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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5월 언론투쟁기록[10] 젊은 기자 5명 회사승인 없이 광주잠입 취재

- - 중앙일보·동양방송(1) 〈김준범 TBC 보도국 기자〉

기사승인 2015.12.26  00: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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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維新)정권의 언론탄압에는 결연히 맞서야 했고, 삼성그룹의 이익보호에도 앞장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대 후반 중앙일보· 동양방송(이하 중앙매스컴)이 처해 있던 이율배반적인 대내외 환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매스컴은 태생적으로 권력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진실을 보도해 당국과 불편한 관계를 야기할 경우 보도한 기자는 예외 없이 희생되곤 했다.

뿐만 아니라 중앙매스컴은 삼성의 인사고과(人事考課) 제도를 도입, 기자의 신분을 위협함으로써 기자정신을 약화시키고 붓끝을 무디게 만들었다. 1977년 한 해 동안에만 객관성 없는 인사고과에 의해 10명의 기자가 다른 직종으로 전배되거나 계열사로 전출되기도 했다.

자유언론을 위한 몸부림 

경기도 성남시 주민교회에서 열릴 예정이던 ‘구속자 석방 기도회’가 당국의 저지로 무산된 사건이 일어났었다. 1978년 3월1일 기도회에 참가하려던 종교지도자 함석헌(咸錫憲) 옹이 자택에서 연금되고 시인 김지하(金芝河)씨가 현장에서 연행됐다. 중앙매스컴 성남주재 박원훈(朴元勳)기자는 이 사건의 전말을 간단히 메모해 당직 근무 중이던 유 균(柳 鈞) 기자에게 보고했다.

서슬 퍼런 유신시절 일선 기자들 사이에 시국사건은 간단히 그냥 메모 형식으로 보고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유 기자는 메모 대신 완전한 기사로 작성해 보내라고 요구했다. 박 기자가 보낸 그 기사는 야간 데스크(이상근)의 손을 거쳐 그날 밤 마감뉴스로 전파를 탔다. 토요일 밤의 마감뉴스는 예나 지금이나 청취율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필 그 뉴스를 북한이 청취하고 남쪽으로 보도를 하는 게 아닌가. 다음날 새벽,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이 방송을 듣고 중앙정보부(김재규 부장)에 자초지종을 묻는 상황으로까지 확대됐다. 그러자 중정(中情)은 중앙매스컴 측에 관련자 중징계를 요구했다. 이에 중앙일보 측은 서둘러 담당 박원훈 기자를 해임하고, 이상근 기자는 방송심의실로 좌천시켰으며, 유 균 기자는 1개월 감봉 처분했다.

박 기자 해임 사실은 입사 동기생(12기) 들조차 1주일간이나 모르고 있었다. 12기생들은 국민의 알권리에 충실했던 기자를 해임시키라고 요구한 독재 권력과 그들의 부당한 요구를 맥없이 수용한 경영진에 분노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기자생활 계속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차재에 중앙일보의 개혁을 호소하여 받아들여지면 남고 거부당하면 미련 없이 떠나자.”

12기생들은 이후 3개월 동안 부지런히 선후배들을 만나 삼성으로부터의 편집권 독립과 신분보장 등 중앙매스컴 개혁을 위한 정지작업에 함께 나설 것을 호소했다. 선후배들의 호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선배들 중엔 묵시적인 지지자들도 많았다.

D-데이는 1978년 6월3일(토)로 정했다. 회사측의 방해공작을 우려해 겉으로는 10~14기 기별 체육대회를 갖는다고 안개를 피웠다. 정작 중앙일보 개혁을 위한 결의대회는 체육대회가 끝난 후 자리를 옮겨 열기로 했다. 양동작전은 적중했다. 서울 은평구 역촌동 예일여고 운동장에서 열린 체육대회는 대성황을 이뤘다. 이어 인근 중국 음식점으로 옮겨 열린 결의대회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 자리에 참석한 80여 사우들은 △삼성그룹으로부터 편집제작의 자율성 확보 △불합리한 인사고과제 철폐 △1978년 1월1일 이후 부당 해고, 다른 직종, 방계회사 등으로 전출된 사우들의 즉각 복직 등 7개항의 요구사항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하고, 전사적으로 연대 서명작업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서명 작업은 날개를 단 듯 확산, 사흘만에 서명자가 4백여명으로 늘어났다. 이 중에는 서명작업을 저지해야 할 인사부 직원도 동참했다.

이런 움직임에 당황한 회사측은 6월 9일 △삼성이나 외부로부터의 보도의뢰는 언론의 자율성을 기준으로 선별 처리토록 하고 △현행 인사고과제는 상벌(賞罰) 고과제로 전환하며 △기자의 전배는 본인의 의사를 충분히 참작하고 △하의상달(下意上達)이 잘 되도록 부별, 국별 회합을 주 1회 이상 개최한다는 등 기자들의 요구사항을 전폭 수용했다. 각 부서별 소통을 활성화하기 위해 회사측은 회식비 명목으로 거금(巨金)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건희의 통 큰 양보로 자율편집, 신분보장 확보

당시 회사를 대표해서는 이건희(李健熙, 현 삼성그룹 회장) 이사가 최형민(崔炯敏, 편집국 사회부) 기자를 비롯한 각 국(局) 대표들과 면담을 가졌다. 이 이사는 기자들이 만든 성명서를 읽어보더니 “내가 보고 받기로는 해사자(害社者)들인데 이제 보니 애사자(愛社者)들이네!”하며 혼잣말을 했다.

