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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권선거’ 폭로와 ‘중립내각’

- 동아일보 대해부 4권 - 19장

기사승인 2023.02.01  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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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국이 연말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던 1992년 8월 31일 충남 연기군 군수를 지낸 한준수가 놀랄만한 폭로를 했다. 그해 3월에 실시된 제14대 총선에서 광범위한 관권선거가 자행됐다는 것이다.

 3당 합당 이후 처음 실시된 제14대 총선에서 노태우 정권은, 3당 합당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6공의 치적을 인정받는 동시에 연말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에 오르기 위해 ‘한맥회 사건’ ‘안기부원 흑색선전물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등 온갖 부정을 자행했었다. 직전 군수의 폭로로 3대 부정선거 말고도 행정권이 총동원된 광범위한 관권선거가 자행됐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전 연기군 군수의 놀라운 폭로

 동아일보 8월 31일자 1면에는「 “14대 총선 관권부정 있었다” / 충남지사가 보낸 수표 등 증거물 제시 / 한준수 전 연기군수 양심선언」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한준수 전 충남 연기군 군수(61)는 31일 “정부가 지난 14대 총선에서 여당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광범위한 관권 선거부정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면 서 그 증거물로 이종국 충남지사가 내려 보낸 선거관련 자금 2천만 원 중 10만원권 자기앞수표 90장과 선거지침서 등 공문서 15종을 공개했다. (…) 한편 이종국 충남지사가 직접 한 전 군수에게 보낸 ‘지방단위 당면 조치사항’이라는 제하의 선거지침서는 공천 탈락자에 대한 설득 무마, 선거공고 후에도 친여 무소속인사를 끝까지 관리할 것, 야권의 장외집회에 대해 지역 선관위와 협조, 공동 대응할 것 등의 관권 개입을 위한 구체적 지침이 적혀 있었다.
 
 이 기사는 5단 주요 기사로 편집됐는데, 1면 머리에는「행락 무질서 다시 활개」라는 한가한 기사가 올라서 동아의 기사 가치 판단 능력이 다소 아쉬워 보였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다음날인 9월 1일자부터 스트레이트기사와 사설, 사내 칼럼, 외부 칼럼 등을 총동원해 그 사건을 키워 나갔다. 1일자 1면 머리기사(「‘관권선거 폭로’ 파문 확산 / 정치특위 공방… 여야 대응책 부심 / “공무원 직접 개입 입증된 셈” 야 / “폭로전… 현실적으로 불가능” 여」,「검찰, 진상조사 착수/ 한 씨 소환키로」), 3면의「정가 관권선거 회오리 / “인사 불만서 비롯된 것… 파문 축소 부심” 여 / “대선 때 또 자행” 장 선거 연내 관철 총력“ 야」등 스트레이트기사와 해설기사는 물론「14대 총선 관권부정 규명하라」라는 사설과「‘부정폭로’와 인신공격」이라는 제목의 ‘기자의 눈’ 등을 총동원해 한준수의 폭로를 옹호하고 정부·여당을 질타하면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한준수 전 충남 연기군수의 관권부정선거와 관련한 양심선언을 놓고 정부와 여당은 일단 한 씨 개인 차원의 문제로 의미를 축소하려는 인상이 역력하다. 정부·여당 관계자들은 한 씨의 전력·인간성까지 들먹이며 그에 대한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 한 씨에 대한 민자당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박희태 대변인은 “한 씨가 과거에도 면직됐다가 행정소송으로 복직된 적이 있으며 공직생활에서 풍파가 많았던 사람” (…) “한 씨의 기자회견은 인사문제로 극단적인 한계상황에 빠진 한 공무원의 돌출행위가 아니겠느냐”고 애써 의미를 축소시켰다. 김용태 민자당 원내총무도 “한 씨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면 민선군수로 나서려고 이번 일을 벌인 것 같다”고 평가절하했다. 검찰 공안 관계자는 한 씨 폭로의 진위를 조사해보지도 않고 “한 씨부터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나타냈다. (…)
  이 같은 과잉 반응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실시 여부 문제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인한 파문을 축소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과거 보안사 사찰이나 군 부재자투표 부정·감사원 비리 등이 폭로됐을 때에도 정부·여당은 폭로자들에 대한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폭로 내용은 나중에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조직’ 내부의 기밀을 발설한 사람을 곱게 보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풍토다. 그러나 내부고발자(Deep Throat)의 용기 없이는 조직의 비리나 범죄행위가 드러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검찰 등 관계당국이 엄정하고 철저하게 조사해서 진위를 밝혀내어 주기를 어느 때보다 기대해 본다. 

