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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정국’과 조선일보

- 조선일보 대해부 4권 - 36장

기사승인 2020.02.12  16: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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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권의 폭압정치에 짓눌려 탈출구를 찾지 못하던 학생과 민중의 분노는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전경의 무자비한 쇠파이프질에 맞아 숨지는 사건으로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사흘 뒤인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안동대 학생 김영균(5월 1일), 경원대 학생 천세용(5월 3일)이 잇따라 자신의 몸에 불을 댕겼다. 정권의 타락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이 공권력의 쇠몽둥이 앞에서 택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이른바 ‘분신 정국’의 시작이었다.


‘치사 정국’에서 ‘분신 정국’으로

강경대가 타살당한 이튿날인 4월 27일자 조선일보는 23면(사회면) 머리에서 그 기사를 현장 위주로 다루었다. 같은 면의 주요 기사는 「검찰 특별수사반 편성」이었다. 조간이기 때문에 정치권의 움직임은 보도할 수 없었겠지만 이후 퍼져 나갈 사건의 엄청난 파장을 간과한 면이 있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에는 강경대 타살 기사가 1면 머리에 올랐다. 그 날자 조선일보의 1면 머리기사는 「마약전쟁 선포 / 단속·유입 봉쇄 수사력 총동원 / 청와대서 마약 퇴치 대책회의」였다. 조선일보는 다음 날에야 내무부장관 교체와 대통령 노태우의 유감 표명을 앞세워 강경대 기사를 1면 머리에 내보냈다.

4월 28일자부터는 모든 신문이 일제히 ‘치사 정국’, 그리고 며칠 후부터는 ‘분신 정국’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조선일보는 강경대에 대한 폭행치사와 그 뒤 잇달아 일어난 분신 사태에 대해 안타까움과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결정적인 비판의 칼날은 공권력이 아닌 폭력시위로 향했다. 기껏해야 경찰과 학생들에 대한 양비양시론이었다.

조선일보는 4월 30일자 사설(「무 화염병 무 쇠파이프」)을 통해, 사태의 원인은 공격적 시위 진압이라는 경찰의 과잉 대응임을 인정하고 진압방법의 다양한 개선책을 제시하면서도 “그러나 우리가 강 군의 억울한 죽음을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시선을 돌릴 필요도 있다고 본다. 다름 아닌, 시위문화의 문제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사설은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시위문화도 건전한 방향으로 정착돼야 할 텐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시위의 명분이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게 되자, 참가자가 줄어드는 것과 반비례해 더욱 시위 양상이 극렬해지는 추세를 보였다”면서 “시위 현장에서 투석행위와 화염병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는 경찰이 아무리 개선을 한다고 해도 시위대와 진압 공권력이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본다”고 단정했다.

‘시위문화를 바꾸자’는 조선일보의 캠페인은 계속되었다. 5월 2일자 사설(「어느 경정의 좌절」)은 전날 사표를 낸 마포서 경찰간부를 끌어 들였다. 그 간부가 “학생들과 경찰이 원수처럼 화염병·최루탄으로 맞서는 지금의 시위문화는 사라져야 한다”면서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경들에 대한 작금의 평가는 그러한 인과관계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만 내려지고 있는데 대해 더 이상 경찰관 노릇을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 전체적으로 볼 때 다수 국민과 시대의 대세는 화염병 그룹과 쇠파이프 그룹 등 양극의 소수파와는 달리 평화적 민주개혁의 길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이다. 그런데 마치 이 대세를 깨뜨리기나 하려는 듯이 화염병은 쇠파이프를 부르고 쇠파이프는 화염병을 부르는 식으로 서로가 상대방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양상으로 오늘의 우리 상황은 또다시 격화되고 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평화적 민주개혁 입장은 관료적 신권위주의 세력과 운동권의 역설적 공생관계의 중압으로 휘청거릴 위험에 직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달갑지 않은 상황의 전개를 극력 막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양식 있는 보수가 쇠파이프를 퇴치하고 합리적인 진보가 화염병을 퇴치하려는 필사의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에게는 과연 그런 양식 있는 보수와 합리적인 진보의 역량이 있는가 없는가.
왜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울 줄 모르고 경험으로부터 배울 줄 모르며 역사로부터 배울 줄을 모르면서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6·29 전이나 후를 막론하고 밤낮 똑같은 화염병과 쇠파이프 수준에 머문 채 단 한 치의 발전도 변신도 이룩하지 못한단 말인가. 왜 우리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밤낮 요것밖엔 안 되는가.

