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
50년 전인 1974년 가을부터 75년 봄까지의 몇 달 동안 나는 내 인생 전체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선택을 진행했다. 50년이 흐른 지금 당시의 선택을 되돌아보면, 그것은 참과 거짓 사이에서 무엇을 붙드느냐 하는 것이었고, 바로 나와 나의 싸움이었다. 지난 50년 사이 나는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기독교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인가 사탄의 종이 될 것인가 하는 싸움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되돌아보면 80여 년의 내 인생 중 기자로서의 인생은 일터를 잃고 활로를 모색하던 시기를 포함하여 35년 정도로 계산된다. 이 35년 동안 나는 아무것도 남기지는 못했지만, 1975년 봄의 선택이 잘 된 선택이었다는 안도감은 든다. 이 선택의 중간 결실이기도 한 한겨레 창간 전후의 내 기억을 더듬어 본다.
1988년 5월5일 서울 양평동 한겨레 사무실에서 열린 윤리강령 선포식 직후 임직원들이 윤리강령에 서명하고 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
촌지(寸志)와 나
한겨레 이야기를 촌지(寸志)로부터 풀어나가는 것이 엉뚱한 시작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 언론의 고질 중의 고질이 바로 촌지였다는 점에서 양해되기를 원한다. 촌지는 원래 좋은 뜻으로 쓰였다지만, 나에게는 그저 취재원이 기자들에게 주는 돈으로 이해될 뿐이었다. 그런데 이 촌지는 언제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선의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뇌물의 일종이 되기도 했다. 다른 시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1970년대와 80년대의 기자들, 특히 외근 취재기자들에게 촌지는 일상적 관행이었다. 내 기억을 더듬어 보면 신문사에 갓 입사한 초임 기자부터 고참 취재기자에 이르기까지 출입처 기자실(갓 입사한 기자들이 주로 모이는 경찰서 출입기자실도 예외는 아님)에는 일정 기간마다 일정 액수의 뭉칫돈이 들어왔고, 이를 기자들이 골고루 나눠 가졌는데, 나도 그런 촌지를 거부했다는 기억이 없다.
정치부에 배속되어 정당을 출입할 때 매월 나눠 받은 촌지는 상당한 액수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이 돈은 대체로 후배 기자들과 술 마시느라 다 썼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문사에서 선배가 후배들에게 술 사주면서 촌지를 다 써버리는 관행은 아마도 떳떳하지 않게 생긴 돈은 집에 가지고 가지 말자는 당시 기자들의 엉뚱한 자존심 때문이었으리라 싶다.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을 출입할 때의 이야기다. 내 또래의 3진 기자(당시 공화당은 각 사에서 3명 정도의 기자가 커버했으니, 3진이면 물론 맨 말단 기자다) 댓 명이 취재에 극도로 비협조적인 공화당 당직자들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을 때 한 선배 기자의 “매월 우리에게 월급을 주고 있는 그들에게 무슨 불평을 늘어놓느냐”는 일갈에 전체가 조용해졌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많은 기자들이 자괴감을 곱씹어야 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이와는 달리 특정 취재원으로부터 개인적으로 건네어지는 촌지에 대해서는 죄책감, 자의식, 자존심 등이 범벅이 되어 알레르기적 거부감이 작동했으며, 나는 결국 이런 형식의 촌지는 거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가지 예를 들면, 동대문 경찰서 출입 기자의 주요 커버 영역이 서울대학교였는데, 한번은 총장실에 취재하러 갔다가 그쪽에서 봉투를 건네기에 이를 한사코 거절하다가, 건물 바깥 섬돌 위에 놓아두고 가버렸던 적이 있었다. 이 일이 당시 총장실 주변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다. 한마디로 촌지는 기자들에게 계륵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뭔가 떳떳하지는 못한데, 생활에 도움은 안 되고,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까운…. 결국 조선일보 기자 시절 촌지에 대한 나의 태도는 부정적인 것은 분명한데, 관행의 거부로까지 나아갈 결단은 없는 어중간한 태도였다.
1988년 5월15일 한겨레신문이 창간호를 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조선투위 위원들이 창간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
그래서일 것이다.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창간 작업에 참여했던 나에게 가장 강하게 박혔던 우리의 슬로건 중 하나가 ‘촌지 거부’였다. 신홍범 선배가 준비한 윤리강령에는 거부해야 할 촌지의 액수를 3만원으로 정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도 3만원 이상은 (거부해야 할) 촌지라는 의식이 한겨레 편집국 기자 모두에게 각인되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나에게는 아픈 기억이 하나 있다. 내가 정치부 편집위원(부장)으로서 지면 제작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노태우 집권하에서 김대중, 김영삼 등 두 민주 진영 거물들이 치열한 대립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라 한겨레 지면 구성에 대한 외부의 반응도 매우 민감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명절이 되자 김대중씨가 나에게 선물을 하나 보냈다. 여성 한복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걸 놓고 나는 한동안 고민했다. 분명히 3만원은 넘어서는 선물인데 하는 것이었다. 결국 되돌려 보내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했다. 그런 나의 결정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만원 이상 선물은 거부한다는 윤리강령을 지키기로 한 결정은 강령을 어겼다는 사내 비판을 두려워했던 (상대적으로) 작은 의였고, 김대중씨의 추석 선물을 거부한 것은 작은 의를 지키려고, 김대중씨를 거부한다는 엉뚱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서투른 행동을 한 것이었다는 인식이었다. 그 얼마 뒤 김대중씨를 개별적으로 만나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나와 김영삼씨를 꼭 같은 잣대로만 다뤄달라”는 말을 했는데, 그가 실제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보다 더 강한 불만의 표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두 김씨를 같은 잣대로 다루는 것에 대해 한겨레의 여러 기자들이 당시 나에게 수시로 항의하곤 했었다.
