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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폐간과 조봉암 사형

- 조선일보 대해부 2권-19장

기사승인 2018.09.18  15: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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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4월 30일 이승만 정부는 경향신문을 폐간했다.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6일 천주교 서울교구(교구장 노기남 주교)가 창간한 신문으로서 폐간 당하던 때 겨우 ‘13세’였지만 영향력은 막강했다. 당시 20만부를 발행하던 경향신문은 동아일보(35만부)에 이어 일간신문들 가운데 2위를 달리고 있었다. 3위는 한국일보(16만부), 4위는 조선일보(10만부)였다(동아일보사, <민족과 더불어 80년: 동아일보 1920~2000>, 동아일보사 발행, 2000, 335쪽).


이승만 독재에 정면으로 맞선 경향신문

창간 직후부터 중도적 노선을 걷던 경향신문은 이승만의 독재정치가 갈수록 심해지자 비판적 논조를 강화하면서 반독재적 기사와 논설을 싣기 시작했다. 특히 천주교 신자인 장면이 부통령으로 취임한 지 한 달쯤 지난 1956년 9월 28일 저격을 당한 사건은 경향신문이 논조를 더욱 강경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 장면은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연설을 하고 연단을 내려오다가 김상붕이 쏜 총탄에 왼손을 관통당했다.

김상붕의 배후는 민주당원 최훈으로 밝혀졌다. 치안국장 김종원은 이 사실을 근거로 장면 피격사건을 ‘민주당의 내분’으로 몰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사건 수사 과정에서 경찰 하급 간부들은 물론이고 내무부장관 이익흥과 치안국장 김종원까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960년 4월 혁명 뒤에 밝혀진 진상을 보면, 이 사건의 주모자들은 자유당 총무부장 임흥순, 내무부장관 이익흥, 치안국장 김종원이었다. 81세의 고령인 이승만이 ‘유고’를 당하면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될 부통령 장면을 제거하려고 이기붕의 측근이 꾸민 암살 음모였던 것이다. 경향신문이 ‘장 부통령 피격 사건’의 진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적해서 보도했음은 물론이다. 경향을 비롯한 일부 신문의 비판적 보도와 논평에 극심한 반감을 보이던 이승만 정권은 1956년에 ‘국정보호임시조치법’을 제정해서 ‘허위보도’를 규제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경향신문의 가장 강력한 도전은 1959년 2월 14일자 신문에서 나타났다. 단평 ‘여적’에 실린 무기명 칼럼이 “선거제를 부정하고 폭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그 이튿날 경향신문사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되었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최대의 언론 탄압이었다.

문제가 된 ‘여적’의 필자는 비상임논설위원 주요한이었다. 수사당국은 편집국을 압수수색하고 사장 한창우와 편집국장 강영수, 그리고 주요한을 연행해서 조사한 뒤 주요한을 ‘내란선동’ 혐의로 구속했다. 경향신문은 이승만 정권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2월 16일자 3면에 「사단장은 기름을 팔아먹고」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강원도 홍천에 있는 육군 모 사단장의 ‘유류 부정 사건’을 폭로했다. 그리고 4월 3일자에는 「간첩 하 모를 체포」라는 1단 기사가 실렸다. 당국은 이 기사가 ‘간첩의 공범들이 도주하도록’ 했다는 이유로 기자 어임영과 정달선을 4월 4일 구속했다.

경향신문 4월 15일자 석간 1면에 이승만의 기자회견에 관한 기사(「이 대통령이 국가보안법 개정을 반대」)가 실리자 정부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면서 적용한 것은 ‘미군정법령 88호’였다. 이승만 정부가 적용한 미군정법령 88호는 미군정이 남로당 계열의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특별히 제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군정이 철수한 지 10년이나 된 시점에 이승만 정부가 그 법령으로 대한민국의 일간지를 폐간했으니 여론이 그렇게 무리하고 위헌적인 결정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경향 폐간에 대한 조선의 보도와 논평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일부 언론과 야당은 이승만 정권의 경향신문 폐간이 위법적이고 언론자유 탄압의 극치라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도 그 대열에 함께해서 경향 폐간 관련 기사와 사설을 실었다. 조선일보의 경향 폐간 관련 첫 보도는 5월 1일자 석간 1면에 나왔는데, 제목은 「국내 정계에 파문과 충격 / 경향신문 폐간 그 뒤 / 정치문제화 할 듯 / 합법성 여부로 이론(異論) 분분」이었다.