같은 날짜 사회면 머리에는 「도심 곳곳 밤늦도록 시위 / 치사 규탄·노동절 집회 / 연대서 만여 명 참석 후 신촌 등 또 화염병·최루탄 공방 / “9일 전국 정권규탄대회” 결의 / 부산·마산·수원 등도 시위 광주선 1만여 명〉 기사가 실렸다.

5월 3일자1면 머리기사(「노 대통령, 대국민 사과 / 치사 없게 제도 보완 유족 애도 / 김 대표와 주례회동」)는 조선일보가 노태우 정권의 대변지 구실을 충실히 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1면에는 머리기사를 받치는 기사가(「평화시위 보장·분신 자제 호소: 서울 17개 대 총장 / “국민은 화염병·최루탄 교전 불원”」) 자리잡고 있다. 3면에는「시위문화 이대로 좋은가: 각 계의 주장 / 폭력은 결단코 정당화될 수 없다 / 법·질서 범위서 자기 주장 표현해야 / 적·불법 안 가린 원천봉쇄 상황 자극 / 분신은 무모 민주화도 살아야 가능」이라는 대형 기획기사 외에, 강경대의 죽음과 관련해 공안통치 종식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한 대학교수들을 비판하는 「교수들만은 그래선 안 된다」라는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은 “적어도 대학교수들이라면 학생운동의 소수파적 편향성과 격렬성을 따끔하게 나무라면서, 또 한편으로는 권력 측의 일련의 비리와 경직성도 권위 있게 힐책하면서 우리 사회의 합리적 민주개혁 위상으로서의 지적 중심권 구실을 톡톡히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라면서 “그런데 이제 와서 뒤늦게 강 군의 죽음을 보고나서야 그런 지적 중심권 역할보다는 마치 재야운동가 같은 어휘와 몸짓을 취하면서 학생들의 흥분에 기름을 붓는 움직임이나 보이고 있으니, 그것이 과연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합당한 지식인상인지를 우리로선 심히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난했다.

같은 날자 사회면 머리기사 역시 「큰아들은 전경-둘째는 대학생 그날 밤은 괴로웠다 / 어느 어머니의 고뇌 시대의 아픔 함께 숨 쉬는 한 가정 / 화염병시위 뉴스 땐 잠 못 이뤄 / 남북도 껴안는데 젊은이들끼리 왜 적대하며 싸우나 / “정치꾼들 분신도 흥정” 개탄: 매일 새벽 기도」라는 제목의 캠페인성 기획기사였다.

5월 4일자 1면 머리에는 「또 분신 죽어선 안 된다 / 각계 인사 “자제의 목소리” / 자살은 용기 아닌 순간적 감정 / 극한투쟁보다 개혁의지 필요 / 4·19에서도 이념투쟁 없었다」라는 기획기사가 올랐다.


김지하까지 동원한 조선의 전면전

조선일보 5월 5일자 1면에 나온 기사(「전국 21개 시 규탄시위 / 밤 되자 화염병 투척 과격화 / 시민 대체로 무관심 호응 없어 / 2만 명 종로 점거 한때 교통 완전마비」)의 제목 중 ‘시민 대체로 무관심 호응 없어’라는 부분에서 조선일보의 의도가 엿보이지만, 같은 날짜 신문의 하이라이트는 3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시인 김지하의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특별기고문이었다. 「환상을 갖고 누굴 선동하려 하나 / 죽음을 제멋대로 이용할 수 있나 / 슬기롭고 창조적 저항 선택해야」 등의 부제를 단 이 칼럼부터 「분신 자살, 그릇된 선택」이란 사설, 정권퇴진운동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신민당을 칭찬하는「신민당의 현명한 판단」이란 사설, 「“분신은 침체 운동권 위기의식 반영”: 극단행위 분석」이란 기사까지, 조선은 총력전을 벌이는 듯 했다.
김지하의 칼럼은 다음과 같다.

