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0일 박근혜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그는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선거인단 직접투표와 여론조사 지지율을 환산한 전체 유효투표의 84%인 8만6589 표를 얻었다. 역대 주요 정당의 대선 경선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이었다. 김문수가 8.7%인 8955 표를 얻어 2위를 차지했다. 동아일보는 8월 21일자 1면 머리기사 제목을 「“불안의 시대엔 안정된 지도자 필요”」라고 붙였다. 부제목은 「박근혜 84% 역대 최고 득표율로 새누리 대선후보 확정 / 대선 사상 첫 성 대결 전망… 안철수 단일화가 최대변수」이다.
(···) 박 후보는 주요 정당의 역대 대선후보 경선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가 얻은 77.5%나 2002년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얻은 68%를 웃돌았다. 그러나 선거인단 투표율은 40%를 겨우 넘긴 역대 최저였다.
경선 재수 끝에 박 후보는 헌정 사상 유력 정당의 첫 여성 후보가 됐다. 현재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가 모두 남성이어서 12월 19일 대선 구도는 처음으로 성 대결로 치러질 것으로 전망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맏딸인 박 후보는 대선에 도전하는 첫 전직 대통령 자녀여서 첫 부녀 대통령이 탄생할지도 관심사다.
박 후보는 먼저 본선 무대에 올라 범야권 후보가 최종 확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특히 양자 대결 여론조사에서 박 후보와 선두를 다투는 범야권의 가장 강력한 주자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민주통합당 후보와 단일화를 이룰지가 이번 대선의 최대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박 후보는 수락연설에서 “위기의 시대에는 준비된 지도자가 필요하고 불안의 시대에는 안정된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최근 불안한 국내외 정세 속에 자신이 여야의 대선 후보 중 가장 ‘준비된 대통령 감’이라는 점을 부각하면서 국정 경험이 부족한 안 원장을 간접적으로 겨냥했다.
‘인간 박근혜’와 ‘정치인 박근혜’를 부각시킨 ‘특집’
동아일보는 8월 21일자 3~6면을 「선택 2012 / 새누리 대선후보 박근혜」라는 ‘특집’으로 꾸몄다. 12건이나 되는 기사 가운데 3면 머리에 오른 「박 “우리 주권·안위 위협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 않겠다”」를 먼저 보기로 하자.
꼭 5년 만이다. 처음으로 대선 도전에 나섰던 2007년 8월 20일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간발의 차로 패배한 후 의연한 승복연설로 강한 인상을 남기며 차기를 기약했던 박근혜 후보가 이번에는 손쉽게 본선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경선이 곧 본선’으로 불릴 정도였던 5년 전 대선 구도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박 후보는 남은 4개월 동안 힘겨운 본선 레이스를 펼쳐야 한다. 무엇보다도 2007년 이후 4년 넘게 이어져온 ‘박근혜 대세론’이 지난해 정치권 밖에서 등장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허물어진 상황이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적 여망과 20∼40대의 폭발적 지지를 기반으로 한 안 원장을 꺾기 위해선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당 안팎의 강력한 주문이다.
박 후보는 수락연설에서 “새로운 제3의 변화로 국민행복 시대를 열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화 시대의 성장 패러다임, 민주화 시대의 분배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제3의 변화로 국민행복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을 원스톱·맞춤형으로 서비스하는 ‘친절한 정부’로의 변화와 정책 결정 과정에 국민의 참여 제도화를 약속했다. ‘5000만 국민행복 플랜’ 수립을 위해 각계 전문가와 국민대표로 국민행복추진위를 구성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
박 후보는 수락연설에서 “100%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5000만 국민의 역량과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당장 경선 투표에서 지역별 한계를 드러냈다.
경북의 투표율이 66.7%로 가장 높았고, 대구는 55.1%로 제주(56.2%)에 이어 3위로 핵심 ‘텃밭’인 대구·경북(TK) 지역이 유독 높은 투표 열기를 보였다. 반면 상대적으로 지지세가 약한 수도권의 투표율은 서울이 40.5%, 경기가 35.1%에 그쳤다. (·····)
5·16과 유신,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등 과거사에 대해선 “우리 정치권이 미래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민생을 제쳐두고 그 문제를 갖고 싸우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건설적으로 가면 좋겠다”며 선을 그었다.
4면 전체는 인간 박근혜와 정치인 박근혜의 ‘인생 역정’으로 장식되었다.
