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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북행과 단독선거 저지 실패

- 조선일보 대해부 2권-9장

기사승인 2018.07.11  11:4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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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무장봉기가 시작된 뒤 미군정과 조선경비대, 거리고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제주도가 피바다로 변하고 있던 시기에 언론의 눈길은 그 엄청난 비극보다는 김구와 김규식의 북한 방문 문제에 쏠려 있었다.


김구, 온갖 반대를 물리치고 38선을 넘다

3월 25일 밤 평양방송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파에 실어 보냈다.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가 남조선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한 것과 남조선의 단선·단정에 반대함으로써 조선의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한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열 것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남조선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는 참석하여 달라.”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방송을 통한 북의 제의에 대해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남북회담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4월 1일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남북회담 문제는 소(蘇) 정책을 아는 사람은 다 시간 연장으로 공산화하자는 계획에 불과한 것으로 간파하고 있는데, 한국 지도자 중에서 홀로 이것을 모르고 요인회담을 지금도 주장한다면 대세에 애매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우사연구회 엮음, 서중석 지음,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 협상-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한울, 2000), 183~184쪽에서 재인용).

미군정을 이끌던 존 하지를 비롯해서 군정장관 윌리엄 딘 등이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참가 결정을 냉소에 붙이면서 ‘착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자 “행동을 보류하고 추후에 떠나겠다”고 밝힌 김규식과 달리 김구의 태도는 단호했다.·
조선일보 4월 17일자 1면 머리에는 「불귀(不歸)의 각오로 북행 / 김구 씨의 결의 비장!」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부제목은 「외세 의존을 배격 / 자력독립의 길뿐」이다.

2, 3일 간에 북행할 것으로 보이는 김구 씨는 15일 밤 기자 초대연 석상에서 남북협상에 임하는 심경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미·소공위나 그리고 유엔까지도 조선 민주독립에는 실망 이외의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나는 이 이상 외국인에게 희망을 가질 수 없으므로 죽으나 사나 말과 피가 같은 동포끼리 마지막으로 내 일을 하여 보자는 것이다. 회담의 성과에 관하여서는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을 것이며 반드시 뚜렷한 성과를 가지고 오겠다고 단언하기 어려움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남북에서 각각 정부가 선다면 국토는 영구히 분할될 것이며 또 명칭이야 어떻든 남조선에 수립될 단정(單政)은 불구자밖에 안 된다. 이것을 어찌 우리 자손에게 넘겨줄 수 있겠는가. 나는 일신의 영화(榮華)의 길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는 금차 이북행에 있어서 사실은 나의 운명까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며 이것은 이번 김은황 문제에 아무 관계 없는 나를 출정(出廷) 시켜 증인커녕 죄인 취급하다시피 한 것으로 보아도 잘 안다. 내가 북행 전 대개 추측할 수 있는 있는 바와 같이 5월 10일의 선거 전후 무슨 폭동이나 일어난다면 그 책임을 나에게 뒤집어씌울 것이 뻔하다. 나는 시시로 나를 구박하려는 손이 있다는 것도 또 점차로 험악해지는 나의 신변의 위험성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70 평생을 두고 그래도 조국 독립에 몸을 바쳤다는 나로서 조국이 절벽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북선(北鮮)에서는 김구가 김일성 장군에게 항복하러 온다든지 또 조선 분열의 책임은 반탁자(反託者)에 있다든지 여러 공격이 많이 있으나 나 역시 할 말이 없지도 않으며 내가 이런 서한을 보내되 외인이 먼저 알게 될 것이므로 다만 좋은 말만 써서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주의가 다르다 할지라도 같은 조상과 같은 말과 같은 피를 가진 동족들이 서로 만나서 하면 무엇이든지 될 줄 알고 마지막 길을 떠나려는 것이다. 만약 못 돌아오게 되더라도 민족과 독립을 위하여 마지막 길을 갔노라고 여러분이 써주면 감사하겠다. 

