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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정국과 정원식 사태

- 동아일보 대해부 4권 - 17장

기사승인 2023.01.18  14: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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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태우 정권의 폭압정치에 짓눌려 탈출구를 찾지 못하던 학생과 민중의 분노는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건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사흘 뒤 전남대생 박승희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안동대 학생 김영춘, 경원대 학생 천세용이 잇달아 분신했다. 정권의 타락에 분노한 학생‧시민들이 공권력의 쇠몽둥이 앞에서 택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기억의 한 장면으로 꼽히는 이른바 ‘분신 정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강경대가 타살당한 이튿날인 4월 27일자 동아일보는 그 소식을 1면에서 「시위 대학생 경찰에 맞아 사망 / 대통령 사과·내각 총사퇴 촉구」라는 기사로 크게 다루었다. 소제목은「야 ‘공권력 살인’ 규정 내무장관 처벌도 요구/ 여야 ‘국회조사단’ 구성 합의」였다. 

  여야는 27일 시위진압 경찰의 명지대생 강경대 군 구타치사 사건을 공권력 과잉 사용으로 빚어진 정권 차원의 중대한 사태로 규정,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단을 구성키로 했다. 신민·민주·민중당 등 야당은 또 이날 강 군 사건과 관련, 노태우 대통령의 대국민 공개사과와 노재봉 내각의 총사퇴, 안응모 내무장관의 형사처벌 및 관련자 즉각 구속, 시위진압 방법의 개선 등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와 관련 민자당의 김종호 총무와 신민당 김영배 총무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긴급 총무회담을 갖고 강 군 사건에 대한 국회 차원의 진상파악조사단을 구성한다는 데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조사단을 여야 공동조사단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국회 내무위에 위임할 것인지에 대해 더 논의키로 했다.
  신민당은 이날 오전 김대중 총재 주재로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소집, (…) 김 총재는 회의가 끝난 뒤 직접 기자회견을 통해 “노 정권이 노재봉 내각 출범과 함께 공안통치로 선회한 후 탄압정치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고 주장, (…) 내무부장관에 대해 “경찰의 폭력 흉기 사용을 독려해온 내무장관의 행위는 형법에 저촉되는 것이기 때문에 형사책임을 추궁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음날부터는 모든 신문이 일제히 ‘치사 정국’ 혹은 ‘분신 정국’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동아일보는 4월 28일자에「내무장관 문책 경질」, 29일자에「“공안통치 종식” 총공세 / ‘강 군 치사 규탄대회’ 전국 초긴장」, 30일자에「전경 시위진압 투입은 위법 / 도심 곳곳 규탄시위」를 1면 머리에 올렸다. 사회면(23면)도 마찬가지였다. 전남대 학생 박승희의 분신 기사는 4단 기사로 실렸다. 불길은 더욱 거세졌다. 

 동아일보 5월 1일자 1면 머리에는「‘치사 정국’ 대치 장기화」라는 기사가 올랐다. 사회면에는 또 다시 대학생의 분신 기사가 실렸다. 이번에는 안동대 학생 김영균이었다. 4단짜리 기사 밑에는 「전남대생(박승희)은 위독하다」는 기사가 2단으로 나왔다. 2일자에는「‘젊은 죽음’ 더 이상 없어야 한다 / 대학생 분신에 각계 목멘 호소」, 3일자에는「여야 전경법 개정 공방」「노 대통령 국민에 사과」, 4일자에는「비상시국 긴급 처방은 없나 / 정치권 당략 떠나 ‘젊은 죽음’ 막아야 할 때」「“지성인답게 격정 자제를 / 재야운동권 ”분신 말라“ 눈물의 호소」가 1면 머리에 올랐다. 3일에는 경원대생 천세용이 또 분신했다.