당시 김영삼씨는 내가 그의 고등학교 후배였다는 사실 때문에 나에게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고, 아마도 그런 후배가 한겨레신문 정치면을 책임지고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나는 그의 대통령 재임 전후는 물론이고, 재야 정치인이나 대선 후보 시절에도 개인적으로 만났거나 전화를 받은 적도 없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 편집국장들을 초청하여 청와대에서 점심을 함께 한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한겨레는 나에게 비판적이지만, 성 국장 생각은 다를 거야”하는 말을 세 번이나 했었다. 그 바로 전에 어느 신문사 편집국장에게 지면에 대해 항의하자 “이제 지면이 달라질 것입니다”하는 대답이 나왔던 터라 그는 나에게서 그 비슷한 말을 기대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세 번 다 똑같았다. “저는 제 생각대로 신문을 만듭니다”는 것이었다. 그런 나의 대답은 당시 한겨레를 둘러싼 외부의 복잡한 시선과 내부의 치열한 분위기를 고려하여 나온 대답이었다. 겉치레 인사나 덕담이라도 했을 때 그것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창간 사무국은 한겨레의 편집 방향과 조직 체계를 두고 논의를 거듭했다. 1988년 1월16일 안국빌딩 사무실에서 열린 편집기획팀 회의 모습. |
또 하나의 신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신문을
한겨레 창간과 그 이후 30년의 역사는 한겨레가 발간한 ‘서른 살 한겨레의 기록’이라는 640여 페이지의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뒤 13년 만에 시작된 나의 한겨레 생활에 대해서는 창간 전후의 짧은 기간 동안의 이야기에 한정 지으려 한다.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기자들은 권력과 결합한 신문 사주들의 행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이 아닌, 수만 명의 국민(실제로 7만명 가까운 국민 주주들이 한겨레를 소유한다)들이 주인인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꿈을 키웠고, 이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바로 한겨레였다. 이 과정에는 수많은 고비들이 있는데, 이 이야기들이 다른 분들의 증언으로 기록되기를 기대한다.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뒤 한겨레 창간에 이르기까지의 공백이 사실은 기자 생활을 계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기간이었다. 내가 한겨레에서 정치부를 맡았을 때쯤이면, 이미 내가 과거 정치부 기자 시절 안면이라도 익혀 놓았던 정치인들은 거의 퇴장하고 없었다. 더욱이 나의 정치영역 취재 경력이란 참으로 짧았다. 그런데 이런 공백을 조금은 메꾸어 준 것이 바로 ‘말’지에서 정치 시국 기사를 써 왔던 경험이었다. 새로운 민중언론인 ‘말’의 창간을 추진하면서 조선투위의 신홍범, 백기범 두 선배가 보기에 기사를 쓸 시간을 수시로 낼 수 있는 후배로 나를 지목했던 듯하다.
1975년 3월 무더기 해직 직후,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언론자유를 외치고 있는 조선투위 기자들. /자유언론실천재단 |
뭐든지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던 내 상황과 두 선배의 뜻이 맞아떨어져, 나는 기자로서 적극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상근 기자까지 뽑아 편집진을 구성하긴 했는데, 시국 관련 기사를 쓸 사람이 마땅치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4년 남짓 되는 짧은 정치부 기자 경력을 가진 내가 이를 담당케 되었다. 사실 나는 조선일보 정치부의 막내 기자였고, 국회가 열리면 의원들의 본회의 발언을 받아 적는 역할을 주로 맡았으며, 정치의 흐름을 짚어주는 기사를 쓸 만한 위치에는 가보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그것도 경력이라고, 이 분야를 쓰라고 맡겨진 것이었다. 게다가 그 짧은 정치 분야 취재경력을 가지고,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정치부 편집위원(부장)까지맡기도 했으니…나원 참. 당시 ‘말’지는 발간만 되면 바로 편집장이 경찰서에 불려가 며칠 구류를 살곤 했는데, 성유보씨를 비롯한 여러 투사들이 구류를 감당해 내는 편집장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던 것이 말지 편집팀에게 큰 힘이 되었다.
