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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신탁통치 관련 모스크바3상회의 가짜뉴스 보도사태 미군정의 공작?

- [고승우의 한미관계 탐구 (10)] 맥아더의 일본, 남한 점령기간 동안 미 정보기관 공작 자심

기사승인 2023.04.03  19: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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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태평양전쟁 종전후 한반도 점령은 일본 점령 정책의 일부로 인식되어 집행되면서 조선인의 독립 열망 등은 점령 초기 정책에서부터 배제되었다.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면서 가쓰라-데프트 밀약을 원용하는 원칙 등이 중시된 감이 있다.

미국은 특히 중국이 모택동에 의해 공산화 되는 것을 주시하면서 일본과 남한을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주요 전진기지로 만든다는 전략에 치중했다. 미국은 중국에서 장개석 군을 지원해 모택동 군을 압박하면서 소련의 진출을 저지하는 동북아 전략을 성공키기 위해 한반도와 일본에서도 동일한 목적의 방안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45년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에서 신탁통치 실시를 제안해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됐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대한 남한 보도는 미소 입장과 정반대 내용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은 1945년 12월27일 ‘워싱턴 25일발 <합동통신> 지급보(至急報)’ 형식으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라는 내용으로 국내에 최초로 보도되었다. 그 내용은 3상회의 당시 미·소 양측의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한 가짜뉴스였다. 3상회의에서 미국은 신탁통치, 그것도 10년간의 신탁통치를 제안했고, 역으로 소련은 즉시 독립을 제안했으나 결국 한반도 문제 처리 방안으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과 5년간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이 <합동통신> 기사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민중일보, 중앙신문, 신조선보 등 대부분의 신문들에 게재됐다. 이 기사는 신탁통치 제안자를 미국이 아니라 소련으로 지목하고, 38선 분할이 지속되는 것도 소련 때문인 것처럼 몰아가 한국에서 반탁운동과 좌우 대립 구도를 격화시켰다(한겨레신문 2019년 06월 0일 / ‘신탁통치안 왜곡의 출발은 ‘날조 전문’ 미국 기자‘).

이에 대해 소련의 타스통신이 모스크바3상회의의 진상이라며 “신탁통치는 미국이 주장한 것이었으며, 이는 국무부에 의해 42년부터 입안되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미군정의 여론관리에 대해 전면 반발했다. 남한내에서 반소운동을 격화시킨 것은 맥아더 통치하에서 미 정보당국이 정치공작을 강행했다는 점에서 우연이 아니라는 추정이 힘을 얻고 있다.

뉴욕타임스 1945년 12월28일자 1면에 실린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 관련 기사의 내용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사항을 올바르게 전달했다. 하지만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그 후에도 허위기사 내용을 바탕으로 반탁을 반대하는 사설 등을 계속 보도하면서 반소 여론을 부채질 했다(CBS노컷뉴스 2021년 08월15일 / ‘한반도 운명 갈랐던 '탁치' 가짜뉴스’).

당시 남한의 미군정은 언론검열을 일상화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남한내 신문의 가짜뉴스 지속 보도는 미군정의 묵인 또는 의도적 방치라는 추정이 합리적이다.  미군정은 1947년 9월 좌파 신문이 조선노동당의 하부 기구라면서 미 헌병들을 동원해 그 사무실을 폐쇄하고 언론인들을 체포했다(New York limes, September 7, 1946, p.16). 또한 미국은 1946~1947년 남한에서 발생한 독립 요구 시위, 총파업이나 폭동 등이 공산주의자나 좌파가 공작한 결과라고 규정하는 등 냉전시대의 선두주자 다운 강력한 통치기구의 모습을 지속했다.

한편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미·소 공동위원회는 신탁통치를 포함한 한국문제 토의를 위해 1946년 1월16일부터 2월5일까지 예비회의, 3월20일 덕수궁에서 본회의를 개최했으나, 진전이 없자 5월6일 무기한 휴회를 선언했다. 이듬해인 1947년 5월 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으나 양측의 의견이 맞서고 결국 그 해 8월12일 결렬되었다.

미국은 1946~1947년 남한에서 발생한 독립 요구 시위, 총파업이나 폭동 등이 공산주의자나 좌파가 공작한 결과라고 보았다. 미군정사령관 존 하지 중장은 1947년 9월 좌파 신문이 조선노동당의 하부 기구라면서 미 헌병들을 동원해 그 사무실을 폐쇄하고 언론인들을 체포했다(New York limes, September 7, 1946, p.16).