젊은 벗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당신들은 잘못 들어서고 있다. 그것도 크게!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다. 젊은 당신들의 슬기로운 결단이 있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숱한 사람들의 간곡한 호소가 있었고, 여기저기서 자제요청이 빗발쳐 당연히 그쯤에서 조촐한 자세로 돌아올 줄로 믿었다. 그런데 지금 당신들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정권보다 큰 생명〉

생명이 신성하다는 금과옥조를 새삼 되풀이 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출발점이요 도착점이라는 것이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심지어 종교까지도 생명의 보위와 양생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그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근본을 말살하자는 것인가? 신외무물이 무슨 뜻인가? 당신들 자신의 생명은 그렇게도 가벼운가? 한 개인의 생명은 정권보다도 더 크다. 이것이 모든 참된 운동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당신들은 민중을 위해서! 라고 말한다. 그것이 당신들의 방향이다. 당신들은 민중에게 배우자! 라고 외친다.
그것이 당신들의 공부이다. 민중의 무엇을 위해서인가? 민중의 생명의 보위, 그 해방을 위해서일 것이다. 당신들이 믿고 있는 그 해방의 전망은 확고한가? 목적에 대한 신념은 과학적으로 확실한가? 만약 그것이 기존의 사회주의라면 그 전망은 이미 끝이 났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민족이 패망하는 극한 상황도 아닌 터에 생명 포기를 요구할 정도의 목적의 인프레션 따위는 있을 수도 없으며 다만 뼈를 깎는 기다림과 겸허한 모색이 있을 뿐이다. 모색하는 자가 매일 매일 북 치고 장구 칠 수 있는가? 도대체 그 긴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왜 덤비는가? (…)

〈자살 전염 부채질〉

전환기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 지배하는 것이 특징이다. 실수하기 안성맞춤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 지금 당신들은 조심성이 있고 없고의 차원을 훨씬 넘어섰다. 당연한 얘기지만 고전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주사파의 스테레오타입마저 이미 이탈했다.
철부지라는 말도 정확하지 않다. 당신들은 지금 극히 위태롭다. 생명은 자기 목숨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무서운 것인데 하물며 남의 죽음을 제멋대로 부풀려 좌지우지 정치적 목표 아래 이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는 모양인데, 그렇다. 바로 그 대답에 당신들의 병의 뿌리가 있고 문제의 초점이 있다.
지금 당신들 주변에는 검은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그 유령의 이름을 분명히 말한다. 네크로필리아 시체선호증이다. 싹쓸이 충동, 자살특공대,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시작이다.
나는 그곳에서 이미 오래 전에 일본 전학연의 몰락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 모순을 어찌할 셈인가? 그런데 한술 더 떠 지금 당신들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 열사 호칭과 대규모 장례식으로 연약한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 생명 말살에 환각적 명성을 들씌워 주고 있다. 컴컴하고 기괴한 심리적 원형이 난무한다.

〈종교냐 유물이냐〉

삶의 행진이 아니라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고 있다. 그것이 해방의 몸짓인가? 무엇을 해방할 작정인가? 귀신인가?
절정은 당신들의 그 혼을 분리하는 굿에 있다. 시체가 당신들 것인가? 왜 탈취하려 하는가? 그 시체의 주인공이 조선시대의 사대부 집안의 그 가족도 없는 종인가? 왜 가족을 무시하는가? 그러나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당신들의 그 기괴한 이원론이다. 당신들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인정하고 있다. 당신들의 결정적 파탄의 증거다. 묻겠다. 당신들의 신조는 종교인가? 유물주의인가? 육신을 경멸하고 영혼의 찬란한 해방을 광신하는 고대종교인가? 육신의 물질성만을 주장하는 속류 유물주의인가? 도대체 어느 쪽인가?
도대체 그놈의 굿판에 사제 노릇을 하고 있는 중과 신부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악령인가? 성령인가? 저는 살길을 찾으면서 죽음을 부추기고 있는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은 선비인가? 악당인가? 당신들은 지금 굿에서의 이른바 불림을 행하는 모양인데, 불림에는 조건이 있는 법이다. (…)