그때 편성국 대표로 참석한 정 훈(鄭 熏, 편성국) PD가 “홍진기(洪璡基) 회장님께서 저희 대표들을 해고시킨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하자, 이 이사는 “걱정 마세요. 상법상 사주(社主)는 나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이사는 대표들에게 본인이 피우던 담배를 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 PD에게 “자네가 제작한 ‘인간만세’ 테이프 하나 보내 주게”라고 요청했다고 정 훈씨가 회고했다. 이날 이건희 이사의 통 큰 양보와 대타협으로 중앙매스컴의 내부문제는 중대 고비를 넘기고 언론창달을 향한 대장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편집권의 자율성과 신분보장 등을 확보한 1978년 6월 이후 중앙매스컴은 활기를 되찾았고 젊은 기자들은 사명감에 충만했다. 편집국에 감돌던 삭막한 분위기는 선후배간에 믿고 따르는 따뜻한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하지만 시시비비를 가리는 기사가 지면에 늘어날수록 중앙매스컴을 감시하는 유신독재의 눈초리도 날카로워졌다.

유신정권은 1978년 9월21일 월간중앙에 3개월 정간(停刊)조치를 내렸다. 10월호에 실린 한완상, 조동필 교수와 이건호 이화여대 법정대학장간의 대담을 정리한 ‘비리의 일상 속에서’가 주 타깃이었다. 정보당국은 또 △경북도교위 사건 △현대 아파트 부정 분양사건 △공화당 성낙현 의원의 여고생 치정(癡情)사건 등 이른바 3대 스캔들을 고발한 특집 ‘이지러진 의식의 회복을 위하여’가 긴급조치 9호에 위배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회사측은 즉시 김석성(金石星) 주간을 대기 발령시키고 부장과 차장은 사표를 받는 한편 정춘수, 최형민 등 5명의 월간중앙 기자에게도 ‘성의를 표시하라’며 사표제출을 강요했다. 이는 지난 6월의 편집권 독립 및 신분보장 투쟁에 이들 5명이 앞장 선 데 대한 보복이 분명했다.

중앙매스컴 기자들은 △9월 23일=출판국 기자총회 △25일=기별 대책회의 △26일=기자총회 △29일=중앙매스컴 전체 기자총회를 잇따라 열고 △월간중앙 3개월 휴간조치 백지화와 △인사조치 철회를 요구했다. 기자들은 일사불란한 투쟁으로 월간중앙 휴간조치 백지화는 관철시키지 못했지만 사표제출 강요 등 인사조치는 전면 철회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1978년 11월18일 월간중앙의 정춘수, 최형민 두 기자를 지방 주재기자로 발령하는 등 월간중앙 기자 5명을 모두 타부서로 전출시켰다. 이러한 인사조치가 알려지자 출판국 기자 40여명은 11월20일 총회를 열고, 보복인사의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는 한편 결연한 의지를 회사측에 전달하기 위해 전원 연기명 사표를 제출했다.

이후 닷새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사원총회가 열렸다. 그동안 회사측은 전택원(全擇元), 전희천(全熙天), 이흥재(李興在) 기자들에게 지방취재 명령을 내 서울을 떠나 있도록 했다. 이들만 빠지면 사태는 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했지만 오판(誤判)이었다. 제 2선에 숨어있던 새로운 리더들이 주재한 11월 24일 총회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25일 오후 3시를 기해 제작거부에 돌입한다”고 결정했다.

11월24일 오후 이건희(李健熙) 이사가 홍진기(洪璡基) 사장을 대신하여 각국(各局) 대표들과 긴급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건희 이사는 △월간중앙 기자 5명에 대한 인사조치 백지화 △편집제작의 자율성 보장 등 9개항을 약속했다. 그것은 예상을 뛰어넘은 대 파격이었다.

제작거부의 신호탄, 중앙일보 백지(白紙)사건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1979.10.26)을 계기로 전국에는 한동안 비상계엄이 발효중이었다. 이듬해인 1980년 대한민국의 봄은 전국 곳곳에서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가 봇물을 이뤘고,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과의 충돌로 매일 크고 작은 유혈사태가 빈발하고 있었다.