  
 다음날인 9월 2일자에는 한승헌(변호사)의 외부 칼럼이 ‘동아시론’ 란에 실렸다. 제목은「‘미봉책’ 아닌 총력 수사를」이었다. 그는 “필시 전국적이었을 그런 부정에도 불구하고 민자당이 국회의석의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면서 “언필칭 민주화를 이룩했다고 자찬하는 정권이라면 관권 부정선거의 책임 또한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한 씨의 양심선언에 대한 정부·여당의 반응은 너무도 뻔뻔스럽다. (…) 이와 같은 적반하장격인 치졸한 반응은 오늘의 정부·여당이 예전의 독재정권과 체질 면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확인시켜 주는 실례다. (…) 이 정권은 한 씨의 주장에 입각하여 진심으로 관권선거의 부정 규명에 힘을 기울이기보다는 부정의 엄폐와 본질문제의 희석에만 머리를 쓰는 기미가 보인다.
  이것은 관권선거 못지않은 또 하나의 파렴치 행위다.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 이런저런 말장난도 주권자인 국민을 여전히 우롱하는 짓으로서 용서할 수가 없다. 연기군에서 공무원이 부정선거를 했다면 민자당 후보가 왜 낙선했겠느냐느니,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관권 개입에 의해 좌지우지 될 정도의 수준을 넘어선지 오래라느니 하는 말은 정말로 국민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수준 미달의 대사일 뿐이다.
  지금 정부·여당이 당장 해야 할 일은 타성적인 부인이나 엄폐가 아니며 ‘괘씸죄’에 사로잡힌 비방이나 보복은 더욱 아니다. 정부 당국은 한 씨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면서 그가 밝힌 부정선거에 관해서 철저한 수사를 펴지 않으면 안 된다. (…) 우리는 한 씨가 양심선언에서 밝힌 바와 같은 관권부정이 충남 연기군이라는 한 지역에만 국한되었으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따라서 연기군에만 국한시키는 한계 수사에 그칠 것이 아니라 대검이 직접 나서는 전국 규모의 수사가 전개되어야 옳다고 믿는다. 또한 지난번 총선의 선거사범 공소시효(선거일 후 6개월)가 이달 24일 자정으로 끝나는 점을 고려하면 검찰의 즉각적이고 총력적인 수사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그런데도 만일 검찰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공소시효 기간을 넘겨버린다면 필시 그것은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 다시금 관권선거를 조장하는 고도의 직무유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법의 명문을 정면으로 어겨가면서까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의 실시를 거부하고 있는 집권세력의 속셈이 무엇인지도 극명하게 뒤집어 보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정부·여당은 부정의 엄폐에 급급하는 미봉책보다는 뒤늦게나마 6공 차원의 선거부정을 국민 앞에 밝히고 사죄해야 한다. 그리하여 ‘변화와 개혁’을 내세운 김영삼 체제의 도덕성·정직성을 실증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

 이후에도 동아일보는 연기군의 관권 부정선거와 관련된 추가 사실들을 잇달아 보도하면서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최대한 촉구했다. 민주당 대표 김대은 대통령 노태우, 민자당 총재 김영삼의 사과를 요구했다. 김영삼은 관권선거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진상을 규명해 엄벌하도록 하겠다며 발뺌을 했다. 그럼에도 한준수의 자택에 협박전화가 잇따랐고 수사는 엉거주춤했다. (9월 3일자 23면) 

 동아일보는 4일자 사설(「연기 사건 철저히 수사하라」)과 8일자 사설(「연기군과 충청남도뿐인가 / 관은 총선 개입 어디까지 했나」)을  통해 그 사건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8일 사설은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연기군 이외의 충남도 내 군에서는 같은 일이 없었는가. 충청남도에서만 있었던 일이었는가. 타 도 타 군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그 책임은 당시 내무장관까지로 끝나는가. 내무부라는 행정조직 이외에 정보기관이 개입하고 공작한 사실도 폭로되고 있지 않은가. 국민적 의구심의 핵심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 이종국 지사를 본격 수사한다면 관 개입의 총체적 윤곽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안기부에 대해서도 수사를 해야 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3·24 총선에 관이 개입한 정도와 범위, 그리고 그 책임 등 사건의 전모를 숨김없이 밝혀내는 것이다.