김구의 북행 결정을 극렬하게 비난하던 동아일보와 달리 조선일보는 객관적으로 기사와 논평을 내보냈다. 김구는 4월 19일 평양을 향해 떠났다. 그날 아침 김구의 거처인 경교장 주변은 북행을 막으려는 군중으로 에워싸였다. 우익 청년단체와 학생들, 기독교인들, 월남한 사람들이 길을 막자 김구는 “38선을 베고 죽을망정 가야만 한다”고 외쳤다.
조선일보는 4월 21일자 2면 머리에 김구의 북행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민족 원한의 38선 / 김구 씨 무사 통과 / 영식(令息)·비서만 데리고 일로 평양에

(38선에서 최성진 특파원 발 전[電]) 김구 씨는 홀연히 19일 낮 기웃해서 아침부터 북행을 만류하는 학생군에게 “가야만 하겠다”고 노기 어린 일성을 남긴 직후 경교장 뒷문으로 비상 대기했던 차에 올라 부랴부랴 평양으로 떠나고야 말았다.
‘서울 2253’ 호송용차 뒷자리 오른편에는 영식 신(信) 군, 왼편에 선우진 군 다 두 사람이 수행했을 뿐 일로 38선을 향하여 의주로 통하는 대로를 달렸다. 저녁 6시경 씨는 개성을 통과하여 마침내 38선에 이르렀다. 경찰지서에서 기장(記帳)을 마치고 나서 씨는 뒤를 따라간 기자들을 돌아보며 “어떻게들 알고 왔소”라고 미소를 띠며 사의를 표하였다. 신 군은 만류하는 학생들 성화에 손수건 하나 못 들고 떠났다고 하였다.
사진반의 청으로 석양을 등지고 나와 서는 씨의 표정은 비장한 가운데도 어딘가 희망에 넘 치는 구석이 보였다.
이윽고 씨의 자동차는 지긋이 움직이며 글자조차 희미한 38선 표목을 지나 저물어 가는 바로 맞은 편 어현 정거장으로 점점 멀어져 갔다. 우리의 뜻이 아닌 국경의 철로 위에 신호등 불빛 한 점이 저도 모르는 향수를 자아내게 하였다.

조선일보 22일자 1면 머리기사(「김 박사도 작일 북행 / 일행 20여 명 동시 출발」)는 “남북 협상에 참가 여부가 주목되어 오던 김규식 박사가 21일 오전 6시 반경 일행 20여 명을 대동하고 발정(發程)하였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 바로 밑에는 「38선의 존속은 부당 / 김구 씨 평양에서 제일성」이라는 기사가 자리 잡고 있다. 김구는 평양에 도착한 뒤 아래와 같은 결의와 포부를 밝혔다. “위도(緯度)로서의 38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양단(兩斷)하는 외국 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족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현하 민주자주의 통일을 전취(戰取)하는 단계에 처해 있다. 우리에게 통일독립이 없이는 세계의 평화도 없을 것이다.”


돌아온 김구 일행, 단독선거 저지에 실패

조선일보는 4월 23일자 1면 머리에 올린 「남북협상 수(遂) 개막 / 대표 545명 참가」라는 기사를 통해 “확실한 보도에 의하면 남북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는 4월 19일 오후 6시 김일성 씨 사회 하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각당 각 단체 대표 545명 참석 하에 개막되었다”고 보도했다. 참가단체는 남로당, 인민공화당, 민주독립당, 사회민주당, 신진당, 민주여성동맹, 민중당, 전민, 전평, 근로인민당, 문화단체총연맹 등이었다.

이 기사 바로 옆에는 AP통신 서울특파원이 ‘미국 측’의 정보를 인용해서 쓴 추측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그 요지는 “1)평양회담에서 헌법을 채택하고 김구 씨를 대통령으로 하고 김규식 씨를 입법원의 의장으로 하는 전조선정부를 선포하는 동시에 미·소 양군의 동시 철퇴를 요구하며 2)양 씨를 남조선으로 보내어 유엔 감시 하에 미국 승인 하에 실시되는 5월 10일의 남조선 총선을 즉시 연기시킬 것을 역설케 하는 동시에 남조선 지도자의 남북 정치인의 회담 계속 요구가 수반”되리라는 것이었다. 이런 보도가 허망한 추측에 불과했음은 그 이후의 역사가 입증한 바 있다.

남북 요인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4월 26일부터 30일까지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 이 정치회담에서는 8·15 이후 처음으로 죄악과 우익, 중도파 인사들이 합석해서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5월 6일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조선일보 5월 7일자는 1면 머리기사로 그 내용을 보도했다.