특히 5월로 접어들면서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정국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5월 1일 계엄사령부는 강원도 ‘사북사태’(舍北事態) 에 대해 국가안보 차원에서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2일에는 서울대생 1천여명이, 6일에는 연세대생 6천여명이 ‘민주화를 위한 시국선언문’을 각각 발표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사북사태는 만성적인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려 온 수 백 명의 광원들이 4일간 사북읍을 점거, 집단 항의함으로써 발생한 불상사였다. 경찰 1명이 숨지고 광원 수 십 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유혈사태로 확대되었다. 85명의 광원이 구속되고 35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그런 가운데 5월 6일에는 강원도 사북 동원탄좌(東源炭座) 광부들의 시위사태를 취재하던 중앙일보 장성(長省) 주재 탁경명(卓景明) 기자가 현지 정보기관원들에 끌려가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전치 4주의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가뜩이나 대치국면에 놓여 있던 언론과 신군부의 관계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사건발생 4일 만에 △임금 소급 인상 △상여금 400% 지급 △주동자 처벌 최소화 등의 조건에 광원들과 대책본부가 합의했다. 그러나 대책본부와 합동수사반은 당초 약속과는 달리 134명을 연행키로 하고 5월6일 밤 대대적인 주동자 색출에 나섰다.

탁 기자는 주동자 대량 연행 낌새를 눈치 채고 임시 작전본부가 차려진 사북 읍장실에 일찍부터 잠입해 있었다. 거기서 연행 대상자 명단을 확인하고 나오던 중 광원들이 버스에 연행돼 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M-16소총에 대검(帶劍)을 꽂은 중무장 군인들이 펼친 삼엄한 경계 속에 광원들의 비명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탁 기자는 두려움을 물리치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그 섬광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무장군인들의 M16 소총 개머리판이 탁 기자의 목을 내리 찍었다. 이어 탁 기자는 합수반 요원들에 의해 버스 안으로 끌려가 뭇매를 맞고 대검으로 고문까지 받아 두 차례 실신 끝에 정선병원으로 옮겨졌다. 탁경명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무장군인이 M-16 개머리판으로 내 목을 내리 찍었다. 내가 ‘중앙일보 기자’라고 소리쳤는데도 나를 또다시 내리 찍었다. 한 시간 반이 지났을까. 나는 온 몸에 통증을 느끼며 실신상태에서 깨어났다....눈을 다시 뜨자 군인들은 나를 어느 연병장에 내려놓은 뒤 이번에는 대검으로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기자협회 30년사’에서)

다음날(5월7일) 오전 11시 중앙매스컴 10층 휴게실에서 열린 기별 대표자 회의에서는 △탁 기자에 대한 수사요원들의 집단폭행 사실을 기사화하고 이희성(李憘性) 계엄사령관에게 엄중 항의 할 것 △향후 대책 논의를 위한 기자총회 소집 등 2개항을 결정했다.

이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이 날짜 중앙일보 사회면은 당초 입원중인 탁 기자의 사진과 집단폭행 내용, 기자협회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항의문을 발송한 사실 등을 묶어 ‘동원탄좌 광부연행 취재하던 기자에 수사반원 뭇매’ 제하의 4단 기사로 다뤘다. 그러나 검열에서 삭제된 부분은 다른 기사로 메우지 않고 공백으로 남겨 둔 채 1판(版)을 발행했다.

그것은 탁 기자 사건을 다룬 기사가 검열에서 전면 삭제된 데 대한 전체 기자들의 항의 표시요 독자들과 나름의 소통방법이기도 했다. 계엄하에서 모든 매체가 사전 검열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시민들은 지면에 공백난이 보이면 ‘뭔가 검열에서 문제가 생겼구나’하고 금방 눈치를 챘다.

같은 날 오후 6시30분 중앙일보 편집국에서는 편집국, 보도국, 출판국 전체 기자총회가 열렸다. 이날 열린 각 기별 총회는 다음날 오전 7시까지 밤을 꼬박 새며 향후대책을 논의했다. 관리위원회가 이 사건의 경위 설명과 함께 기자협회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항의문을 발송했음을 보고했다. 총회는 이날 모임을 ‘자유언론 실천의 밤’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후 9시에 재개된 자유토론은 밤 12시를 넘어서면서 경찰 출입기자들이 차례로 나와 대학생들의 언론에 대한 불신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자 더욱 가열됐다. 기자들은 민주화 대행진 과정에서 저지른 언론의 과오를 냉정하게 자성하는 한편 민주화를 위해 언론이 담당해야 할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각 기별 대표들이 나와 작금의 언론상황과 회사에 대한 성토를 이어갔다.

8일 오전 7시, 12시간 30분 동안의 토론을 바탕으로 계엄당국에 대한 항의문과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이 항의문에서 기자들은 “정상적인 취재활동 중 발행한 집단 구타사건은 언론기관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라고 규정하고 “조속한 진상규명과 관련자 엄중 문책”을 계엄당국에 요구했다.

함께 채택된 결의문에서는 또 지금까지 한국언론은 민중의 소리를 외면한 채 침묵으로 일관해 왔음을 반성했다. 나아가 △충실한 보도 △각계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성원 △비상계엄의 조속한 해제 △자유언론 운동의 실천을 다짐하고 ‘전 언론계가 동지적으로 결속할 것’을 호소했다.