 한준수의 잇단 폭로가 속속 사실로 드러나자 다급해진 정부·여당은 9월 8일 경찰력을 동원해 민주당사에 피신해 있던 그를 강제 구인했다. 9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한 씨 구인’ 정국 급랭 / 야, 당사 경찰 투입 강력 비난 / “폭거” 규정… 당력 총동원 투쟁; 민주 / “법 집행 방해한 쪽 책임” 반박; 민자」라는 기사가 올랐다. 주요 기사는「한 씨 철야 신문… 구속 / 부지사 소환 ‘지침서’ 등 추궁 / 이 지사는 내일 소환」제목의 4단 기사,「‘관권 선거 방지’ 곧 선언/ 김영삼 총재 대선 제도개선 포함」이었다. 3면에는「연휴 편승 ‘파문 진화’ 시도 / 검찰 구인 배경과 수사 전망/ 이 지사 사법처리로 매듭지을 듯」이라는 해설기사, 22면에는「당원 1명에 전경 4∼5명 붙어/ 한 씨 강제구인 안팎 / 검사·변호인 가족면회 싸고 맞고함」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한준수를 강제구인해 놓고 축소 수사에 급급하던 검찰은 드디어 9월 17일 한준수와 민자당 지구당위원장 임재길을 구속하고 충남지사 이종국을 불구속입건 함으로써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동아일보는 18일자 1면에 「‘관권선거’ 진상 규명 “실종” / 검찰 서둘러 수사 종결 / 자금·지침서·대책회의 흐지부지」라는 기사를 싣고, 사회부장 전만길의 ‘오늘과 내일’(「그래도 기대했는데…」) 칼럼, 그리고「법과 정의는 땅에 떨어졌다」라는 사설 등을 통해 항의의 소리를 쏟아냈다. 전만길은 칼럼에서 “검찰이 ‘도둑이야’ 하고 소리친 사람은 잡아넣고 달아난 ‘큰 도둑’은 끝까지 끈질기게 추적하지 않고 놓아준 꼴이나 진배없다. (···) 기대에 못 미  치는 검찰 수사 결과로 우리 사회는 앞으로 상당 기간 이 사건 후유증으로  시달리게 될 것 같다”고 개탄했다. 

「법과 정의는 땅에 떨어졌다」라는 사설은  “검찰은 이번 사건이 연기군에 한정된 국지적 사건이며 관의 개입을 유도한 사람은 임재길 후보 한 사람 뿐이었던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며 “전체 모양으로 볼 때 임 후보와의 공모아래 선거 때의 군수인 한 씨 혼자 과잉 충성을 한 끝에 내가 그랬노라 폭로하고 옥에 갇히는 줄거리로 사건 수사가 끝나버린 셈이다”라고 비판했다.

  (…) 이 나라에 참다운 의미의 검찰권이라는 게 있는 것인가. 검찰에 독점적으로 맡겨져 있는 수사권과 기소권이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가. 한 씨의 폭로가 던진 충격과 그간의 파장에 비추어 검찰의 수사 결론을 보는 국민의 마음은 허탈하기 그지없다. (…) 큰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보아 온 일이지만 이러고서야 법의 위기요 정의의 위기요 국권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검찰은 국가안전기획부가 주도한 대책회의가 법적으로 잘못이 없다고 결   론짓고 있다. 안기부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보안사건을 다루는 것이 그 임   무인 안기부가 선거대책회의를 주관할 수 있는 것이며 안기부 조정관이 역   내의 관리들을 오라 가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검찰은 그   부분에 법적으로 잘못이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 무엇을 더 말할 것인   가. 정의는 땅에 떨어졌다. 통탄스러울 뿐이다. 


 노태우의 민자당 탈당

 동아일보 9월 18일자 1면에는「노 대통령 민자 탈당 / 개각 내달 초에 단행 / ‘선거중립내각’ 원칙 합의 / 야 의견 폭넓게 수용키로; 노·김 회동 / “관권선거 국민에 송구” 노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놀라운 기사가 터져나왔다. 한준수의 양심선언으로 궁지에 몰렸던 집권 여당이 극약 처방을 쓰는 것으로 읽혔다. 다음날인 19일자 1면에는「선거 중립내각 구성 관권 개입 원천배제 / 노 대통령 민자 탈당 파문 / 여권이 흔들린다」, 2면에는「강공… 반공… ‘힘 겨루기’ 사흘 / 청와대·상도동 ‘개각 갈등’ 전말」, 3면에는「“당·정 ‘파경’인가” 충격과 당혹 / 노 대통령 ‘탈당’ 여권 파장」등의 기사가 나왔다.

