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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번호 179… 나는 '3사하 7방' 독방에 수감됐다"

- [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14) 이종욱(李宗郁) 동아투위 위원(상)

기사승인 2024.07.01  10: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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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1975년 3월17일 새벽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나오고 있는 동아일보 기자들. 사진 가운데 중절모를 쓰고 있는 제임스 시노트 신부가 보인다. /동아투위

 

1975년 3월17일은 ‘고달픈 삶’이 아니라 ‘축복된 삶’의 출발점이다. 그러니까 동아일보사 2층 공무국에서 농성 중이던 그때 회사 측에서 고용한 폭도들에 의해 거칠게 끌려나온 그날은 반어적으로 표현하자면 ‘기묘한 축복의 날’이다. 무엇보다 이날이 없었더라면 나의 외동딸 이가영도 이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해직 기자라는 사실이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한참 지나서야 속내를 털어놓은 ‘이가영의 어머니─현일숙 여사’와의 인연도 맺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인천문화재단에서 펴내는 웹진 ‘플랫폼’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 <‘마당’, 말하는 잡지에서 보여주는 잡지로>(통권 7호. 2008년 1,2월)를 기고했었다.

“세상살이는 오묘해서 역경과 고난이 행운과 복으로 변하기도 한다. 1975년 3월, 동아일보사에서 강제해직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정년까지 한 곳에서 일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해직된 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한 신문, 두 월간지의 창간에 참여해 일간, 주간, 월간지뿐만 아니라 출판사에 이르기까지 활자매체의 주요 영역을 두루 거치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월간 ‘마당’과 ‘한겨레신문’으로 말미암은 행운은 각기 우리나라의 잡지사와 신문사에 남을 매체의 창간에 미력이나마 기여했다는 것이고, 복은 두 매체의 창간호에 매우 중요한 ‘사진 설명’을 쓴 것이다. ‘한겨레신문’ 창간호 1면 중앙에는 그 당시로는 ‘과감한’ 백두산 사진이 실렸으며, 문화부장이었던 나는 편집부 심채진 선배의 ‘지시’로 사진 설명을 쓰게 되었다.

한편 ‘마당’ 창간호(1981. 9) 표지사진은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손이다. 마침 대하소설 ‘토지’ 제4부를 연재하기로 한 터라, 글쓰기, 사진 찍기, 일하기 등 온갖 작업의 도구인 손의 노고를 기려 표지로 쓰기로 한 것이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손의 값어치를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공작하는 인간)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 그러나 손은 인간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몫을 담당해 왔으면서도 언제나 가장 쉽게 외면당해 왔다. 창간호의 표지로 ‘손’을 선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당연히 1975년 3월17일은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의 시발점이다. 서울여대 이우정 교수, 이해동 목사, 영종도에서 오신 제임스 시노트(한국명 진필세 야고보, 2014 선종) 신부를 비롯한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이 새벽의 폭거를 목격한 증인이다.

3월17일, 전날이었는지 그 전날이었는지 아슴푸레하지만, 2층 공무국에서 제작거부 농성을 한다고 해서 참여하러 들렀다가 회사 측이 출입구를 봉쇄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당시에는 신문을 활판 인쇄로 제작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들은 삼각대 모양의 목제 구조물에 쌓여 있는 조판용 납 활자를 보호하기 위해 신문지로 겹겹이 감쌌으며, 그 사이 통로에서 농성했다. 내가 있던 줄에는 이종덕 선배와 국흥주 위원이 있었고, 근처에 박종만, 홍종민 위원이 있었다.


김종철, 정연주 위원과 ‘말콤 엑스’ 공동 번역

첫 직장은 중앙대학교에서 인수해 발행했던 주간시민이다. 수원대학교 총장도 지낸 이달순(李達淳) 발행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인 최은희 여사(1904~1984)의 맏아들이다. 이계익 선배가 주간시민에 입사한 것은 이달순 발행인과 양정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중앙대에서 파견한 이달순 사장은 동아투위 이계익 위원을 편집부장(정확히는 ‘주간’)으로 초빙하고, 이종덕·이기중·김언호·이종욱(신동아부 소속)·이영록·고 김성균 위원들로 편집 간부진을 구성했다. 개편 요청에 부담을 느낀 이계익 위원이 1976년 5월 사임하자, 이종욱(동아일보 편집국 소속) 위원이 편집부장을 맡아 잡지의 환골탈태를 이끌었다. 그는 박종만·이태호·유영숙 위원도 모으고 학생운동권 출신 오성숙(김세균 교수 부인)·이혜경(유인태 의원 부인)·김선숙·이상우·오세구 등도 채용했다.

