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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

- 조선일보 대해부 3권 -8장

기사승인 2019.01.09  17: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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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5·16 쿠데타 직후부터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나라 안팎에서 공개적으로 털어놓았다. 그런 박정희의 ‘언론관’은 1964년 3월부터 6월 초까지 계속된 학생들과 재야세력의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 과정에서 일부 언론이 보인 ‘반(反) 박 정권’ 성향의 기사와 논설 때문에 극도의 적대감으로 변해갔다.

첫 번째 희생자는 동아방송의 시사프로그램 <앵무새> 제작진이었다. 6월 4일 오전 <앵무새>가 데모대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수사기관원들이 동아방송 방송부장 최창봉 등 6명을 연행했다. 6월 15일 계엄사령부는 반공법과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별법 등 위반 혐의로 그들을 계엄보통군법회의에 구속 송치했다. 그들 가운데 3명은 40일 만에, 다른 사람들은 64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1964년 7월 28일 계엄령이 해제됨에 따라 민재로 이관되어 2년 4개월 만에 다시 재판이 서울형사지법 합의3부에서 열리고 11월 19일 구형공판에서는 전원에게 징역 3년씩을 구형했으나 11월 29일 선고공판에서는 전원 합의로 무죄가 선고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앵무새 사건’ 항목에서).


‘언론 규제’ 위한 윤리위법 국회 통과

박정희는 6월 26일 국회 제8차 본회의에 참석해서 ‘시국 수습에 관한 특별교서’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 가운데는 ‘언론의 횡포’와 ‘학원의 과잉자유’에 대한 강경책이 들어 있었다. 그는 학원 문제를 ‘입법으로 보호·규제’할 것과 “언론의 횡포를 규제하는 조치의 양성화”를 강조했다.

7월 29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해제되었다. 공화당은 이틀 뒤인 7월 30일 언론윤리위원회법안과 학원보호법안을 국회에 단독으로 상정했다. 전문 20조와 부칙으로 이루어진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은 신문, 방송, 통신, 잡지 등의 ‘자율적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언론윤리위원회와 언론윤리심의위원회를 두고 언론윤리요강을 제정해서 언론의 보도 내용이 요강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심의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언론윤리요강은 “국가의 안전 및 공안의 보장에 관한 사항, 국가원수의 명예 존중에 관한 사항,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사항, 보도와 논평의 공정성 보장에 대한 사항 등”을 심의 대상으로 정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제정하려는 언론윤리위법은 그런 내용 때문에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처럼 악용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한국신문발행인협회, 편집인협회, 통신협회, IPI 한국위원회, 신문윤리위원회 등 5개 언론단체 대표는 30일 하오 제2차 대표자회의를 열고 언론의 규제는 ‘그 형태 또는 방법의 여하를 불문하고 법제화함이 없이 현 윤리위를 보강’함으로써 타율적인 규제를 배제하고 자율적인 규제를 보강한다는 결론을 내렸다.”(조선일보 7월 31일자 1면).

8월 1일 공화당이 야당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언론윤리위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하자 야당은 국회 단상을 점령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법안은 8월 3일 공화당이 낸 수정안대로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공화당의 표결 강행에 야당인 민정당, 민주당, 삼민회가 묵시적으로 동조했기 때문이다. 표결 결과는 찬성 96표, 기권 53표였다.

조선일보는 8월 4일자 1면에 언론윤리위법 국회 통과 강행을 강력히 비판하는 사설(「민주정치에 큰 오점을 찍었다 / 언론규제 입법의 강행 통과를 보고」)을 올렸다.