 동아는 연일 사설을 통해 분신 사태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면서 정치권, 특히 정부와 여당의 책임을 물었다. 강경대가 맞아 죽고 박승희가 분신한 다음 날인 30일자 사설(「더 이상 젊음의 희생 없게 하라」)은 “6공화국의 민주화가 왜 이 즈음에 와서 주춤대고 있는지를 강 군의 죽음과 결부하여 따져봐야 한다”면서 “정부나 정치권이 국민적으로 성숙된 민주화 의지, 새로운 질서에 의한 사회 발전에 행보를 맞추지 못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그 사설은 ‘정부 및 정치권의 결연한 민주화 의지의 표명’과 ‘사심 없는 반성’, ‘내무부장관과 일선 지휘경찰에 대한 문책과 국무총리의 사과’ ‘실질적인 책임자인 경찰 지휘계통에 대한 가시적 의법조치’를 요구했다. 사설은 또 학생들의 폭력시위가 사태의 원인이었음을 직시해야 한다면서 “격앙된 감정을 누르고 모두가 이성을 되찾아 더 이상 젊음의 희생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동아는 이어 5월 2일자에도「학생의 죽음과 정치권의 책임」이란 사설을 통해, “여야 정치인들이 당리당략에 몰두한 나머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행태는 시국의 혼돈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질책하며 “특히 본회의에서 독립의안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야권의 주장을 다수의 힘으로 거부한 여당의 독단은 그들의 정치적 무감각과 무책임을 극명하게 노출시킨 처사로 지적될 것이다”라고 여당을 비판했다. 

  (…) 이 시점에서 정치권이 해야 될 일은 분명하다. 강 군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정치인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여야가 하나같이 오늘의 사태는 공안정치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면 문제의 공안정치를 청산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공안정치가 반정치 비민주의 양상을 띠었다면 그것을 타파해야 한다. 공안정치가 공권력을 도구로 사용했다면 그것을 규제하는 처방을 마련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26)이 서강대 옥상에서 “폭력 살인만행 자행하는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친 뒤 미리 시너를 뿌린 몸에 불을 붙이고 20m 아래 아스팔트 길바닥으로 투신해 숨졌다. 서강대 총장 박홍은 즉시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 모두는 젊은이들의 죽음 앞에 슬퍼하면서도 이 죽음을 선동하는 세력을 반드시 폭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이들의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며 또 직접 실천하는 반생명적인 사람들의 정체를 알고 그들 세력의 유혹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결단을 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동아일보 5월 8일자 23면「분신 선동세력 정체 밝혀내야 / 박 서강대 총장」) .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5월 9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는「“분신 현장 2~3명 있었다”; 목격 교수 진술 / 검찰, 자살 방조 여부 조사」라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동아일보 사회면에는 「“옥상엔 혼자 있었다”; 서강대 운전사 경찰에 밝혀 / 목격 교수들 “2~3명 있었다고 말한 적 없다”」라는 정반대 내용의 기사가 나왔다. 동아는 아직 눈치 채지 못 하고 있었지만 분신정국이 본격적인 ‘유서 대필’ 국면으로 들어간 것이다. 

 동아일보는 스트레이트 기사 외에는 ‘유서 대필’ 의혹 사건에서 한 발 떨어진 채 계속해서 사설 등을 통해 노태우 정권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5월 10일자 사설(「권력의 오만과 시국인식」)을 통해 “이번 사태를 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세력의 불순한 동기로 보고 강력한 대응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노태우의 시국 인식과 처방책에 우려를 표하면서 강성내각을 내치는 단안을 내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동아는 그 와중에서도 5월 10일 국가보안법과 경찰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정권에 대해 11일자 사설(「정부 여당이 폭주하고 있다」)을 통해 비판의 날을 세우면서 같은 날짜 또 다른 사설(「노 총리의 사퇴를 권고한다」)에서어 “오늘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총체적 위기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노재봉 총리 스스로 퇴진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동아일보는는 5월 20일자 사설(「정치는 때를 맞춰야 한다」)을 통해 다시 한 번 노재봉의 퇴진을 요구했다. 노태우는 24일 정원식을 새 총리로 임명했지만 그것은 시위대의 힘에 밀려서가 아니라 ‘유서 대필’ 공작 등으로 시위대와 시민들을 떼어놓는 데 성공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유서 대필’ 공작은 그 진실 여부를 떠나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정원식의 총리 임명과 그로 인한 하나의 해프닝으로 재야‧학생권의 민주화운동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총리로 임명된 정원식은 6월 3일 외국어대 교육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시작했다. 외대 학생회는 과거 문교부장관 재직 시 전교조를 탄압했던 정원식의 이력을 겨냥해 “학우 여러분, 전교조 선생님들을 학살한 정원식이가 지금 우리 학교에 와 있습니다”라는 교내방송을 했다. 「정 총리 외대생들이 폭행/ 어제 저녁 마지막 강의 후」라는 제목의 4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의 부제는「달걀 밀가루 세례… 주먹 발길질 / “계획된 폭력… 모두 형사처벌” 정부 대책 / “반인륜적 행위” 각계 비난 / 정부, 재야 운동권에 강경 대응 예상」이었다. 