“성난 파도가 몰려오는 바닷가였다. 엄청난 파도가 몰아쳐서 사람들과 같이 등대 밑에 피해 있는데, 그 순간 장면이 확 바뀌면서 태양이 비추고 탄탄대로가 펼쳐졌다. 길 너머 언덕에서 솟아올랐다. 시뻘겋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대학시절 꾼 꿈이다. 그는 당시 일기장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든다”고 적었다고 한다. 어머니(육영수 여사)의 비극적 부음을 접했을 때 그는 꿈속의 성난 파도를 떠올렸다.
10대 대통령의 딸, 20대 퍼스트레이디, 30대 한 집안의 가장, 40대 국회의원, 50대 당 대표, 60대 대선 후보. 헌정 사상 첫 유력 정당의 여성 대선 후보가 된 20일, 그는 다시 이 꿈을 떠올릴지 모른다. 타오르는 태양과 탄탄대로를 생각하며….
박 후보의 인생 역정을 그가 쓴 책 제목으로 나눠봤다.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1979년)
1) 1961년 5월 16일
15일 밤 10시, 서재에 있던 박정희 소장이 육 여사에게 말했다. “그 가방 속에 권총 있지. 꺼내줘요. 다녀올게.”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다고 느꼈을까. 육 여사는 “근혜 숙제 좀 봐주시고 나가세요”라고 말했다. 박 소장은 “그럴까?” 하고 안방으로 갔다. 군인의 딸이었던 열 살 근혜 양의 인생이 바뀐 첫 순간이었다.
2) 1974년 8월 15일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겼으니 빨리 하숙집으로 와야 한다.”
1974년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 유학 시절 친구들과 여행 중이던 그에게 전화가 왔다. 프랑스 공항에서 ‘암살’이라는 글자와 함께 어머니 사진이 크게 실린 신문을 보고서야 변고를 알았다. 박 후보는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고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고 당시 심경을 표현했다. (·····)
‘고난을 벗 삼아 진실을 등대삼아’(1979∼1998년)
3) 1979년 10월 26일
27일 오전 1시 반경 전화벨이 울렸고, 김계원 당시 비서실장으로부터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박 후보가 그 순간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박 후보는 9일장을 치르고 난 뒤 청와대를 떠나 서울 신당동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를 대신해 한 집안의 가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18년간 ‘음지의 세월’이 시작된다.
4) 1989년 10월 26일
“묘소까지 가는 도중 마음의 울렁임을 참기 힘들었다. 추모사에서 아버지! 하고 부르고 나면 감정이 폭발해 자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일기장에 담긴 것처럼 15만 명의 참배객이 몰려든 박정희 사망 10주기 추도행사는 박 후보에게는 특별했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흔적 지우기에 열을 올렸다. 추도식도 허용하지 않았다. 박근혜 남매는 아버지 기일이 되면 숨 죽여 제사를 지냈다.
박 후보는 홀로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나섰다. 1988년 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박정희 일대기를 다룬 책과 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시련의 연속이었다. 1980년 4월 영남학원 이사장직에 올랐으나 교내 운동권들의 반대로 7개월 만에 사퇴했다. 동생인 근령 씨와 갈등이 빚어져 육영재단 이사장도 사직했다. (·····)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1998년∼)
5) 2004년 4월 15일
4월 총선을 보름 앞두고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후보가 눈물을 흘리면서 녹화한 사죄 방송연설 이후 민심은 움직이기 시작됐다. 2002년 대선 이후 대선자금 수사로 차떼기 오명을 쓴 한나라당은 2004년 대통령 탄핵까지 추진하면서 분노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형국이었다.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이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민만 보고 가겠다.” 10층짜리 당사를 버리고 천막당사로 들어갔다. 총선에서 개헌 저지선인 121석을 이뤄냈고 이후 대표 시절 잇단 재·보궐선거와 지방선거에서도 압승을 이뤄내며 정권교체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6) 2007년 8월 20일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합니다.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읍시다. 하루아침에 잊을 수 없다면 며칠이 걸려서라도 잊읍시다.”