 같은 날짜 사설(「노 대통령의 민자당 당적 포기)은 “노 대통령의 중립 결심은 충남 연기군의 관권선거 개입 사건으로 어지러워진 정국 수습방안의 하나로 이뤄졌다”고 분석하고 “검찰의 축소 수사 태도에 대한 (…) 국민감정이 어떻게 폭발할 것인지 참으로 조마조마한 상태임을 정부는 먼저 알아야 한다. 노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것은 검찰에 대해 철저하게 재수사하도록 지시하는 것이다”라며 “연기군 관권 선거개입 사건에 대한 재수사 지시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연내 실시에 대한 결단, 이 두 가지의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 한 어떠한 처방도 본질을 호도하려는 미봉책으로 지적될 수 있다”고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21일자 사설(「중립 결심과 중립내각의 조건」)은 중립내각에 대한 찬성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노태우 대통령의 무당적 중립 결심은 이 나라 초유의 엄청난 정치실험을 의미한다. (…) 그러나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엄청난 정치실험이 실패할 경우 그로 인해 빚어질 반작용은 생각하기조차 가공스럽다. 노 대통령의 중립 결심은 공정한 대통령선거에 모아져 있다. 노 대통령은 깨끗한 선거 관리를 위해 중립적인 선거내각 구성을 발표했고 권력의 기반을 스스로 포기하는 민자당 탈당까지 결행했다. 정치적 모험이다. 제도상의 혼란마저 염려케 하는 그 같은 정치적 모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해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선거 때마다 되풀이 돼온 정통성 시비의 근본 원인을 말끔히 씻어보자는 국민적인 여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
   노 대통령은 자신의 중립 결심에 대한 실증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노 대통령은 첫째, 자신이 철저한 중립적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 그리고 노 대통령의 중립 결심이 어떠한 조건에서도 확고한 것임을 믿  해야 한다. 민자당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보여준 노 대통령의 결심 번복이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 둘째, 대통령의 중립 의지 못지않게 중립내각에 참여하는 인물의 중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 당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인물로 새 내각을 구성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 셋째, 선거 관리의 중립성을 확고히 하기 위한 제반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 (…) 넷째, 정책의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 아울러 정치권도 각성해야 한다. 이 나라 초유의 엄청난 정치실험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책임이 또한 막중하다. 자당의 이기주의에 빠져 중립내각 구성 자체를 둘러싸고 시간을 낭비할 경우 그 결과는 정치적 혼란과 행정의 공백을 가져올 것이다. 이 점 3당의 대통령후보들이 깊이 새겨두어야 할 대목이다.  

 
 동아일보는 9월 22일자 2면에 중립내각에 대한 반응은 대체적으로 우호적이라는 내용의 기사(「전환기 ‘새로운 군’ 위상 다짐 / 노 대통령 탈당 선언과 군부 반응」)를 내보냈다. 24일자 3면에는「검·경 정치적 독립’ 기대」, 25일자 3면에는「“‘친위대’ 오명 씻자” 자성 소리 / 안기부 기무사 / 정치적 중립 시대적 요청으로 판단 / 내부 토의 부산… ‘본연 업무’ 충실 다짐」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개각의 성격과 폭, 총리와 장관 후보를 둘러싸고 각 당의 이해가 엇갈리면서 난항을 거듭했다. 동아일보는 24일자 사설)「3당 합의의 총리와 선거각료」), 27일자 사설(「3당 대표회담에 바란다」), 29일자 사설(「3당 대표 합의의 중요성」)을 통해 거듭 입장을 밝혔다. 29일자에는 박권상의「‘적극적 중립’의 초당파 내각을」이라는 글이 ‘동아시론’에 나왔다. 