〈운동은 이제 끝장〉

젊은 벗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소름끼치는 의사굿을 당장 걷어 치워라. 영육이 합일된 당신들 자신의 신명, 곧 생명을 공경하며 그 생명의 자연스러운 요구에 따라 끈질기고 슬기로운 창조적인 저항행동을 선택하라.
나는 군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내 말을 듣지 않겠다면 좋다. 할대로 해보라. 당신들 운동은 이제 끝이다! 그래도 지성인이라면, 최소한 내 말을 접수라도 한다면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 자신의 신조가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종교인가? 유물주의인가? 대답이 다행히 창조적 통일로 끝났을 때, 그 때 우리는 현 정권에 대한 효력 있는 저항을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자중자애 하라. 부디 절망하지 말라. 절망은 폭력과 죽음, 그리고 종말의 서곡이다.

이 칼럼은 재야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 글은 생명에 대한 존중심에서 나온 위대한 시인의 고언으로 읽히지 않았다. 어쩔 도리가 없는 절망의 벽 앞에서 제 몸이라도 던져서 항거하고자 했던 젊은이들의 숭고한 열정과, 젊은이들의 죽음 앞에서 통곡을 삼키며 불의에 맞서고 있는 모든 이들에 대한 매몰찬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 그런 글이 조선일보에 실렸다는 점에서 재야는 분노했다.


‘유서 대필’ 이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5월 8일에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 후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날 서강대 총장 박홍은 기자회견을 갖고 “지금 우리사회에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우리는 이 세력의 실상을 반드시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배후세력을 ‘전염병균 같은 이들’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은 그늘에서 엄청난 힘을 갖고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는 물귀신 공법으로 물 마시듯 폭력을 전염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분신 정국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5월 9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는 「“분신 현장 2~3명 있었다”: 목격교수 진술 / 검찰, 자살 방조 여부 조사」라는 짧막한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동아일보 사회면에는 같은 사안에 대해 「“옥상엔 혼자 있었다”: 서강대 운전사 경찰에 밝혀 / 목격 교수들 “2~3명 있었다고 말한 적 없다”」라는 제목의 정반대 기사가 나왔다. 그때부터 ‘분신 정국’은 본격적인 ‘유서 대필’ 국면으로 들어갔다.

조선일보는 5월 10일자 사설(「박홍 총장의 경고」)에서 “우리는 박 총장이 어떤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서도, “그의 말대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자살 소동에는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은 의문점이 개재한다는 점을 강하게 느낀다”고 했다. 이 사설은 또 “자살과 시신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죽음의 세력이 있다면 생명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점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또 바로 그 같은 인간가치 파괴의 행태는 국민의 동정과 지지를 받기도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정말로 필요한 우리 사회의 건전한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마저 모두 왜곡시키고 퇴색시키지 않을까 박 총장과 함께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조선일보-김지하-박홍-검찰로 이어지는 불온한 공기가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분신 정국의 배후엔 죽음을 부추기는 세력이 존재하고, 그 구체적인 행동이 유서 대필이라는 시나리오로 짜여진 것이다.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신 써주며 학생들, 노동자들에게 ‘나가 죽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처음부터 작심한 듯 강기훈을 유서 대필 등 자살방조 혐의자로 특정하고 그의 필적을 압수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하는 등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국과수는 처음엔 김기설의 속필체(유서)와 강기훈의 정자체를 비교할 수 없다며 ‘감정 불가’라고 통보했다가, 검찰이 추가로 찾은 김기설의 정자체들과 함께 재차 감정을 요청하자 “두 필적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그 직후 국과수는 김기설의 유서와 강기훈의 필적이 같다고 발표했다. 결국 강기훈은 1991년 7월 유서를 대필하여 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한 죄로 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2005년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김기설의 지인이 보관하고 있던 전대협의 노트가 새로운 증거로 접수됐다. 김기설의 행적이 세세하게 기록된  노트의 필적은 유서와 마찬가지로 속필체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노트와 김 씨의 유서를 감정해 ‘필적이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린 뒤, 2007년 11월 법원에 유서 대필 사건의 ‘재심’을 권고했다).