주간시민은 ‘시민 시단’이라는 고정란을 만들어 매주 고은·신경림·정희성·박몽구 등 참여주의 작가들의 시를 싣고, ‘이달의 문제작’에는 기왕에 발표된 저항주의 작가들의 단편소설도 실었다. 예비군 훈련을 주제로 한 송기원의 단편 ‘집단’을 실었다가 국군 보안사의 수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자 서울시는 아예 잡지 구매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시사 정보에 굶주린 서울시민들 사이에 잡지의 인기가 높아져 발행부수가 3만5000~4만부에 이른 덕분에 독자 운영이 가능했다.”<[길을 찾아서] ‘주간 시민’ 새 언론 위한 소중한 실험-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64). 성유보[이룰태림]. 한겨레신문, 2014-04-01>

시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재의 ‘작가회의’ 전신) 회원들이다. 이에 비추어볼 때 ‘시민 시단’은 내가 제안해 시작한 기획인 듯하고, 출판사(한길사)를 내기 위해 퇴사한 김언호 위원과 함께 동반 사직한 이후 시 청탁은 이종욱(李鍾旭) 선배가 맡았던 듯하다. 이 선배가 이동순 시인에게 원고 청탁한 일을 이 시인이 <동아일보 해직·한겨레 창간 ‘두 이종욱 기자’와의 인연>이란 제목의 글로 남긴 것이 그 증거이다. 이 시인은 ‘반시’ 동인 1집에 참여한 뒤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했다. 나는 3집(1978년)부터 참여했다. 4집에는 아프리카 시인 5인의 시 18편을 번역, 게재했다(이 작업의 확대판이 1983년에 편역해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현대아프리카 시선’이다). 이듬해 창작과 비평 1979년 가을호의 ‘특집: 제3세계의 문학과 현실’에 <아프리카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기고했다. 1988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아프리카지역연구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한 것도 이러한 작업들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듬해인 1977년 창작과비평사에 입사했다. 백낙청 발행인과 친분이 있던 황명걸 선배의 추천에 힘입었던 것 같다. 1978년 초, 발행인이 영남대 염무웅 교수(문학평론가)로 바뀌었고, 사무실도 종로구 수송동에서 서대문구 냉천동의 폐교로 옮겨졌다. 당시 편집부에는 나중에 대표를 지낸 정해렴 선생과 나, 둘뿐이었다. 지금의 창작과비평사 규모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느낌이 든다.

 

창작과비평사가 1978년 펴낸 '말콤 엑스' 하편. 이종욱 위원은 당시 김종철, 정연주 위원과 함께 말콤 엑스의 자서전을 번역, 출간했다.

 

1978년 7월에는 말콤 엑스의 자서전(The Autobiography of Malcolm X)을 ‘말콤 엑스’(1978)라는 제목으로 김종철, 정연주 위원과 함께 번역, 출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틴 루터 킹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 급진적인 흑인민권운동가의 ‘혈서 같은’ 저서를 우리말로 옮긴 것은 꽤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원서는 1966년 그로브 출판사(Grove Press)에서 펴낸 것으로,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이다. 말콤 엑스의 구술을 받아 정리한 알렉스 헤일리는 ‘뿌리’(Roots: The Saga of an American Family, 1976)로 전 세계에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최초의 한국어판은 한진출판사 이문구 주간(소설가)의 부탁으로 1977년 종각번역실에서 번역해 펴낸 것이다.

‘말콤 엑스’ 번역 원고를 백 교수는 조판에 들어가기 전 원고 상태에서 꼼꼼히 교열을 보았다. 정해렴 선생에 따르면 ‘말콤 엑스’는 당시 창비에서 펴낸 책 가운데 가장 잘 팔렸다고 한다.

 

1978년 10월 민권일지 사건으로 안종필 위원장 등이 연행되자 동아투위 위원들이 서울 종로 청진동 동아투위 사무실 건물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동아투위

 


잇단 구속으로 동아투위 총무대리 물려받아

1978년 12월4일, 안종필 위원장, 홍종민 총무, 장윤환, 안성열, 박종만, 김종철, 정연주 위원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뒤이어 이듬해 1월15일에는 윤활식 위원장 직무대리와 이기중 총무대리가 구속되었다. 이른바 ‘10․24 민권일지 사건’이다. 총무대리(위원장대리 이병주)를 물려받은 나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한 듯한 백낙청 발행인의 표정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다.

