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언론보국’으로 ‘천황 폐하께 충성’(2)

- 조선일보 대해부 16장(2)

기사승인 2018.02.14  11:56:25

공유
default_news_ad2

‘적화 방지, 공산주의 배격에 공동전선을’

1938년 8월 31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에 실린 사설(「조선방공협회 조직」)은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공동으로 ‘방공(防共)전선’을 결성한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소화 11년 (서기 1936년) 11월 일독(日獨)방공협정의 성립을 본 후 1년을 지나 작년 11월에는 다시 이 협정에 이탈리아가 가입하게 되었다.
그래서 ‘갖지 못한 나라’로서 공통한 입장에 있는 일독이 3국은 구아(毆亞)를 연락하는 적화(赤化)의 방지, 공산주의 배격에 공동전선을 펴게 되었는데, 저간這間) 그 실행방침도 결정되어 일간 방공칙임관의 주재(駐在)를 보게 되었으며 또한 국내적으로도 내무성에서는 이 선에 따라서 여러 가지 입법을 실시하여 만전을 기하고 있는 터이거니와 조선총독부에서도 지나사변 발발 이래 국제정세가 매우 험악하여 자칫하면 혼돈한 상태를 초래할 염려도 없지 아니함에 감(鑑)하여 특히 적화사상 대책에 대하여는 심심한 연구를 거듭하여 오던 바인데 금 30일로써 드디어 조선방공협회의 조직을 발표하였다. 근래 조선에는 공산주의자로서 과거의 과오를 깨닫고 감연히 전향한 자의 수가 적지 않으나 그러나 왕년의 맹렬하던 여진(餘震)이 아직 완전히 근절된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운 터인즉 이와 같은 기구를 설치하여 만일이라도 아직 그 과오를 청산치 못한 자가 있다고 하면 그 반성을 촉하여야 할 것이며 또한 그와 동시에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적극적으로 방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장기전 하에 있어 만일에라도 이 사상이 침입되어 총후국민을 교란하는 일이 있다고 하면 이야말로 예측을 불허하는 험악한 상태에 빠질 것이다. 더구나 소화 10년 코민테른 제7회 대회에서는 종래 적으로 취급하던 민주주의적 경향을 띤 제 단체와 인원을 전부 인민전선이라는 명칭 하에 총합하여가지고 그 전법(戰法)을 변경하고 전진(戰陣)을 확대한 이후에는 구주와 아세아를 구분할 것 없이 그 사상의 만연을 보게 되었다. 아국에서도 내외지를 막론하고 그 영향이 적지 않았는데 (…) 지나사변이 발발하자 그 영자(影子)를 감춘 것이다. 이래 당행(當行)히 이런 차종(此種) 사건의 발생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거니와 그렇다고 전연 근절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매 이때에 한층 더 방침을 강구하여 미몽에 깨지 못한 자의 각성, 국외로부터의 침입을 방지하는 것은 장기전 하인 까닭에 한층 더 절실히 요구되는 정책이라 할 것이다.

전체주의국가인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은 공산주의자들을 가장 경계하면서 혹독하게 탄압하고 있었다. 조선일보의 이 사설은 일제의 ‘방공(防共) 정책’이 외부와 내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당연히 조치라고 옹호하고 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중심인 코민테른의 정치적 지도를 받아 ‘민족 해방’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주하는 원산지역에서 적색노동조합을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 다른 사태 발전도 주목할 만하다.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 사건의 핵심인물인 이재유의 친구 이관술은 1937년 자기 누이동생과 함께 콩그룹을 조직했다. 콩그룹의 조직책인 김삼룡이나 출옥 후 콩그룹의 지도자가 된 박헌영 등 이 조직의 인물들은 훗날의 공산주의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이 콩그룹은 화요회파, ML파, 상해파 등 과거의 거의 모든 파벌에서 정예분자를 흡수했다. 그러나 이 운동 역시 일제경찰의 탄압에 쓰러지고 만다. 1940년 12월 서울에서 일련의 검거가 단행되었고, 잔여 지도자들은 1941년 6월 함경도에서 검거되었다. 이 해 10~12월, 마침내 모든 활동은 종식되었다(스칼라피노·이경식 공저, 한홍구 옮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 돌베개, 1986, 269쪽).

