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
1979년 12월27일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일지(민권일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동아투위 위원 10명의 출옥 환영회겸 송년회에서 김학천 위원이 발언하고 있다. /김학천 제공 |
지금은 인간의 수명이 80을 넘었지만 얼마 전 만 해도, 아니 지금도 50년은 한 인간의 수명에 해당한다. 유아기와 죽기 전 무기력한 시기를 빼면 그러하다. 그동안 10명이 넘는 대통령과 정권교체가 있었다. 참 많은 것이 변하고 진화했지만 어찌된 셈인지 우리가 견디다 못해 울부짖은 언론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이를 실행하던 사람들에 대한 우악스럽거나 교묘한 탄압은 기대한 만큼 진화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권력이 언론과 민주주의에 강요하는 욕망의 표시가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라는 뜻이다. 다만 언론의 조작이나 언론인의 인권이 밟힐 때마다 어처구니없게 자유라는 표현만 나타날 뿐이다. 예전에 우리는 언론의 자유라는 거대 담론을 주창할 때도 우리 형편에 맞게 “이젠 언론인을 막 잡아갈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오히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상기하는 세태가 되었다.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 전범 루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다. 아렌트는 책에서 아이히만의 악행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있을법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언론과 민주주의와 보통사람의 인권을 대하는 권력의 횡포가 어쩌면 그토록 변하지 않고 긴 세월 유지하는가 하는 점에서 닮은꼴이란 뜻이다.
1970년대 이전에 언론인들이 무시로 짓밟히는 인권과 언론의 정체성에 대해서 한목숨 걸고 버티어보겠다고 나섰는데 막상 그 당사자 언론 사주는 태도를 바꾸어 민주주의 압제자 쪽에 서고 50여년을 아무렇지도 않게 돈만 버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로 넘겨버릴 일인가. 하긴 이런 의문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도 이제는 많을 것 같지 않다.
우와 좌 양쪽으로 쫙 갈린 언론인이나 언론 소비자의 모습도 그러하다. 진화가 아닌 퇴행적 변화 과정은 우리에게 무거운 부채의식도 남겼다. 그때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크고 작은 액수 가리지 않고 짤막한 절규와 함께 광고, 광고비를 내준 시민들, 거리에서 학교에서 병원과 구치소에 이르기까지 찾아주고 격려해 준 시민들, 나름대로 성의를 담아 생활비 돈봉투를 건네준 분들, 오늘은 이분들에게 어떤 면목으로 설명을 드릴 수 있겠는가. 언론과 언론인의 위상에 대해 무슨 말로 인사와 변명을 건네야 하는가. 한나 아렌트의 관찰처럼 이기주의와 탄압은 언제 어디나 있는 보편성이라고 변명을 해야 하는가.
1974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동아투위 위원 대부분은 ‘해직자로 찍힌 채’살아왔지만 그래도 권력만으로 살아가는 정치무뢰배나 이기주의에 찌들은 언론 사주들보다는 번거로운 삶을 같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틈에서 민주주의와 인간성, 그리고 저항의 싹을 발견하곤 했다.
그런 점에서 내 삶에 작은 사연이지만 몇 가지 회상이 떠오른다. 해직 후 권력이 저지른 패악 중 하나는 해직 언론인들에게 언론 관련 취업을 막은 일이었다. 생각다 못해 몇몇이 사무실을 임대하여 식구들을 편집원으로 쓰면서 출판업(?)을 시작했다. 그 사무실에 아예 책상 하나를 들여놓고 근처 경찰서에서 출퇴근하는 감시원 형사를 배치하였다.
동아투위 간부(위원장, 총무)가 차례로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는 날도 법원에 동석해 재판을 지켜보곤 했다. 어느 날 감시역 L형사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할 얘기가 있으니 문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햇빛이 내리쬐는 법원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형사가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아니고···우리 아이가 이번에 대학에 들어갔어.”
“어이고, 그거 잘됐군, 그래서요.”
“그런데 그놈이 내 직업에 대해서···아주 사람 취급을 안 한다고, 어떻게 해야 돼?”
“그것 참···내가 지금 그럴싸한 조언은 하기 어렵구, 들으니 고향에 땅도 있다면서요, 내려가 보면 어때요?”
“아냐, 못 가. 고향에선 내가 크게 출세한 줄 안다고.”
1975년 3월 동아일보는 기구 축소, 제작방해 등 이유로 기자 37명을 해임했다. 기자들은 대량 해직에 맞서 동아일보 2층 공무국, 3층 편집국, 4층 동아방송 방송국에서 3월12일부터 농성에 들어갔고, 3월17일 새벽 강제 해산을 당했다. 제작거부 농성 당시 기자들은 장기자랑을 하며 고단함을 달래기도 했다. 당시 동아방송 PD였던 김학천 위원이 노래를 하고 있다. /김학천 제공 |
어느 날 시위하는 동아투위 위원들을 철망 두른 버스에 태워 구치소로 실어 갈 때 L형사는 투위 위원들 몇 명을 버스에 싣지 않고 수송동 술집 골목으로 밀어 넣었다.