대선 경선에서 1.5%포인트 차로 석패했지만 그는 담담하게 패배 후보 연설을 읽고 당선된 이명박 후보를 축하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물었던 ‘아름다운 승복’은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
7) 2010년 6월 29일
세종시 수정법안의 국회 본회의 찬반표결을 앞두고 박 후보는 본회의 단상에 섰다. 1998년 의정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치가 미래로 가려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박 후보는 이명박 정권 출범 후 현안에 대해 의견 피력을 자제해왔다. 현 정권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새누리당이 올해 4·11 총선 때 충청 지역에서 압승을 거둔 배경은 그의 ‘세종시 지킴이’ 행보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여당 속 야당’의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하는 계기도 됐다.
8) 2011년 12월 19일
“당이 이렇게까지 국민에게 외면 받게 됐는지 참당한 심정입니다. 우리 정치를 바로잡고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일에 저의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지난해 12월 19일 비상대책위원장직 수락연설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주변은 ‘독배’라며 말렸다. 그러나 그는 비대위원장직을 맡았고 외부 비대위원과 함께 당 강령·당명 개정을 이뤄내며 4·11 총선에서 152석의 승리를 이뤄냈다.
박 후보는 ‘대통령’이라는 단어를 잘 입에 담지 않는다. 다른 후보들이 “제가 대통령이 되면…”이라고 말할 대목에서 그는 “제가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르면…”으로 바꿔 말한다. ‘대통령’ 자리에 대한 권위와 책임감을 잘 알고 있는 동시에 그 자리를 향한 의지도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입에 자주 담는 말은 ‘국민’이다. ‘국민’은 과연 12월 19일 그를 ‘책임 있는 자리’에 올려줄 것인가. 이제 꼭 4개월 남았다.
이 기사는 동아일보가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박근혜를 얼마나 ‘따뜻한 눈길’로 조명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떤 독자가 보더라도 박근혜는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대통령이 되기에 넘칠 정도의 품성과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나중에 문재인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었을 때 동아일보는 이렇게 후한 대접을 하기는커녕 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큰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폄하’하기에 바빴다.
동아일보는 위 ‘특집’과 같은 날짜 31면에 「박근혜 후보 ‘본선의 험로’」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박근혜 의원이 어제 새누리당 경선에서 84%의 지지로 대통령 후보에 선출됐다. 5년 전 이명박(MB) 후보는 박 후보를 불과 1.5%포인트 차로 이겼다. 역대 다른 경선에 비춰 보더라도 유례가 없을 정도의 압도적 승리다. 여성이 주요 정당의 대선 후보가 된 것도 헌정 사상 처음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대를 이어 대권 도전에 나서면서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대결, 여성과 남성의 성 대결과 함께 한국의 산업화 민주화를 둘러싼 공방도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2007년 MB가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대선 후보로 선출됐을 때 우리는 「이명박 후보 본선의 험로」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대통령 후보 빼고는 모든 것을 버린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MB가 대선에서 530만 표 차로 이겼던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 박 후보 앞에는 훨씬 힘든 험로가 가로놓여 있다. 경제사회적 상황도, 정치 구도도 그때보다 좋지 못하다. 대선 승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박 후보야말로 이제부터 대선 후보 빼고는 모든 것을 버린다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박 후보는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부정적인 것은 모두 털어낼 필요가 있다. ‘박근혜가 바꾸네’를 넘어 ‘박근혜가 바뀌네’라고 많은 사람이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에게서 떠오르는 가장 부정적인 이미지는 불통이다. 국민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는 정치지도자는 다른 장점이 아무리 많더라도 국가 최고 지도자에 오르기 어렵다. (···)
‘박근혜 대세론’은 이미 깨진 지 오래다. 대세론의 허망함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연거푸 고배를 마신 1997년과 2002년 대선 때 입증된 바 있다. 지지율이 견고하니 유리하다는 달콤한 소리에 솔깃할 게 아니라 신발끈을 다시 고쳐 매야 한다. 변화의 출발점은 인사(人事)다. 박 후보는 친박으로 일컬어지는 측근들을 뒤로 물리고 경선 과정에서 소원해졌거나 경선에 불참했던 비박(非朴) 인사들을 대거 포용하는 탕평 인사로 대선 진용을 짜야 한다. (·····)
대선 후보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을 넘어서야 한다. 국민은 세계 경제 10위권 대한민국과 5000만 국민의 생존을 책임질 대통령 감을 찾고 있다. 박 후보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프레임을 깨고 나오지 못한다면 국민통합의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 없다. 박 후보에게 거리를 두고 있는 2040세대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도 박정희의 부정적 유산은 과감히 비판하고 극복할 필요가 있다. (·····)
대선까지는 120일 가량 남았다. 박 후보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국가를 경영할 능력과 자질을 갖췄는가. 글로벌 시대에 세계와 소통하면서 경쟁과 협력으로 국익을 극대화하고 국위를 선양할 리더십을 지녔는가. 이 모든 것을 국민에게 보여 주기에 길지 않은 시간이다.