통일 기초는 전정(奠定) / 애국동포의 단결 끽긴(喫緊) / 김구, 김규식 양씨 공동성명

(…) 성명서 내용
금반 우리의 북행은 우리 민족의 단결을 의심하는 세계 인사에게는 물론이요 조국의 통일을 갈망하는 다수 동포들에게까지 금차 행동으로써 많은 기대를 이루어 준 것이다. 그리고 남북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며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는 우리 민족도 세계 어느 우수한 민족과 같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서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행동으로써 증명한 것이다. 이 회의는 자주적 민주적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서 남조선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미·소 양군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확언하였다. 이것은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적 신발전이며 우리에게 큰 서광을 주는 바이다. 더욱이 남북제정당사회단체들의 공동성명서는 앞으로 양군 철퇴 후 전국정치회의를 소집하여 통일적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우리 민족통일의 기초를 전정할 수 있게 하였으며 자주적 민주적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였으며 외력의 간섭만 없으면 우리도 평화로운 국가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여하한 험악한 정세에 빠지더라도 공동성명서에 표시된 바와 같이 동족상잔에 빠지지 아니할 것을 확언한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것이니 우리가 이것으로써 만족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거두어진 성과를 가지고 최후의 성공을 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애국동포 전체가 일치하게 노력하는 데 있을 뿐이다.

김구와 김규식의 공동성명서는 남북회담이 성공했다고 단언하면서 ‘통일조국’을 이룰 전망이 밝아졌다는 확신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믿음일 뿐 그 이후 남과 북의 상황은 그들의 소망과는 정반대로 치달았다.

장덕수 암살 전까지 극우 노선을 걷던 김구가 좌우를 초월하는 통일론자로 탈바꿈하면서 외세를 배제한 독립국가 건설과 국토의 통일을 주창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자기 혁신이었지만, 미국의 주도로 기정사실화한 남조선 단독 총선거를 저지하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다.


부정과 폭력으로 얼룩진 5·10 총선거

1948년 5월 10일로 정해진 총선거를 앞두고 3월 29일부터 4월 9일까지 열흘간의 유권자 등록기간에 전체 유권자의 79.7%인 780만여 명이 선거인명부에 등록했다. 4월 말 언론에는 “약 500여 명을 인터뷰한 결과 91%가 등록을 강요당했다”고 보도했다.

4월 28일 유엔임시위원단은 투표자 등록에서 드러난 부정행위를 지적했다. 총선거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가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조직은 항토보위단(향보단)이었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5·10 총선거를 앞두고 미군정장관 딘의 지시에 따라 1백만 명 규모의 향보단을 조직했다. 전국 3만여 명의 국립경찰만으로는 1만3천여 곳에 이르는 투표소 경비가 불안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만 18세 이상 35세 이하 남성 모두가 향보단에 편성되었다. 총선거가 끝난 뒤인 5월 13일 유엔임시위원단은 “금번 선거는 일부 세력이 불참하였고 향보단이 투표소를 감시한다는 명목 하에 자유분위기를 파괴하였으므로 본 선거효과에 대하여서는 (판단을) 보류한다”고 발표했다가 번복한 바 있었다.

향보단과 함께 불법과 탈법 행위를 저지른 단체는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이었다. 1946년 10월 9일 이범석을 중심으로 조직된 극우 성향의 족청은 ‘국가 지상, 민족 지상’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3백여 명의 단원으로 출발했으나 1947년 11월에는 30만여 명을 거느린 거대 조직으로 컸다. 미군정은 족청을 동원해서 유권자들에게 선거인 등록을 강요하도록 하는 한편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총선기간에 조선일보뿐 아니라 보수적인 언론은 그런 불법과 부정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200명(제주도 2명은 4·3사건으로 유보)의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에는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을 비롯해서 좌익과 중도의 여러 정당이 불참했기 때문에 우익을 대표하는 한국민주당이 압도적 우위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런데 많은 유권자들이 외면하던 한민당은 91명의 후보를 내고 겨우 29명을 당선시켰다. 이승만을 추종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가 55석으로 정치조직으로서는 가장 많은 당선자를 냈다. 무소속 당선자는 85명이었는데, 그 가운데는 한민당이나 독촉 소속이지만 무소속으로 위장한 후보가 다수 있었다고 한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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