(…) 이제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고, 정부의 공포 시행만을 기다리는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반대해본들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으나, 막상 법률로 확정되었다 한들 사실 이 법으로 말미암아, 얼마만한 실효를 거둘 수 있는가를 생각해볼 때 정말 양두구육(羊頭狗肉)이요, 요령부득의 법률도 다 있구나 싶은 한심한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첫째로 이 법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언론의 자율적 규제를 강화’하자는 데 있는 것이니, 제 아무리 자율이란 미명 아래 타율의 억압을 시도해본다고 한들, 현재 언론기관을 구성하고 있는 언론인들의 전폭적인 협력을 얻지 않고서는 준(準)행정기관인 언론윤리위원회의 구성은 물론, 발족부터 어렵게 될 것인데, 입법 과정에서 그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시피 과연 우리나라 언론단체가 이 비민주적인 법률과, 위헌성을 띤 윤리위원회를 위해 기꺼이 협력할 줄 기대하고 있는가. 둘째로 6·3 사태 후의 국가적 시련에 제하여 언론계가 보여준 양식의 협조도 간 곳 없이, 이 악법의 제정으로 말미암아 정부와 언론계, 국회와 언론계, 정당과 언론계 앞에 가로놓인 시대관의 커다란 거리가 분명해졌다고 아니 할 수 없는 것인즉, 국가적인 불행이 이에 더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위정자가 언론을 불신하고, 언론이 위정자를 불신하는 데서 빚어낼 모든 혼란의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분명히 말해 두거니와 오늘 이후 이 악법 제정을 서두른 측이 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
(…) 우리는 이제 언론에 부하된 사회공기로서의 책임을 더 한층 자각하여 더욱 스스로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해 자체 역량의 향상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는 동시에, 이 악법 제정에서 생생하게 노정된 여·야 정치인들의 믿을 수 없는 자세를 재삼 개탄하면서 국민의 신뢰를 잃지 않는 언론 본연의 사명에 충실할 것을 마음속 깊이 재확인하려 한다.

 

언론계의 윤리위법 반대투쟁

8월 5일 오후 언론단체 대표 50여 명은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투쟁위원회(이하 언론투위)를 결성했다. 언론계가 강력한 반대투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는데도 정부는 바로 그날 그 법을 공포했다.

8월 10일 오전 신문, 방송, 통신, 잡지 등에서 일하는 언론인 5백여 명이 서울 신문회관에서 전국언론인대회를 열었다. 그들은 ‘언론인이 권력의 시녀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자유는 천부의 인권이요, 특히 언론표현의 자유는 ‘제1의 자유’라고 일컫는다. 유구한 인류사의 조류가 바로 인간의 자유 전취를 그 기본방향으로 삼고 있은즉, 그 아무도 이 방향을 역행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가 공산주의와 대결하여 혈투를 거듭함도 또한 언론의 자유를 선두로 한 인간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은즉, 그 아무도 이 진리를 부정할 수 없다. (…)
이제 또 다시 집권자들은 이른바 ‘언론윤리위원회법’이라는 악법을 제정하여 국민의 ‘알 권리’와 ‘알릴 권리’를 억압하려 하고 있다. 우리 언론계가 이 민주주의의 위기에 직면하여, 불퇴전의 반대투쟁을 전개함은 이 투쟁이 언론에 종사하는 자의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손만대에 물려줄 전 국민의 기본권리 수호를 위함이요, 따라서 이 투쟁이 언론에 종사하는 자만의 분기(奮起)가 아니라 이것을 응시하고 뜨거운 지지를 보내는 온 겨레의 소리 없는 함성을 등에 진 투쟁임을 명백히 해두는 바이다. (…)
공공의 복리를 위해서는 언론에도 제약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기에 언론이 일반법에 저촉되었을 때 그 책임을 면해본 바도 없거니와, 언론의 책임을 스스로 강조하여 이미 ‘신문윤리위원회’를 설치하였고, 그 자율 강화를 기약하고 있다. 여기에 명분 없는 악법으로 언론을 권력의 시녀로 삼고 자유를 질식케 하려는 이 책동이 계속되는 한 그 민주주의에 대한 죄과는 길이 역사에 기록될 것임을 경고해 두는 바이다.
한국의 전 언론인은 이제 의연히 궐기하였다. 우리의 행동에 대의가 있으매, 우리는 사필귀정을 확신하는 바이다(조선일보 8월 11일자 1면).

8월 17일 “기자들의 자질 향상과 권익 옹호, 언론자유 수호”를 목적으로 하는 한국기자협회(기협)가 창립되었다. 일간신문, 통신, 민간방송 등 19개 언론사에서 일하는 기자들은 기협 회장에 이강현(동아일보 지방부 차장), 부회장에 유승범(합동통신 정치부) 등 4명을 선출했다.

8월 21일 박정희는 청와대 기자단이 낸 4개 항의 서면질문에 대해 언론윤리위법을 반드시 시행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는 “이 법은 국가의 확정법률이며 이 법 제정에 공명하는 넓은 국민층 여론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언론인들이 하루빨리 더욱 자성하여 자율적 규제 책임에 충실함으로써 이 법의 필요성이 없어질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조선일보 8월 22일자 1면).


