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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실천… 우린 그 싸움에 젊음과 인생을 걸었다"

- [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6) 박종만 동아투위 위원(상)

기사승인 2024.04.29  14: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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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부당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동아일보 기자와 PD, 아나운서들은 1975년 3월12일부터 제작거부 농성에 들었다. 납으로 된 활자를 뽑는 공무국에서는 기자 23명이 단식농성을 벌였다. 왼쪽으로부터 고 강정문 위원, 박종만 위원, 이종덕 위원. /자유언론실천재단 제공


1974년 봄부터 1975년 봄까지,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보람차고 격정적인 한 해를 보냈다. 특히, 1974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 선언’이 발표된 이후 1975년 3월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날 때까지 5개월 남짓, 나와 내 동지들은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자유언론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젊음을 불태웠다. 우리는 그 싸움에 우리의 젊음을 걸었고, 우리의 인생을 걸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기자들은 지면 개선을 위해 끈질긴 노력을 했다. 여전히 권력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한 경영진과 간부진에 맞서 자유언론의 뿌리를 내리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동아일보 지면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정권의 부도덕성과 야만성을 폭로하기 시작하면서 초라하던 몰골이 원래 그래야 할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자유언론 투쟁의 물결을 잠재우기 위해 광고탄압이라는 전대미문의 악랄한 수단을 동원했다.

동아일보의 광고면은 백지 상태가 되었다. 광고 무더기 해약사태는 국민적 분노를 촉발했다.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민중의 함성이었다. 40여년 뒤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낸 촛불혁명의 씨앗이 이들 격려광고 속에 배태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몇 달을 못 버티고 결국 권력의 압력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동아일보사의 배신으로 나와 내 동지들의 투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동아일보사는 1975년 3월8일, 이른바 경영합리화를 위한 기구축소 해임이라는 명분으로 기자 18명을 해임함으로써 배신의 첫 신호탄을 올렸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은 권력과의 야합이 분명해진 회사 측에 항의하기 위해 3월12일부터 전면적인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사무실에서 박종만 위원(왼쪽)과 고 홍종민 위원이 앉아 있다. 고 홍종민 위원은 1978년 10월 제도언론이 외면한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알린 ‘민권일지’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고 1980년 5월18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돼 23일 동안 조사를 받으며 고문을 당했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며 투병생활을 하던 그는 1988년 4월20일 44세 나이로 별세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제공

 

나는 제작거부에 들어간 첫날 동지 16명과 함께 또다시(1974년 3월 노조 사태 때 해고) 전격 해고되었다. 내 나이 33세, 입사한 지 7년 반, 결혼한 지 만 4년 되던 때 일이었다. 이로써 나는, 내 젊음과 정열을 모두 바쳐 일했던 첫 직장 동아일보사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고, 오랜 세월 거리의 언론인이 되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프로듀서·아나운서들은 경영진의 배신에 항의하며 닷새 동안 농성을 벌이다가, 1975년 3월17일 미명, 회사 측이 동원한 폭도들에게 떠밀려 강제로 쫓겨났다. 나는 동지 22명과 함께 2층 공무국에서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통금(通禁)도 해제되기 전인 새벽 3시에 끌려나가 강제로 혜화동 우석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우리는 병원 측의 치료 제의를 거부하고, 단식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기독교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이날 낮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한 동지들 권유로 130시간에 이르는 단식투쟁을 마쳤다. 그날 이해동(동아투위 명예위원) 목사의 부인 이종옥 여사와 안병무 박사의 부인 박영숙(전 평민당 국회의원) 여사 등이 쑤어 가지고 와 나누어 주던 녹두죽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975년의 봄과 여름은 길고도 암울했다. 4월 말에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정부는 모든 언론을 동원해 위기감을 극대화하더니, 5월13일엔 긴급조치 9호를 발표, 온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귀를 막았다. 갑자기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냉각되고 온 나라가 정적에 휩싸인 것 같았다. 그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동아투위 동지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회사에서 쫓겨나온 뒤 꼬박 여섯 달 동안 아침마다 동아일보사 앞에서 침묵시위를 하고 유인물을 돌렸다.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 서울거리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동아투위 동지들은 참고 견뎠다. 당장 맞아줄 일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성급하게 구하려고 애쓰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또 당국의 온갖 훼방 때문에 재취업의 문도 거의 막혀 있었다. 우리는 밤낮 수사기관의 감시를 받을 뿐 아니라, 일종의 ‘공민권 제한 대상자’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 동지들은 권력의 탄압에 굽히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우리가 굽히는 것이 우리의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동아투위 동지들은 누구나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찬송가 460장을 즐겨 불렀다.