미국 정부는 1947년 여름 소련의 팽창주의가 유럽에서 다수의 위성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주목하면서 패배주의에 빠져 조선반도의 남북한이 자유롭게 선출된 정부를 세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미국은 1947년 가을 남한에 대해 두 가지 중대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하나는 남한 단독 정부를 세우는 방안을 유엔을 통해 추진하는 방안이고 다른 하나는 동북아에서 군사적 방어 저지선에서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하고 일본을 최전방으로 삼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것이었다(Memorandum, Assistant Chief of the Division of Eastern European Affairs (Stevens), 9 September 1947, FRUS, 1947, VI, The Far East, 784-85. The present section of this essay is drawn extensively from a paper entitled "The Making of Mr. Truman's War" that was delivered by the author during a conference in Seoul in June of 1990. Commemorating the fortieth anniversary of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the conference was sponsored by the War Memorial Service-Korea. The paper was subsequently published in The Historical illumination of the Korean War (Seoul: Korean War Research Conference Committee (a division of the War Memorial Service-Korea), 1990). The War Memorial Service-Korea, headed by Lieutenant General Lee Mm Young (retired), has granted permission to the author to incorporate the paper in the present essay).

1947년 10월 미 합참의장은 군사적 관점에서 남한에 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의미는 없다고 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미국은 1948년 봄 국가안보회의에서 작성한 조선반도에 대한 보고서를 트루먼 대통령이 재가했다. 보고서 내용은 미국의 향후 남한에 대한 정책이었다.

“미국은 남한이 경제와 군사력을 구축하는 것을 지원한다. 그러나 미국은 남한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전을 위해 외부의 공격에 대항해서 군사력을 동원한다는 방안은 전적으로 배제한다.”

미국이 남한이 공산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사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나온 시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중국에서 장개석 군이 패퇴하고 모택동 군이 천하통일을 목적에 둔 시점이기도 했다. 모택동 군은 2차 대전 종전 직후 소련의 도움으로 만주의 1/3을 점령하면서 승승장구해 1947년 200만 명으로 증강되어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미국은 동북아, 특히 중국의 공산화를 저지해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는다는 전략이었지만 중국의 공산화가 기정사실이 되면서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남한을 공격한다면 미국이 이를 감당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한 결과였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이 지원하는  북한의 남침에 개입할 경우 득보다 실이 크다고 보고 소련의 남침 저지선을 동북아에서는 남한을 빼고 일본으로 후퇴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남한에서 반탁 운동이 거세게 발생했다. 사진=위키미디어

 


미국과 소련, 유엔 통한 한반도 해결방안 놓고 격돌

미국은 한국문제를 1947년 9월 23일 유엔총회 본회에 제기해 안건으로 채택되게 만들었다. 미국은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한국문제의 해결방안으로 유엔감시 하에 민주주의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한 총선거 실시 후, 정부수립과 동시에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 그리고 총선 및 양군 철수 등에 대한 감시협의체로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설치할 것을 제의했다.

소련 측은 미국 측 제안에 반대하면서 한국인 스스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미·소 양군 동시 철군 및 본 문제 토의에 남북한 대표를 참가시키는 내용으로 하는 반대결의안을 제출했다.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선(先)정부수립·후(後)외국군철수를 주장한 미국과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한 소련이 날카롭게 대립하였으며, 1947년 10월28일 부터 11월5일까지 이 양 결의안을 놓고 토의한 결과 소련의 반대결의안을 부결시키는 대신 미국 측의 제안을 채택했다.

유엔총회 본회의에서 11월14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한반도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측 안을 40:0(기권 6)이라는 압도적 다수결로 채택함으로써 모스크바협정이 규정한 5개년 신탁통치안이 묵살되었다(Oliver, Robert Tarbell (1978).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A Personal Narrative. Seoul, South Korea: Panmun Book Company. p. 149. OCLC 568651495).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중화민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 소련 등 9개국 대표로 발족시켰지만 우크라이나와  소련은 불참했다. 소련 측은 조선인대표의 참가 없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에 참가하기를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위원단은 1948년 1월 서울에서 임무에 착수 했으나 위원단의 북한 입장이 소련군정당국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8개국의 대표로 구성된 임시위원단이 남한에 입국하였으나 소련군 점령 하의 북한 지역에는 들어가 못하게 되자 그 사실을 유엔 소총회에 보고했다. 이에 대해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동 위원단이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 그 과업을 계속 할 것을 결정했다(https://ko.wikipedia.org/wiki/).