조선일보는 10월 2일자 석간 사설(「전시 경제 통제의 금후 진로」)을 통해 ‘지나사변’이 종결되더라도 ‘아국’은 자유주의경제로 되돌아 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구(漢口) 함락을 목첩지간에 두고 일부에는 경제통제가 이것을 계기로 다시 자유주의경제로 환원될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없지 않아 전염을 불긍(不肯)하는 경향까지 있다. 그러나 이는 장상상(藏商相)이나 육상(陸相)의 언명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인식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지나라는 곳은 소련의 공산주의와 영국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경쟁장으로서 지나가, 소영 하자(何者)의 실력 하에 있게 되든 동양 영원의 평화를 목적하는 아국으로서는 단호 퇴치하여야 할 대(大)사명 하에 성전을 시작한 이상 한구 함락 후 설령 전투행위가 일단락된다고 즉시로 만사가 해결되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목적을 달성할 때가 아니면 진정한 의미의 사태 종결이라 할 수 없고 또는 사변이 종결된다 하더라도 세계의 군비 경쟁이 더해가는 한 아국의 경제통제는 결코 완화되리라고 볼 수 없으며 이런 정세 하에서 자유주의로 복귀될 것을 꿈꿀 수 없는 것이다. (…)
현행 전시경제통제는 단기의 물자부족대책을 근간으로 한 것이나 장기적 전시 건설로 재편성하여야 할 것이다. 또 소비제한, 배급통제의 목적은 일정한 물질의 효력을 가장 유효하게 국력 발전을 위하여 사용함에 있는 것이요 절약 때문의 통제, 물자 제한 때문의 통제에 있는 것이 아니다. (… 특히 경제경찰은 직접 민중과 접촉하는 것인 만큼 전시통제에 대한 인식을 충분히 하며 경제사정에 통감(通鑑)하여 민으로 하여금 불평을 품게 하지 말고 전시경제 취지를 철저케 하도록 지도에 노력하여 전시경제 운용에 만 유감이 없도록 하기를 조선서도 경제경찰이 설치되는 오늘에 당하여 특히 바라는 바이다.


‘아(我)의 개가, 피(被)의 만가’

10월 28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은 ‘무한삼진(武漢三鎭) 완전 공략’에 관한 기사로 뒤덮였다. 무한은 중국의 호북성과 화중(華中)지방의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였다. 양자강과 그 지류인 한수(漢水)의 합류점에 있는 무한은 양자강 우안의 우창(武昌), 한수 이북 좌안의 한구, 한수 이남 좌안의 한양 세 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오랜 옛적부터 이 지역을 ‘무한삼진’이라고 일컬어 왔다.
조선일보는 일본군이 그 지역에서 거둔 승리를 흥분한 어조로 보도했다.

아의 개가(凱歌), 피의 만가(輓歌) / 장 정권 어시호(於是乎) 몰락 / 무한삼진 몰락의 중대 의의

(상해 27일 발 동맹) 항일 장 정권 최후의 거점인 무한은 마침내 10월 27일로써 아군의 수중에 귀(歸)하였다. ‘무한 함락!’ 장 정권은 이날로써 명실(名實) 모두 일 지방정권에 전락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등(我等)의 승첩의 개가는 즉 피등(彼等)의 만가다. 금일까지 항일세력의 제 요인이었던 항일 군대의 잔존(殘存)민족의 항일적 단결에 관한 열국(列國)의 원조 등은 무한 삼진 함락을 계기로 하여 일대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무한삼진은 고래(古來)로 ‘구성(九省)의 회(會)’라고 호칭된 중부 지나 유일의 상부지(商埠地)이며 군사적으로는 ‘형초(荊楚)는 천하의 중진(重鎭) 병가필쟁(兵家必爭)의 지(地)’라고 한 만큼 그 함락은 (…) 북지 각 지방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중심 관절을 실(失)한 분산적 토지로 전화(轉化)케 함을 의미한다.

이 기사 바로 옆에는 「성상(聖上) 폐하 어만열(御滿悅)」이라는 상자기사가 자리잡고 있다.