1988년 5월 창간을 앞두고, 창간에 참여한 해직 기자들의 목표는 ‘또 하나의 신문이 아닌, 전혀 다른 신문’이었다. 1987년 9월부터 창간사무국이 가동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창간 준비는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임재경, 신홍범 선배 등이 중심이 된 새 신문의 지향, 구성, 편집 등을 연구하는 팀이었고, 또 하나는 신문사를 세우는 일로서 정태기 선배가 이끌었는데, 나는 편집 쪽 준비팀에 배속되었다. 이때 나온 “신문사는 내가 만들 테니, 임 선배는 신문을 만들어 주세요”라는 정태기 선배의 말이 듣는 이들의 가슴에 짠하게 와 닿은 것은 사실은 그가 해직기자들 누구보다도 기자직과 편집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간 준비 과정에서 편집팀을 이끌던 임재경 선배는 창간되는 신문은 기존의 신문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와 내용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었다. 우선 편집국의 구조가 대폭 바뀌었다. 정치·경제·사회·외신·문화부 등으로 되어 있는 기존 신문사의 편집국 구조를 대폭 바꾸어 정치부와 경제부를 통합했는데, 그것은 기존 신문의 정치 기사 과잉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조 개편이었고, 기존의 사회부 영역 중 민생과 인권 관련 기사를 집중적으로 취재 보도하는 민생인권부를 신설한 것, 그리고 국제뉴스를 다루는 외신부를 민족국제부로 바꿔 국방과 통일 문제까지 관장하게 하는 것 등이 눈에 띄는 변화였다.
게다가 각 부서의 민주적 운영을 강조하기 위해 편집국장을 편집위원장으로, 각 부의 부장, 차장들을 편집위원, 편집위원보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도 발상의 전환으로 비칠 것 같다. 한마디로 한국 언론 마당에 새로 등장하는 한겨레는 기존의 신문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 신문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당시 창간에 참여한 해직 기자들의 공통된 염원이 반영된 편집국 구성이라고 할 만하다.
기존 신문과는 전혀 다른 신문을 만들겠다는 편집팀의 꿈은 물론 조직 개편에 머무르지 않았다. 기존 언론의 취재 관행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 시작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촌지 거부는 이들 중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우선 그동안 신문들이 남북한 관계를 보도할 때 써 온 용어의 상당 부분을 바꿨다. 하나만 예를 들면 판문점에서 남북한 대표자들 회의가 열리면, 당시 신문들은 으레 “북괴가 생떼를 부렸다”라고 보도하던 것을 한겨레는 “북한이 주장했다”라고 고쳤다.
한겨레의 이런 변화에 대해 정부는 주목했던 것 같았다. 노태우 정부의 청와대 수석비서관 한 분에게서 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가 한 이야기의 요지는 “한겨레가 정부를 호되게 비판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내 주위에서는 한겨레가 서울서 발행되는 신문인지, 평양서 발행되는 신문인지 헷갈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에 “한겨레는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이 분명하지 않느냐?”고 동문서답식 대응을 했지만, ‘내 주위’라고 표현된 세력이 누구냐를 생각하면 엄청난 협박이었다. 요즈음 언론 대부분이 남북 관계를 보도할 때, 한겨레가 쓰는 표현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협박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었나를 말해준다.
올해 5월14일 광화문광장에서 조선투위 기자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성한표, 신홍범, 최병선. /자유언론실천재단 |
우리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몸에 익혔던 관행들에 대해서도 철저한 결별을 선언했다. 과거 같으면, 기자들이 밖에서 대단한 기삿거리나 정보를 취재했을 경우 우선 부장에게 귀엣말로 소곤소곤 이를 보고하고, 바로 사장실로 쫓아가 사장에게 보고하면 일단 임무는 끝났다. 기사로 쓰느냐 아니냐는 차차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특히 내근 기자들에게는 아주 볼썽사나운 광경 중의 하나였다. 한겨레는 바로 이 귀엣말 절차를 없앤다는 원칙을 세웠다. 기자는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부장에게 소곤거리지 말고, 기사를 써서 제출해야 하며, 취재된 소식 중 기삿거리가 되는데도 한겨레 지면에 싣지 않는 기사는 없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이에 따라 기자가 취재 후 귀사하여 부장에게만 속삭거리는 모습은 한겨레 편집국에서 사라졌다.
이 밖에도 한겨레는 기존의 많은 관행을 바꾸었고, 처음에는 바로 이것이 한겨레의 뚜렷한 특징으로 부각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특징들을 웬만한 신문은 다 자기들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기존 신문사를 박차고 나온 경력 기자나 민주화 투쟁에서 앞장선 학생들이 졸업하여 한겨레에 입사하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기자들도 다른 신문사와 차별화되는 특징이 거의 없어졌다. 또 하나의 신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신문을 만들겠다는 한겨레 초기의 의지가 되살아날 수 있을까? 한겨레에 몸을 담았든 아니든, 한겨레는 우리 해직기자들이 이 땅에 남긴 귀한 유산이고, 따라서 이 유산의 가치가 유지되느냐, 아니냐는 우리 모두에게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다.
* [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 시리즈는 2024년 3월 22일부터 한국기자협회와 뉴스타파에 매주 금요일자로 동시 게재되고 있습니다. 이글은 2024년 5월 31일(금) 한국기자협회에 게재된 글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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