“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 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나는 어머니, 아내, 세 살 난 아들과 함께 화곡동에 있는 13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회사에서 쫓겨난 지 두세 달 동안은, 동아투위에 대한 각계각층의 도움이 있어서 그런대로 버틸 만했다. 그러나 실직상태가 장기화하면서 점점 막막해졌다. 아내가 서둘러 조그만 출판사 일자리를 구했지만, 먹고사는 일에 대한 불안감이 언제나 우리를 짓눌렀다. 게다가 회사에서 쫓겨난 이후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이른바 ‘담당’형사들이 늘 주변을 맴돌았고, 걸핏하면 수사기관에서 나와 내 동지들을 연행해 조사했다.

 

2014년 동아투위 결성 40주년을 맞아 아내 윤수경씨와 함께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박종만 위원. /박종만 제공

 

그런 가운데, 나는 해직 두 달 만에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동아투위 두 동지와 함께 집단폭행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런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제작거부 농성에 동참하다가 회사로 복귀한 한 기자가, 동아투위 임시 사무실로 쓰던 세종여관에 만취한 상태로 찾아와 온갖 주정을 다 부렸다. 그때 방안에선 동료 여섯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중 한 기자와 방문객 사이에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졌고, 그래서 다른 동료들이 이를 말리느라 밀고 당기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종로경찰서에서 여섯 명을 모두 연행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세 명을 조직폭력 혐의로 구속했다. 사건은 짜 맞춰진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 듯했다. 알고 보니 단순한 형사고발 사건이 아니었다. 이른바 ‘윗선’의 지시에 따른 일종의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나는 20일 만에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났다. 워낙 말도 안 되는 사건인지라 검찰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1967년 11월 동아일보 공채 10기로 입사한 박종만 위원 등이 2017년 11월 입사 50년을 맞아 서울 무교동에서 모임을 갖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박종만 제공

 

우리가 동아일보사에서 강제 축출된 지 석 달째가 되는 6월로 접어들면서 여러 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동아투위 대변인으로 동분서주하던 이부영 동지가 6월11일 수사기관에 연행되었다.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한 혐의로 이미 두어 달 전에도 한 차례 1주일 동안 구류처분을 받은 일이 있었으므로 처음엔 걱정만 했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동지가 2주가 지나도록 풀려나지 않고 있는 가운데, 6월25일엔 성유보 동지가 신문회관(현 한국프레스센터) 앞에서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

정보부가 일을 꾸며도 크게 꾸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부가 어떤 조직인가. 이부영과 성유보, 두 동지가 동아투위 핵심 중 핵심임을 모를 리 없었고, 따라서 그들을 잡아넣으면 동아투위 활동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정보부가 동아투위 와해공작 일환으로 그들을 체포했다면 그건 그들의 오산이었다. 두 동지를 감옥에 둔 채 그리 쉽게 와해될 투위라면 당초에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동지는 두 달 동안 모진 고문을 받고 8월 중순에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후일 재심에서 무죄 판결).