“유엔은 소련 등 7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을 하겠다는 미국의 안을 따른다.”

그에 따라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가 치러지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남한에서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북한에서는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출범했다.

1948년 12월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남한 지역에서 실시된 선거에 따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맥아더의 일본통치, 전범처벌과 토지개혁 등 실시

한반도 분할 점령 이후 남한에서 격렬한 반소 감정을 폭발시킨 모스크바3상회이후 남한에서는 미군정과 우익세력이 득세할 기반이 조성됐다. 이 회담에 대한 1945년 12월 최초의 남한에서의 보도는 미·소 양측의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한 가짜뉴스였고 이를 사실로 믿은 남한 주민들은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며 소련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다.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대해 남한에서는 반소 감정이 격화되면서 미국 의도대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미국 정부의 목표가 추진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당시 남한의 미군정은 미국의 대일본 정책의 한 부분으로 시작되어 소련이나 사회주의 세력의 남한 확산을 경계하는 것을 제1의 전략목표였다는 점에서 소련에 대한 남한에서의 부정적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매우 주목할 일이다. 당시 남한 언론을 통제하던 미군정이 모스크바3상회의에 대한 가짜보도에 대해 전혀 규제하지 않은 것은 미국의 노림수가 무엇인지를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이는 남한군정의 총지휘부 역할을 한 맥아더가 미국 정부의 지침에 따라 일본을 통치한 것과 무관치 않다.

미국이 한반도의 이남 지역을 점령한 초기 발표해 실시한 맥아더 포고령도 일본 점령 정책과 큰 틀에서 유사했다. 맥아더가 일본 점령기간 동안 미국 정보기관이 맹활약했고 이는 남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점에서 항복한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점령정책과 막후 공작정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맥아더는 1945년 10월 미 정부의 전후 일본 대책에 따라 일본에 대한 평화로운 점령과 재건을 목표로 삼아 혁명과 공산주의를 방지하라고 지시했다. 맥아더는 이어 1946년 1월 천왕에 대해 전쟁 책임 등을 물을 경우 일본인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라며 천왕에 대한 전쟁 범죄 기소를 중단하고 대신 도조 수상이 전쟁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일본 통치 방침을 미 정부에 전송했다(Bix, Herbert (2000). Hirohito and the Making of Modern Japan. New York: HarperCollins. ISBN 978-0-06-093130-8. pp. 550–551).

맥아더는 1945년 말까지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전범 재판을 열고 일본인, 대만인, 조선인 5700 명을 체포해 4300명을 기소(조선인 148명, 대만인 178명 포함)하고 그 가운데 984명에 사형선고를 한 뒤 920명을 집행했다(Dower, John (2000). Embracing Defeat: Japan in the Wake of World War II, p. 447).

 

▲ 태평양전쟁 후 1946년 일본 이치가와에서 열린 극동연합군군사재판소 대법정의 피고인석에 출석한 일본인 전범들. 사진=위키미디어


맥아더는 일본 천왕과 왕족들이 전쟁범죄에 연루되지 않도록 일본전범들의 진술 내용을 변조하기도 했다(Dower, John W. (1999), Embracing Defeat: Japan in the Wake of World War II, p. 246.Norton, ISBN 0-393-04686-9). 미국은 731 부대의 인체 실험에 대한 자료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부대장에게 면책 조치를 내렸는데 이는 미국이 나치 고위관리 가운데 로켓, 제트 엔진 기술자들을 풀어준 것과 유사했다(Gold, Hal (1996). Unit 731 Testimony. Boston: Tuttle. ISBN 978-0-8048-3565-7. p. 109).

맥아더는 1945~1948년까지 남한에 대한 미 점령을 지휘, 하지 중장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그 결과를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했다(Schnabel, James F. (1972).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ISBN 0-16-035955-4. OCLC 595249. CMH Pub 20-1-1. Retrieved 27 March 2021. p. 13). 맥아더는 1949년 일본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고 1951년 4월11일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항복한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점령정책은 전쟁기간 동안 수차례의 연합국 협의를 통해 만들어졌다. 영국, 미국, 중화민국, 미국은 일본의 무장 해제와 한반도 대만 등 일본의 식민지 처리 계획을 논의하고 일본의 경제를 안정시켜 재무장화를 방지할 방안을 협의했다. 그 결과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1945년 9월 그 목표가 달성되었다(https://history.state.gov/milestones/1945-1952/japan-reconstruction).