이 사설은 박근혜의 정치적 장점을 돋보이게 하면서 ‘약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자상하게 ‘조언’하고 있다. 한나라당 기관지의 논설에 버금간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2012년 9월 16일 문재인이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 동아일보 17일자 35면에 실린 사설(「문재인, 과거 아닌 미래와 싸워야 승산 있다」)과 비교해 보자.
민주통합당이 18대 대통령 후보로 문재인 의원을 선출했다. 59일의 경선 기간 중 모바일 동원 경선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문재인 대세론이 결국 통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인 문 후보가 13연승으로 경선을 독주한 배경엔 민주당을 장악한 친노 세력의 전략적 선택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당 지도부는 문 후보에게 대통령 선거일까지 최고위원회의 권한을 모두 넘기기로 했다. 이해찬 대표·박지원 원내대표를 사실상 2선으로 후퇴시키고 문 후보에게 당 운영의 전권을 준 것이다. 당장 경선 과정에서 친노와 비노로 깊게 파인 갈등의 골을 봉합하는 것이 문 후보의 정치력을 재는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문 후보는 기자회견에서 “국민이 바라는 눈높이만큼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화의 강조가 막연한 수사(修辭)에 그쳐서는 안된다. ‘노무현 프레임’ 깨기를 통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문 후보는 12월 19일의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리기로 확정된 후보가 아직 아니다. 사실상 ‘준결승 후보’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며칠 안에 대선 출마를 선언할 경우 문 후보와 야권 단일후보를 놓고 한판 승부가 벌어질 것이다. 단일화 방식으로는 1997년의 DJP(김대중+김종필)식 담판과 2002년의 노무현·정몽준 식 경선이 거론되고 있다. 두 사람이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나눠 갖는 공동정부 시나리오도 흘러나온다. 그러나 야권 후보 단일화가 국민이 납득할 수준의 정책 공유 없이 4·11 총선 때처럼 선거공학에만 매달려 ‘묻지 마’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민심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민주당은 정권 탈환을 부르짖는 제1야당이면서도 2010년 6월 경기도지사 후보를 내지 못했고, 작년엔 ‘제2의 선출직’인 서울시장 선거도 무소속의 박원순 후보에게 넘겨줬다. 이번에 최고의 선출직인 대통령 후보마저 못 낸다면 그야말로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당 주변에선 60년 정통 정당의 역사에 두 번 집권 경험까지 있는 민주당이 ‘선거기획사’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온다. 문 후보는 자신의 국정 운영 비전과 후보 경쟁력으로 당의 존립 위기를 돌파해야 할 중대한 책무를 떠안게 됐다. 그가 당의 분열 치유, 수권 능력 입증 과정에서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느냐에 민주당과 자신의 운명이 함께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 후보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과거사 인식을 맹공하지만 박정희 시대의 역사와 박 후보의 발언을 꼬투리만 잡아서는 활로를 열기 어렵다. 문 후보가 실패한 노무현 정권 사람이라는 낙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미래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문 후보의 선택이 그의 운명을 가를 수밖에 없다.
동아일보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박근혜의 장점을 부각시키면서 ‘선거 전략’을 제시한 것과 달리 문재인에 대해서는 그가 넘어야 할 장벽이 험난하다는 것과 ‘실패한 노무현 정권 사람이라는 낙인’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다.