  정원식 국무총리서리가 3일 오후 취임 전 시간강사로 출강해 온 한국외국어대 교육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다 외대학생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하는 등 수모를 겪었다. 정 총리서리에 대한 학생들의 폭행 사건은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고 특히 지성의 전당인 대학 구내에서 발생한 이번 사건은 반인륜적 폭행이라고 규탄하는 각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더욱이 이번 사건은 지난 두 달 이상 계속돼 온 긴장 시국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데 그동안 재야 및 운동권 학생들의 각종 집회 및 시위에 대해 수세적인 입장을 보였던 정부는 이번 사건을 정부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보고 앞으로 이들 세력에 대해 보다 강경하게 대응할 것으로 예상된다. 재야와 운동권 일각에서도 이번 정 총리서리 폭행 사태가 학생운동권 전체의 도덕성을 크게 훼손하는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며 “정부 당국이 이를 빌미로 학생들의 집회시위에 대해 강경으로 돌아서서는 안 된다”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정원식은 “현실에 비애감을 느낀다”고 했고 노태우는 ‘용서 못할 행동’이라며 ‘학원 풍토를  바로잡도록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언론 역시 일제히 그 사건을 ‘인륜의 파탄’이라고 보도하면서 학생들과 재야운동권을 맹비난했다. 경악과 분노, 충격 허탈이란 단어들이 난무했다. 

 치사 정국에서 분신 정국으로 불길이 옮겨 붙으면서 일정 부분 시위대의 입장에 서서 노태우 정권에 각을 세웠던 동아일보도 ‘정원식 사태’가 터진 뒤인 6월 5일자에「가투는 이제 그만둘 때다」라는 사설을 싣고 재야운동권의 자숙을 당부했다. 그 사설은 해방 이후 학생운동의 명암을 회고하면서 극단주의적 학생운동이 역사를 정지시키거나 후퇴시킨다는 점을 우려했다. 사설은 이어 “지금 이 순간의 학생운동은 지난날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오늘, 일부 과격 학생운동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학생운동의 도덕성 상실과 그들이 신봉하는 정치이념이 시대착오적인 것에 있다고 할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소수 학생운동권과 재야의 혁명적 구호와 운동방법의 도덕적 타락은 그들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으니) 민주화를 방해하고 순수한 학생들을 정서적으로 오염시키는 일부 학생권과 재야의 가투는 이제 그만둘 때다”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학생운동이 민중민주주의를 세우겠다는 체제 변혁의 이론적 명제 위에 있다고 단정하고, 그것이 소련이나 동구 식 사회주의, 더구나 ‘주체의 나라’ 북한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동아는 이어 6일자 사설을 통해서도 ‘정원식 사태’에서 나타난 교권의 실종을 개탄하면서 “대학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교수이다. (…) 대학이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해방구’가 되건, 교수가 학생들에게 뭇매를 맞건, 내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겠다는 소아병적 이기주의적 교수가 많을 때 그 대학은 진리의 전당도, 미래사회를 예비하는 학문의 산실도 될 수 없다”며 교수들이 떨쳐 일어서라고 촉구했다.

 ‘분신 정국’의 불길은 급격히 사그러들면서 6월 20일 광역의회선거 국면으로 빠져들어갔고, 결과는 집권여당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득표율은 민자당 41%, 신민당 22%, 민주당 14%였는데 획득 의석수는 전체 866석 중 민자당이 거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564석, 신민당은 165석, 민주당은 21석, 무소속 115석이었다. 민자당 압승의 1등공신은 당연히 정원식이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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