이 기사는 공보실장 전성천이 “정부 조치는 타당하다”고 주장한 데 반해 부통령 장면은 “야당 탄압 전초전이다. 군정법령 적용은 부당하다”고 비판했다고 전했다. 이색적인 것은 주한미대사 다울링이 “시비 말할 생각 없다”면서도 “군정법령은 공산당 선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단언한 사실이었다. 조선일보는 그 기사 바로 옆에 「경향신문 폐간과 한국 언론의 장래」라는 사설을 올렸다.

동업 경향신문은 4월 30일 밤 돌연 공보실로부터 발행허가 취소의 통보를 받았는데 전 공보실장은 군정법령 제88호에 의하여 발행허가를 취소한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발표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것은 비단 이 나라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뿐이 아닐 것이다. 한국 국민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민주적 발전에 깊은 관심을 가진 민주우방 특히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더 한층 경악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은 14년 전에 한국을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공산당의 야욕으로부터 수호하여 우리 민족이 독립의 영예를 회복케 하며 그것을 유지 발전시키는 데 있어 미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큰 노력과 원조를 제공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경악과 충격을 느끼게 되는 것은 한 국가의 민주적 발전에는 언론의 자유가 필수적 조건의 하나라는 것이 그들의 굳은 신념일 것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전 공보실장은 그 폐간 조치가 “국가의 안전과 보다 참된 언론계의 발전을 위하여 부득이”한 것임을 그 담화에서 밝히고 있으며 아울러서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언론계가 본연의 위치에서 앞으로 그 사명 완수에 더욱 더 큰 노력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라고 요청함을 잊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불행히도 전 실장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또 그는 국내 국외에서 그 견해에 대한 많은 찬동 공명자를 발견하기가 힘들 것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 언론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이해 밑에서 경향신문 폐간조치 문제를 생각하여 보건대 첫째 우리는 그것이 군정법령에 의한 조치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 군정법령의 문리(文理) 해석상으로도 법원의 확정판결을 기다림이 없이 행정부가 중대한 ‘위법사실’을 범하였다고 인정하는 것만으로 군정법령 제88호가 규정하는 바 “법률에 위반이 유(有)할 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지 의의(疑義)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법 여부에 대한 행정부의 독자적인 그러한 해석이 설령 종전에 진보당 해산명령의 경우에 정부가 취한 바와 같이 이번에도 취하여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그 법령의 운용을 그르친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문면상 거의 신문의 생사에 대한 전면적 자유재량권을 행정부에게 일임한 듯한 동 법령은 그 당시 공산당의 도량(跳粱)을 방지하자는 데 그 입법의 취지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표현상 가혹한 것 같이 보이는 법령도 당시로서는 하등 민주적 언론을 해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불가피한 것으로 그 존재이유가 용납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런 법령을 오늘날 과오를 범하였다 하여 민주적 신문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그 법령의 입법정신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해석상 또는 운용상의 착오보다도 우리가 강조하려는 것은 그 법령은 확실히 민주언론을 규제하는 법령으로서 존재가치를 상실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
(…) 우리의 호불호(好不好) 간에 이번 조치는 국제적으로 신국가보안법 파동에 다음 가는 제2의 충격을 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끝으로 국내 정치의 불안은 바야흐로 협상의 기운이 떠돌아서 그 성패는 여하간에 합리적인 수습 등을 모색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냉각되어 온 것이 사실인데 이 시기에 돌연히 취하여진 야당계 신문 폐간 조치는 정국의 불안 상태를 재연(再燃)시킬 우려가 큰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과연 이 조치가 정치적으로도 현명한 것인가라는 것이 충분히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으로 폐간된 경향신문 측의 행정소송 등 구제조치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우리는 그야말로 “국가의 안전과 언론의 발전을 위하여” 정부가 자진하여 재고하기를 간곡히 요청하는 바이다.

이 사설은 ‘해방자 미국’ ‘공산당의 야욕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수호하여 독립을 회복’해준 미국이 한국의 경향신문 폐간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임을 전제로 이승만 정권의 폐간 조치가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어쨌든 조선일보는 동아일보보다 강력한 논조를 펼치지는 못했지만 경향 폐간 사건에 대해서는 정론을 전개하려고 노력했다.