길고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나니 우리가 회사에서 쫓겨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실직 상태로 무작정 버틸 수는 없는 일이었다. 9월17일, 동아투위는 매일 아침 회사 앞에 도열하여 벌이던 침묵시위를 끝내고, 장기전에 돌입하기 위해 각기 생업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 여름의 끝자락에 나는 화곡동의 작은 아파트를 팔고 수유리 시장 근처에 있는 누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형의 권유로 그 집 차고에다 사과 가게를 차리고, 몇 주 동안 추석 대목을 겨냥한 사과 장사를 해보았다. 그러나 장사는 애당초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여섯 달 동안의 동아일보사 앞 시위를 끝내고, 각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장기 투쟁에 들어가기로 하였지만, 나는 그 후에도 1년 반 넘게 동아투위 상근총무로 사무실을 지켰다. 함께 투쟁의지를 다지던 동료 두 명이 감옥살이하는데, 나만 내 살길을 찾아 나서겠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나는 투위 사무실을 지키는 상근총무를 맡기로 했다. 그 가을과 겨울을 넘기면서 투위 사무실은 점점 썰렁해져 갔다. 세종여관을 떠나 내자동 쪽으로 옮긴 투위 사무실은 매일 권영자 위원장과 안성열 선배, 나, 세 사람이 지켰고, 일자리를 찾지 못한 동지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리고 작은 일자리라도 찾은 동지들은 쥐꼬리만 한 수입이나마 그 일부를 동아투위에 기부했다.

 

박종만 동아투위 위원

 

1975년 그 치열했던 여름,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새로운 예수, 고난 받는 예수를 만났다. 그해 초여름부터 나와 내 아내는, 해직교수들이 주축이 된 갈릴리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갈릴리는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이 일어난,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이 살던 땅. 교회 이름은 바로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안병무,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이문영, 김찬국 등 해직교수 6~7명이 돌아가며 설교를 했다. 사실 나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이후 그때까지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렇게 생활에 파묻히면서 학창시절 간절히 소원했던 성직의 꿈을 완전히 접고,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는 일마저 게을리하고 있었다. 믿음은 회의의 구름에 휩싸이고, 헛똑똑이의 지적 오만은 하늘을 찔러, 순진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우습게 여기고, 기독교의 여러 교리나 제도를 백안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교회 건물도 없이, 틀에 박힌 형식도 없이, 참석자들이 빙 둘러앉아 예배드리는 갈릴리교회에서 나는 기독교의 새로운 모습과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민중의 벗 예수를 알았고, 착취와 굶주림의 현장에 계시는 예수를 알았으며, 모든 억압에서 풀어주시는 해방자 예수를 알았다. 내 믿음은 되살아났고, 나는 이 땅의 해방과 평화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실업 3년째가 되어가면서 살아가는 일이 더욱 팍팍해졌다. 아내가 임시직 일자리마저 잃고 쉴 때는 더 그랬다. 결혼반지며 돌 반지며 집안의 금붙이는 모두 팔아 썼지만, 정말로 견뎌내기가 힘겨운 상황도 가끔 닥쳐왔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해진 아내는 장사를 해보겠다고 했다. 남대문시장 근처에 새로 생긴 새로나 백화점이라는 곳에 두 평짜리 스낵 가게를 내고 우동과 부침개 등을 팔았다. 그러나 대학을 나온 뒤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한 아내가 백화점 한 모퉁이에서 장사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을까?

힘만 들고 장사는 잘 안되니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조그만 구멍가게에까지 정보기관의 이른바 ‘담당’이라는 자가 뻔질나게 찾아와 “지금 남편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아느냐? 잘못하면 패가망신하니 하지 못하게 설득해라.”때때로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니 그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결국 아내는 몇 달 만에 그 일을 접고 말았다. 당시 남대문시장에선 홍선주 선배, 김명걸 선배, 김두식 동지 세 분이 옷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도 오래 못 견디고 문을 닫았다.

나는 2년 가까이 동아투위 상근총무를 맡으면서,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각계각층의 연대투쟁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그래서 기독교 중심의 인권운동협의회에도 관여하고, 목요기도회 같은 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에도 직간접적으로 동참했다. 나는 신문사에서 쫓겨나올 때까지, 언론자유만 보장된다면 박정희 독재체제가 아무리 강고하더라도 머지않아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독재정권만 무너지면 우리 사회가 훨씬 살기 좋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거리의 언론인이 되어, 동일방직을 비롯한 노동현장의 아픔을 알게 되고, 그들의 한 서린 생존권 투쟁을, 그들의 외침을,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으로 공감하게 되면서, 단순한 정치적 억압체제의 붕괴만으로는 사회 전체의 근본적 변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수유리에 있는 누님 집에서 살았는데, 내 자형과 고향이 같다는 ‘담당 형사’가, 그걸 핑계로 걸핏하면 찾아와서 내 동향을 물어 가곤 했다. 또 1976년 3월1일 ‘3.1민주구국선언’발표 이후, 해마다 3‧1절이나 광복절 같은 국가기념일만 되면 이른바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연금이 되풀이되었는데, 나도 5~6일씩 두 차례 연금되는 경험도 했다. 4~5명의 경찰관과 방범대원 등이 집 앞에 차 한 대를 세워놓고, 아무 법적 근거도 없이 나를 집안에 가둔 채 동네 목욕탕조차 가지 못하게 24시간 감시했다. 실로 법은 있으나 법이 소용없는 무법천지의 세월이었다.