언론윤리위법 반대 언론사에 대한 정권의 탄압

한국기자협회는 8월 29일 정부가 압력과 회유를 통해 일부 언론사 발행인들이 언론윤리위법 반대투쟁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공작을 벌였다고 폭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부 신문 발행인이 언론윤리위법 시행을 강행하려는 정부에 동조, 언론윤리위원회 소집을 찬성한 데 대해” 기협의 성명서는 “일부 몰지각한 신문발행인들이 숭고한 언론인의 지조를 자기의 사소한 이해와 바터하려는 처사를 개탄”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악법 시행을 강행하려는 정부는 갖가지 위협과 회유책으로 일부 발행인을 이용하고 있으며 더욱이 일부 발행인들 뒤에는 경찰간부까지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었다(조선일보 8월 30일자 1면). 이 기사 바로 옆에는 「4개사(동아, 조선, 경향, 대구매일)는 끝내 반대」 「한국, 서울 등 찬성」이라는 기사가 나와 있다.

정부 기관지인 서울신문과 경제부총리를 지낸 바 있는 장기영이 경영하는 한국일보가 투쟁의 대열에서 이탈한 데 이어 대한공론사, 일요신문사, 문화방송, 동화통신 등 주로 여당계 언론이 정권의 압력에 굴복해 그 뒤를 따랐다.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투쟁위원회에서 탈퇴한 이들 신문·방송사들은 표면적인 이유로 이런 저런 구실을 내세웠으나 ‘투위’에서도 ‘사(社) 단위 이탈 불인정에 관한 투쟁 성명’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고 반대하였다.
“언론 관계 5개 단체와 그 후에 조직된 기자협회 등 각 언론단체가 그 단체 구성원의 결의에 의하여 직능대표로서 ‘투위’에 각자가 참가하게 된 것이므로 일부 신문사가 사 단위로 ‘투위’로부터 탈퇴하겠다고 성명한 것은 근거가 없으며 본 ‘투위’로서는 일체 이들을 인정할 수 없다.”(송건호, 「박정희 정권 하의 언론」, 송건회 외,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다섯수레, 2007, 273쪽).

조선일보는 8월 30일자 2면 「신문발행인협회의 서면결의를 보고」라는 사설을 통해 투쟁 대열에서 이탈한 언론사 발행인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 우리가 무엇보다도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언론인으로서의 신의와 지조에 관한 것이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지난 10일에 이번 찬표(贊票)를 던진 대다수 일간신문 발행인을 포함하는 발행인협회도 포함하여 전국언론인대회를 개최했고, 다 같이 언론윤리위원회법을 ‘위헌적인 악법’이라고 규탄하면서 그 철폐투쟁을 위한 선언과 결의를 통해서 국내외에 이 시점의 한국 언론인으로서의 몸 가질 바를 뚜렷이 하였었다. 더구나 그 결의문 제2항엔 “우리는 언론윤리위원회법 부칙에 의해 규정된 첫 회합의 소집이 신문발행인협회에 의해서 거부되어야 할 것을 다짐한다” 하였고, 제3항은 “우리는 타율적인 관제 윤리위원회의 성립에 협력한 자를 사이비 언론인으로 규정한다”고 명백히 맹약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하여 갑자기 이를 배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한 기업체의 경영자로서 그 저간의 여러 가지 말 못할 고충이 있었을 것임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적어도 ‘사회의 공기’로 자처하는 신문의 발행인들이 이처럼 의지가 박약하고, 결과적으로 신의와 지조에 의심을 사게 만든 것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나 건전해야 할 한국 언론계의 권위를 위해서 큰 오점을 남겼을 뿐 아니라, 언론의 자유를 중핵(中核)으로 하는 이 나라 민주주의의 신장을 역행하는 통한사라 아니 할 수 없다. (…)
(…) 발행인협회의 이번 행동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전체 언론인들의 악법철폐투쟁 대열에 상당한 차질을 가져오게 하고, 내부적으로는 지금까지 함께 투위를 형성해오던 편집인협회, 기자협회 및 기타 각 언론단체와의 사이에 투명치 못한 대립관계를 예상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로 말미암은 혼란의 전 책임은 발행인협회가 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8월 31일 긴급 소집된 국무회의는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에 반대하고 있는 경향·동아·대구매일·조선 4개 신문을 정부기관에서 구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중앙의 각 부처는 소관장관이 정하는 몇 부만 제외하고는 이들 4개 신문을 구독치 않도록 하고 지방행정기관에 대해서는 내무부장관이 조치하도록 하는 동시에 각 장관 책임 하에 27만 전 공무원의 가정에서도 4개지의 구독을 가능한 한 중단하게끔 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바로 그날 성명을 통해 “일찍이 일제하에서도 보기 드문 보복조치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조선일보 9월 1일자 1면).