(동경 전화 동맹) 27일 오후 5시 30분 무한삼진 완전 공략 공보(公報)는 대본영으로부터 즉시 우사미(宇佐美) 시종무관장을 통하여 대원수 폐하께 주상(奏上)한 바 황공하옵게도 폐하께서는 별(別)히 어만열하옵시며 황군의 빛나는 전승(戰勝)을 어가상(御嘉賞)하옵시와 우사미 무관장에 대하사 여러 가지로 감사하온 말씀을 사(賜)하옵셨다고 배문(拜聞)된다. 황공하옵게도 지난 여름 7월 7일 사변 발발 이래 1년유4개월 폐하께옵서는 (…) 시국에 어진념하옵시사 동양 영원의 평화 극복을 위한 제국 부동의 대방침을 분부하사 어굉락(御宏樂) 완성에 황군을 어통수하옵시면서 만기어친재(萬機御親裁)에 오직 어정려하옵시는 대어심(大御心)을 봉찰(奉察)하고 무관장은 공구(恐懼)감격리에 어전을 퇴하(退下)하였다.


일본 수상 고노에의 ‘역사적 사자후’를 앵무새처럼 중계

11월 4일자 조선일보 석간 머리기사(「인적 구성 변개(變改) 시엔 / 국민정부라도 용납 / 신동아 건설 홍업(鴻業)에 대하여 / 고노에 수상의 역사적 사자후」)는 다음과 같다.

(동경 전화 동맹) 고노에(近衛) 수상은 3일 오전 9시 15분부터 AK의 마이크를 통하여 정부 성명의 내용을 부연하고 제국이 취할 방향을 국민에 전하여 정전(征戰)의 목적을 달성코자 시국에 처하는 국민의 깊은 이해와 인식을 요망한 바 방송 내용은 아래와 같다.
금일 명치절을 봉영(奉迎)하고 명치천황의 성덕(聖德)을 회상함에 제하여 천황의 어위업(御偉業)인 동양평화의 확립에 관한 정부의 소견을 개진함은 나의 가장 큰 광영으로 여기는 바이다. 지금 광동 함락에 계속하여 지나 내지의 심장인 한구도 역시 아군의 수중에 속한 결과 근래 지나의 전 기능을 지배하는 7대 도시의 전선(全線)을 보유하는 방대한 지구 즉 소위 중원(中原)은 완전히 일본군의 수중에 입(入)하게 되었다. 중원을 제(制)하는 자 즉 천하를 제한다. 장 정권은 이미 사실에 있어서 지방정권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일방에 있어서 일본은 외부로부터 간섭을 배격할 충분한 정예적 전투력을 보유하고 여유 도도히 이 전과를 획득한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폐하의 어능위(御稜威) 하에 충용한 장병이 분투한 결과의 소득으로 일본국민의 감격은 비유할 것 없을 만치 고조(高潮)에 달하였다. 이 광휘 있는 전과를 생각함에 당하여서도 국민의 감사는 무엇보다 먼저 수만의 전몰자와 부상자에게 바치지 않아서는 안된다 할 것이다. (…) 아(我) 일본이 진실로 희망하는 바는 지나의 멸망이 아니요 지나의 흥륭이다. 일본국민과 동양인으로서 자각한 지나국민이 호상 제휴하여 진실로 안정한 동아의 천지를 건설하기를 욕망하는 바이다. (…)
만약 광동, 한구 공략을 일(一) 전기로 태평시대가 도래함과 같은 사상을 포회(抱懷)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이런 자는 금차 사변의 중대 의의를 이해치 못하는 자로 천하에 이 이상 위험한 생각은 없는 것이다. 신동아를 건설할 일본은 그 국민생활의 신분야에 있어서 신창조시대에 들어간 것이다. 이 의미에서 진정한 전쟁은 지금 시작된다. 진실로 위대한 역사적 국민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상하 일치하여 앙고(昻高)한 신념과 결의로써 내외의 정비 건설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일본 행정부 수반인 수상 고노에가 침략전쟁을 ‘동양 평화의 확립’을 위한 위업으로 미화하면서 중국의 멸망이 아니라 중국의 흥륭을 진심으로 희망한다고 거짓말을 나열한 방송 내용을 조선일보는 앵무새처럼 충실하게 전달했다.