경향신문은 정부의 결정이 부당하다는 판단 아래 정부 측을 상대로 발행허가 취소처분에 대한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냈다. 6월 26일 서울고법 특별1부 재판장 홍원일은 용감하게도 경향신문에 승소 결정을 내렸다. 자유당 정권은 홍일원에 대한 보복에 들어갔다. 그의 동생과 처가 식구 등 친인척들이 하던 회사와 공장에 세무서원들이 들이닥쳐 장부를 모두 압수해 가고 대대적인 세무사찰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경향신문 승소 결정이 내려진 지 불과 몇 시간 뒤인 오후 6시 예정에 없던 국무회의를 긴급 소집해 “법원의 결정에 따라 발행허가 취소처분을 철회하는 대신 신문의 발행을 무기정지 처분한다”는 기상천외한 대응책을 발표했다. 경향신문은 이에 불복하여 또 한 차례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냈으나 이는 다른 재판부에 배당돼 ‘이유 없다’며 기각됐다. 결국 경향신문은 ‘폐간 57일, 하루 발행, 정간’으로 이어지는 우여곡절 끝에 1년만인 1960년 4월 26일, 4·19가 나고 이승만이 하야한 다음 날에야 신문을 복간 할 수 있었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3권>, 249~250쪽)


조봉암 ‘사법살인’의 전주곡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갑자기 사망한 상황에서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총유효표의 23.8%인 216만여 표를 얻은 조봉암은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로 떠올랐다. 조봉암은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5개월 뒤인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창당을 주도했다. 진보당은 수탈 없는 계획경제체제 확립과 책임 있는 혁신정치 단행을 내걸고 한국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표방했다.

진보당은 12월 초순부터 1957년 11월 말까지 전국 여러 지역에서 지부당 결성대회를 열었는데, 사복경찰과 우익단체들의 방해 또는 테러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야만적인 탄압과 테러에 대해 진보당이 항의하였지만 민주당과 당시 일간신문은 이를 묵살했다. 신문들은 연이은 진보당에 대한 테러를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짧게 다루었고, 이는 진보당의 김달호 의원의 발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김달호 의원이 국회에서 ‘진보당 도당 결성대회’에 대한 테러사건을 보고하자, 김준연 등 민주당 의원들과 자유당 의원들은 그것을 무시한 채 김 의원의 평화통일 발언이 대한민국 국시를 도끼로 찍는 것과 같다는 등 평화통일론을 공격했고, 오히려 김 의원을 조치해 줄 것을 의장에게 요구할 정도였다. 국회 내무위원회는 테러사건을 조사한다고 했으나 그해 12월까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
(…) 진보당의 약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이승만과 자유당의 행보는 더욱 바빠졌다. 민주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당은 이념적으로 조봉암보다는 이승만에 가까웠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진보당의 평화통일 주장이 현실 정치에서 공공연히 제기되고 상당수의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확대해가는 것을 ‘무력통일’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체제 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더구나 이승만으로서는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다시 조봉암의 도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매우 불안스러웠다. 이러한 위기감은 조병옥과 민주당도 가지고 있었다. (…)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하여 이승만과 자유당 그리고 민주당은 1958년 5월에 실시될 예정인 제4대 민의원선거에 진보당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어떤 조치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는 결국 ‘진보당 사건’으로 이어졌다. 진보당이 제도정치권 안에서 별 저항 없이 제거된 이유는 바로 ‘반공분단정치’에 동조하는 민주당의 묵시적인 동의와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한국민주화 운동사 1>, 돌베개, 2010, 67~69쪽).

1957년 9월 검찰은 “조총련계 간첩 정우갑과 관련된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조봉암을 소환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혁신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박정호, 김경태 등이 간첩 혐의로 긴급체포되었는데(‘남반부 정치변혁공작대 사건’ 일명 ‘간첩 박정호 사건’) 그대도 조봉암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제4대 민의원선거(5월 2일로 예정)를 앞둔 1958년 1월 12일 서울지검 부장검사 조인구는 갑자기 기자회견을 요청하고 박정호 등 10여 명에 대한 공소 내용을 설명했다. 조인구는 “평화통일이란 구호는 남한의 적화통일을 위한 방편으로서 대한민국의 존립을 부인하는 것이다. ‘북진 없는 정강정책을 갖는 정당을 조직하라’는 김일성의 지령 내용은 바로 진보당의 확대 공작에 귀착된다”라고 발표했다.