박 정권은 신문구독 중지와 아울러, 은행융자 제한 및 기존 대출자금 회수, 신문용지 가격의 차별대우, 극장협회와 기업체들에 대해 광고게재 중단 압력, 취재활동 제한 등 모두 다섯 가지 보복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대해 4개 신문 1면에 실린 공동성명서는 이렇게 비판했다.
“그 악랄한 수법은 일찍이 일제 때에도 보지 못하였던 터로, 그 천인공노할 비인도적인 조치는 이미 가공할 언론 탄압일 뿐 아니라 위정당국이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였음을 노정한 것이다. 우리는 한국신문인협회의 결정을 준수하고 한국기자협회의 정열적인 투쟁에 큰 기대를 걸면서 일사불란 악법 철폐를 위하여 끝까지 감투할 것을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9월 2일엔 언론 주무장관인 공보부장관 이수영이 정부의 보복조치에 항의한 뜻에서 사표를 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2권>, 311쪽).

9월 3일 한국일보 및 자매지인 코리아타임스, 서울경제 기자들은 발행인 장기영이 관제 윤리위 소집에 찬성한 것을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지방의 국제신보, 영남일보, 대전일보, 중도일보 기자들도 발행인들의 ‘투항’에 상관 없이 언론자유를 위해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9월 2일 이후 야당·종교·법조·학계·언론계의 저명인사들은 ‘언론자유수호국민대회 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보복조치 철폐를 요구하는 공한을 박대통령에게 보내는 한편, 국민대회 개최의 구체적 방안을 검토한 다음 9월 10일에 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
한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도 각각 4개사에 대한 정부의 보복조치를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시내 11개 대학 신문기자 대표들도 회합을 갖고 윤리위법 철폐를 위해 투쟁할 것을 다짐하였다(송건호, <한국현대언론사>, 142~143쪽).


‘언론보복 조치 취소’와 ‘유성회담’

박정희 정권은 정작 언론윤리위원회법을 공포한 뒤에 언론계와 야당, 그리고 시민단체들의 거센 반대에 부닥쳐 그 법을 시행하지 못하는 궁지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박정희는 언론 장악을 위한 ‘작전’을 바꾸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9월 5일 ‘특별담화’를 통해 “정부가 취한 몇 가지 지나친 조치를 시정할 것을 내각에 지시했다”면서 “언론윤리위법은 그대로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9월 9일자 신문들에는 박정희와 언론계 대표들이 충남 유성에서 회담을 가졌다는 보도와 함께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이 보류될 듯하다”는 추측기사가 실렸다.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언론법 시행을 보류? / 박 대통령과 언론계 대표, 유성회담 계기로 타결의 빛 / 윤리위 소집 중지 등 요청 / 투위 측, 법 자체의 철폐 전제로 / 국회·공화당과 협의-박 대통령, 조속 선처를 약속」)에 회담의 경위가 상세히 나와 있다.

언론윤리위원회법을 에워싼 정부와 언론계의 격심한 대립은 8·31 ‘보복조치’ 취소에 뒤이어 8일 박정희 대통령과 언론윤리위법철폐투위 대표들의 유성회담을 계기로 하여 많이 누그러져 법 시행이 보류될 전망이 비쳐졌으며 정부는 언론윤리위 소집을 하루 앞두고 9일 중으로 최종 언론정책을 밝힐 것이다. 정부 고위층과 언론윤리위법철폐투쟁위 측은 지난 4일 8·31 ‘보복조치’가 철회된 후 비공식으로 빈번히 이면(裏面) 교섭을 가져 언론윤리위법 시행을 강행하려는 정부 측 주장과 법을 철폐시키려는 언론계의 정면 대립을 해소, ‘서로 명분이 서는 해결책’을 모색해왔으며 공화당도 적극 중재에 나섰었는데 정통한 소식통은 8일 아침 유성에서 있은 박정희 대통령과 투위 대표들의 회담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잡힌 것 같다고 전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이 같은 이면 교섭의 결과 정부 고위층의 태도도 많이 누그러져 어쩌면 10일로 예정된 언론윤리위의 소집까지도 무기 연기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와 언론계 대표들의 유성회담 결과는 9월 9일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원만한 타협’처럼 나타났다. 조선일보 9월 10일자 1면 머리기사에 그 내용이 상세히 보도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9일 밤 “언론윤리위원법 시행의 전면 보류와 언론윤리위 소집의 무기 연기를 포함하는 ‘적절한 조치’를 공보부에 지시했으며, 이와 동시에 언론윤리위 소집 주체인 한국신문발행인협회는 이날 밤 10시 반 긴급 이사회를 열어 10일 상오 10시로 예정된 첫 언론윤리위 소집을 무기 연기했다. 이로써 지난 8월 2일 언론윤리위법이 국회를 통과, 5일 정부가 이를 공포한 이래 언론계의 맹렬한 반대로 정부와 언론계 사이에 빚어졌던 격심한 대립은 38일 만에 해소된 셈이다.

