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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본 챙기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한국 철저히 배제

- [고승우의 한미관계 탐구 (23)] 독도, 강제징용 논란 발생 근본 원인 미국이 만들어

기사승인 2023.05.22  18: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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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태평양전쟁 종전이 가까워오면서 소련이 동북아시아로 진입할 경우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으며 이런 태도는 일본 항복이전과 이후 일관되게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 반영되었다.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전후 점령정책도 이런 기조에 맞춰져 집행되었다.

미국은 전후 동북아에서 소련을 견제할 구도를 만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추진했으며 이 조약은 일본이 미국의 대소 동북아 전진기지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미국은 이에 따라 전범국가 일본에 대해 전범 처리와 전후 배상문제를 최대한 가볍게 하는 방식을 만들어 오늘날 한일간에 논란이 되고 있는 일제 치하의 강제징용, 성노예 문제가 발생할 근본적 원인을 만든 셈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또는 대일 강화 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상태를 종결하고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1951년 9월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 공연예술 센터에서 일본이 미국·영국 등 48개국과 맺은 평화 조약으로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었다.


‘일본 한반도 식민지배가 한반도 근대화 기여 논리’ 미국이 유포

미국의 태평양전쟁 종전 후 한반도 점령은 일본에 대해 취한 솜방망이 전후 점령 정책의 일부로 인식되어 집행되면서 조선인의 독립 열망 등은 점령 초기 정책에서부터 배제되었다. 소련을 견제하면서 가쓰라-데프트 밀약을 원용하는 원칙 등이 중시된 감이 있다.

미국은 특히 중국이 모택동에 의해 공산화 되자 일본을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주요 전진기지로 만든다는 계획을 중시하면서 한반도의 전후 배상 문제 등에 대해 일본 편을 주로 드는 태도를 취했다.

그것은 미국이  1952년 4월 일제의 2차 대전 전쟁범죄에 대한 배상과 일본 정부발족에 대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었다. 미국은 이 조약의 협의 과정에서 한국을 협의 참여나 조약 서명국에서 배제하는 등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배상 조건을 협의할 때 한반도를 제외시켰다.

미국은 협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하면서 근대화에 기여한 공로를 금전으로 환산할 경우 배상 추정 액보다 훨씬 많다는 식의 괴문서를 배포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이전인 1951년 5월 미 국무부는 38선 이북의 북한 땅을 제외한 남한 땅에 남겨진 일본인 자산은 한국이 일본에 대해 요구하는 배상액의 4배에 달한다는 내용을 공개했다(“Comparison of Japanese Assets in Formosa and Korea with Possible Korean and Formosan Claims in Japan,” 24 May 1951, Box 5, Folder “DRF-DR 229”, Reports Relating to the Far East, 1946-1952, RG 59).

오늘날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한반도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논리는 당시 미국 쪽에서 만든 것이다. 미국은 이 조약을 통해 일제의 전쟁범죄에 대해 일본과 피해국이 1:1로 협상해 해결하는 식으로 만들어 주어 일본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다. 오늘날 강제지용문제 등이 발생할 소지를 미국이 마련해 준 것이다.

미국은 또 독도 문제를 제외함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제공했다. 종전 후 남한에서 취한 미국의 태도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는 미국이 점령군으로 진주하는 것과 같은 일련의 태도가 설명되지 않는다. 미국은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한반도를 일제의 식민지로 여기면서 조선의 독립을 외면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그런 태도는 일본의 항복 이후 취해진 남한에 대한 미군정의 조치에서도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그런 태도는 이승만이 친일세력과 야합해 집권하는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제 미 청산과 이승만 이후 독재의 뿌리가 가쓰라·테프트 밀약에서 비롯된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는 이유다.

미국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한국군 군작전지휘권을 이양 받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된 1953년 이후 미군이 슈퍼 갑으로 공인되면서 남한의 군사적 주권을 장악했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 수준이 되면서 미군정 기간에 발생한 제주 4.3,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군사령관의 지휘를 받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치권이나 언론이 미국이나 미군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 해석하지 않고 친미 일색이고 반미는 친북이라는 색깔론이 지배적인 것은 국가보안법의 뒷받침이 강하기 때문이다.

 

▲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식에서 서명하는 일본 대표단. 사진=위키미디어

 


미국, 일본 배상 책임 가볍게 한 강화조약 만들며 한국 원천 배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또는 대일 강화 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상태를 종결하고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1951년 9월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 공연예술 센터에서 일본이 미국·영국 등 48개국과 맺은 평화 조약으로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었다.