박근혜에 유리한 ‘북풍 프레임’ 짜기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문재인은 ‘남북 공동선언’ 발표 5주년이 되는 2012년 10월 4일 남북관계 구상을 담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발표했다. 그는 “참여정부를 끝으로 중단됐던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되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10월 6일자 사설(「야권 후보들의 대북 인식과 안보관을 우려한다」)에서 문재인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강하게 비판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는 10·4 선언 5주년인 그제 한반도 평화구상을 밝히면서 “참여정부를 끝으로 중단됐던 지점을 남북관계의 출발점으로 삼되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이날 발표된 내용은 기본 골격에서 노무현 정부 때의 대북정책 및 10·4 선언에 담긴 것과 거의 같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을 답습해서 어떻게 북한의 핵 포기를 이끌어내고 한반도 평화를 이루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대한 문 후보의 인식도 위태롭다. 그는 10·4 선언의 핵심인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와 관련해 “당시 국방부 장관이 회담에 임하는 태도가 대단히 경직됐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간의 남북 정상회담 직후에 열린 2007년 11월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서 김장수 당시 국방부 장관이 북측에 양보를 하지 않아 무산됐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그러나 김 전 장관은 “우리 측은 NLL을 중심으로 남북 양쪽에 같은 거리, 같은 면적으로 어로공동구역을 두려는 생각이었는데 북한 측은 NLL 남쪽인 우리 영해상에 공동구역을 두자고 해 합의가 불가능했다”고 증언했다. 북한은 6·25 전쟁 이후 해상경계선으로 유지된 NLL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무력화(無力化)를 시도했다. 북한은 지난달 29일 “10·4 선언에 명기된 서해 공동어로와 평화수역 설정 문제는 북방한계선 자체의 불법·무법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 후보는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으로서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도 ‘국방장관의 경직된 태도’ 운운한 것은 김 전 장관이 NLL을 포기하고 북한 요구를 수용했어야 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문 후보는 서해평화지대 구상을 언급하면서 “NLL은 그대로 두고”라는 전제조건을 달았지만 북이 계속 NLL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동아일보 10월 9일자 2면에는 「정문헌 의원 ‘2007년 노무현·김정일 비밀 녹취록 존재’ 주장」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앞으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으며 이 발언이 담긴 비공개 대화록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당시 회담 배석자와 관계 기관은 이를 부인했다.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8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2007년 10월 3일 오후 3시 백화원초대소에서 남북 정상은 단독회담을 가졌다”며 “당시 회담 내용은 녹음됐고 북한 통일전선부는 ‘녹취된 대화록이 비밀 합의사항’이라며 우리 측 비선라인과 공유했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통일비서관을 지냈다.
정 의원은 “대화록에서 노 전 대통령은 김정일에게 ‘NLL 때문에 골치 아프다. 미국이 땅 따먹기 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니까. 남측은 앞으로 NLL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공동어로 활동을 하면 NLL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라며 구두 약속을 해줬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11월 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연설에서 NLL을 둘러싼 남북 갈등에 대해 “실질적으로는 거의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문제를 놓고 괜히 어릴 적 땅 따먹기 할 때 땅에 줄 그어놓고 ‘네 땅 내 땅’ 그러는 것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 대통령이 북한 최고지도자에게 NLL을 부정했다면 이는 ‘NLL은 불법’이라는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정 의원은 “대화록에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 노 전 대통령이 ‘내가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북한이 핵 보유를 하려는 것은 정당한 조치라는 논리로 북한 대변인 노릇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북한이 나 좀 도와 달라’는 언급을 했다”며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통일 등에 대한 김정일의 발언에 노 전 대통령이 동의를 표하는 내용, 대규모 경제 지원을 약속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고 말했다. (·····)
그러나 당시 정상회담에 참여했던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2007년 10월 3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정상회담이 있었지만 별도로 만난 적도, 노 전 대통령이 이런 내용을 언급한 적도 없다. 황당한 얘기다”라고 일축했다. 노무현재단도 “하나부터 열까지 허위 사실이며 비밀 합의도 없었고 발언도 날조된 내용”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선거를 두 달 남짓 앞둔 시점에 새누리당 쪽에서 노무현이 NLL을 포기하려고 했다고 주장하자 야당인 민주통합당은 참여정부 시기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동아일보는 10월 11일자 35면 사설(「문 후보, 노무현의 NLL관[觀] 승계할 건지 밝혀야」)을 통해 문재인에게 ‘NLL 포기에 관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과 나눴다는 비공개 대화를 둘러싼 진실 공방이 뜨겁다. 이명박 정부의 통일비서관을 지낸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이 보았다는 60여 쪽 분량 대화 녹취록의 골자는 ‘북방한계선(NLL)이 불법적으로 그어진 선이니 앞으로 이 선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사실이라면 우리의 영토주권을 포기한 발언이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 참석했던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 백종천 전 대통령안보실장은 어제 기자회견에서 비밀 녹취록의 존재를 부인했다. 두 차례 공식 정상회담 말고 별도의 단독회담이 없었으니 비밀 녹취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현 정부 인사들은 녹취록을 분명히 봤다고 하고, 2007년 실제로 회담에 임했던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부인하니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혼란스럽다.
