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과 북한에 대해 취한 정책이나 행동은 윤석열 대통령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적지 않다. 미국을 절대 신뢰하고 미국에 의존하며 미국에 퍼주는 식이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그곳 지배층이나 피지배층 가리지 않고 동족이라는 점은 멀리하고 있다. 외세에 올인하는 것과 동시에 국내의 비판세력이나 정적에 대해 비타협적이고 심할 경우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이기도 하다.
이승만은 미군정하에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 즉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남한과 일본을 반공보루로 만든다는 최우선 정책에 적극 호응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유엔을 통해 강행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통해 집권했고 제주 4·3과 여순사건 등에서 미국의 철저하고 잔혹한 진압작전에 적극 호응했다.
여순사건 당시 이승만은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제히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려 군경의 잔혹한 집단학살의 멍석을 깔아주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만을 외쳐 미국의 군사원조를 제대로 받지 못할 정도였으며 남북 정부간 대화를 시도한 적이 없다. 이승만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휴전선을 무대로 북한과 군사적 충돌을 끊임없이 벌였고 전쟁이 터지자 서울 사수 약속을 저버리고 한강다리를 폭파한 뒤 서울을 탈출했다. 이승만은 전쟁 직후 보도연맹 등 이른바 반정부 세력이라고 분류한 시민들을 학살토록 지시했다.
이승만은 정전협정 체결 움직임이 있자 정전협정이 맺어지면 남한은 괴멸할 것이라며 반대해 미국이 제거 계획까지 세웠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 국군은 60만 명에 달했지만 이승만은 자주국방을 외면한 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미국과 맺어 군사주권을 넘겨주고,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을 차단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전후 동북아 냉전체제를 고착시키면서 일본의 전쟁범죄 배상을 최대한 경감시키기 위해 한국을 철저히 배제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태도로 미국의 입장에 동조했다.
한편 윤석열 정부는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처하기 위해 한미동맹 또는 한미일 군사협력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미국 주도의 대북 정책에 올인 하면서 북한과의 대화를 전혀 시도치 않고 있다. 동시에 야당과의 협치, 대화는 거의 생략하고 민주노총과 같은 시민사회단체에 대해 검찰을 앞세워 규제를 강화하는 특성을 보인다. 윤 정부의 시민단체 등 자국민에 대한 태도는 국민을 주권자로 섬기는 원칙과 충돌한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윤석열 정부는 자체 핵무기 보유 필요성과 함께 미국의 핵우산 제공 강화를 공언하면서 국제적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윤 정부가 △미국의 한국 정부 도감청의혹에 공식적인 항의 등은 일체 생략하고 동맹을 강조하고 △일제치하의 강제징용에 대해 일본 기업 대신 한국정부가 제3자 변제라는 변칙수법을 동원해 굴욕외교 논란을 자초하거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해양방류에 앞서 시찰단을 일본 현지에 파견해 일본 내에서도 논란이 심각한 원전 오염수 방류에 면죄부를 주는 행위로 이어지고 있다.
윤 정부가 한미일 군사협력 시스템을 구성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에 굴욕적, 비자주적이라는 비아냥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나서는 태도는 국내 노조활동 등에 대해 취하는 적대적 태도나 북한과의 대화 재개 가능성을 생략하는 것과 대비된다. 특히 윤 정부가 중국과 러시아에 각을 세우면서 이들 두 개 국가에 진출하거나 통상을 하는 국내 기업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윤 정부는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한 대책이라며 미국, 일본과 군사관계를 급속히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군사안보에만 올인 할 뿐 경제, 기술안보에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특히 용산 미군반환기지 오염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해당 부지에 ‘공원’이 아닌 ‘정원’을 만들어 주한미군에 의한 환경오염 문제에 대해 책임을 물 타기 하거나 면죄부를 주면서 공원을 찾는 시민들의 건강을 해칠 가능성에 눈을 감는 해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 1948년 8월15일 서울 중앙청에서 열린 정부수립 기념일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이 대통령은 맥아더의 중국 공격 전략을 적극 지지하다가 맥아더가 해임되자 크게 실망해 맥아더 해임을 지지한 영국 등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사진=위키미디어 |
이승만 맥아더 해임에 크게 실망, 영국 등에 독설
이승만은 일본이 항복한 후 귀국해 반공노선을 강조한 미군정 치하에서 우익세력의 대표자가 되었고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민주정치 실천을 약속했지만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집권이후 야당세력을 탄압했고 그와 노선을 달리하는 정치인들이 제거되거나 암살당했다.
이승만은 집권 후 국방력이 북한에 비해 열세인 상태에서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앞세우다가 6·25 전쟁을 맞았다. 이승만은 6·25 전쟁이 발생하자 서울 사수 라디오 방송을 한 뒤 미 군사고문단에 사전에 통고하지 않은 채 정부각료들과 함께 서울을 탈출하고 한강다리가 폭파되게 만들었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 동조세력의 거사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변명했으나 그 후에도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증오와 전쟁 공포증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수차 언급되고 한국군 단독의 북진무력통일론으로 표출됐다.