한편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7일 오후 중앙일보 김승한(金昇漢) 주필에게 전화를 걸어 탁 기자 구타사건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고 “기자를 직접 구타한 자를 색출해서 엄중 문책하도록 특명을 내렸다”고 전했다. 기협도 성명을 발표, 탁 기자 사건에서 보여 준 중앙매스컴 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 정신에 전국 3천여 회원들이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검열지침의 주 타깃(tarket)은 DJ와 광주

계엄하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언론에 대한 검열지침을 통해 그들의 야욕을 차츰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문과 방송, 통신과 잡지 등 모든 언론매체는 계엄사 검열단의 사건 검열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보도할 수 있었다. 신문기사용 원고와 방송용 필름 등을 매번 들고 가서 검열을 받아야 했다.

검열단이 가장 비중 있게 다룬 분야는 김대중(金大中), 김영삼(金泳三), 김종필(金鍾泌) 등 이른바 3김을 비롯한 정치권과 학원가, 노동계, 종교계 등의 움직임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는 언행(言行) 하나하나는 물론 표정까지도 세밀하게 간섭하고 나섰다. 3김씨 중에서도 특히 김대중씨에 대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웃는 모습을 내 보낼 수 없도록 통제했다. 3김씨의 미소 짓는 모습이라든가 군중들로부터 환호 받는 장면 같은 것들은 반드시 삭제 대상이었다.

기사에 사용되는 어휘 하나하나도 철저히 통제하고 들었다. 종교계나 학원가, 노동계 등의 움직임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도할 경우 ‘부분삭제’ 또는 ‘전면삭제’를 받곤 했다. ‘부분삭제’는 기사의 일부를, ‘전면삭제’는 기사 전체를 삭제하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보도불가’나 마찬가지였다.

검열의 강도는 5월 17일 계엄 전국 확대를 기점으로 더욱 고조되기 시작했다. 특히 5.18 광주민중항쟁과 관련한 기사나 사진의 경우 일체 사용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심지어 광주시민들이 시민군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주는 모습이나 거리 청소하는 모습 등도 내보낼 수 없었다. 광주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는 모든 시민들은 시종일관 ‘폭도’로 규정하고 사진설명도 그렇게 붙이도록 요구했다.

특히 5월 16일 광주시내 금남로에서 있었던 몇 가지 놀라운 사실에 대해 기사는 물론 사진도 철저히 통제됐다. 도청 앞에 모인 2만여 대학생들은 이날 오후 “국가 비상시에는 전원 학도병으로 자원 입대할 것”을 결의하고 서명했다. 경찰은 학생과 시민들의 횃불 행진이 인도 밖 차도로 확대되지 않도록 엄호해 주었다.

시위는 질서정연하게 진행됐다. 학생, 시민들은 마지막 이벤트로 ‘5.16 화형식’을 갖기도 했다. 또 교수와 일부 학생들은 횃불행진을 하는 동안 질서유지에 힘 써온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즉석에서 성금(10만여원)을 거둬 경찰에 전달했다. 바로 이런 사실들은 검열에서 철저히 차단, 어떤 매체도 다룰 수 없었다.

검열단이 주목한 또 다른 기사가 있었다. 시민군이 광주를 장악하고 있는 동안 은행 강탈이나 절도, 방화, 주거침입 등 치안사범이 한 건도 없었다는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기사는 검열단에서 여지없이 삭제되고 마침내 ‘보도불가’ 딱지를 받았다. 오로지 광주 학생, 시민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마치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의 행위인양 묘사해야만 보도할 수 있었다.

서울시청 3층 검열단에는 대위, 소령 등 수십명의 장교들이 각 언론사별로 나누어 검열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들 검열단 요원들은 상부로부터 내려온 그날그날의 검열지침(가이드 라인)을 책상 위에 걸어놓고 검열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검열단에 지침을 내려 보내는 ‘상부’는 대부분 보안사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루에도 수 십 개 씩 전달되는 검열지침은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김대중씨 웃는 사진 보도불가” 또는 “DJ 얼굴 찡그리고 오른손 높이 들어 내리치는 장면은 보도해도 좋음”, “김영삼씨 주먹 불끈 쥐고 청중 향해 연설하는 장면 ‘전면삭제’” 등 특정인의 표정이나 움직임까지도 세세히 규제를 했다. 하지만 두 김씨가 서로 외면하고 나란히 앉아있는 사진 같은 경우는 오히려 크게 키우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학원가나 종교계, 시민단체 등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검열은 다르지 않았다. 종교계 인사들의 시국선언이나 학원가에 나붙은 민주화 내용의 대자보 등은 기본적으로 ‘보도불가’였다. 이들의 요구가 계엄당국이 아닌 내부 문제일지라도 갈등적 요소가 있거나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킬만한 요소가 보이면 보도를 불허(不許)했다.