서울시경은 1958년 1월 11일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조봉암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월 12일 박기출, 윤길중, 조규희, 조규택, 이동화를, 1월 13일 조봉암, 김달호를 각각 구속하였다. (…) 같은 날 검찰총장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진보당은 불법 결사단체”라고 발표했고, 서정학 치안국장은 진보당 간부 구속에 대해 “이들 구속된 진보당 간부는 이미 송청한 박정호· 정우갑·허봉희 등 간첩사건 수사 중 진보당 간부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뚜렷해져 구속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문들은 이러한 수사 당국의 성명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매일같이 조봉암이 북괴 지령문을 보고 불태웠다느니, 아무개 간첩과 접선했다느니, 조봉암 집에서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다느니 하고 대서특필했다(같은 책, 71쪽)


권력의 발표를 충실히 전달한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1958년 1월 13일자 석간 3면 머리에 「조봉암 씨 등 3명을 연행 / 12일 새벽부터 검찰서 모종 중대사건 수사 / 당국자는 내용 일체에 함구불언 / 평화통일 내막 규명 / 검·경 아연 긴장리에 활동」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은 이래 정부와 수사 당국이 발표하는 ‘진보당 사건’ 관련 내용을 중계방송하듯이 전달했다.

1월 15일자 석간 3면 머리에 오른 기사(「조 씨 등 체포 이유는 이것 / 14일 정 검찰총장 정식 발표 / 김일성 지령 이행 강조 / 간첩 박과 합세할 것도 밀약」)는 진보당 사건에 대해 이승만 정권이 어떤 과정을 밟아 갈는지에 관한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였다.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 씨를 비롯한 7명의 동당 및 민혁당 간부 등이 국가보안법 혐의를 받고 수사기관에 검거되자 일반의 비상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14일 정 검찰총장은 “사회의 제반 의혹을 일소시키는 의미에서 그들에 대한 혐의 내용을 발표하겠다”라고 전제한 다음 요지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검찰총장 발표문 : 첫째 북한괴뢰집단에 의해 남파된 간첩 박정호는 공작원 김경태, 오중환 등과 같이 북한괴뢰집단의 대남유격공작인 공산평화통일을 침투시키기 위하여 때마침 재야 혁신세력 통합운동이 조봉암, 윤길중 등 주도하에 움직이고 있음을 규지(窺知)하자 전기 공산 평화통일을 정강정책으로 하는 정당 조직 방향으로 광분하고 1956년 5월 조봉암과 시내 모처에서 동 평화통일에 관한 합의를 한 끝에 동인이 시행하는 바 평화통일이 전기 공산평화통일과 상합(相合)된다는 결론을 얻고 정당 조직에 더욱 추진 활동을 하던 중 동년 9월 소위 동 재야혁신세력이 진보당으로 규합되었다는 합동발표를 하는 동시에 평화통일을 정책에 부르짖으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앞으로 진보당 확대 공작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김일성의 지령을 충실히 실시 이행할 것을 재강조하고 조봉암은 1957년 8월 12일 재일본 ‘조총련’(북한괴뢰집단 산하단체)에서 파견된 간첩 정우갑과 ‘신흥사’에서 윤길중과 함께 회합하고 동인이 간첩이라는 정을 알며 평화통일에 관한 문답을 한 끝에 동인의 제안으로 진보당이 전기 ‘조선인총연맹’과 합세키로 논의한 후 그 단계로서는 동월 22일 윤길중을 통하여 진보당에 가입코자 하여 그 승인을 얻은 후 정강정책에 관한 책자를 받은 동시 입당 수속을 취하여 이후 공동정치노선 달성에 매진키로 합의한 바 있다. (…) 한편 전기와 같은 발표가 끝나고 “조봉암은 전부 피동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 아니냐”라는 기자 질문을 받자 정 총장은 “만나서 합세하기로 합의를 이룬 것이니 혐의가 있다”고 대답하고 나서 “결론을 지어 말한다면 조봉암은 작년 10월에 동당 기관지 <중앙정치> 10월호를 통하여 평화통일에 대한 것으로서 「진보당의 주장을 만천하에 고한다」라는 제목 하에 ‘대한민국이 북괴뢰와 동등한 위치에서 동일한 시간에 선거가 실시된다는 것은 좀 불유쾌하기는 하지만 기왕에도 유엔 감시 하에서 선거를 해 왔으니 또 한 번 한다고 해서 나쁠 것이 없지 않으냐’라는 명백한 용공정책을 씀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존립을 부인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조봉암을 ‘간첩’으로 조작

서울지검 부장검사 조인구는 1958년 2월 8일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관계자들을 기소했다. 조선일보는 2월 21일자 석간 2면 머리에 ‘관계당국’을 소식통으로 삼아 “간첩이 진보당에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올렸다.