이승만은 전쟁 발생 후 전국 군과 경찰에 좌익세력 학살을 지시했고 1951년 봄 맥아더 장군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임 당하자 이 대통령은 크게 실망해 맥아더 낙마에 책임이 있다고 알려진 영국, 호주, 캐나다 군을 향해 공개적으로 ‘한반도를 통일시키려는 맥아더의 노력을 훼방했으니 이제 한반도 전선에서 떠나라’라는 내용의 독설을 퍼부었다.
이 대통령은 소련과의 핵전쟁을 감수해서라도 중국에 대해 전면전을 펴야 한반도가 통일된다는 맥아더 장군의 전략을 전적으로 신뢰한 나머지 분노한 것이다(Hastings, Max (1988). The Korean War. Simon and Schuster. pp. 32–34. ISBN 9780671668341. p. 235). 이승만은 맥아더 장군의 중국 공격 주장에 적극 찬성하고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하기 위해 군국 단독 북진 주장, 반공포로 일방적 석방 등으로 저항했다(https://en.wikipedia.org/wiki/Syngman_Rhee).
그는 정전협정 대신 미국의 한반도 전쟁 자동개입 조항이 포함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고집했지만 그런 조항은 포함시키지 못하고 주한미군에게 특권을 주는 식의 불평등 조약이 만들어지게 만들어 한국의 군사적 자주권을 외세에 철저하게 예속시키는 우를 범했다. 그는 국가안보를 철저하게 미국에 의존하면서 국방 자주권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을 ‘권리’로 인정받아 각종 특권을 누리면서 자국의 동북아 방어 전략에 활용하는 실속을 챙겼다.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무력통일론을 경계해 한국군 작전 지휘권을 유엔사령관이 장악하게 만들고 한국군의 국방자주권 확립을 원천 봉쇄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이승만은 집권 초부터 철권을 휘두르는 식의 정치를 했다. 그는 1952년 야당 국회의원을 체포하도록 명령한 상태에서 개헌을 억지로 강행하는 등 집권 연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선거철마다 부정선거가 판을 쳐 당락이 뒤바뀐 경우까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1960년 3·15 선거에서는 범정부 차원의 부정투표가 행해져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 시 군 내부 부패가 심각했는데 장교가 사병의 급여를 가로채거나 미군이 제공하는 군수품이 암시장으로 팔려나가고 군부대원의 숫자를 부풀려 급여로 나오는 돈을 장교가 갈취했다. 가장 심각한 사건이 국민방위군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4후퇴 때 방위군 예산을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약 25억 원의 국고금과 물자를 부정 착복해 방위군에게 식량 및 피복 등 보급품을 지급하지 못해 방위군 수 만여 명이 굶어죽거나 환자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사건의 주모자인 김윤근·윤익헌·박기환 등 5명이 사형 당했다(Hastings, Max (1988). The Korean War. Simon and Schuster. pp. 32–34. ISBN 9780671668341. p. 235-240). 이승만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권력기구를 중심으로 해외 원조나 기금, 은행 융자 등에서 뇌물을 주고받는 식의 부정부패가 만연했지만 그에 대해 침묵했다.
미국의 정전협정 타결 강조에 이승만 ‘중국과 북한에 남한 괴멸될 것’ 주장
아이젠하워는 1952년 대선을 앞두고 있어 이승만의 정전협정 반대는 재선에 큰 악재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켜야 했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인 1952년 12월 한국을 방문해 정전협정 타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Sasangch’oyuŭi Kwibin” [The Unprecedented VIP], December 7, 1953. Dong-A Daily).
1953년 4월9일 정전협정 타결이 임박한 시점에서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정전협정이 타결된다면 미국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군은 휴전협상을 하기보다 독자적으로 싸우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정전협정을 조속히 타결 짓기 위해 핵무기로 중국과 북한을 위협할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최후통첩을 받고 경악했다.
아이젠하워는 1953년 4월23일 이 대통령에게 보낸 답서에서 “이 대통령의 친서를 받고 크게 불편했다. 이 대통령의 태도는 한반도에서의 적대행위를 끝내려는 미국의 노력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1953년 5월30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답신을 통해 정전협정에 반대한다는 자신의 의지를 강조하면서도 정전협정 수용 조건을 제시, 중공군이 한반도에 잔류해서는 절대 안 되며, 한미 간에 정전협정 발효 이전에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정전협정 발효 후 미국은 한국이 침략을 받으면 즉각 군사적 지원과 원조를 해야 하고 미군 없이 한국군이 독자적 방위능력을 갖추도록 충분한 무기 지원을 하고 적의 재침을 막기 위해 미 해군과 공군을 잔류시켜야 한다는 것 등을 강조했다.
이승만은 이 답신에서 ‘중공군이 한반도에 계속 잔류하게 되면 한국은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면서 주한미군이 떠나게 되면 중국과 북한에 의해 남한이 괴멸된다는 주장을 폈다.