5.16 금남로 횃불대행진 기사, ‘보도불가’

10.26 이후 KBS를 비롯한 서울의 주요 언론사 건물에는 24시간 계엄군이 주둔해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언론사 직원들의 출입을 감시하거나 통제하는 것이었다. 서울 중구 순화동의 중앙일보 동양방송 10층짜리 사옥에는 철모와 개인화기로 단독군장을 한 계엄군 10여명이 회사 정문과 편집국, 보도국, 출판국 등 출입문에서 교대로 근무를 서고 있었다. 계엄군은 대개 일등병, 상병 등이 대부분으로 직원들과 얼굴을 아는 사이가 되자 며칠 후부터는 서로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한편 중앙일보를 비롯한 서울의 주요 언론사에는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와 보안사, 치안본부, 서울시경찰국 등에서 출입하는 기관원들이 언론사 내부동향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마치 출입기자가 정부 각 부처 기자실에 나가 해당 부처의 동향을 취재하듯 언론사 내부사정을 빠짐없이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일부 외근 기자들은 회사 내부 사정을 잘 몰라 이들 상주(常駐) 기관원들에게 역으로 사내 정보를 귀동냥하기도 했다.

기관원들의 언론사 상주는 1970년대 초 유신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언론을 철저히 권력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러다가 10. 26 직후 계엄이 선포되자 몇몇 정보기관들이 언론사 출입을 가세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만큼 계엄하에서 각 언론사는 각 기관에 24시간 노출돼 있었다.

이들 기관원들은 회사 대표와 중역들 방을 무시로 드나들며 온갖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각 기관원들은 나름대로 보이지 않는 정보경쟁을 벌였다. 당시 언론은 이중삼중의 통제와 감시체제를 벗어날 수 없었다. 1970년대 유신치하에서 이미 정보기관의 감시와 통제 속에 순치돼 온 언론은 10.26 이후 ‘사전 검열’이라는 방울을 목에 걸어야 했다.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 제도는 계엄과 동시에 실시됐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계엄당국은 각 언론에 보도통제 지침을 전달하는 정도였고, 이를 각 사가 ‘알아서 기는’ 모양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보안사의 이상재 준위가 검열단에 투입되면서 신군부의 언론통제는 한층 강도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그는 보안사에서 주로 대공(對共)업무를 담당해 왔었다. 그런 그가 1980년 3월 보안사 요원 5명, 문공부 파견원 1명, 필경사(筆耕士) 1명등 모두 8명으로 ‘언론대책반’을 구성했다. 이를 통해 언론통제 정책을 기안하며 압박을 더욱 심화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한 달여 뒤인 1980년 4월, 조선일보 출신의 주일 공보관으로 나가있던 허문도(許文道)씨가 돌아와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 비서실장에 임명되면서 언론상황은 최악의 사태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 무렵 언론계의 최대 이슈는 ‘언론검열 철폐운동을 통한 언론자유 운동’으로 바뀌고 있었다.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검열철폐와 자유언론 실천’ 움직임은 80년 5월로 접어들면서 본격 타오르기 시작했다. 계엄철폐, 검열철폐 등을 외치는 학생, 노동자들과 신군부의 대치국면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유신정국에서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해 있던 한국기자협회(記協)도 10.26 이듬해인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비로소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기협은 1980년 3월31일 제17차 대의원 대회에서 제20대 회장으로 합동통신(연합뉴스의 전신)의 김태홍(金泰弘) 기자를 선출했다.

해직과 통폐합의 주범, 이상재와 허문도

기협은 이날 5명의 부회장과 2명의 감사도 선출함으로써 집행부의 골격을 갖추게 됐다. 고영재(경향신문), 정교용(鄭僑溶, 중앙일보), 노향기(한국일보), 이수언( 부산일보), 이홍기(KBS) 기자 등이 부회장으로, 박정삼(서울경제), 김영진(동양통신) 기자 등이 감사로 각각 선출된 것이다.

이들 기협 20대 집행부는 첫 번째 작업으로 개정될 헌법의 언론조항에 언론계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1980년 4월 8일 ‘신문의 날’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헌법개정과 언론의 자유’라는 주제의 강연회를 열었다. 송건호(宋建鎬)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김철수(金哲洙) 서울법대 교수, 리영희(李泳禧) 한양대 교수 등이 각각 주제발표에 나섰다.

기자협회는 1980년 5월16일 오후 2시 신문회관 회의실에서 기협 회장단, 운영위원, 분회장, 보도자유 분과위원회 연석회의를 열고 자유언론 실천 대책을 협의한 끝에 20일(화) 오전 0시를 기해 검열거부에 들어가고 당국이 강압적으로 나올 경우 제작거부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결정은 동아투위(東亞鬪委)의 강경론과 중앙매스컴의 온건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기협 회장단의 지원들 받은 강경론이 득세, 중앙매스컴 대표들이 퇴장한 가운데 가결됐다. 중앙측 주장은 검열거부나 제작거부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 단계적으로 투쟁해 나가는 가운데 기자들의 결의와 응집력이 절정에 다달았을 때 마지막 카드로 사용해야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5월17일(토)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정치인, 재야인사, 대학생, 언론인들을 대거 연행했다. 그날 저녁 서울 이화여대에서는 전국 대학의 학생회장단이 긴급 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기협의 김태홍 회장과 노향기 부회장은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 피신했으나 정교용 부회장(월간중앙) 등 7명은 속수무책으로 연행되고 말았다.