또 1975년 3월17일 회사에서 강제로 끌려 나올 때, 나는 몰려드는 폭력 속에서 실신하고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퇴원 후 동아일보 앞에서 복직시위를 하던 중 우리를 끌어내는데 앞장섰던 동아일보 직원 Y씨가 다가왔다.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동아일보 건물 구석에서 그는 겸연쩍게 얘기했다. Y아무개를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더니 바로 자기 아들이란다. 지금 군대에 가 있는데 신문에 방송사 퇴출 과정에서 당신이 쓰러졌다고 보도되니까 그 녀석이 제대로 수속도 안하고 집으로 와서 김학천 선생 때린 게 아버지냐고 추궁하더란다.
“당신 아들이 나를···어떻게 알고···”라고 물었더니 내가 잠시 봉직했던 H고등학교에서 내가 담임을 했던 학생이라 했다. 그러니 잠시 한번 만나서 내가 때린 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달라는 거였다. 착잡하고, 고마운 거 같기도 하고 그랬다. 어쨌든 내가 쓰러진 것은 너의 아버지 때문은 아니라고 간곡히 전하고 귀대하도록 한 기억이 생생하다. 선생한 보람을 느꼈다.
그때 내가 실신하니까 우리를 끌어내던 사람들이 급하게 안암동 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공교롭게도 옆방에 동아방송 간부가 입원했다. 그는 방송국 투위 위원을 끌어내는 날 앞장서 들어오다가 사무실에 엎드렸던 누군가가 얼떨결에 던진 잉크병에 머리를 맞고 다쳤다고 했다. 그런데 이튿날부터 위문을 온 사람들이 내 병실에만 몰려들었고 그 간부 방엔 아무도 얼씬하지 않았다. 대학강사였다는 그 간부의 부인은 며칠 후 다친 남편한테 말했다.
“당신 세상을 어떻게 살았길래 이 지경이 되었는데 들여다보는 사람 하나 없소. 우린 이젠 아무래도 여기서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가족들은 그 후 곧바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나중에 들으니 그 간부는 동아 사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눈물을 적셨고, 몇 해 전 귀국해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 잉크병을 던졌던 동아방송 PD도 투위에 참여하지 말라는 강압으로 타 방송에서 일하다 요절했다.
나는 퇴원 후 퇴직 직전에 이사한 수유리에서 백수 생활을 하던 중 집을 살 때 진 빚을 감당할 수 없어 골목입구 복덕방에 우리 집을 팔아달라고 했다.
“내가 당신 좀 아는데 살 집은 구해놓고 팔자는 거야?”
“그건 아직 못 구했는데, 영감님이 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요 아래 경찰서에서 당신 들고 나는 걸 좀 지켜봐 달랬어.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인가 했는데 방송국 직원이었다며? 지켜보니 나쁜 사람 같진 않고, 하여튼 알려준다고 약속은 했으니까 집 팔아달랜다고 보고하지. 살 집 마련하지 않고서는 팔지 말라고 한 것도 보고하고···허허···앞으론 내가 적어보내는 건 미리 알려줄게, 에이 참.”
대체로 그런 내용인데 그 복덕방 영감님 덕에 집을 헐값에 파는 걸 면했다. 아주 작은 일들이지만 세월이 가면서 권력이 망가뜨려 놓은 민주주의의 구멍들을 이 민초들의 보편적인 인간성이 메꾸어준다는 생각을 했다. 권력의 이기주의와 막가는 욕심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세상이 돌아가는 까닭이 이런데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 풀지 못한 의문과 부채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다.
김학천 동아투위 위원 |
대중을 상대로 진실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그 문제의 기득권 언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세월이 지나서 모두 잊었으니까 없던 일이라고 하는 걸까!
부채의식이란 50년 전에, 그리고 지금까지 간단없이 바른 언론과 언론인 편을 들어주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다.
1970년대 중반 동아일보가 언론자유 편에 서고 압제를 받기 시작하자 서울대생들은 무지스러운 탄압에 대한 비판, 풍자극을 하다 모두 정학처분을 받았다. 해직된 동아투위 위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다 불려가 닦달을 받은 데도 있다. CBS가 그랬다. 가끔 만나는 지인은 아직도 동아일보에 냈던 격려광고의 쪽지를 지니고 있었다. 모두가 큰 빚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나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빚을 갚은 일이 있다. 해직 후 6~7년이 지나 대학의 은사인 이영덕 선생이 만든 교육개발원의 교육방송 만드는 일에 참으로 어렵게 동참하게 되었다. 취직을 한 것이다. 출근하는 첫날 얼굴에 웃음을 띠고 찾아온 첫 번째 축하객이 있었다. 광화문 비각 옆에 있던 복취루라는 짜장면집 주인이었다. 정말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7~8년은 되었음 직한 노랗게 된 짜장면 외상쪽지를 내밀었다. 절대 이것 때문에 온 것은 아니라면서….
여전히 정권만 바뀌면 우수수 목이 떨어지는 방송사 간부들과 프로그램을 만들다, 기사를 쓰다가 일손을 놓는 사람들은 어떤 외상쪽지를 남기고 있을까…. 빠르게 지나간 세월이었지만 긴 세월이었다.
* [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 시리즈는 2024년 3월 22일부터 한국기자협회와 뉴스타파에 매주 금요일자로 동시 게재되고 있습니다. 이글은 2024년 4월 19일(금) 한국기자협회에 게재된 글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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