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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살다 갔으면 후회할 뻔 했다"

- 지난 1월 17일 해직 44년 기간 중 구순 맞는 윤활식 동아투위 위원 축하 자리 마련

기사승인 2019.01.23  0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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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위원장 김종철, 이하 동아투위) 윤활식 위원의 구순(九旬) 잔치가 지난 1월 17일 오후 1시 경복궁역 인근 식당에서 열렸다. 동아투위는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사에서 폭력에 밀려 쫓겨난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매달 17일 오후 1시, 자유언론실천재단과 동아투위가 함께 쓰는 사무실에서 가까운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부근의 한 식당에서 정기 모임을 갖고 있다. 이 자리를 조금 넓혀 윤활식 위원 구순 잔치를 진행했다. 

이날 행사에는 동아투위 위원 및 동아투위 요요회 회원, 자유언론실천재단 임원 및 회원, 김중배 언론광장 공동대표, 이해동 목사,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 및 임직원, 김언경 민언련 사무처장, 강성남 새언론포럼 회장 및 회원, 양상우 한겨레신문 사장 및 김형배 한겨레사우회 회장 및 회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윤 차장님, 축하드립니다. 만년 차장이야, 윤 차장 말고 윤 국장 소리도 한번 들어봐야죠~~”.

매달 모이는 자리이지만 윤활식 위원의 구순을 축하하는 자리여서인지 동아투위 위원들이 다른 때보다 많이들 참석했고 축하 인사를 건네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윤활식 위원은 동아방송 공채 1기 PD로 입사했다. 동아방송은 1963~1980년 기간동안 운영됐던 동아일보 산하 라디오방송국이었다. 윤 위원은 해직 당시 차장 직급으로 유일하게 해직됐던 위원이다. 윤 위원의 부친도 일제때 항일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옥살이를 했고, 윤 위원도 1975년 해직 후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정신을 이어가는 자유언론투쟁 과정에서 옥고를 치렀다.

엄혹한 시절 후배들과 흔쾌히 함께했던 윤 위원은 1975년 3월 29일 해임통지서를 받았다. 40대 중반의 가장으로 4남매의 아버지였던 그는 동아일보사 간부들의 회유에 따라 회사로 복귀했다면 안정된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윤 위원은 그러지 않았다.

해직된 후 윤 위원은 동아투위 투쟁의 현장에 한결 같은 모습으로 함께 했다. 동아투위 위원들이 졸지에 회사에서 쫓겨나고, 그 시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간 동아투위 위원들은 새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다. 초·중·고에 다니는 네 자녀를 키워야 했던 윤 위원은 제강회사에서 일하던 남동생의 권유로 친지들에게 빌린 돈으로 파이프 가게를 내기도 했으나 1978년 10월 24일 발표한 동아투위의 ‘민권일지’가 발단이 돼 구속되면서 가게 유지가 어려워졌다. 구속된 후 두 달쯤 되던 1979년 2월 24일이 윤 위원의 딸 결혼식을 하는 날이라 가족들이 결혼식에 참석만 하게 해달라고 기관에 사정을 해봤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은 뒤 13일 만인 1979년 11월 8일 집행유예로 석방되고 나서도 윤 위원의 삶은 자유언론실천선언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삶이었다. 1984년 12월에 결성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현재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전신)에 실행위원을 지내고, 송건호 언협 의장을 중심으로 제도언론에 맞서 월간지 <말>을 발간하면서 1986년에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함으로써 나라 안팎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윤 위원은 1988년 5월, <한겨레신문> 창간사원이 되어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한 지 13년 만에 직장에 출근했다. 전무 자리까지 오른 그는 1994년 3월 한겨레를 떠났다.

윤 위원은 1월 17일 축하자리가 비록 넓고 화려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이런 자리가 마련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못 감격스러워보였다. 45년 여의 시간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자 후배들의 축하 인사와 선물, 꽃다발, 케익, 떡 등에 둘러싸여 소감을 말하는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지만 유쾌하게 웃으며 소감을 말했다.

“적당히 살다 갔으면 후회할 뻔 했다. 이렇게 후배들과 여러분들이 베풀어준 잔치상을 받는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 동아투위라는 조직은 ‘희생정신 발휘한 이익집단’이라고 평가되기도 하고 ‘새로운 역사의 전범을 썼다’고도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는 일생 사는 동안 아무나 들을 수 있는 평가는 아닌거 같다. 너무 과분하고, 반면에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 정말 감사하다”.

2019년 3월 17일은 동아투위 결성 44주년이자 동아일보에서 폭력에 의해 쫓겨난 언론인들이 해직 만 44년을 맞는 날이다.

 

2019년 1월 17일 동아투위 윤활식 위원 구순 축하자리가 마련됐다. 이명순 동아투위 위원이 사회를 맡았다.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이 구순 축하 행사를 마련하게 된 취지 등을 설명하고 있다.

 

양상우 한겨레신문 사장이 축하 꽃다발과 선물을 전하고 있다. "감회가 깊다. 선배님들의 고통 속에 오늘의 한겨레나 뉴스타파가 있는거 같다"며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시라"고 축하 인사를 전했다.

 

사회를 맡은 이명순 위원 옆으로 김종철 위원장, 윤활식 위원, 이해동 목사 모습이 보인다.

 

이해동 목사가 "동아투위 명예위원도 구순잔치를 해준다면, 다음 잔치는 내 차례일 것 같다"며 "건강한 모습 감사드리고 행복해보이신다"고 축하 인사를 하고 있다.

 

김용진 뉴스트파 대표가 "선배님들의 뜻을 이어받아 자유언론, 독립언론의 기치를 어어가겠다"고 밝히고 있다.

 

윤활식 위원을 가장 오래 가까이서 지켜본 허육 동아투위 위원은 "윤 위원의 모친은 100세를 넘기셨다. 어머님을 따라 아들도 100수를 넘겨야 자식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라며 "윤 위원의 부친은 항일독립 투쟁을 하다 긴 시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살이 1년도 못하고, 동아투위 사십 몇 년 했다고 다 한게 아니다. 윤 위원이 동아투위를 계속 이끌어 주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부영 위원의 축사 모습. 이부영 위원은 "오늘 같은 자리는 우연히 생기는 자리가 아니라 줄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정정하게 계속 이끌어달라"고 의미를 두었다.

 

동아투위를 대표해 신정자 위원이 윤활식 위원에게 구순 축하 '동아투위 드림' 각인이 된 금반지와 꽃다발을 전달하고 있다.

 

윤활식 위원이 동아투위가 증정한 반지를 낀 손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윤활식 위원의 답사 모습.

 

윤활식 위원의 답사 모습,

 

2019년 1월 17일 열린 윤활식 위원 구순 축하 자리.

 

윤활식 위원이 축하 케잌 촛불을 끄고 있다.

 

임경자, 백춘자 명창의 '서도소리' 축하 공연 모습.

 

"60년 기간 동안 이렇게 오늘 같이 만나 한잔 걸친다는 것은 보통 행운이 아니다"며 축사를 하는 김학천 위원 모습.

 

윤활식 위원 모습.

 

단체 기념 사진.

 

단체 기념 사진.

 

단체 기념 사진.

 

동아투위 문영희 총무(좌), 윤활식 위원(중), 김종철 위원장(우) 모습.

 

단체 기념 사진.

 

단체 기념 사진.

 

〈사진, 글 정리 :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영순 사무국장〉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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