20일 관계당국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수일 전 괴뢰대남간첩 양명산(별명 김동조·52세)을 구속하고 문초 중이던 육군특무부대에서는 이날 조문자(여), 조순정 등 7명을 양의 일당으로 지목하고 간첩, 간첩방조,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의 구속영장을 서울지방법원에서 발부받은 다음 속속 집행 중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 육군특무부대에서 개최된 검·군·경 사찰 관계자 연석회의에 참석하였던 검찰 관계자들은 “이번에 검거한 양 등 일당 8명은 진보당 사건에 관련된 자로서 조봉암의 간첩죄를 견고히 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 자들이나 직접 조봉암의 밀사로 지목된 자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그들은 주로 조봉암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해왔던 자들인 것으로서 특히 양은 앞서 검거한 박정호 정도가 문제되지 않을 만큼 거물급인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이날 동 소식통으로부터 탐문한 바에 의하면 양은 공작금을 4만 불이나 소지 월남한 후 주로 진보당에 침투하면서 그들에게 그 중 일부를 지급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으로서 수사에 따라 동 사건의 범위는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한다.

2월 22일자 조선일보 석간 3면에는 양명산과 조봉암의 ‘거래’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은 기사(「간첩 양의 죄상 속속 판명 /조 씨가 2억 요구 / 생활비 일체를 제공 자백」)가 실렸다.

21일 상오 국방부 발표에 의하면 육군특무부대에서 계속 수사 중인 괴뢰대남간첩 양명산과 조봉암 씨와의 접선 내용이 다음과 같이 밝혀졌다 한다. 양은 10여차 이북을 내왕한 중에서 1953년 가을철을 통해 교역을 빙자하여 수 차례에 걸쳐 내왕한 바 있는데 처음 북한에 들어갔을 때 박길룡에게 남한의 정치 경제 전반에 걸친 정보를 제공한 다음 약 2주일 간씩 정보 수집에 대한 밀봉교육을 받는 한편 박으로부터 조봉암에 대한 현재의 동정, 남한 각 정당과의 관계를 세밀히 파악하고 기회를 포착하여 의사 타진으로 “과거 박헌영의 비판을 북에서는 오히려 동정한다는 뜻을 말하라” “각 정당파의 과감한 정치투쟁을 찬양하라”는 지령을 받고 남하하여 남산 및 무명 요정에서 만나 상해에서의 구면임을 기화로 지령을 전달한 바 조 씨는 반응 없이 무표정이므로 1956년 초 월북하여 이 사실을 보고한즉 박은 “평화통일 노선으로 지향하라” “자금을 무제한 원조하라”는 지령을 조에 전달하였으며 북으로부터 소지 남하한 아편, 인삼 기타 한약재를 처분, 조 씨의 생활 기타 일체를 돌보아 준 것이라 한다. 그리고 전기 양의 진술을 종합하여 조봉암 씨를 심문한 바 제1차 심문에 있어 조 씨는 전기 사실에 취조관에게 밀회 상면 전부를 시인하나 금전으로 경제적인 원조는 사업하는 데 다만 개인적으로 원조를 받았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1956년 4월경에 접선 상황을 보면 아서원에서 5·15 정부통령선거에 기반을 공고히 하며 평화통일을 일반에 주입시켜 득표 즉 인기를 파악하는 데 조 씨는 선거자금으로 필요한 2억 환을 요구한 사실도 있다 한다.

2월 25일 공보실은 진보당의 등록을 공식으로 취소했다. 공보실장 오재경은 “진보당이 유엔 결의에 위반되는 통일방안을 주장했고, 진보당 간부들이 북의 간첩·밀사·파괴공작조들과 항상 접선했다는 것을 이유로 진보당 등록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3월 13일 첫 공판에 이어 3월 27일 제2회 공판이 열렸다. 검찰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에 대해 이런 주장을 펼쳤다. “평화통일이라는 용어는 북한괴뢰가 사용하고 있는 문구인데 진보당에서 이 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봉암의 <평화통일에의 길>에서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현 대한민국의 해체·해산을 전제로 하며 그것은 대한민국 헌법의 파괴 내지 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대한민국을 부인하고 국헌을 위배하며 정부를 참칭(僭稱)하는 것이 되므로 진보당의 통일론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3권>, 190~191쪽).