김정일 앞에서 어떤 발언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노 전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해 NLL은 법적인 근거 없이 미군이 일방적으로 그은 선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를 한 뒤에도 핵무기는 미국과 일본을 겨냥한 것이며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 대항한 자위적 측면이 있다는 발언도 자주 했다. (···)
‘10·4 선언’ 전면 계승을 주장하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4일 “당선되면 즉각 공동어로구역 협상을 개시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현재의 NLL을 변경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2007년 11월 국방장관 회담이 실패한 것은 아쉽다며 회담 수석대표였던 김장수 전 장관에 대해 “태도가 대단히 경직됐다”고 비판했다. 김 전 장관이 NLL을 양보하지 않은 것을 두고 “경직됐다”고 말했다면 문 후보의 NLL관에 문제가 있다.
북한은 여전히 “10·4 선언은 NLL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NLL을 인정하지 않는다. NLL 주변에서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지속되는 것은 1953년 정전 이후 지켜져 온 남북 간 해상경계선을 부인하는 북한의 태도가 근본 원인이다. 문 후보는 노 전 대통령의 NLL관을 승계할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문재인은 10월 12일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주장하는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때의) 녹취록 또는 비밀 대화록은 없다”며 “정 의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 대신 사과드리고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사실이 아니라면 정 의원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문 후보는 이날 경기 평택시 해군 2함대 사령부를 찾은 자리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 사안은 굉장히 중요해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며 국가정보원장과 통일부 장관에게 녹취록이나 비밀 대화록이 존재하는지 밝혀 줄 것을 요구했다. 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사실관계가 규명되는 것”이라며 “존재한다면 보여 줄 것을 요구한다. 보고 확인해서 사실이라면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
문 후보는 “새누리당이 선거 때마다 색깔론이나 북풍으로 국민을 오도하려는 구태 정치를 되풀이하고 있는데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새누리당의 국정조사 요구에 대해서는 “왜 필요한가. 국정원장과 통일부 장관이 밝히면 하루 이틀이면 된다”고 일축했다.
문 후보는 이날 다소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으며 비공개 대화록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계속되자 “됐다”며 말을 끊기도 했다. NLL에 대해서는 “남북 간에 합의된 불가침 해상 경계선이라는 것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동아일보 10월 13일자 3면).
‘NLL 문제’가 대선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지속되는 가운데 동아일보는 10월 31일자 31면에 「 ‘NLL 비밀’ 이제 여야 합의로 국민 앞에 공개하라」라는 사설을 올렸다.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이 2007년 10월 3일 이뤄진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의 정상회담 대화록이 국정원에 있다고 그제 밝혔다. 앞서 천영우 대통령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국정원의 대화록을 열람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청와대가 대화록을 폐기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당시 대화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국정원의 기록물에는 공공기록물관리법이 적용된다. 한번 비밀로 지정하면 보호기간 내에 국회의원 3분의 2가 동의하기 전에는 볼 수 없는 대통령지정기록물과는 달리 공공기록물은 비밀취급 인가를 얻은 사람은 열람할 수 있다. 또 비인가자라도 국정원장의 보안 조치 아래 볼 수 있다. 천영우 수석은 인가를 얻어 1급 비밀인 정상회담 대화록을 열람했다. 다만 대화록 내용을 공개할 경우 비밀누설죄에 해당한다. 원 원장도 ‘공개 불가’를 고수한다.
많은 유권자는 노 전 대통령의 NLL 발언을 국가안보와 관련된 중요한 정보라고 여기고 있다. 국익이 있고 나서 비밀이 있는 것이지, 비밀이 국익에 우선하는 것은 아니다. 비밀 유지와 알 권리의 조화가 필요하다. 북한은 “10·4 공동선언의 서해 평화수역 설정이 NLL 불법성을 전제로 한 북남 합의 조치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최근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는 대화록의 NLL 부분에 한해 여야 합의로 열람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대통령과 국정원장, 여야가 합의해 국회 정보위 의원들에게라도 대화록을 열람하도록 함으로써 소모적인 논란을 종식시켜야 한다.
