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4. 국방부 과거사 위의 80년 언론인 강제해직 진상 규명
80년 해직언론인들은 97년 이후 언론인 강제해직에 대한 진상 가운데 규명되지 않고 있는 많은 의혹들을 밝히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 성과를 거두거나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우선 군사정권의 불법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해 1997년 초 전두환 노태우 등에 대한 12·12 및 5·18재판의 판결을 통해 언론학살의 불법성이 확정되었다. 광주특별법 제정 당시 80년 해직기자들도 보상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 또한 실현되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 들어 80년해직언론인배상특별법이 추진되었지만 IMF재정난 등을 이유로 폐기되었다. 그 후 해직기자들은 행정심판 청구, 국가배상 청구 등을 통해 실질적인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을 벌이지만 정부의 반개혁성에 의해 다 좌절되었다.
2005년 여름 발족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군 과거사위)에 신군부의 언론학살 진상을 규명토록 촉구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군 과거사위는 2007년 10월 25일 보안사령부가 80년 언론인 불법 해직과 관련, 언론반을 설치한 근거문서인 ‘언론조종반 운영계획’을 처음으로 확인했으며 중진언론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공작인 ‘K-공작계획’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실시됐다고 발표했다. 1980년 신군부가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를 동원해 언론탄압을 자행한 실상이 관련문건으로 재차 확인됐다. 당시 밝혀진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K-공작계획 = 1980년 3월 보안사 이상재 언론반장이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신장을 위한 안정세력 구축’을 명분으로 회유공작 계획을 수립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결재를 받았다. 특히 보안사는 K-공작의 일환 또는 연속선에서 보안사령관과 언론사주 및 언론사 간부 면담을 추진해 언론으로부터 신군부에 유리한 여론을 얻어내려 했다.
‘보안사령관과 언론계 사장의 면담보고’ 자료에 의하면 신군부는 계엄해제를 앞두고 계엄기간 중 검열된 기사를 계엄 이후에도 게재하지 못하도록 간담회를 개최해 각서까지 받았다. 과거사위 관계자는 “K-공작은 전두환을 최고 인물로 만들기 위한 언론공작” 이라며 “K-공작계획의 문건 발견은 처음” 이라고 말했다. 1980년 8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언론인 정화 대상자를 A, B, C 3급으로 나눠 문화공보부에 통보했다. A급은 국시부정 행위와 제작거부 주동, 특정 정치인 추종, B급은 제작 거부 주동 및 선동, 부조리 행위자, C급은 단순 제작 거부동조, 부조리 행위자 등이었다. 또한 과거사위는 작성주체와 날짜가 적혀있지 않은 ‘언론정화자명단’이라는 문건을 찾아냈다. 이 문건에는 정화보류자 44명과 정화자 938명 등 합계 982명의 이름과 등급이 손 글씨로 적혀있다.
정화사유로는 국시부정(10명), 반정부(243명), 부조리(341명), 기회주의·무능(123명), 근무태만(3명) 등이며 아무런 이유도 기재되지 않은 경우도 109명에 달했다.
과거사위는 “이 명단에서 누락된 해직언론인이 얼마나 되는지는 추산할 수 없었다”며 “1980년 11월 단행된 언론사 강제 통폐합 과정에서도 상당수의 언론인이 해직되었다고 하나 이에 대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보안사는 해직언론인 711명에 대해 신분별로 취업제한기간을 뒀다. 당시 부국장 이상 42명은 1년, 부장 이하 627명은 6개월, 나머지는 영구제한 조치를 취했다. 이후 A급 13명은 영구, B급 96명은 1년, C급 602명은 6개월로 제한기간이 바뀌었다. 보안사 정보처 정보2과에서는 해직언론인에 대해 계엄 해제 이후에도 동향을 파악했다. 보안사는 당시 해직언론인 가운데 49명을 A, B, C, D등급으로 나눠 동향을 분석했다.
과거사위는 “외관상으로는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의 자율결의 형태였으나 실제로는 국보위가 국시부정 행위자, 제작거부 주동자 등을 해직한다는 기본 방침을 수립하고 보안사가 주축이 된 합동수사본부에서 작성한 해직 대상자의 명단을 문공부가 각 언론사에 하달했다”고 밝혔다.