유서 대필은 성공한 공작이었다. 사람들은 이어지는 죽음의 행렬 자체에 겁을 먹은 채 몸서리를 치는 상황이었다. 노태우 정권을 타도하겠다는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 사이에 서서히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하던 판에 유서 대필 공작은 학생들의 순결한 희생을 “순번 정해놓고 유서 대신 써주며 몸에 불 싸지르는” 공포의 화신(火神)들로 낙인찍기에 족했다. 운동권 학생들을 비윤리적 집단으로 몰아붙이면서 공권력은 더욱 강압적으로 탄압에 나섰다.
대다수 언론은 검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쓰기 바빴다. 한겨레신문이 검찰의 발표에 비판적으로 접근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진실게임의 틀에 갇혔다. 유서를 누가 썼나, 진짜 강기훈이 썼나, 그것만이 언론의 관심사였다. 당시 사건 담당 검사들은 남기춘, 신상규, 곽상도 등이었다.

조선일보는 5월 15일 사회면에 〈애인에 준 메모확보〉, 19일에는 〈뉴욕타임스〉를 인용해 〈“분신에 배후 한국에 소문 파다”〉라는 기사를 2면에 실으면서 배후세력으로 북한까지 끌어 들였다. 이어 조선일보는 20일 사회면에 〈전민련 총무부장 수사/ 김기설 씨 대필관련/ 강기훈 씨 검찰, “필적동일” 용의자 지목/ “결정적 단서도 확보”〉라는 기사를 싣고, 검찰이 강기훈을 유서를 대신 써준 용의자로 지목하고 신병확보에 주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기설 분신현장에서 발견된 유서가 강 씨의 필적과 동일하다는 감정결과에 따른 것이라는 얘기다.
 
조선일보는 5월 21일자 사설(「필적 의혹 철저히 가려야」)을 통해 대필 의혹을 한층 더 강화했다. 조선일보 22일자에는 「“김 씨 수첩 일부 내용 빠져”: 검찰 / 유서 대필 혐의 필적 감정 의뢰 / 업무일지도 날짜 바뀌고 찢겨져 / 김 씨 분신 직전 행적 공백 집중수사」, 23일자에는 「“강 씨, 홍 양 수첩에도 가필”: 검찰 / 김기설 씨 분신 수사 대비 추정/ 홍 양 진술 증거보전/ 전민련: “강압수사로 착오”」, 24일자에는 「〈대필 경위·김 씨 행적 수사 초점: 검찰 / 홍 양 수첩 가필, 은폐 기도 심증 “분신 날 6시간 공백 의문” / 기업체에 낸 이력서 확보 감정 의뢰」, 25일자에는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 검토: 정 검찰총장 / “강 씨 소환 불응 땐 강제연행” 사전영장 재야인사 포함 / 김 씨 접촉-수첩 보관 전민련 8명 소재 수사 / 검찰, 김 씨 필적자료 2점 추가 입수 감정 의뢰〉, 26일자에는 」검찰 “김 씨 수첩 원본 아니다”: 과수연 감정 결과/ 일부 훼손-첨삭 변조 결론 / 찢었다 끼운 부분 절취선 달라/ “유서도 대필 판명” / 전민련선 “김씨 유서 분명” 반박」 등의 기사가 나왔다. 하루도 쉬지 않고 ‘검·경 발’ 뉴스를 대서특필하면서 유서대필을 기정사실화해 나갔던 것이다.


정원식의 외대 밀가루 봉변 사건

노태우 정권은 5월 24일 정원식을 새 총리로 임명했지만 그것은 시위대의 힘에 밀려서가 아니라 ‘유서 대필’ 공작 등으로 시위대와 시민들을 떼어 놓는데 성공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유서 대필’ 공작은 그 진실 여부를 떠나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정원식 총리 임명과 그로 인한 하나의 해프닝으로 재야·학생권의 민주화운동은 결정적 타격을 받게 된다.

정원식은 6월 3일 외국어대 교육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시작했다. 외대 학생회는 과거 문교부장관 재직 시 전교조를 탄압했던 그의 이력을 겨냥해 “학우 여러분, 전교조 선생님들을 학살한 정원식이가 지금 우리 학교에 와 있습니다”라는 교내방송을 했다. 학생 50여명이 강의실 밖 복도에서 “전교조를 박살낸 ×× 어디라고 왔느냐”는 등의 욕설을 퍼부으며 소란을 피우자 강의시간 90분을 다 채우지 못하고 강의실을 나오던 정원식은 학생들로부터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아 얼굴과 양복이 뒤범벅이 됐다. 그는 학생들에게 에워싸여 30여분 간 욕설과 주먹질 발길질을 당하며 교문 밖으로 끌려나왔다.