19일(월) 오전부터 편집국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정교용 기자의 연행사실이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17일 오후 늦게부터 시위에 나선 광주시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군경에 의해 사망했다는 소문이 쫙 나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엄당국의 통제로 모든 국내 언론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광주와 연결된 통신수단이 모두 두절돼 사실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그 무렵 중앙일보 편집국과 TBC 보도국에서는 최소 인원으로 광주에 취재반을 보내 현지 와 소통하려 했다. 편집국에선 김광섭(金光燮) 차장을 팀장으로 이창성(사진), 이창우, 권오중, 장재열 등 사회부 기자가, 보도국에선 오홍근(吳弘根) 차장을 팀장으로 박 충(촬영), 한준엽, 성창기 기자 등이 현지에 급파됐다. 그런가 하면 회사의 정식 취재지시와는 무관하게 개인자격으로 현장에 잠입한 경우도 있었다. 보도국 김준범 기자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1년 전 10. 26 직후 입사한 김 기자는 당시 보도국 편집제작부에서 내근하며 광주에 내려간 선배들이 보낸 정보보고를 받아 적을 때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광주에서 보내온 생생한 팩트(fact)들은 하나도 뉴스로 내보내지 못하고 휴지통에 처박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광주 소식은 검열당국(사실상 보안사)에 의해 치밀하게 계산된 가짜 기사만이 전달되는 기막힌 상황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광주를 제외한 어느 곳에서도 광주의 진상을 알 수가 없었다. 계엄당국은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었다.

망월동 진흙 밭에 아무렇게나 묻어

광주를 외부와 완전히 차단시켜 놓은 다음 언론을 통해 저들이 꾸며낸 거짓 정보를 유포시키면 대다수 국민들은 실제로 “그러면 그렇지!”하며 기관에서 만들어 낸 허위보도를 믿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참다못한 그는 마침내 5월 24일(토) 전북 정읍과 장성, 송정리 등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광주에 들어가 27일 계엄군이 도청을 최종 진압할 때까지 현지상황을 취재했다.

이 보다 며칠 앞선 5월 21일경 중앙일보 편집국에서는 경찰기자 5명(권일, 이석구, 최형민, 허남진, 최승호 등)은 역시 회사의 승인 없이 취재차량을 이용해 광주로 잠입했다. 그곳에서 이들은 22일 계엄군 이 퇴각하기 전후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심지어 광주 외곽 상무대로 시체들이 차에 실려 들어오는 모습,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상황에서도 기자정신을 발휘, 관 뚜껑을 열고 시신의 상태와 숫자를 확인하기도 했다.

최승호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계엄군은 당시 상무대로 모아진 시체들을 망월동으로 옮겨 매장했다. 말이 무덤이지 허허로운 진흙 밭에 구덩이를 파고 무작위로 묻은 다음 흙으로 덮으면 그만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 20cm 길이의 판자쪽에 먹 글씨로 ‘ooo묘’라는 네 글자를 써서 박아 놓았다.

만약 그 위패를 누가 뽑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기라도 하면 그 시체가 누군지 확인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광주 희생자들에 대한 계엄군의 사후처리는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이들 5명의 기자들은 그 후 회사로부터 명령불복종, 근무지 무단이탈 등 사유로 징계를 받았다.

한편 5월 19일 오후 7시경 중앙매스컴 기자들은 비상총회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는 기자, PD뿐만 아니라 국장, 부장, 차장들도 거의 참석했다. 관리위원회는 기자협회의 결정사항을 보고하고 향후대책을 논의했다. 비상총회는 기협의 결정을 존중하고 △광주항쟁 왜곡보도를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으며 △20일부터 광주의 진상이 보도될 때까지 전원 제작을 거부한다는 등 2개항을 결의했다.

실제로 20일(화)부터는 기자, PD 모두가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기협의 결의에 가장 먼저 호응한 곳은 역설적이게도 온건론을 폈던 중앙매스컴이었다. 내부 결속력이 어느 언론사보다 탄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장급 이상 간부들이 통신지(通信紙)를 활용해 신문을 제작하는 바람에 ‘제작거부’라는 극약처방도 당초 기대했던 것 보다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동양방송(TBC) 보도국도 사정은 비슷했다. 평기자들이 전면 제작거부에 돌입하자 부장, 국장들이 통신지를 베껴 기사를 작성한 다음, 부스(Booth)에 들어가 직접 방송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강용식(康容植) 국장도 기자들을 대신해서 직접 부스에 들어가 리포트를 했다. 그러자 26일(월)에 이르러서는 편집ㆍ보도ㆍ출판 3국 대표와 기별 대표들이 긴급회의를 갖고 “실효성 없는 제작거부 보다는 참여해서 광주항쟁의 진상보도에 적극 대처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로써 27일에는 편집부 기자 전원과 경찰출입 기자 일부를 제외한 중앙매스컴 소속 기자, PD 전원이 며칠만에 제작에 복귀했다. 이 날은 광주항쟁에서 시민군이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최후의 날로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언론 각사도 제작거부의 열기가 한 풀 꺾이던 시간이었다.