1982년 7월 작성된 ''숙정위해언론인''이란 문건에 의하면 해직언론인을 A급(극렬비판 인물로 순화가 불가능), B급(비판활동 재개 가능성, 순화 및 미행감시 요구), C급(비판성향은 잠재해 있으나 특이동향 없는 자, 순화만으로 회유 가능자), D급(문제성은 있으나 자숙하면서 생계에 전념 중인 자, 거주파악 외 별도조치 필요 없는 자)으로 각각 분류해 동향을 파악한 것으로 밝혀졌다.
언론사 강제통폐합은 당시 청와대 허문도 비서관이 작성한 ‘언론창달계획’을 문화공보부 이광표 장관이 전두환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강행됐으며 포기각서 문안을 작성해 언론사주로부터 포기각서를 받았다. 보안사는 보도성향과 국가관 및 시국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 여부 등을 지방지 통폐합의 평가기준으로 정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과거사위는 “강제해직과 강제통폐합은 국가공권력의 위법한 행사이므로 정부는 국가의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피해자와 국민에게 공개 사과해야 한다”면서 “중앙일보 언론인 연행사건(한수산 필화 사건)과 오홍근 테러사건의 피해자에 대해서도 공개 사과하고 사건의 후유증세로 사망한 박정만 시인에 대한 추가조사도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권유 내용은 그 후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5. 진실화해위의 80년 언론인 강제해직 진상 규명
고승우는 2006년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80년 언론 저항과 강제해직 진상 규명을 아래와 같은 이유로 청구했다.
전두환, 허삼수, 허화평 등 신군부는 내란을 수행하면서 1980년 7월∼10월 동안 언론인 다수를 부당하게 해직토록 한 사실은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노태우와 관련한12·12와 5·18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해직과 관련해 많은 사항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즉 반란주도 세력의 언론인 강제해직과 관련한 범죄 사실은 일부 밝혀졌으나 그 하수인역할을 한 문공부 장관, 문공부 공무원, 언론사 경영진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다시는 한국 언론사에 이 같은 비극적 사건이 재발치 않도록 해직관련 진상이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진실화해위는 2010년 1월 7일 80년 언론인 강제해직과 관련 아래와 같이 결정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는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 언론통폐합 조치 및 정기간행물 및 출판사의 등록취소 조치에 대해 공권력을 이용하여 강압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책임을 인정하고, 관련 피해자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 국가는 이 사건의 신청인들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부당한 공권력의 불법이 언론을 상대로 자행된 지 30년만이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신군부는 체제에 순응하는 언론구조를 만들기 위해 정보기관의 자료와 보안사 요원들의 동향자료를 바탕으로 언론계의 저항세력을 30%로 규정한 뒤, 이들을 해직하도록 언론사에 강요한 것으로 밝혀졌다. ○ 언론인 해직은 표면적으로는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의 자율결의라는 형식을 갖추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보안사가 신군부에 비판적인 언론계 인사들을 선정해 명단을 작성, 이를 언론사에 전달하여 해직케 하였다. ○ 당시 언론사는 보안사로부터 지시받은 일정비율에 따라 자체적으로 해직 대상자를 선정한 후, 부조리나 무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언론인을 해직시켰다. ○ 신군부는 해직된 언론인 가운데 일부를 삼청교육대에 입소시키고, 해직이후에도 취업을 제한하여 생존권을 위협하는 등 공권력을 위법·부당하게 행사하였으며, 해직된 언론인들은 취업이 불허된 상태에서 부조리·무능력한 사람으로 사회적인 낙인이 찍혀 가정파탄, 생계곤란, 불명예 등의 고통을 당했다. ○ 국가는 1980년 언론통폐합 조치 및 언론인 강제해직, 정기간행물 및 출판사의 등록취소 조치에 대해 공권력을 이용하여 강압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책임을 인정하고, 관련 피해자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 ○ 국가는 이 사건의 신청인들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
6. 80년 해직언론인들의 명예회복 노력과 투쟁 사례
80년 해직언론인들은 5공하에서 감행된 일부 정치 및 언론 민주화 투쟁에 동참했으며 노태우 정권하에서 새 언론 창간에 동참하거나 해직된 소속사에 재취업하는 방식 등을 통해 민주화 추진에 노력했다. 그러다가 문민정부 들어 신군부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 내려지면서 80년 언론 학살 등에 대한 진상 규명 노력 등을 펼치기 시작했다.