‘NLL 논란’에서 새누리당 정문헌 등의 주장이 진실인지 여부에 대해 검찰이 어떤 결정을 했는지에 관한 기사(「‘NLL 회의록 유출’ 무더기 면죄부」)가 2014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 1면에 나왔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의혹을 수사해온 검찰이 회의록의 존재를 처음 폭로한 새누리당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만 약식 기소했다. 같은 당 김무성·서상기·조원진·조명철·윤재옥 의원, 권영세 전 의원과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 한기범 국정원 1차장 등은 모두 무혐의 처분했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국가기밀인 회의록이 특정 정당의 선거운동에 이용됐다는 의혹에 대해 검찰이 정확한 유출 경로를 밝히지 못했고, 정식 기소도 하지 않아 논란이 예상된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이현철)는 정 의원을 공공기록물관리법상 비밀누설 혐의로 벌금 500만 원에 약식 기소했다고 9일 밝혔다. 대선을 2개월여 앞둔 2012년 10월 정 의원은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NLL(북방한계선)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비공개 회의록이 있다”며 회의록 논란을 촉발시켰다.
검찰은 정 의원이 외통위 국정감사나 국회 본관에서의 기자회견을 통해 회의록 내용을 언급한 것은 면책특권에 해당한다고 봤다. 하지만 정 의원이 회의록 내용을 당시 새누리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소속이던 김 의원과 권 전 의원에게 누설하고 국회 밖에서 기자회견을 하거나 언론 인터뷰를 통해 언급한 혐의는 유죄로 인정했다.
검찰은 김무성 의원의 경우 공공기록물관리법상 업무처리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했다. 이 법은 ‘업무처리 중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한 자’를 처벌하도록 돼 있다.
특히 김 의원은 대선을 닷새 앞둔 2012년 12월 14일 부산 유세 때 “노 전 대통령의 굴욕적인 발언을 대한민국 최초로 공개하겠다”며 회의록 내용을 상세히 언급했으나 내용을 알게 된 경위는 이번 수사에서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검찰은 “선대위 실무진이 작성해 온 보고서에 그런 내용이 있었으며, 여의도에 돌아다니는 ‘찌라시’와 비슷했다”는 김 의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새정치민주연합 박광온 대변인은 9일 논평을 통해 “김무성 의원 등이 업무처리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한 것은 법조항을 지나치게 축소 적용한 ‘봐주기 수사’”라고 주장했다.
이 기사와 같은 날짜 35면에는 「정치적 사건에 약한 검찰, ‘회의록’ 수사 결론도 허탈」이라는 사설이 나와 있다.
어제 검찰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사건과 국가정보원 여직원 감금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둘 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 발생했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이다. 그래서인지 검찰은 두 사건 모두 주요 피의자들을 벌금형에 약식 기소했다. 회의록 유출 사건에서는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만 벌금 500만 원에 약식 기소하고 김무성 의원 등 나머지 9명은 무혐의 처분했다. 감금사건에서는 강기정 의원 등 4명을 벌금 200만∼500만 원에 약식기소하고 나머지 4명은 기소유예 또는 무혐의 처분했다. (·····)
회의록 유출 사건의 발단은 정 의원이 제공했다. 그는 대선을 앞둔 2012년 10월 8일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했다”는 취지로 발언해 대선 정국을 뒤흔들었다. 그는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고발됐지만 무혐의 처분됐다. 그러자 야당은 정 의원이 국회 밖에서 별도의 기자회견을 통해 회의록 내용을 누설하고 국정원 보관 발췌본을 무단 열람했다며 다시 고발했다.
당시 온 나라를 뒤흔든 것은 NLL 포기 발언을 둘러싼 여야 간 논란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회의록 유출은 ‘곁가지’였을 수 있다. 검찰은 정 의원이 대통령통일비서관 시절 회의록을 열람한 것은 문제가 없지만 국회의원이 된 뒤 그 내용을 의정 활동과 무관하게 공표한 것은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회의록이 작년 7월 국회 의결로 공개됐지만 사전에 공개한 것은 법을 어기고 외교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잘못된 처사였다.
이 사설 집필자는 2012년 대통령선거 기간에 동아일보가 ‘NLL 논란’에 관해 새누리당을 일방적으로 편들면서 민주통합당 후보 문재인과 참여정부 시기 통일·안보 부처의 고위 관리들을 거칠게 공격한 사실을 모르는 채 이런 글을 쓴 것일까?
관리자 freemediaf@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