나는 1979년 1월17일자로 발행된 ‘동아투위 소식’부터 제작에 참여했다. 원고 내용을 ‘가리방’으로 긁은 뒤 등사기 위에서 둥그런 밀대로 밀어 인쇄했다. 사진식자로 모조지에 깔끔하게 인쇄한 투위소식지는 충무로 인쇄골목에 있었던 세진인쇄에서 제작했다. 사장 강은기 선생은 70~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인쇄물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소화한 의인(義人)이며, 동아투위에도 크나큰 애정을 보였다. 이부영 선배와의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1980년 ‘김재규 항소이유보충서’를 찍어낸 뒤 계엄법 위반으로 3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옥중에서 임채정, 이해찬, 장영달 등과 교분을 맺었다고 한다.

이때의 투위 사무실은 당주동 수진빌딩 306호에 세를 들어 있었다. 총무는 나였으나, 대외 업무는 이부영 선배가 도맡아 했으며, 이러한 일들로 구속되는 것도 이 선배 몫이었다. 이 무렵 오정환, 이기중 선배가 자주 들렸고, 오 선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투위 사무실의 유인물과 집기 등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도 했다. 실제로 나중에 ‘그들’이 사무실에 들이닥쳐 나머지 물품들을 압수해갔다.

1979년 7월4일 워커힐호텔에서 세계시인대회가 열렸다. 나를 포함해 이문구, 이시영, 송기원, 이진행, 김영철 등 9명이 만찬회 석상에서 ‘세계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배포하고 성명서를 낭독했다. 이어서 “한국의 시는 죽었다”, “구속문인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우리는 성동서로 연행되어 유치장에서 며칠 지낸 뒤 서울지법 성동지원에서 경범죄처벌법에 의거해 ‘구류 10일’ 처분을 받았다. 이시영 시인은 이때의 경험을 ‘구류’라는 산문시로 남겼다.

 

동아투위가 1977년 1월17일 발행한 '동아투위 소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운명적으로 광주항쟁 현장을 목도

신군부가 12·12군사반란을 일으키자 대학생들은 이에 맞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문인, 언론인들도 이러저러한 반독재 투쟁에 가담했다.

1980년 5월15일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868036)이 발표되었는데, 나는 임재경 선생의 권유로 서명에 동참했고, 남영동(대공분실)에도 함께 끌려갔다.

5월17일 새벽 0시를 기해 신군부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 시간 동아투위 위원들은 수유리 명상의 집에서 ‘새 시대 새 언론’을 주제로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철야토론을 하던 중 이화여대 학생들이 끌려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우리는 토론을 중단하고 서둘러 하산했다.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에 갔더니 안성열 선배, 정연주 위원도 있었다.

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동가식 서가숙(東家食西家宿)’에 들어갔다. 친우 박병진이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집에서 여러 날 잤다. 그러던 중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간사 윤수경 여사가 ‘안전하게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전갈을 보내와, 처가가 있던 광주로 내려갔다. ‘운명적으로’ 광주민중항쟁의 현장을 목도했다.

어느 날 금남로에서 시위 현장 주위를 맴돌다가 박몽구 시인을 만나 음료를 사주기도 했다. 장시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쓴 김준태 시인은 만나지 못했다. 소설가 김남일씨는 소문의 출처가 궁금한 글 ‘소설가 김남일의 80년대 문학의 갈피를 들추며’(문화일보, 2003년 9월24일)에 다음과 같이 썼다.

“창작과비평사에 근무하던 시인 이종욱은 마침 처가가 있는 광주에 내려와 있었다. 5월25일 그는 금남로에서 빨간 잠바를 입은 시인 박몽구를 본다.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복학한 박몽구는 시민대회 사회도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 ‘잡히면 총살형’이라고 생각했다. 항쟁 후 서울에 올라온 이종욱의 뇌리에는 박몽구의 빨간 잠바가 삼삼했다. 하지만 박몽구는 살아남았다. 그는 피눈물을 삼키며 도청 앞에서, 금남로에서, 그리고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자기가 보고 들은 항쟁의 과정을 꼼꼼히 기록했다. 그 기록은 일본으로 넘어가 진보적 잡지 ‘세계(世界)’지에도 실렸다. 박몽구는 서울로 달아났다가 이듬해 체포, 구속 수감된다.”

5월20일 밤에는 광주 MBC 건물이 불길에 휩싸이는 것을 옥상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그 다음날 광주 KBS 건물이 불타는 것은 보지 못했다. 시민과 상인들이 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건네주는 광경도 지켜보았다. 금남로 가는 도중, 빌딩 옥상에서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사람들의 시체를 거적에 감싸 리어카로 옮기는 광경도 목격했다.