1945년 9월 맥아더는 연합군총사령부(SCAP)사령관이 되어 일본 재건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영국, 소련, 중화민국이 연합국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자문역할을 맡았지만 맥아더가 모든 결정의 최종권한을 행사했다. 일본 점령은 세 단계로 실시되었는데 그것은 일본의 전쟁 범죄 응징과 개혁, 일본 경제 부흥, 평화조약 체결과 일본 주권 회복을 순차적으로 시행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SCAP는 1945~1947년까지 군국주의자와 전쟁범죄자에 대한 재판을 열어 관련자들을 응징하고 일본군의 해체와 함께 전직 일본군 장교의 새 정부 정치적 지도자 참여 금지 조치 등을 취했다. SCAP는 경제 분야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해 일본의 팽창주의를 지지하거나 전쟁을 옹호했던 지주들의 토지를 다수의 소작농에게 분배했다. 맥아더는 일본의 거대기업을 해체해서 일본 경제를 자유 시장에 기반한 자본주의 체제로 바꿨다.

1947년 연합국자문기구는 일본의 새 헌법을 만드는 것을 관장해 공격 목적의 군대 배제, 전쟁 선포권 박탈과 함께 천왕의 지위를 정치적 권한 등을 배제한 상징적 존재로 격하시키고 의회에 힘을 실어주는 내각책임제를 채택케 하면서 여권신장 등의 조항을 담도록 했다.

 

▲ 1945년 9월 맥아더와 일본 히로히토가 첫 번째 면담 후 찍은 사진, 미군정이 이 사진을 일본에서 공개하자, 비밀의 장막에 가려져 신성시되던 히로히토의 실제 모습을 처음 목격한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위키미디어

 


미국 일본내 공산주의 확산 우려, 한국 전쟁 일본 경제 회복 기회로 삼아

1947~1948년 동안 일본에서 경제위기가 닥치고 공산주의 확산의 우려가 커지면서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이 수정되었다. 이 기간 동안 점령정책은 경제정책에 집중되어 1950년까지 지속되었다. SCAP는 일본 경제가 약화되면 일본 국내에서 공산주의 활동이 증대할 것을 우려했고 이는 중국 내전에서 모택동이 승리하면서 동북아의 미래가 위태로워졌다는 위기의식 속에 더 심화되었다. 점령정책은 일본 인플레를 통제하기 위한 대책에 집중되었지만 원자재 부족으로 인한 일반산업과 시장문제가 심각했다(https://history.state.gov/milestones/1945-1952/japan-reconstruction).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하자 SCAP는 일본 경제 위기 극복의 기회로 보았다. 미국이 유엔 깃발을 사용한 연합군을 만들어 참전하자 일본은 유엔군의 병참기지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일본을 미국의 방위선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인들은 외부의 무력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SCAP는 1950년에 시작된 일본 점령정책 3단계를 시작하면서 일본의 정치, 경제적 안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전쟁과 점령을 동시에 종식시킬 평화조약 체결에 착수했다. 미국정부는 1945~1950년 동안 국제적 위협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면서 일본의 재무장과 군사화가 미국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며 진정한 위협은 특히 아시아에서 팽창하는 공산주의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 같은 인식에 따라 미국은 일본의 오키나와 등지에 기지를 만들어 군대를 주둔시키고 일본 정부와 안보조약을 체결했다(https://history.state.gov/milestones/1945-1952/japan-reconstruction).

1951년 52개 국가가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대일 평화조약을 협의했고 소련, 폴란드, 체코 등 3개국이 거부한 가운데 대일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불리며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 공연예술 센터에서 맺어져 1952년 4월28일에 발효되었다.