1) 문민정부하의 사례
광주항쟁의 진상이 어둠속에 갇혀 있을 동안 80년 언론인 강제해직 또한 그 진상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해직언론인들만이 신군부가 불법해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을 주장했지만 사회적인 반응은 냉담했다. 그러다가 전두환, 노태우의 내란죄수사와 5·18특별법제정과정에서 언론학살의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성공한 쿠데타는 사법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해괴한 권력의 논리가 국민의 진상규명요구에 굴복한 것이 80년 언론인 해직 진실을 밝히는 출발점이 되었다.
80년 언론인 학살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80년 해직언론인의 역사적 의미가 정확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국기자협회와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는 97년 ‘80년 언론인 해직의 진상’을 밝힌 백서를 공동으로 발간했고, 같은 해 언노련은 80년 해직언론인의 원상회복을 촉구하는 언론인 서명 운동을 벌인 것이다.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는 문민정부가 추진한 5·18특별법 제정 당시 여야 정치권을 상대로 80년 언론인 강제해직도 그 법에 포함시켜 줄 것을 주장했다. 80년 언론인 학살이 광주항쟁 기간 동안 신군부의 광주학살에 항의해 검열 및 제작 거부를 행한 것에 대한 신군부의 보복과 언론 탄압이라는 근거를 제시했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정치군인들에 의해 짓밟힌 광주항쟁 관련 피해자들의 대상과 범위가 축소되는 과정에서 80년 해직언론인들도 배제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80년 해직언론인들은 전두환 등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최초로 발표된 뒤인 96년 3월, 80년 당시 언론인 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에 주요한 역할을 한 문화공보부의 후신인 공보처를 상대로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해직언론인들은 5공화국 당시 문공부를 승계한 공보처가 80년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해직당한 언론인들이 원상회복과 함께 피해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행정적 조처를 취해줄 것을 촉구한 것이다.
해직언론인들의 행정심판 청구에 대해 정부는 그해 5월 “80년 당시 언론인 해직에 공권력이 부당하게 행사되었다며 명예회복 및 피해배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한 청구인들의 주장은 행정심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공보처의 견해를 받아드려 각하 결정을 내렸다. 정부의 행정심판위원회는 80년 당시 문공부의 이광표 장관이 신군부 세력의 내란 행위에 동참해 언론학살에서 주요 역할을 한 것은 법률에 기인한 법률적 행위가 아니고 단순한 사실 행위에 불과하다는 공보처의 견해를 받아드린 것이다. 이는 당시 행정부 쪽의 역사바로세우기 수위가 어느 수준 이었던 지를 실감케 하는 대표적 사례의 하나였다.
신군부 공소장에서 드러난 이광표의 내란 행위 동조행위는 당시 신군부의 내란 행위에 동조해 주요 역할을 했던 몇 안 되는 행정부처 국무위원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례의 하나다. 공보처가 이광표의 언론학살 가담 행위에 대한 자체 진상조사 노력은 외면한 채 전임 장관을 내란 세력의 하수인으로 격하시킨 행위는 궁색하기 짝이 없다.
80년해직언론인들은 신군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를 들어 96년 7월 서울지구배상심의위원회에 국가배상을 청구했다. 그러나 서울지구배상심의위원회는 97년 3월 시효소멸 등의 이유를 들어 기각 결정을 내렸다. 해직언론인들은 이에 불복해 같은 해 9월 재심을 청구했으나 역시 기각되었다.
배상심의위원회는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피해자가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이 지나거나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5년이 지나면 시효가 소멸한다는 조항을 앞세웠다. 그러나 위원회가 앞세운 시효소멸은 5공화국 당시의 살인적인 민주세력 탄압 속에서 해직문제 제기가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외면한 무책임한 결정이었다. 또한 전두환 등 신군부의 내란 과정에서 강제해직이 자행된 것이 최초로 밝혀진 것은 96년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에 대한 검찰 수사였다는 사실 또한 철저히 무시된 것이다.