공판에서 진보당 측은 “북한이 평화통일론을 들고 나온다면 우리는 수세에 몰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 능동적으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면서 “진보당의 통일론은 결코 공산당의 전술에 넘어간 것도, 그들의 주장에 동조한 것도 아니다”라고 검찰을 반박했다.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단정하기가 어려워진 데다 조봉암과 진보당 관계자들이 박정호 등 간첩과 접선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게 되자 검찰이 조봉암을 확실한 간첩으로 몰기 위해 새로운 ‘간첩’으로 등장시킨 것이 양명산이었다.

육군 특무부대는 1958년 2월 8일 대북첩보기관인 HID 공작요원으로 남북교역을 하던 양이섭(일명 양명산)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 불법 감금한 상태에서 북한의 지령 및 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혐의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조봉암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였음에도 특무부대는 양이섭으로부터 자백을 받아 양이섭과 조봉암을 간첩죄로 검찰에 송치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은 갑자기 수사권도 없는 특무대가 담당하고 나섰다는 것에서부터 이승만 정권의 조작 의도가 짙게 깔린 것이었다. 검찰은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하여 국가변란 혐의로 2월 8일과 2월 17일 두 차례에 걸쳐 기소하였고, 양이섭과 조봉암에 대해서는 간첩 혐의로 4월 3일과 4월 8일 두 차례에 걸쳐 기소를 하였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72~73쪽).


조봉암 1심 무죄, 2심·3심 사형 선고

‘진보당 사건’ 1심을 맡은 서울형사지방법원은1958년 7월 2일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는 한편 조봉암과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간첩죄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제3조를 적용해서 각각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김일성과 내통해서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운 사건이 단순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판결이 나온 것이었다.

그런 판결이 나온 지 사흘 뒤인 7월 5일 반공청년단원 수백 명이 법원 청사에 몰려가 “친공(親共)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단하자”라고 외치며 난동을 부렸다.
조봉암의 ‘간첩죄’를 성립시키는 데 열쇠를 쥐고 있던 양이섭은 1심에서 자백한 내용은 특무대의 강요에 의한 허위진술이라고 2심에서 밝혔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1958년 10월 25일 조봉암과 양이섭의 유죄를 인정하고 각각 사형을 선고했다.

3심인 대법원은 1959년 2월 27일 조봉암의 간첩 및 국가변란 혐의, 양이섭의 간첩 혐의를 인정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조봉암이 재심을 청구하자 대법원은 7월 30일 기각했다.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형 집행을 당했다. 조선일보 8월 1일자 석간 3면에 실린 기사(「치안국서 보도 관제 / 민심 자극은 이적행위 된다고 / 조봉암 등 사형」)는 그의 죽음에 관한 권력의 ‘보도 관제’를 짤막하게 전했다.

1일 상오 이 치안국장은 사형이 집행된 조봉암, 양이섭은 북한괴뢰를 위하여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한 반국가적이고 반민족적인 범증에 의하여 처단되었는데 그들의 행적과 그 외의 그들에 대한 모든 기사는 민심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적을 이롭게 할 결과가 될 것이므로 언론인들은 특히 이 점에 유의하여 달라고 경고하였다.
이 국장은 또한 금후 이들 사형자와 그 주위환경 등에 이르는 기사는 법에 저촉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1일 석간부터 일체의 보도를 하지 말아달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조봉암의 유족이 청구한 재심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한 단체 결성과 간첩 혐의’에 대해 대법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2012년 7월 26일, 서울민사고법 민사14부(이강원 부장판사)는 조봉암의 유족 4명이 낸 국가배상 청구소송 공판에서 “국가는 모두 29억7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을 기본적 책무로 삼아야 할 국가기관이 중대한 불법행위를 저질러 위법성이 크다”며 “유족은 조 선생이 억울한 혐의를 받고 사형 집행을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로도 오랜 기간 사회적 냉대와 신분상 불이익을 겪었다”고 밝혔다.

대법원의 무죄 판결과 서울민사고법의 민사배상 판결은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을 ‘사법살인’했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진보당 사건’ 당시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대는 권력의 주장과 보도자료를 앵무새처럼 전달함으로써 그의 억울한 희생에 ‘일조’를 한 언론은 사후 52년 만에 나온 무죄 판결을 보고서도 고인에 대해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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