조약의 발효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한 일본의 군정기가 끝나고,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영국과 미국의 견해 차이로, 한반도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 어디가 전체 한국인을 대표하는지의 문제로 초청 대상국에서 제외됐다. 미국이 거의 일방적으로 주도해 만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일본을 미국이 대소 전초기지로 만드는 대신 일본에게 파격적인 특혜를 주어 오늘날 일본의 전쟁범죄 부인과 배상 거부의 근거를 제공했고 동북아의 대립구도를 형성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독도 문제를 제외함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제공했다. 종전 후 남한에서 취한 미국의 태도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는 미국이 점령군으로 진주하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에서 한국을 배제한 것과 같은 일련의 태도가 설명되지 않는다. 미국은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오늘날 한미일 군사동맹을 목표로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에서 일본이 비이성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하는 배후 세력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맥아더, 정보정치로 일본과 남한내 좌익세력과 노동 운동 탄압

맥아더의 일본 점령 통치는 강력한 정보정치와 겸해졌는데 그 역할은 정보기구 G-2 부장 찰스 앤드류 윌러비(Charles Andrew Willoughby)소장이 맡았다. 윌러비는 2 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기간 동안 맥아더 장군 휘하의 정보기구 G-2의 국장을 역임하며 정보 참모 책임자 역할을 했다. 그는 맥아더가 일본을 점령한 최고연합사령부 사령관이 되면서 임무도 막중해졌다(http://www.arlingtoncemetery.net/cawilloughby.htm).

윌러비는 강력한 반공주의자로 미군에 의해 붙잡혀 일본 정치범으로 수감된 공산당원들의 석방을 주장하는 미국 고위관리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사상범을 다루던 일본 특별고등경찰(이하 특고경찰)출신들을 주요 공직에 복직토록 조치했다(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A._Willoughby).

 

▲ 맥아더의 한반도와 일본통치 기간 동안 그의 휘하에서 정보정치 책임자였던 G-2 부장 찰스 앤드류 윌러비 소장. 사진=위키미디어

 

남한에서 일제치하에서 일본 경찰이 되어 독립군을 탄압했던 친일세력이 경찰에 복귀한 것도 그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특고경찰은 1911년 만들어져 좌익운동, 노동 운동 탄압이나 민간 범죄수사와 방첩 업무를 담당했다. 조선에서도 여러 독립운동 색출과 탄압에 특별고등경찰이 나섰다.

미 점령사령부(GHQ)는  1945년 10월4일 특고경찰과 치안유지법은 폐지했지만 후에 특고경찰의 공직추방의 처분은 해제되어서 자치성, 경시청, 공안조사청, 일본육영회 등의 상급기관으로 복직되었다. 또한 특고경찰 중에 고문이나 인권유린 등으로 문책, 처벌의 대상이 된자는 없었다. 또한 냉전이 심화됨에 따라, GHQ는 일본내의 사회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특고경찰을 활용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https://en.wikipedia.org/wiki/Tokubetsu_K%C5%8Dt%C5%8D_Keisatsu).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주한미군 CIC정보원

윌러비는 소련군에 포로로 잡혔다 귀환하는 일본군 패잔병 9만 5천 명 가운데 섞여 있을지 모를 공산주의자의 색출에 전념했으며 이를 위해 방첩대(CIC)(오마이뉴스 2021년9월 19일)를 만들었다.

1949년 6월26일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주한미군 CIC정보원으로 활동하다 정식요원이 된 인물이다. 윌러비는 남한에도 별도의 정보부대를 창설했다. 1948 – 50년까지 한국에는 여러 미국 첩보기관들이 주재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CIA와 미 공군이 운영하는 특별수사대(OSI)도 포함되어 있었다.

윌러비는 1945년 8월 만주의 731부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일전쟁 중 일본 제국 군대의 생물세균전 실험을 담당했던 이시이 시로(1892년 6월25일~1959년 10월 9일)에게 관련 정보를 넘겨받는 작전을 성공시킨 공로로 소장으로 승진했다. 이시이에게 별도의 돈도 지급되었다(Edward Drea (et al.): Researching Japanese War Crimes Records: Introductory Essays. Washington 2006, ISBN 1-880875-28-4; Chapter 8). 윌러비는 일본 언론에 대한 검열을 담당했고 남한의 미 점령군의 남한 언론 검열도 그의 지침에 따라야 했다("SCAPIN-33: PRESS CODE FOR JAPAN 1945/09/19". Naional Diet Library Digital Collections. Retrieved 2021년 03월07일).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소련이 한반도의 신탁통치에 찬성한다는 가짜 정보가 서울에서 보도되어 큰 논란이 된 바 있는데 이는 미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당시 남한 언론은 미군정의 검열을 받고 있었던 점에서 중대 사안에 대한 가짜뉴스가 방치된 것은 의도된 결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 정보 책임자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가능성 정보 변조, 왜곡

윌러비는 미군의 일본 점령정책을 실시하는 데에 있어 정보 수집을 하면서 맥아더의 구미에 맞는 정보를 조작하기도 했다. 그는 1950년 2월 OSI가 북한의 남침 가능성과 그 침투 루트를 제시하자 이를 깔아뭉갰지만 1개월 뒤인 3월에 6월의 남침가능성을 보고했다가 십 여일 뒤 그것을 뒤집는 정보를 올리기도 했다.