80년 해직언론인들이 배상 등을 요구한 민사소송도 거의 패소했다. 87년 노태우 정권은 80년 해직된 공직자와 국영기업체 임직원들에 대한 복직과 보상조치를 취했으나 해직언론인들만이 보상이나 배상 없이 재취업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적지 않은 해직언론인들은 원상회복을 요구하면서 재취업을 거부하고 해당 언론사를 상대로 원직복직과 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민법상의 손해배상 시효 10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패소하고 말았다.
2) 국민의 정부하의 사례
80년 언론인 해직은 신군부가 저지른 범죄라는 사실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뒤 80년 해직언론인들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 등의 조치가 급물살을 타는 듯 했다. 즉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인 1997년 대선 공약으로 80년해직언론인의 원상회복을 약속했고, 집권당이 된 국민회의가 특별법으로 그해 결을 시도했다.
국민회의는 98년 1월 소속 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80년해직언론인배상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가 해직언론인에 대한 배상문제에 앞장선 것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안전판인 언론자유가 이 땅에서 유린되는 일이 다시는 발생치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국회가 80년 해직언론인문제 해결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언론개혁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언론 개혁이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는 것에서 출발 한다면 80년 언론인 해직에 대한 확고한 법률적 의미부여가 필수적이었다.
98년 10월 전국 30여개 시민언론단체들로 구성된 언론개혁시민연대는 성명을 통해 ‘80년 해직언론인 문제해결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입장을 밝혔다. 80년 해직언론인의 역사적 의미는 비슷한 시기에 언론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현직 언론인들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언론재단에서 발행하는 정기간행물 ‘신문과 방송’은 전국 신문 방송사의 편집ㆍ보도국장들을 상대로 한 조사한 결과, 80년 언론인해직과 언론사통폐합을 정부수립 50년 동안의 언론계 10대 사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뽑혔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80년 광주항쟁과 언론사 제작거부를 두 번째 중요한 사건으로 선정했다. 80년 언론인 해직과 직결된 두 가지 사실이 해방 후 반세기 동안에 일어났던 10대 사건으로 뽑혔다는 것은 언론인 강제해직이 우리 언론사에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80년해직언론인배상특별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15대 국회는 여야 합의 속에 80년해직언론인배상 특별법을 상정해 놓고도 IMF 사태에 따른 재정문제, 다른 신군부 피해자들과의 형평성 문제 등을 이유로 그 처리를 미뤘고 국회회기가 끝나면서 그 법안도 자동 폐기되었다.
한편 2000년 7월,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은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규정된 법률 시행령만으로는 80년 해직언론인이 받을 수 있는 보상 수준이 미약하다”며 금전적 보상을 위한 별도의 입법 조치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이는 언론행정 주무부처 장관이 80년 언론인 강제해직에 대한 입법조치의 필요성을 표명한 최초의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80년 해직언론인들도 박 장관의 발언이후 해직언론인 배상특별법을 정부가 발의하도록 촉구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후속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80년해직언론인들에 대한 정당한 자리매김은 해직언론인특별법 무산 이후 중단되지는 않았다. 즉 지난 2000년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에관한법률’이 제정, 시행되었고 해직언론인들 다수가 민주화관련자로 인정되었다.