  사이비 민주주의(facade­democracy)란 말이 있다. (…) 무엇보다도 선거는 기득권 세력이 조작한다. (…) 거기서 실질적인 정권 교체는 있을 수 없었다. (…) 바야흐로 대통령선거가 막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조직적인 ‘행정선거’의 하수인이었던 한준수 군수의 양심선언이 터졌다. (…) 그것은 체념과 타성에 젖은 이 땅의 양심에 다시 한 번 불을 댕긴 것이다. 규모가 크게 다르고 방법이 대단히 세련되었으나 본질에 있어 3·15 관권선거와 궤를 같이 한다.
  그런 뜻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9·18 조치는 역사 발전의 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 9·18 조치는 따라서 겉과 속이 다른 사이비 민주주의가 붕괴하는 역사의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은 ‘일부 지역’이라는 단서를 붙였으나 부정선거가 자행되었음을 시인하고 이에 ‘송구스럽다’고 사과하였다. 관권 부정선거가 ‘아직도 뿌리 뽑히지 않는 지난 시대의 폐습을 근본적으로 청산하기 위해’ 대통령 스스로 민자당 당적을 떠나고 중립 선거관리 내각을 구성하겠다는 것이다. 비정상적이지만, 그러나 비장한 용단이다. (…)
  첫째, 노 대통령의 9·18 조치 역시 겉과 속이 같아야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구집권당과 완전히 손을 떼고 이를 실증하는 부수적인 제반 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기대하고자 한다. (…) 둘째, 중립선거관리 내각 역시 명실상부하게 선거에 중립을 지키고 엄정한 관리 심판자 역할을 맡아야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중립 선거관리 내각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런 내각을 구성하느냐에 있다. (…) 오히려 정치 역량이 비상하고 따라서 민자·민주·국민 등 특정 정치세력에 편들지 않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고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적극적 중립의 비상한 ‘정치가’가 내각을 주도해야 한다. (…) 셋째, 그것은 총리 및 국무위원의 임명에 있어 헌법 절차를 제대로 이행하는 데서 가능하다. (…) 총리와 각료 임명이 최종적으로는 대통령의 책임이고 권한이지만, 결코 대통령만의 이른바 ‘고유권한’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 넷째, 대통령은 따라서 총리 지명에 앞서 각 당 대표의 의사를 묻고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가능하면 만장일치로 ‘동의’받을 수 있다는 사람을 총리후보로 지명하는 것이 순서다. (…)
  다시 한 번 9·18 조치가 이 땅에 참된 민주화의 위대한 첫걸음이 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임을 지적하고 중립적이면서도 강력한 정부가 치르는 진정한 공명선거만이 민주적 대타협을 이뤄 다가오는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싶다. 


  절반의 성공도 못 거둔 ‘중립내각’

 노태우는 10월 5일 공식 탈당한 뒤 7일 교총 회장 현승종을 총리로 임명했다. 9일에는 국가안전기획부장에 청와대 경호실장 이현우, 내무부장관에 전 법원연수원장 백관현, 법무부장관에 전 법원행정처장 이정우, 공보처장관에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유혁인, 정무제1장관에 김동익 중앙일보 고문 김동익을 임명하는 개각을 단행했다. 동아일보는 10월 6일자 사설(「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중립을」) 통해 “(새 내각이) 정당의 눈치나 살피고 여론의 흐름에 매달리는 소극적인 중립은 용인될 수 없다. 기회주의적 처신이나 보신주의적 무사안일을 탐할 계제는 더욱 아니다”라면서 “합리적인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내각이야말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중립내각이다. 중립내각의 참뜻을 적극적으로 살려주기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 당부가 ‘연목구어’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기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고려대 교수 한승주가 쓴 10일자 ‘동아시론’은 다음과 같다.

  (…) 정치권과 언론은 중립내각이 공명선거를 보장하는 즉효약이나 되는 듯 떠들고 있지만 도대체 공정하고 민주적인 선거가 다른 나라에서는 다 중립내각이 아닌 정당·부 밑에서도 잘만 치러지는데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대통령이 탈당을 하고 중립내각을 세워야 한다는 말인가. (…) 하기야 총리를 비롯한 내각이 정치적으로 ‘중립’인 것이 중립이 아닌 것보다는 공정한 선거를 치를 가능성이 더 크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럴듯한 이야기다. 그러나 중립내각의 부작용이 그 기대효과보다도 클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선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중립내각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실제로 공명선거를 위해 필요한 조치와 행동이 등한시되고 있다. 자치단체장 선거문제는 물론이고 연기군 관권선거문제도 전 군수 한준수 씨가 옥중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가운데 흐지부지되어가는 양상이다. 공정보도가 이슈로 되고 있는 MBC 사태도 해결은커녕 회사와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악화와 확대로 치닫고 있다. 국민은 우직한 투우와도 같이 중립내각이라는 마타도의 적색 케이프를 향하여 맹목적인 기대를 갖고 애매한 방향으로 돌진하는 것은 아닌지. (…)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이제부터는 헌법도 선거법도 그리고 중립내각도 좀 ‘이론적’으로 검토하고 논의해볼 일이다. 그렇게 따져보았을 때 정권의 마지막 순간에서 아무리 그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의 여당 탈당이나 중립내각의 출현은 아마도 답습할만한 선례가 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여론이 일제히 한 곳으로 몰려갈 때 이렇게 다른 의견을 싣는 것도 신문의 역할일 것이다. ‘중립내각’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한승주의 우려는 대선 국면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안기부는 여전히 ‘북풍’을 불러 일으켰으며, 민자당을 탈당하려는 국회의원 김복동을 납치해 탈당을 막았다. 그리고 대선 직전에는 부산에서 모든 기관장들이 복국을 먹으면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김기춘의 충동질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을 연출하게 된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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