그 기사와 같은 면에 실린 사설(「동아 신질서의 건설 / 제국 불퇴전의 응징 성명」)은 고노에의 방송 내용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 제국의 차거(此擧)는 지나의 영토적 점령에 있거나 약자 압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용공항일을 일삼아 일만지(日滿支) 협력을 거부하는 국민정부의 응징에 있다. 그러므로 국민정부가 아직까지 용공항일책을 버리지 않고 항일용공을 지속하는 한 중경, 곤명에까지라도 추격을 멈추지 않으나 정책을 고쳐 일만지 협력을 서약하고 용공항일을 버리고 항일용공분자를 국민정부로부터 축출한다면 국민정부와 악수함도 불사한다 함이니 종래의 장 정권을 상대치 않는다는 성명과 표면 상이한 듯하나 근본적 불퇴전의 방침에는 소허(少許)도 변개가 있는 것이 아니다. (…)
 국민정부를 지배하는 수뇌부에는 의연히 장기집권을 함으로써 제국의 재정적 위기를 초래할 것을 몽상하는 이가 많고 이것을 선동하는 영불미소의 열강이 배후에 있다. 그러므로 국민정부의 수뇌부로 하여금 종래의 인식을 달리하게 하고 열강으로 하여금 그 무식을 느끼게 하는 것이 제국의 외교적 수완에 있거니와 그리하여 실력을 배경으로 한 군사적 행동을 계속할 뿐 아니라 타방 정치가, 외교가 내지 국민 전부가 외교가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그 미몽을 깨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산당과 합작한 중국의 국민정부를 향해 “항일용공을 포기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중국 전체를 일제의 손아귀에 넣어주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조선일보의 이 사설은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이 ‘무식’해서 국민정부의 항일용공을 배후에서 선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제가 주권국가인 중국 땅에서 무자비하게 자행하고 있는 살육과 약탈을 ‘민족언론’이라는 조선일보가 찬양하거나 비호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정신 작흥(作興)’의 나팔수가 된 조선일보

1938년 1월 8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에 실린 사설의 제목은 「국민정신작흥주간 / 실천 궁행(躬行)으로 행사를 실시하라」이다.

 지난 7일부터 전시 하에 국민정신작흥주간은 시작되었다. 조서환발(詔書渙發)기념일인 11월 10일을 중심으로 하고 전후(前後)의 1주간을 국민정신작흥주간으로 정하고 각종 행사를 실시하여 온 것은 누구나 다 잘 명기(銘記)하고 있는 바로 이미 연중행사의 한 가지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금년의 이 국민정신작흥주간은 특별히 의의가 깊은 바가 있으니 그것은 곧 지나사변이 이미 15개월을 경과하고 한구 함락 후에 일본제국 정부의 방침이 확립되어서 고노에 수상으로부터 이것을 중외(中外)에 성명한 바가 있으므로 국민이 지향할 바가 명확하여졌고 더욱 국가의 총력을 경도(傾倒)하여서 장기건설과 사변 처리에 매진치 아니하면 안 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제회(際會)하여 일반국민은 굳은 결의와 철저한 각오로 극기정려(克己精勵)하고 근로보국에 성(誠)과 역(力)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당국에서 이 1주간 행사를 각일마다 배정하고 이것의 실행을 철저케 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황군감사, 근로보국, 자원애호, 시국재인식, 극기정려, 가정보국, 체력향상의 각 항 행사를 여러 날 실시하기로 된 것이다. 사변 중에 있는 정신작흥주간 행사로서 가장 적의(適宜)한 내용을 가진 것은 우리의 췌언(贅言)을 불요하는 바요 요는 일반국민이 이 주간의 근본의의를 요해(了解)하고 실질궁행(實質躬行)으로 실행하느냐 또는 객관적으로 피상적으로 지내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
 (…) 당국의 지도사항이라고 하여서 외면으로 순종하고 ‘하라는 것이니까 하지’라는 마음으로 이 주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적의한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행사가 행사에만 그치지 않고 그 효과가 저현(著現)하여야 될 것이므로 일반국민이 성심성의로 각항 행사를 철저 실행하여야 할 것이요 그러자면 이 주간행사에 대하여 그 근본의의는 물론 실행방법 등에 이르기까지라도 일반민중에게 철저화하여야 할 것이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원하던 민중은 이런 사설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총독부가 정한 ‘국민정신작흥주간’에 경건한 마음으로 ‘황군에게 감사를 드리고’, ‘열심히 일해서 대일본제국에 보답하며’, ‘모자란 자원을 아껴쓰고’, ‘시국이 절박함을 다시 깨달으며’, ‘참을성 있게 정성으로 일하고’ ‘체력을 더 키우겠다’고 결심했을까?