3) 참여정부하의 사례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정부 행정부처 등이 과거사 진실규명과 그 청산에 앞장서도록 지시했으나 80년 언론인 강제해직에 동원된 문공부의 후신인 문광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에 이은 참여정부의 등장으로 개혁 작업이 많이 추진되고 있으나 일부 부처 등이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권이 끝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민주화법이 2004년 개정되어, 해직된 민주화 관련자들의 복직조항을 담은 이 법의 시행령이 다음해인 2005년 개정되어 해직 권유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KBS에서 극소수 80년 해직언론인이 재취업 등의 형식으로 조치가 취해졌을 뿐 다른 언론사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민주화보상위는 매년 언론사들에게 복직 여부에 대한 문의의 회신을 요구하고 있으나 언론사들은 이마저 외면하고 있다.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와 시민사회단체들은 2005년 9월 이후부터 2007년 말까지 민주화관련자의 복직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도 참여정부가 수수방관하는 것을 항의하는 집회와 농성 등을 지속적으로 벌였으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 이들 단체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의 잃어버린 권리 회복이 바로 진정한 민주화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행해졌던 민주화운동 탄압 행위를, 민주화운동 관련자에게 담화문 등을 통해 사과할 것 △민주화운동 관련 해직자에 대한 원상 복직, 불이익 해소, 징계기록 말소 등 정부가 취해야 할 조치에 대한 방침을 즉각 제시하고, 정부 내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대책위를 즉각 구성할 것 등을 요구했다. 참여정부의 등장에 기여한 민주화 세력들은 위와 같은 요구의 관철을 위해 군사정권 시절과 마찬가지로 시위, 농성을 지속했지만 별 다른 성과를 이룩하지 못했다.
참여정부는 2007년 해직언론인들에 대해 생활지원금을 지급 목적의 민주화법 시행령 수정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해직기간 동안 취업했으면 해직이 종료되는 것으로 보거나, 일정 수입이 있는 경우 지급대상에서 제외하는 등의 터무니없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이에 대해 많은 민주화 운동 단체 등이 반대했으나 참여정부는 시정치 않았다.
한국기자협회는 2006년 2월, 1980년 해직언론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군부의 광주 학살에 저항, 검열 및 제작 거부를 강행한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 5월 20일을 ‘기자의 날’로 제정했다. 기자협회가 26년 만에 언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한 것이다. 기자협회는 언론사를 바로 세우는 의미에서 광주항쟁의 역사 속에 언론투쟁의 역사를 병행시키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4) 이명박정부의 사례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10년 1월, 1980년 언론통폐합이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목적으로 이뤄진 것이므로 관련자들에 대한 국가의 피해 구제 조치가 필요하다고 권고함에 따라 관련 특별법 발의가 잇따랐지만 법안 통과 등의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에 대한 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활동이 불필요하다며 유족과 시민사회, 학계의 요청에도 ‘진실화해위’의 활동을 2010년 12월 이후로 연장하지 않았다. 진실화해위 활동 종료되면서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배·보상 특별법 제정도 이뤄지지 않았다.
맺음말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언론인 탄압 방식의 하나는 불법 인사 조치, 특히 해직이었다. 독재자들은 정론을 펴려는 언론인을 언론 현장에서 내쫓았다. 독재자들이 언론인을 불법 해직 시킨 목적은 반인륜, 반 언론적인 것이었다. 우선 특정 언론인을 불법으로 해직시켜 직장을 박탈함으로써 해직언론인은 물론 그 가족들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두 번째로 이른바 일벌백계다. 소수 언론인을 거리로 내모는 것은 언론사에 남아있는 다수 언론인들에게 ‘나도 저렇게 되면 안 되겠구나’하는 공포심을 주입하는 효과가 컸다. 그 결과 언론인들이 정치권력에 대한 파수견 역할을 중단하게 되었다. 독재자에게 도전하는 언론은 사라지고 독재자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언론사만이 남게 되었다.
이명박 정권이 언론을 장악하고 언론인들을 탄압하는 방식은 박정희, 전두환 시절과 흡사하다. 뻔뻔스럽기는 한 술 더 뜨는 식이다. 낙하산 사장을 내려 보내 청와대의 하수인으로 삼은 뒤 언론을 장악하고 짓밟았다. 청와대와 그 칼잡이들은 언론을 정권 홍보기구로 전락시키기 위해 광분하는 과정에서 일부 양심적 언론인 등을 억지 논리로 강제해직을 시켰다. 현 정권은 법원에서 언론인 강제해직이 불법으로 최종 판결이 나도 모르쇠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법치국가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공영방송 등에 청와대의 하수인을 낙하산 사장으로 앉혀 언론 현장을 파괴하면서 청와대 찬가만을 외치게 만들었다. 이명박 정권에 이어 등장한 박근혜 정권도 방송 정상화나 해직언론인 원상회복은 외면하면서 국정원 부정선거, 간첩 사건 증거 조작의 공권력 범죄를 은폐하고 진상 규명을 저지해 시민사회의 격렬한 저항이 전개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종합편성채널 강행, 공영방송 사장 낙하산 투하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언론자유를 외치는 언론인을 다수 불법 해직시켰다. 이명박 정부 들어 4백 여 명의 언론인이 편파보도와 ‘낙하산 사장’에 반대하는 행동에 나섰다가 징계를 받았다는 것은 현 정권이 언론자유를 외면한정권이라는 확실한 증거다.