28일에는 편집부 기자들이 제작거부를 철회했고, 30일은 경찰출입 기자들의 참여를 끝으로 열흘 동안의 제작거부 운동은 막을 내렸다. 6월초 회사의 지시 없이 광주에 내려갔던 경찰출입 기자 4명에 대한 출입처 이동 조치가 있었다. 이는 강제 해직의 전주곡인 셈이었으나 당시에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불길한 조짐은 월간중앙에서 먼저 

언론인 대량학살의 조짐은 뜻밖에도 중앙매스컴의 다른 곳에서 먼저 불거졌다. 월간중앙 1980년 6월호의 특집기사를 계엄사가 뒤늦게 문제 삼은 것이었다. 월간중앙이 6.25 3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특집 가운데 ‘전후세대가 말하는 통일전망’이라는 주제의 좌담기사가 그것이었다.

6.25를 겪지 않은 분야별 전후세대 5명이 출연, 자신들이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반공교육과 남북한 체제문제, 통일전망 등에 대해 토론한 것을 강희경(충북대 사회학 교수)가 정리한 내용이었다. 당시는 계엄하인지라 그 기사 역시 사전 검열을 받았고, 몇 가지 지적사항을 반영한 뒤 인쇄에 들어가 6월호 책은 이미 서점에 배포된 상태였다.

그런데 7월호를 준비중이던 6월 말경 계엄사 검열단으로부터 갑자기 월간중앙 6월호와 최초 기사 검열본을 가져오라는 통보가 왔다. 그 기사를 담당했던 강 기자는 당국이 요구한 자료를 챙겨 곧바로 검열단에 제출했다. 검열단은 좌담회 내용 중 한 출연자의 발언내용을 문제 삼고 있었다.

즉 “...6.25는 남침설과 북침설, 중간설 등 여러 각도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라고 한 대목에서 유독 ‘북침설’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은 것이었다. 이 대목도 최초 검열 당시에는 문제되지 않았고, 그래서 최종 인쇄에 들어갔음은 물론이었다. 말하자면 저들이 한 일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나중에 꿰맞추기를 한 것이었다.

검열단은 왜 스스로의 검열결과를 불과 몇 주만에 부정하고 엉뚱한 꼬투리를 잡으려 했을까? 그것은 역시 5월의 정치일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것이 17일이고, 무소불위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로 위원장은 전두환)가 설치된 것이 31일이었다.

이로 미루어 월간중앙 6월호 원고를 처음 검열한 5월 초순쯤은 서울의 봄이 한창일 때였고, 두 번째 검열을 요구할 때는 이미 국보위가 설치된 이후로 정국이 극도로 삼엄해진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검열의 기준도 훨씬 강화됐을 것임은 물론이었다.

그 무렵 신군부는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기자들을 무더기로 연행하는 등 언론에 대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계엄당국은 6월 9일 경향신문의 △서동구 △이경일 △노성대 △홍수원 △박우정 △표완수 기자 등과 문화방송(MBC)의 △오효진, 동아일보의 △심송무 기자 등을 유언비어 날조혐의로 구속했다. 그리곤 다음 타깃으로 유력지인 중앙일보를 겨냥했고, 그 중에서도 일간지가 아닌 월간지를 선택한 것이었다.

당국이 지나간 월간중앙 6월호 기사를 문제 삼자 중앙매스컴 측의 반응은 예상 외로 신속했다. 중앙일보는 7월1일부로 △출판국장 홍사중 △월간중앙 주간 양태조 △월간중앙 부장 한규남 △담당 기자 강희경 등 관련자 4명을 동시에 해고 조치했다. 중앙일보는 이같은 사실을 7월 2일자 1면(출판국장, 주간)과 2면(부장, 기자)에 각각 게재했다.

자기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을 해직시켜 놓고 그 명단을 자기 신문에 게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1980년 7월 1일부로 해직된 이들 네 사람은 불과 한 달 뒤에 불어 닥칠 언론인 대량학살의 예고편이었고, 중앙매스컴으로서는 그 해 8월의 33명에 앞 선 최초의 강제 해직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해직조치가 중앙일보의 독자적인 결정이라고 보는 사람은 언론계 내부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신군부의 외압에 의해 결국 자기 조직의 손발을 자르지 않으면 안 될 지경까지 이른 것이었다. 신군부는 이처럼 제 손에 피를 뭍이지 않고 각 언론사들이 스스로 알아서 눈엣 가시를 뽑아내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와 함께 중앙일보는 또 문공부에 월간중앙을 한동안 발행하지 않고 중단하겠다는 휴간계를 제출하기도 했다.

무성한 소문 뒤 사직서 강요 

이들 4명 가운데 문제의 특집을 기획하고 좌담을 진행한 강희경 기자는 입사한지 1년도 채 안 된 상태였다. 따라서 월간중앙의 모든 원고검열 책임은 강 기자가 도맡다시피 하면서 시청 검열단을 출입하곤 했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년 전 입사한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미혼(未婚)의 가장(家長)이었다.