5월27일 새벽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들이 시내로 진입하자,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외침이 골목골목을 누볐다. 이불 속에서 엎드린 채 이 절규를 무력하게 듣고만 있던 나는 자괴감에 감싸였다. 애절한 목소리로 가두방송을 한 분은 ‘전옥주’님이었다.

전남도청 앞 광장 맞은편 상무관 강당에 시신들이 안치되어 있다고 해서 가보았다. 2층에서 내려다보니 목관이 즐비했다. 시민들이 모금해 목관을 사서 거적에 싸인 시신을 입관하고 태극기를 덮어 놓은 것이었다, 휘장에 ‘전영진(시몬), 너의 뜻이 길이 빛나리’라고 적힌 관이 특히 눈에 띄었다. 오른쪽 머리에 총탄을 맞고 사망한 그가 박석무 선생의 대동고 제자였다는 사실은 나중에 글을 통해 알았다.


남영동을 겪고 서울구치소로

나는 7월 중순,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채 검은 승용차에 실려 남영동으로 끌려갔다. 거주지가 같은 지역이어서 임재경 선생과 함께 연행되었다. 수사관들은 지식인 시국선언을 추진하고 작성한 사람이 누구인지, 김태홍 한국기자협회 회장이 어디로 도피했는지, 동아투위 총무로서 김대중 선생 또는 이휘호 여사로부터 얼마를 받았는지 등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이틀가량 잠을 안 재우고, 진술서를 계속 쓰게 했다. 찢고 또 찢었다. 주로 만난 민주인사들은 누구이고, 읽은 책은 어떤 것이지도 적으라고 했다. 나는 더 이상 꼬투리를 잡지 말라는 속셈으로 밀로반 질라스의 ‘새로운 계급’을 슬쩍 끼워 넣었다.

나는 ‘끝물’에 끌려간 탓인지, 욕조에서 물고문조차 당하지 않았다. 방마다 돌아다니며 수사관을 거드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었다. 3층의 좁다랗게 경사진 창문 틈새로 숙대입구역이 내려다보였다. 이때 투위원 여럿이 동시에 조사를 받았다. 성유보 선배는 <[길을 찾아서]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 필명 ‘태림’ 에 담아─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75)>에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사실 내가 끌려간 혐의는 이른바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 서명한 것밖에는 없었다. 박세경·이돈명·홍성우·황인철·이돈희·나석호·이범열·강대헌·박인제·안명기·김동정·정춘용·조승형·김제형·조준희·이세중 등 변호사, 임재경·장윤환·정태기·안성열·김명걸·박종만·이종욱·윤호미와 나를 포함한 언론인, 종교계에서는 조남기·강문규·김상근·김용복 목사, 문인으로는 신경림·구중서·윤흥길·박태순·조태일, 출판계 최옥자 등이 같은 이유로 조사를 받았다. 신군부는 선언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임재경과 이종욱을 구속시켰다.”

임재경 선생도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길을 찾아서] 과도내각? 옷깃도 안스쳤는데… / 세상을 바꾼 사람들 9-5(2008년 6월29일>에 비슷한 내용을 기록했다. 홍종민 위원이 언급된 점이 다르다. 실제로 홍 위원은 정보기관이 ‘투위 총무’로 잘못 알고 연행했던 것이다. 이들의 정보력은 거듭 혼선을 빚어 다음에는 동명이인 이종욱(李鍾旭) 선배를 연행했다. 홍 위원은 이때 당한 고문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경향신문 출신으로 문화일보에서 함께 근무했던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이경일 회장은 예외적으로 지하실의 칠성판 위에서 당한 고문에 대해 들려주었다.

임재경 선생과 나는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졌다가 며칠 뒤 서울구치로서 넘겨졌다. 나는 ‘3사하 7방’(독방)에 수감되었다. 수번은 ‘179’. 이른바 양심수는 흰 수의(囚衣)에 노란 딱지를, 이른바 사상범은 빨간 딱지를 달았다. 빨간 딱지를 단 박모 선생은 사형이 확정되었는데, 운동을 정말 열심히 했다. 하늘이 보이는 마당에서 땀나게 빙빙 돌던 때의 심정을 담은 시가 ‘운동시간’이다.

얼굴을 눈부신 하늘로 향해
천천히 빨리 천천히 빨리
20분간에 두 시간의 달음박질을 하니

고맙다
얼굴 가득 흘러내리는 땀
고맙다
골고루 비추는 햇살
아름답다
나무가 듬성듬성 박힌 건너편의 돌산

(…)
두 볼에 주르르 흘러내리는 땀방울
순간 눈물로 착각하다

창비시선 28 ‘꽃샘추위’(1981)에 실린 ‘구린내’, ‘굶주리던 사람은’도 같은 계열의 시들이다.


