조에 따른 것이라고 전하고 전두환의 약력을 소개했다. 

 동아일보는 4월 15일자 1면에 2단으로 전두환의 정보부장 서리 겸임에 대한 일본 언론의 반응을 보도했다.  일본 언론은  ‘군의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이 표면에 나선 것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비록 1면 2단 기사에 불과하지만 전두환이 이미 정보부장을 겸임함으로써 실권을 장악했음을 을 재확인하는 내용이다.  

  [동경=홍인근 특파원] 일본 신문들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임 사실을 15일자 조간 외신면 머리 또는 중간기사로 해설을 곁들여 크게 보도, 한국 정부가 계엄령을 해제하려는 데 대한 대비책이라고 분석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뒤에서 계엄 행정을 지원해온 전 사령관이 표면에 등장한 것으로, 최규하 대통평 체제를 뒷받침하는 제1인자로서 그가 앞으로 어떠한 진로를 선택할는지 커다란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논평했다. 
  (···) 아사히신문은 전 중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완전한 군부 내의 실권을 잡은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논평했고 동경신문은 전 사령관이 군의 실권 장악을 재확인한 것이며 이 실력을 배경으로 표면에 나선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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