정원식은 “현실에 비애감을 느낀다”고 했고 노태우는 “용서 못할 행동”이라며 “학원풍토 바로잡도록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보수언론은 일제히 그 사건을 ‘인륜의 파탄’이라고 보도하면서 학생들과 재야운동권을 맹비난했다. 경악과 분노, 충격, 허탈이란 단어들이 난무했다.

다음은 사건 후 6월 4일자부터 6일자까지 조선일보의 주요 기사 제목들이다.

4일자 사회면: 「〈150m 끌고 다니며 ‘린치’ / 정 총리 집단폭행 / 멱살 잡고 교문 밖 내쫓아/ “살인마” ‘분단 고착 원흉 ’등 욕설/계란 70여개 세례 밀가루 범벅/ 학생들, 강의실 피신하자 끌어내 계속 구타」
5일자 4면: 「정 총리 폭행 충격파 각계 반응 / “학생인가 폭도인가 패륜 업보 가르쳐야”/ 이런 세대가 어떻게 나라주인 되겠나 / 사회 전체 도덕성 먹칠 간과할 수 없어/ 대개혁 필요 이젠 스승이 자신감 갖고 할 말해야」
6일자 1면: 「대학폭력 추방 결의/ 63개 대 총학장회의 / 엄격 학사관리로 불량학생 배격, 학원 정상화위 설치 공동대응 / “방관 태도 교수들도 책임” 공감 / 학생회비도 원하는 학생만 내도록 규정 개정」
6일자 2면: 「“학생운동 순수성 잃어 적군파 흡사” 전국 63개 대 총·학장회의 발언 요지 / 의식화 교수 재평가 과감히 인사조치 / 재단 비리 등 시위 소지 사전 근절 시급/ 다수 학생, 과격파와 철저 차단 필요」

 
조선일보는 6월 5일자 사설(「운동권은 타락하고 있다」)에서 “이번 사건은 결코 우발적이거나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치밀하게 계산된 계획에 의한 것이며, 정 총리에게 위해를 가한 자들은 그저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라고 배후설을 내세웠다. 이어 “이들 조직은 이제 윤리적 투쟁이라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계급투쟁을 전면에 내세운 민중혁명 세력이며 주사파 집단이라고 세간에선 보고 있다”면서 “극단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사회의 혼란을 조성하고 거기에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을 세력화해서 세상을 어지럽게 흔들어 보자는 것”이 그들의 목표라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이어 6일자 사설(「중심권이 일어설 때」)을 통해 “운동권이 80년대 중반부터의 극좌노선-즉 친북 성향의 주체사상파와 레닌주의 등 볼셰비키 그룹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데서부터 이미 운동의 타락은 예견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중심권의 시민세력과 그 지식인·교수·교사·종교인·재야 법조인·전문직 종사자·양식 있는 학부모들은 과감하게 일어서서 저 집요한 극좌 운동권의 타락한 몸짓을 그만두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치사 정국에서 분신 정국으로 옮겨가면서 일정 부분 시위대의 입장에 서서 노태우 정권에 각을 세웠던 동아일보도 ‘정원식 사건’이 가 터지자서 6월 5일자에 「가투는 이제 그만둘 때다」라는 사설을 싣고 재야운동권의 자숙을 당부했다. 사설은 해방 이후 학생운동의 명암을 회고하면서 극단주의적 학생운동이 역사를 정지시키거나 후퇴시킨다는 점을 우려했다.

‘분신정국’의 불길이 그렇게 급격히 사그러들면서 6월 20일 광역의회선거 가 치러졌고, 결과는 집권여당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득표율은 민자당 41%, 신민당 22%, 민주당 14%였는데 전체 866석 중 민자당이 거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564석, 신민당은 165석, 민주당은 21석, 무소속은 115석을 차지했다. 민자당 압승의 1등 공신은 당연히 정원식이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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