미국은 1947년 7월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을 위한 예비회담을 제의하였으나 회의 방식을 놓고 소련과 충돌해 실현되지 못하다가 1950년 6·25 전쟁을 계기로 속도를 내기 시작해, 주최국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52개국 중 체코슬로바키아, 소련, 폴란드를 제외한 49개국이 이 조약에 서명했다.

미국이 주도한 이 조약은 일본 침략을 받은 아시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은 집단안보체제가 아닌 미국이 일본을 반공 진영에 편입시켜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이 신속히 경제적으로 안정, 발전할 수 있도록 일본이 전범국으로 피해국가에 대해 배상 책임을 지는 방식을 베르사유 조약과 크게 다르게, 즉 약하게 규정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패전국 독일이 피해 국가들에 대해 엄청난 배상을 하도록 만든 것이었는데 미국은 이 방식을 피하고 일본이 개별 피해국들과 협상을 통해 배상문제를 해결토록 했다. 미국은 일본에게 40년 가까이 식민지배의 피해를 당한 한국을 이 조약 협상과정에서 배제하고 서명국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이 참여할 경우 과도한 배상요구를 할 것이라는 점을 내세웠으나 일본에 의해 피해를 본 국가 중 한반도가 가장 심각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태도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24XXXXX59359).

베르사유 조약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에 대한 책임으로 독일에 대해 다시는 전쟁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민간인 피해 등 모든 전쟁 피해에 대해 엄청난 배상액을 요구하는 등 가혹한 제재를 가했다. 그러자 독일은 해외 식민지 상실과 엄청난 배상액 요구에 대해 적개심을 표시하는 등 반발하자 조약 비준 수 년 뒤 조약의 상당부분이 개정, 철회 되었다. 무자비한 전후 보복과 용두사미 식 조약 실행으로 1930년대에 독일 군국주의가 발호하면서 2차 대전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베르사유 조약에 문제가 있었다 해도 일본의 침략행위와 전쟁범죄에 대한 정당한 청산절차를 아예 생략한 것은 미국이 일본을 친미 일변도의 반공보루로 삼아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파격적 혜택을 주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컸다. 미국은 이런 의도를 감추기 위해 일본 배상 책임의 시기를 2차 대전기간에 국한한다는 식으로 제한하고 민간인 배상은 도외시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은 대화상대가 아니다’라는 식의 완강한 태도를 표명했을 뿐 공개적으로 미국에 항의하거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6·25 전쟁을 전후해 북진통일만을 집요하게 주장하는 내용의 친서를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내 압박했다.

미국이 난색을 표하자 남한이 외부의 공격을 받을 경우 미군이 즉각 개입할 수 있게 한미 두 나라가 상호방위조약을 맺자고 주장하면서, 정전협정 추진이나 합의 과정에 불참하고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해 정전협정을 무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이런 요구는 좌절되고 한미상호방위조약도 한반도 전쟁 발생 시 미국의 즉각 참전 요구도 포함되지  않았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미군의 남한 주둔을 ‘권리’로 규정함으로써 한국의 군사적 주권을 미국에 예속시키고 주한미군을 동북아 전략용으로 활용할 여건 확보와 같은 실리 등을 챙겼다.


미국, 소련과의 냉전체제 대비해 한국의 역사적 고통과 손실 문제 희생시켜

2차 대전 종전 직후 한미관계는, 한국이 일본 식민지와 전시 체제에서 당했던 역사적 고통과 손실 문제가 미국이 소련과 전개할 냉전체제에 대한 대비 과정에서 희생당한 것으로 압축될 수 있다. 미국 정부는 일본 점령정책을 통해 일본의 전쟁 범죄로 인한 한반도 등에 대한 책임 문제를 취급하지 않는 대신 전후 아시아에서 소련과 경쟁할 체제를 구상하는데 몰두했다. 이런 미국 태도는 미국이 1905년 일본과 필리핀, 조선을 점령하는 것을 서로 양해하기로 합의한 가스라-테프트 밀약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측면도 있다.