이명박 정권은 집권과 함께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면서 조중동과 대기업이 방송에 진출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언론 시장을 구조적으로 수구 또는 보수언론의 철옹성으로 만들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보수 세력이 언론과 결탁하는 식의 연합전선을 형성해 일본과 같은 장기집권 체제의 기반을 조성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은 법에 임기가 보장된 KBS 사장을 불법 해임하고, 낙하산 사장 등을 반대하면서 언론자유를 주장한 기자들을 대량 해직시켰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의 경우 청와대가 진두지휘하고 감사원, 검찰, 방송통신위원회 등이 합동작전을 벌여 불법해직 시켰다. 대법원은 그 불법성을 2012년 확정 판결했다. MBC의 경우 방문진이 사장이 행사하던 이사진 등에 대한 고유 인사권에 제동을 거는 식으로 퇴진 압박을 가한 뒤 낙하산 사장을 투하했다.
이명박 정권은 조중동 방송을 허가하기 위해 적극 추진한 미디어악법의 국회통과가 불법이었다는 헌법 재판소의 결정이 났지만 이에 대한 후속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MBC 김재철 사장은 2012년 10월 말까지 조합원 8명을 해고하고 219명을 징계했다. KBS 새 노조의 경우 133명의 조합원이, 연합뉴스 노조도 9명의 조합원이 징계를 받았다. YTN노조는 2008년 10월 구본홍 낙하산 사장 저지와 공정방송 사수 투쟁을 한 6명의 기자가 해고되는 등 2012년 대선 전까지 45명의 조합원이 징계를 받았다.
KBS, MBC 경영진은 공정방송의 기치를 걸고 파업을 벌인 다수 언론인을 해직, 전보, 감봉 등의 부당한 인사 조치를 강행해 사회적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귀를 막고 외면하고 있다. MBC는 특히 파업에 동참 언론인 60여명을 그해 12월 대선까지 정상적인 업무에 복귀시키지 않기 위해 장기 교육을 시켜 1980년 전두환의 삼청교육대를 연상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해직당한 MBC, YTN기자들은 그 후 해고무효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하지만 경영진이 불법인줄 알면서도 해직을 시킨 것은 다수의 현업 언론인을 심리적으로 압박해 언론자유 요구 목소리를 잠재우려는 노림수라는 비판을 받았다. 언론사 경영진이 불법 해직을 수단삼아 언론자유 운동을 억압하는 방식이 이명박 정권 들어서도 남용된 것은 80년 신군부의 언론인 불법 해직과 같은 언론인 불법 해직 행위에 대한 정당한 법적 청산과 원상회복 조치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권하에서 부당하게 거리로 내 쫓긴 언론인들은 개개인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언론자유, 민주주의라는 공익적 목적을 위해 행동한 인사들이다. 공익적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 언론인들을 거리에 내몬 뒤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계속 방치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행위라 하겠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군부독재에 저항한 언론인 수 백 명을 불법 해직시키고 언론사를 강제로 통폐합한 것에 대한 법률적 심판이 내려졌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이명박 정권하에서도 진실보도를 외치는 언론인들의 피해가 잇따라 발생한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이명박 정권이 훼손한 언론구조를 이어받아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불법 개입 사건과 통합진보당 내란 음모 사건 등에서 축소보도, 왜곡보도 등이 난무하게 만들어 진실을 가리는 기만성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대중매체는 정권이 생산해 유포하는 정보를 전파는 단순 확성기 역할을 하거나 대통령 선거 결과의 적법성을 의심케 만드는 정보는 보도 안하거나 축소 또는 왜곡보도를 일삼으며 국민을 배신, 능멸해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기레기’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면서 결국 청와대의 외압 의혹을 받던 KBS 사장이 퇴출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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