 

윗줄 맨 왼쪽이 김도연, 한 사람 건너 시인 김정환, 김종철 위원. 그 옆이 김 위원의 절친이자 시집 ‘꽃샘추위’의 발문을 써준 정희성 시인, 맨 오른쪽 신경림 시인. /이종욱 제공

 

‘3사하’에는 후일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고영재 해직기자도 수감되어 있었다. 그는 접견 나갈 때 가끔 나와 몇 마디를 나누곤 했다. 이 무렵 광주 일대를 주름잡던 태촌이파의 김태촌, 양은이파의 조양은도 수감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교도관이 아예 감방 문을 따주어 마음대로 돌아다녔으며, 담배장사도 대놓고 했다. 김태촌은 내가 언론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김대중 선생이 집권할 수 있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면회 가는 길에는 문학평론가 임헌생 선생,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된 문단 후배 김남주 시인과 스치기도 했다.

나는 11월8일 필동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열린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 판결을 받고 13일 형집행 면제로 석방되었다.

 

이종욱(李宗郁) 동아투위 위원.

 


‘월간 마당’을 거쳐 ‘월간 한국인’에 정착

서울구치소에서 나온 이듬해, 계몽사 주간 이종욱 선배의 추천으로 1981년 ‘월간 마당’ 창간에 참여해 기획부장으로 일했다. 유일한 부원은 영남일보 해직기자 조학송이었다. 주간은 월간 중앙 부장 허술, 취재부장은 국제신보에 근무하면서 먼 길을 돌고 돌아 광주로 잠입해 항쟁을 취재, 보도했던 조갑제 기자였다. 조 부장 밑의 유일한 기자는 김도연(1952〜1993)이었다. 그는 1981년 ‘시와 경제’ 동인 결성을 주도하며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동인은 김사인, 김정환, 나종영, 박승옥, 정규화, 채광석, 홍일선, 황지우 등이었다. 2집(박노해 시인 데뷔)까지 나왔는데, 두 권 모두 김동현 부위원장과 더불어 대학교 때부터의 벗인 박병진이 운영하던 육문사에서 간행되었다. 김도연은 1985년 6월15일 창간호를 낸 ‘말’지 초대편집국장을 지냈다.

‘월간 마당’의 사진부장은 동아일보 사진부에서 옮겨온 박상원 기자였고, 아트 디렉터는 나중에 독특한 한글 글꼴을 개발한 안상수 안그라픽스 대표였다. 동아투위 위원 중에서는 이태호 위원이 시리즈물 ‘생활 속의 한국 탐험’을 창간호(1회, ‘점’)부터 연재했다. 국흥주 위원은 ‘위인들의 겉과 속’을 썼다. 소흥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의 ‘우리말의 논리성-문화창조와 언어’, 현기영 작가의 연재소설 ‘변방에 우짓는 새’ 등도 내가 청탁한 글이다. 이때의 인연이 작용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소흥렬 교수는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에서 문화와 사상(1985)을 펴내면서 ‘제3세계연구 1’(한길사, 1984)에 실었던 ‘새벽은 언제 오는가: 니카라과의 신부시인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을 ‘Ⅳ. 제3세계의 문화와 사상’의 한 꼭지로 재록했다.

1982년에는 직장을 옮겨 ‘월간 한국인’ 편집장으로 일했다. 이 잡지는 사회발전연구소(회장 장덕진)에서 펴냈으며, 8월호가 창간호이다.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지낸 장 회장은 서예와 영어 공부에 열심이었으며, 편집에 관해서는 전권을 맡기고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편집부에는 나중에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로 사회부장, 정치부장, 편집부국장을 지낸 이상현씨, 역시 한겨레 창간 멤버로 교열부에서 일한 김상익씨가 있었다. 김상익씨는 시사저널에서 박순철 선배(편집국장, 주간)와 함께 근무했다. 박 선배는 문화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긴 뒤, 우승용, 양한수, 국흥주 위원, 나를 비롯해 조선투위의 백기범,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이경일 등과 한솥밥을 먹었다.

 

* [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 시리즈는 2024년 3월 22일부터 한국기자협회와 뉴스타파에 매주 금요일자로 동시 게재되고 있습니다. 이글은 2024년 6월 28일(금) 한국기자협회에 게재된 글 전문입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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