당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장기적인 다국적 참여를 통한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목표는 외면한 채 냉전에 대한 대비라는 단기적 목표에만 집중되었다. 그 결과 미국 정부는 태평양전쟁 후 아시아의 나토와 같이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태평양집단안보기구는 추진하지 않았다. 미국의 관심은 일본에 집중되었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을 미국의 우방으로 만들어 일본이 냉전체제 속에서 미국의 통제 하에서 전략적 이익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이 맨 먼저 취한 조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추진과 미일 방어전략 수립 과정에서 한국을 배제하는 작업 이었다(https://openscholarship.wustl.edu/cgi/viewcontent.cgi?article=1015&context=undergrad_etd).

일본이 항복한 뒤 맥아더 장군의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1945-1952년까지 일본을 통치했다. 이 기구는 미국, 소련, 중국, 영국 등이 참여하는 다국적 형태로 보이지만 실제 미국이 전담했다. 맥아더는 동경에서 일본 전 지역에 파견된 연합군 사령부 통치기구와 일본 관료들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는 외국군이 직접 통치했던 독일의 경우와 확연히 달랐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일본 과거 정부와 관변 기구, 특히 구 관료조직의 지원을 받아 워싱턴의 지시 사항을 이행했다(https://www.britannica.com/place/Japan/Economic-transformation).

이 기구의 주된 업무는 일본의 탈 군국주의, 민주화와 민주화된 일본을 적절히 지탱해줄 경제 질서 확립이었다. 맥아더가 이 업무를 총 지휘하면서 미국의 우방이 될 일본을 창조하는 업무에 열중했다.

당시 미국은 오키나와, 류큐 열도를 점령하고 있었고 소련은 전체 쿠릴열도와 남부 사할린을 지배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추진하기 위한 회의가 1951년 9월 열렸을 때 소련은 회의에 참석했지만 서명을 거부했다. 이 조약은 일본의 태평양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서 일본이 관련 국가들과 개별적으로 협상토록 했다. 이 조약으로 미일관계가 정립되었다. 일본은 일본 영토에 미군 기지를 유지토록 해주는 대신 미국 시장에 접근해 경제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https://www.britannica.com/place/Japan/International-relations#ref319774).


미국 대일 강화조약 추진 초기 한반도 등에 충분한 보상원칙 정해

미국의 일본 배상 원칙은 초기에는 합리적인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180도 뒤집혀 일본의 부담을 파격적으로 가볍게 만드는 것으로 변질됐다. 미국은 1945년 10월 일본과 강화조약을 추진할 때는 일본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피해국들에게 충분한 배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은 세계 1차 대전 패전국 독일에 대해 다시는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응징하는 의미에서 가혹한 배상과 전쟁 청산을 규정했던 베르사유 조약의 취지에 부합하는 배상을 일본이 아시아 피해국가에게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을 정했다(6 Elizabeth Borgwardt. A New Deal for the World: America’s Vision for Human Rights. (Cambridg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286-291).

미국은 포츠담 선언에서 연합국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일본이 전후 연합국과 그 국민들이 입은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을 추진한다고 밝힌 것 등을 고려할 때 한반도가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요구하는 청구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반도가 그런 점에서 미일 강화조약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Potsdam Declaration: Proclamation Defining Terms for Japanese Surrender,” 26 July 1945).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담당한 미국 정부대표단은 1945년 10월 일본의 전후 배상원칙에 대한 초안을 마련할 때 ‘미국의 일본 점령은 징벌이 목적은 아니지만 일본의 산업시설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파괴된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회복을 위해 제공되어야한다. 그래야 일본의 전쟁 재발 능력을 제한하고 아시아 지역경제 안전을 달성할 수 있다.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배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어 일본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FRUS): Diplomatic Papers, 1945, The British). 미국 정부가 일본배상의 대상에 한반도를 포함시킨다는 원칙은 1945-1946년 동안 유지되었다.

 

▲ 1945년 10월 2차 대전 전승국 소련 태평양 함대 소속 군인들이 에스토니아 항구에서 깃발을 들고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1945년 12월 8일 미국 대표단은 맥아더와 태평양사령부에 보낸 전문에서 “대표단은 일본 본토의 산업시설과 장비는 한반도를 착취하기 위해 사용됐다는 점에서 한반도에 이전되어야 한다는 점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밝혔다(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FRUS): Diplomatic Papers, 1945, The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Volume VI. Eds. Glennon et. Al, (Washington: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747).