조선일보는 9월 11일자 2면에 박정희의 ‘영단(英斷)’을 극찬하는 사설(「언론계의 大路[대로]를 확보하면서 / 박 대통령의 영단과 금후의 문제」)을 올렸다.

(…) 이번 박 대통령의 조치는 참으로 ‘영단’이 아닐 수 없으며 비록 그동안 ‘언론의 자세’에 대한 견해차와 착잡한 정정(政情)에서 비롯된 입법 과정 및 이를 강행하려는 당국과 언론계의 대립이 심각하였다손 치더라도 정부의 위신이나 체면에 구애됨이 없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사태의 근본적 수습을 단행한 정치적 판단과 용기를 우리는 높이 찬양해 마지않는다. 물론 시행 보류가 법 철폐와는 다르겠지만 국회를 통과하여 공포 확정된 법률을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그 시행을 보류한다는 것은 사실상의 철폐와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으로 해석하여 앞으로 여당 총재 자격으로서 국회를 통한 법 폐기 절차에 또 한 번 이번 같은 결단 있기를 우리는 충심으로 기대하면서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데 인색치 않으려 한다. (…)
(…) 우리 언론인들은 이번의 시련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것이 몇 가지 있음을 다짐해 두어야겠다. 첫째, 자유는 스스로 싸우는 데 용감한 자에게만 돌아온다는 철칙이다. 긴 말을 요치 않겠거니와 한국의 신문기업이 내포하고 있는 허다한 난관을 무릅쓰고 끝까지 부동의 신념과 불굴의 기백으로 이 법을 반대해온 몇몇 발행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모든 언론인들이 분연 궐기하여 ‘언론의 자유 수호’에 총단결하여 갖은 고난과 최후 일각까지 대결해온 빛나는 투쟁의 기록이야말로 70년 전의 독립신문 이래 배양된 우리 한국 언론의 전통을 한결 빛나게 했다고 해서 결코 자화자찬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언론인들은 이번 경험에서 이 너무나 소연(昭然)한 철칙을 산 교훈으로 삼아 민주주의의 파수병이 되어야 할 것을 다시 한번 명기해두려 한다. (…)
(…) 우리 언론계는 우리가 처한 오늘의 사회적 좌표를 재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이번의 시련을 겪었다고 자위하면서, 그간 혼란 무비했던 사회 전반의 태세가 오늘부터 당연히 재정비되기를 충심으로 희망한다. 다만 결과적으로 볼 때 평지풍파와도 같은 언론파동이 애당초 어떻게 된 연유로 일어났던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후일을 위해서 정부나 국회가 철저한 자가 비판의 근거로 삼아주어야 하겠고, 걸핏하면 이 나라를 민주주의에서 낙후된 사회로 자모(自侮)하는 열등의식과 전근대적 관권만능적 사고방식이 이에 곁들였던 소산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라고 본다.