윌러비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중국의 참전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변조,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Haberstam, David; The Coldest Winter; New York 2007, ISBN 978-1-4013-0052-4). 그는 맥아더가 중국 참전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한 것을 지지하기 위한 정보만을 상부로 올렸는데 이는 맥아더가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소련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없을 경우에만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라고 지침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공군의 참전과 관련한 정보를 축소, 왜곡하면서 결국 장전호 전투에서 중공군이 대승하고 미 8군과 한국군 등이 큰 피해를 입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윌러비가 맥아더의 해임과 함께 일본 정보책임자 자리를 물러난 뒤인 일본의 극우세력은 1952년 일본 정부를 전복하고 요시다 시게루 수상을 암살하려는 쿠데타 계획을 미국 정보기관과 함께 세웠던 것으로 비밀이 해제된 미 중앙정보국(CIA)문서에서 2007년 밝혀졌다(조선일보 2007년 3월1일).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전범들이 결탁하고 미국 점령군이 개입한 이 쿠데타 음모는 당시 미국에 우호적이었던 요시다 수상을 몰아내고 강경 보수 세력인 하토야마 이치로가 앞장선 우익 정권을 만들어 일본의 재무장을 시도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쿠데타 음모의 주모자는 전범으로 1948년 사형당한 전시 수상 도조 히데키의 개인 비서였던 하토리 다쿠시로였다. 이 쿠데타 음모는 미군정이 1952년 종식되면서 시작되었으며 하토리에게 제공된 미국 쪽의 경제적 지원이 중단되면서 백지화되었다. 이 쿠데타 음모는 1945년 일본 항복이후 1950년 초까지 지속된 냉전 상황에서 미군사령부의 정보기구였던 G-2가 일본의 우익과 반공세력 등과 함께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미 중앙정보국은 G-2와 별도로 가동되었다.


CIA, 일본을 아시아 반공 보루로 삼기 위해 수백만 달러 자민당에 지원

한편 미 중앙정보국(CIA)은 냉전시대인 1950~1960년대에 행한 비밀작전을 통해 일본을 아시아의 반공 보루로 만들고 일본 내 좌파를 약화시키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자민당에 지원했다는 사실이 미 국무부가 기밀 해제한 정부 자료에서 최초로 발견됐다(한겨레신문 2006년 7월19일).  

CIA는 지난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일본 사회당을 분열시키고 자민당 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비밀 자금공작을 펼친 사실이 이 공문서로 확인됐다. 당시 미 정부는 중앙정보국에 대해 일본의 정치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비밀공작 4건을 승인했다. 이 자료는 비밀 자금이 미국 기업인의 지지를 받기 위한 목적이라는 점만 통보되면서 전달됐는데 그 대상이 상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기시 노부스키, 이케다 아야토 수상인 것으로 추정됐다.

당시 미국은 일본에서 좌파 세력이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일본의 중립화를 촉진하면서 좌파 정권이 들어설 것을 우려해서 공작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동시에 극좌 정치인의 선출 기회를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1959년에 유사한 자금 지원 계획을 전개하면서 좀 더 친미적이고 온건한 야당의 출현을 목적으로 좌파 야당의 온건파를 분열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미국은 자민당 창당에도 관여했다. 1994년도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일본이 사회주의 세력에 편입될 것을 우려한 중앙정보국(CIA)은 경쟁 구도에 있던 보수파들에게 합칠 것을 격려하며 수년간 자금을 지원했다. 그런 결과일까. 일본은 1955년 이래 2021년까지 단 두 번을 제외하고 자민당이 집권해왔다. 자민당은 1955년에 생겨났는데 전후 일본이 미국 점령에서 벗어난 지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경향신문 2021년 10월1일).

 

 

▲ 필자 소개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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