제임스 F. 번즈 당시 미 국무장관은 1946년 2월 28일 전문에서 “미국 정부와 미극동위원회는 연합국 관리 하에 있는 일본 재산은 배상의 형태로 분배되어야 한다. 미군정이 남한 지역의  일본 재산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의 고통을 한국인들이 받았다는 점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남한 쪽에 인도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FRUS), 1946, The Far East, Volume VIII. Eds. Reid and Fine, (Washington: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1). 361).

당시는 독일과 일본 전범재판이 진행되는 상황이어서 군사적 침략으로 발생한 피해자가 배상을 받아야 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당연시 되었고 미국 정부 입장에서 한반도는 그 역사로 볼 때 충분한 도덕적 배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인정된 것이다. 당시 한반도에는 한국인의 정부가 없었고 한국인 해외 망명 정부에 대해 미국은 큰 관심이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미국의 한반도 배상자격 문제에 대해서는 확고한 상태였다(https://openscholarship.wustl.edu/cgi/viewcontent.cgi?article=1015&context=undergrad_etd. 40-41).


미국, 한국의 샌프란시스코 조약 참여 원칙 1949년 정반대로 바꿔

그러나 미국 정부의 이런 입장은 1949년 후반이후 정반대로 뒤집혔다. 미 국무부의 문서들은 한반도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포함되거나 일본 배상 대상에 포함되는 것에 반대하면서 한국인 망명정부는 2차 대전 전쟁기간 동안 미국에 의해 인정받은 바 없어서 한반도는 연합국 자격을 상실한다고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전후를 통해 한국은 일본의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큰 목소리로 주장했다. 한국은 1905년부터 일본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식민지였기 때문에 40년 동안의 피해에 대한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Participation of the ROK in the Japanese Peace Settlement,” 12 Dec 1949, Box 4, Folder “DRF 163”, Reports Relating to the Far East 1946-1952, RG 59, NACP. In particular, Section III, Part A1 “Claims of the Republic of Korea for Restitution and Reparations.”).

한국 정부는 일본의 강제 징용은 물론 문화재, 금, 토지 강제 수용 등을 배상 대상으로 포함시켰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일본 전후 처리가 복잡해질 것을 우려해 한국을 세계 2차 대전 연합국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단지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일본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규정했다. 필리핀에 대한 배상의 경우도 2차 대전 당시 일본에게 당한 피해에 국한하는 것으로 조정됐다.

당시 미국이 일본 배상문제를 놓고 가장 크게 고려한 부분은 소련이었다. 미국 정부는 소련의 영향력 증대에 대처할 아시아의 교두보로 일본을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앞세워 한국의 배상요구에 대해 1947-1949년 부정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미국은 그러나 남한 내 일본 재산을 한국에 이전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 소련과 미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미국 정부는 일본 경제와 정치적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고 일본 배상문제는 미국 외교관들의 금기 사항이 되었다(Schaller, American Occupation of Japan, 16; Schaller, Michael “MacArthur’s Japan: The View from Washington,” Diplomatic History 10, no. 1(Winter 1986): 1-23, esp. 3-5; Sakamato, Yoshikazu. “The International Context of the Occupation of Japan”, in Democratizing Japan: The Allied Occupation, ed. Robert E. Ward and Sakamato Yoshikazu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7): 42-75, esp. 44-46; Schonberger, Howard. “The Japan Lobby in American Diplomacy, 1947-1952,” Pacific Historical Review Vol. 46, no. 3 (Aug 1977): 327-359, esp. 329; Schonberger, Howard. “U.S. Policy in Post-War Japan: A Retreat from Liberalism,” Science & Society Vol. 46, no. 1 (Spring 1982): 39-59).

미국이 미소 냉전 심화와 일본의 조속한 경제회복을 명분으로 일본의 전후 배상문제에 대한 기준을 패전국의 전쟁범죄 책임을 무겁게 지도록 한 베르사유 조약과 판이하게 일본 부담을 가볍게 만들 때 일본의 피해국가운데 가장 상징적 존재였던 한국이 침묵하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미국의 의도대로 만들어 진 측면도 있었다. 당시 일본에 의한 피해국이 50여 개국에 달했는데 한국이 앞장서서 미국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시정토록 요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미국은 1947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이 배상할 대상의 국가 범위를 2차 대전 당시 일본과 교전한 국가로 축소하는 방침을 정하고 남한, 중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이유로 초청대상에서도 제외했다(FRUS 1947, Volume VI, Document 291).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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