7월 중순 회사 측은 모든 사원들에게 사표제출을 강요했다. 기자직 말고 일반 영업직 사원들에게도 사표를 강요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날짜는 조금씩 달랐지만 편집국과 보도국, 편성국과 출판국 등 각 파트별로 소속 사원들에게 미리 인쇄된 사직서 용지가 한 장씩 배포되었다. 거기에는 각자의 소속과 이름만 적어내면 되도록 사직서 요건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었다. 부장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신군부의 지시에 따른 요식 행위일 뿐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써서 내라’고 말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사태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 무렵 언론사 주변에는 신군부의 노선에 반대하는 기자들은 몇 명이고 자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유포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심리전으로 당국은 언론사를 출입하는 기관원들을 통해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협박성 유언비어를 적절하게 흘리고 있었다.

이를 통해 당국은 기자들의 투쟁의지를 꺾고 신분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해 나가는 수법으로 외압을 강화시켜 나갔다. 특히 광주상황이 계엄군에 의해 강제로 진압된 5월 27일 이후 6~7월 두 달간은 끊임없는 유언비어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마침내 문제의 사직서가 배포됐다. 용지를 받아든 기자들은 잠시라도 고민을 해 보거나 주위 동료들의 눈치를 살피는 제스처 같은 것도 없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신속하게 빈 칸을 매웠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왜 사표를 써야하는지 묻거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각자는 그랬을 것이다. ‘설마 이렇게 강요된 사직서가 나중에 무슨 효용이 있을까’라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모두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단 부장의 말을 믿고 대부분의 사원들이 사표를 제출했다. 물론 이런저런 사유로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는 경우(이병효 PD)도 없지 않았지만 그건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중앙매스컴 기자, PD 등 33명에게 사표수리가 통보된 날은 그해 7월 31일이었다. 대부분 검열거부와 제작거부에 적극 가담했거나, 광주취재를 다녀왔거나, 좌경용공 등의 혐의가 있거나 하는 등이 강제해직의 사유였다. DJ와 지역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해직자 명단에 낀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발표할 때는 국시(國是)부정, 금전문제 또는 비리연루 등의 혐의를 끼워 넣기도 했다.

7월31일자로 사표가 선별 수리된 33명에 이어 8월말엔 제작거부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기자들도 삼성 관계사로 전배 조치됐다. △삼성전자 홍보실(이순동, 이헌익) △그룹 비서실 홍보팀(최승호, 권오중) △동방생명 홍보실(김창회) △신세계 홍보실(도성진) 등 주로 삼성계열 홍보실로 전배됐다.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직되진 않았지만 이들은 본의와는 무관하게 회사에 의해 인사조치된 경우로, 이들 중 이순동, 최승호를 제외한 4명은 나중에 중앙일보로 복귀했다.

대부분 생계 곤란, 일부는 해직사실 숨기기도

또 그해 11월 언론통폐합 조치로 중앙언론사의 지방 주재기자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많은 지방주재 기자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거리를 헤매게 됐다. 기자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정교용(월간중앙) 기자는 회장단이 대부분 유고상태가 되자 혼란에 빠진 기협을 혼신의 노력으로 수습했다. 그러던 중 임기만료 다음날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해직된 동료들과 행보를 같이 했다.

강제 해직된 사람들은 대부분 입사 10년 미만자들로 생계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해직 초기에는 대개 가족에게 차마 해직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매일 평소와 같이 출근(?)을 하는가 하면 시내에 나와서는 삼삼오오 모여 극장 조조(早朝) 관람이나 기원(棋院)을 돌며 시간을 때우기 일쑤였다. 얼마 후에는 어학원에 등록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원고를 쓰거나 출판사 주변에서 소일거리를 찾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다가 1, 2년 후부터 각자 새로운 일거리들이 생기면서 최소한의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일부는 삼성이나 대우 같은 대기업으로 가기도 했고 어떤 경우는 조그만 자영업을 시작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서 각자는 언제 올지도 알 수 없는 복직에 대한 꿈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렇기를 무려 7년, 그러니까 1988년 3월 노태우 정부 출범과 함께 복직이 이뤄질 때까지 각기 낯 선 곳에서 그 나름의 삶을 영위하며 지냈었다. 다음은 중앙매스컴 33명의 해직자 명단.

◇중앙일보=△김승한 주필 △김동호(편집부) 차장 △전택원(외신부) 기자 △박준영(사회부) △전희천(경제부) △김원태(정치부) △방인철(문화부) △이흥재(외신부) △최형민(사회부) △김송번(편집부) △최돈오(편집부) △허 술(출판국) △유병무(출판국) △이춘욱(출판국 문예중앙) △정연수(출판국 여성중앙) △신상범(제주주재) △김태균(경주주재) △황영철(광주주재) △이근성(이리주재) △탁경명(장성주재) △김경렬(청주주재) △조광희(원주주재) △김형배 (마산주재) △최근배(청주주재) 등 24명

◇동양방송(TBC)=△한종범(편집제작부) △황용복(외신부) △정홍렬(외신부) △오흥진(대구주재) △김준범(편집제작부) △남성우(편성국 PD) △정 훈(편성국 PD) △이병효(편성국 PD) △허 환(라디오 편성부장) 등 9명 (끝)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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