조선일보, 불교계를 준엄하게 꾸짖다

1938년 12월 1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에는 불교계의 타락을 가차없이 비판하는 사설이 실렸다. 「불교계에 고함/ 사찰 신설 금지에 제(際)하여」가 바로 그것이다.

근세에 있어 조선 불교계의 타락은 실로 심한 바 있어 사찰이 주수청루(酒樹靑樓)와 다름이 없이 난잡한 곳도 있고 승려가 속인보다 모리(謀利)와 탐재(貪財)에 급급한 자 적지 않으니 대(代)를 석가에서부터 따지고 몸에 가사를 걸었을 뿐이지 그러한 무리를 어찌 여래의 종도(宗徒)로 부르며 그런 무리의 집합지를 어찌 사원이라 부를 것인가. 한양조 5백년 간 불교가 지배계급으로부터 배척됨에 따라서 승려가 천인(賤人) 부류에 속하여졌으므로 그들의 대다수는 자연히 종교가의 자존심을 잃고 천인의 비굴한 근성을 가져왔다고는 하지만 명승거석(名僧巨釋)이 끊이지 않아서 불교계를 빛내고 있는데 오늘날은 그들의 지위가 향상되고 대우가 개선됨에 불구코 어째서 그들 자체는 좀 더 종교가다운 처신을 가져주지 못하는가. 근교나 각 지방의 사찰을 돌아볼 때마다 조선의 불교를 위하여 우리는 실로 개탄함을 마지않아 왔다. 그들이 끝끝내 자중치 못하는 때는 법령으로써도 어떠한 정도의 제재를 요하는 바가 아닐까고 생각한다.
몇 해 전부터 당국에서 근교 사찰에 대하여 음식영업을 금지시키는 동시에 그 경내에 있어서 일체의 난잡한 행동을 취체하기로 된 것은 불교 정화를 위하여 마땅한 처사이거니와 명년도부터 전 조선에 대하여 사찰의 남건(濫建)을 절대 불허키로 된 것도 그 역시 불교 정화에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
(…) 일체 청정을 요체로 삼는 불가인지라 그들은 산중에 사찰을 세워서 처세의 속연(俗緣)을 멀리하여 온 것이 아닌가. 법령으로써 그들의 타락을 광정(匡正)코자 하는 오늘이니 그들의 타락을 그들이 무슨 말로써 변해(辨解)하려는가. 불교도 된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자기네의 과오를 뉘우치고 진실한 귀의를 도모하여 청정한 불문(佛門)을 행여 더럽히지 않도록 성심성의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종교로서의 불가를 풀어내고 그래서 종교가로서의 자기네들의 권위를 지키고 그래서 더 전일(前日) 불교의 빛난 역사를 후속(後續)하여 주기 바란다.

사설은 신문사의 공식 견해를 지면을 통해 발표하는 것이다. 사설은 무기명(無記名)으로 나오지만 내용에 대한 최종 책임은 발행인과 편집인에게 있다. 조선일보의 발행·편집인과 이 사설 집필자는 불교계의 타락을 준엄하게 꾸짖을 수 있는 도덕성과 윤리를 갖추고 있었던가? 사주인 방응모 자신이 친일행위에 앞장서고 그가 경영하는 신문은 날마다 ‘천황 폐하’의 ‘성덕’을 칭송하거나 ‘황군의 승전’을 축하하고 있으면서 불교계 일각의 타락을 비난하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이성과 양식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사설의 자가당착과 후안무치함을 당장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사설은 총독부가 사찰 신설을 금지한다고 발표한 직후에 나왔다. 지배세력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옳다고 지지하던 조선일보가 총독부 정책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불교계의 타락을 극대화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3
default_nd_ad5
default_news_ad4
default_nd_ad3
default_news_ad5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