이 사설은 박정희가 “언론윤리위법 시행의 전면 보류와 언론윤리위원회 소집을 무기 연기하라”고 공보부에 지시한 것을 그의 위대한 결단인 듯이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언론윤리위법 파동이 일어난 원인과 그 과정을 깊이 되짚어보면 그것은 박정희의 ‘영단’이 아니라 정치적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대통령이자 공화당 총재인 그는 여당과 정부기관들을 총동원하다시피해서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도록 한 총책임자이자 그 법을 공포한 행정부 수반이었다. 그는 언론계와 야당,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치자 국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린 나머지 ‘유성회담’을 통해 돌파구를 찾았다. 멀리는 만주군 장교 시절부터 ‘여순반란 사건’ 때, 그리고 5·16 쿠데타 이래 그가 일일이 셀 수도 없이 저지른 기회주의적 처신과 ‘임기응변’, 민주주의적 국가 운영에 대한 원천적 부정 따위를 기억한다면 어떻게 이 조치를 ‘영단’이라고 찬양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위의 사설은 언론계가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부동의 신념과 불굴의 기백’으로 싸워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자화자찬을 하고 있다. 이런 자화자찬이 타당성을 얻으려면 박정희가 언론윤리위법을 완전히 폐기하는 조치까지를 확인하는 한편, 행정부처나 정보·수사기관들이 언론사 사주들의 약점을 잡아 언론윤리위법 철폐투쟁의 대열을 교란시킨 일을 행정부 수반으로서 사과하는 일이 먼저 이루어졌어야 한다.

송건호(전 동아일보 편집국장·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는 언론윤리위법 파동이 언론계의 승리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부가 (…) 내외 여론의 집중공격을 받게 되자 이제까지의 강경자세에서 후퇴의 기미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극히 지능적이며 교묘한 방법으로 언론계를 회유하고 무력화시키는 술책을 꾸며냈다. 그것은 박 대통령에게 ‘윤리위법’을 폐기가 아니라 유보해 달라는 건의문을 제출케 하여 박 대통령이 이 청원을 들어주는 식으로 문제를 호도하려 한 것이다.
언론계 대표들은 공화당 중진이 중간에 서서 꾸며낸 이 같은 계략에 넘어가 이른바 ‘유성회담’이라는 것에 응하고, 이 자리에서 대표들은 문제의 건의서를 대통령에게 전하고 박 대통령이 이 건의서에 따라 법 시행을 유보, 자비를 베푼다는 절차로 수습이 되었다. 타협 없는 투쟁에 의해 박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언론계 전체의 의사나 국민의 여론과는 달리 언론계 대표인 일부 노장층은 박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대통령 각하께서는 대소고처(大所高處)에서 이 나라 민주언론의 발전을 위해,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시행을 보류하시와 자율적인 신문윤리위를 강화함으로써 책임 있고 공정한 언론이 이 나라에 이룩되는 길을 열어주시기를 삼가 건의하나이다.”
이리하여 그토록 전 언론계가 투쟁하여 폐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게 한 언론자유투쟁은, 악법의 폐기가 아니라 대통령의 자비에 의하여 일시 시행을 보류한다는 식으로 언론파동의 수습 아닌 수습이 되고 말았다. 싸움은 권력 당국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싸움에는 이기고도 결과는 패배가 된 셈이다.
1964년의 이 언론파동은 한국 언론사상 길이 빛날 자유언론투쟁사였다. 그러나 실은 바로 이때부터 8·15 후 전통에 빛나던 이 나라 언론이 권력에 굴복, 그들의 시녀가 되는 길을 걷게 된 것이다. 9월 10일 전 ‘언론윤리위원회법철폐투쟁위원회’는 철폐 아닌 시행 보류로 파동이 끝나자 대표 7명이 청와대로 박 대통령을 방문하고 정부 결정에 사의를 표했다. 싸움은 박 정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한국현대언론사>, 143~144쪽).

송건호의 이런 기록과는 달리, 조선일보사가 펴낸 책에는 언론윤리위법 철폐투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조선일보라고 적혀 있다.

언론은 석 달간의 거센 저항 끝에 권력의 손을 들게 하는 데 성공했던 것 이다. 조선일보는 사원들의 단합과 경영진의 결단으로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을 이겨냄으로써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성과를 올렸다. 한국 언론이 정부의 언론탄압에 정면으로 맞섰던 투쟁의 과정에서 조선일보는 선두에 섰으며 성공을 쟁취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방일영은 1983년에 간행된 회갑기념논문집 <태평로 1가>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면서 “우리도 폐간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단호한 결정을 내렸었기 때문에, 그 절박했던 상황을 용기 있게 이겨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지금도 이를 교훈으로 삼고 있다”며 “이런 기개가 없이는 올바르게 신문을 해 나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언론정도(言論正道)를 걷는 데 필요한 교훈이라고 본다”고 썼다(<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210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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