긴급조치9호 발효 이후 잠시 냉각됐던 민주화운동은 1976년 후반기 들어 다시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인권문제를 앞세운 카터의 당선이 유력해지기 시작하면서 더욱 고조돼 갔다. 동아투위 사무실도 무언가 모를 희망으로 부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의 움직임에 일희일비하면서, 때로는 의기소침해지고 때로는 큰 기대를 걸어보곤 하던 일이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그때까지는 그랬던 게 사실이다.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다시 고조되기 시작한 1977년 4월, ‘민주구국헌장 서명사건’이 발생했다. ‘민주구국헌장’이란 그해 3월에 함석헌 선생 등 재야인사 10명이 발표한 문건으로, 1976년 3월에 있었던 ‘3.1민주구국선언’사건 최종판결에 앞서 시국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철폐를 촉구한 것이었다. ‘헌장’이 발표되자 이를 지지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동아투위 위원들도 서명에 동참했다. 이 사건으로 동아투위 위원 50여명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하루 정도씩 조사를 받았다. 나는 서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엿새 동안 조사를 받았다.

이 사건이 있고 동아투위에선, 투쟁노선을 둘러싼 약간의 설왕설래가 있었다. 일부 투위 위원들은 투쟁의 대상을 동아일보사로 한정시키고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에 대한 원론적 주장만 펼쳐나가는 것이 옳다는 입장인 반면에, 다른 투위 위원들은 각계각층의 민주화운동세력과 폭넓게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독재투쟁을 펼쳐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동아투위는 여러 논의를 거쳐 적극적인 반독재투쟁 쪽으로 노선의 가닥을 잡았다.

그 무렵, 여성의 몸으로 2년 동안이나 온갖 신변의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힘들게 동아투위를 이끌어 온 권영자 위원장이 새 위원장 선출을 요청했다. 동아투위는 권 위원장의 고충을 이해하고, 안종필 선배를 2대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에 따라 나도 자연스럽게 상근총무 짐을 내려놨다. 새 총무는 자유언론실천선언 당시 기협분회 총무를 맡았던 홍종민 동지가 맡았다.

나는 상근총무 짐을 내려놓은 뒤에도 거의 매일 동아투위 사무실을 드나들면서, 투위 동지 여럿이 함께 하던 ‘주간시민’이나 다른 기관지 같은 데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1978년 초여름부터는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에서 매주 한 번씩 내는 ‘인권소식’을 만드는 일을 했다.

살아가기는 여전히 힘들었지만, 나도 아내도 그걸 크게 불편하게 생각하거나 한탄하지도 않았다. 그때는 젊어서 그랬을까? 되돌아보면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았나 싶을 만큼 살아가기가 팍팍하고 어려웠는데, 어디서 그런 활기와 여유가 생겼던 것일까? 그때가 언제이던가? 투기 광풍이 몰아치던 70년대 중후반 아니었던가? 자고 나면 달라질 만큼 집값은 다락같이 오르는데,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집 한 칸 없이 살면서도, 기죽지 않고 씽씽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나도 아내도 철이 덜 들었던 탓일까? 아니다. 그때 우리에겐 믿음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강하고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셨다’는 믿음이 있었다. 박정희 독재만 무너지면 자유롭고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역사는, 뒷걸음질 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웃음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살 수 있었다.

 

* [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 시리즈는 2024년 3월 22일부터 한국기자협회와 뉴스타파에 매주 금요일자로 동시 게재되고 있습니다. 이글은 2024년 4월 26일(금) 한국기자협회에 게재된 글 전문입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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