이런 태도는 주권국 원수로서 50만 여 명의 국군이 전투중이고 미국이 정전협정이후 한국군에 대한 지원 등을 약속한 것을 감안할 때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과도한 전쟁 공포증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 적대감을 지니게 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승만의 답신을 본 아이젠하워는 한국과 방위조약을 필리핀, 호주 등과 유사한 형태로 맺을 방침을 고려중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제안을 수용 가능한 것으로 판단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하기 6일 전인 1953년 6월6일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서 ‘본인은 이 대통령이 정전협정에 동의하는 연장선상에서 방위조약을 체결할 의향이 있다, 미국이 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와 같은 집단 안보체제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아이젠하워의 이런 언급은 미국이 아시아판 집단안보 체제에 소극적이었지만 이승만이 1948년부터 집단안보체제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Ch’oe, Yŏng Ho. 1999. “Yi Sŭnngman chŏngbu ŭi t’aepyŏngyangdongmang kusang kwa asiapangongyŏnmaeng kyŏlsŏng” [Syngman Rhee Administration’s Plan for Pacific Alliance and Anti-Communist Asian Alliance]. Kukjejŏngch’I nonch’ong 39(2): 165-182).
아이젠하워는 그러나 이승만이 요구한 미국의 자동개입 조항이 들어가 있는 방위조약은 미국의 헌법체계에서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면서 수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밝혔다. 아이젠하워는 6월13일 이승만에게 워싱턴을 방문해 기밀사항을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 1951년 10월 11일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협정 실무자 회담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영관급 장교들이 지도를 놓고 협의하고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
이승만 ‘정전협정 타결되면 한국 생존 고민 공포에 사로잡힐 것’ 거듭 주장
이승만은 자신이 독자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기 하루 전 날인 1953년 6월17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정전협정이 타결되면 한국은 생존을 고민해야 할 공포에 사로잡혀야 하는데 이런 사태에 무기력한 나 자신이 실망스럽다. 6·25 전쟁 발생 첫해에는 미국과 유엔이 통일된 독립 한국의 설립과 침략자에 대한 응징을 다짐했었지만 그 후 공산군이 더 강한 것으로 보이자 유엔군은 이 전쟁은 한반도 통일과 무관하다고 말을 바꿨다. 본인은 한국이 정전협정을 수용하는 대가로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려는 지원은 거부한다. 그 이유는 정전협정은 남한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해도 그 효과가 의심스럽고 무력한 상태로 그 의미가 축소될 것으로 우려된다. 유엔과 공산주의자가 정전협정을 맺는다는 것은 적들이 서로 손을 잡는 것과 같을 것이다. 본인은 미 대통령이 이 중차대한 시기에 대처한 처방을 내놓을 리더십을 발휘하기를 희망한다.”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서한을 발송한 다음날인 6월18일 유엔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는 한국군 헌병대에게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명령했다. 이 날은 유엔군과 북한군, 중공군이 정전협정에 합의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이 대통령의 돌발적 행동은 공산군 측이 볼 때 유엔군이 사전합의를 위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정전협정 추진이 중단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행동에 격노해서 6월19일 “이 대통령의 행동은 전쟁 포로 문제는 유엔사령관의 관할이라는 점에서 유엔군의 권위에 대한 공격행위”라며 “이 대통령이 유엔사의 권위를 즉각 수용하지 않을 경우 모종의 조치가 필요하고 유엔 사령관이 그에 대처할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밝혔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모종의 조치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는데 이는 이 대통령이 미 대통령의 정전계획 추진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학계에서 미 대통령이 이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도 포함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 행정부, 이승만 제거 계획 상세한 부분까지 준비
미 행정부는 이승만이 독자적인 ‘북진 통일’을 실천하는 등 돌출행동을 할 경우 등을 우려해 극약처방을 내렸다. 미국은 1953년 중반 이승만이 정전협정 내용에 반대하거나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할 경우 미국이 제거한다는 비밀계획인 ‘에버레디 작전’을 만들었다(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politics/1977/12/17/us-had-53-plan-to-overthrow-unreliable-korean-ally/53816fa5-c677-4d57-964c-09edd8605c42/).
미국은 이 작전을 수행하지는 않았으나 1953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정에 반대할 경우에 대비해 만든 3가지 대처 방안가운데 하나였다. 다른 두 방안은 이 대통령이 강하게 주장했던 미군 철수 등이 포함된 한미간 안보조약을 협의하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이 최종 채택한 방안은 주한 미군의 주둔이 포함된 방위조약을 협의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 했던 비밀계회 에버레디 작전이 실행되지 않은 것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을 제거할 경우 대체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주한미군 및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은 1953년 중반 이 대통령이 한국군을 유엔군 휘하에서 철수하려 위협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비밀 작전을 만들라는 지시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받았다. 당시 한국군은 전체 유엔군의 60%에 달했다.
클라크 장군이 1953년 5월4일 작성한 비밀작전 계획은 한국군이 유엔군에 적대적 행동을 할 것을 상정해 유엔의 이름으로 계엄령을 선포해 정전협정에 반대하는 민간인과 군인을 체포하고 유엔군의 이름으로 군사정부를 만드는 것 등이 포함됐다. 이 작전은 클라크 장군이 미 육군부에 보낸 날짜 미상의 비망록에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 본인은 본인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한국군의 광범위한 명령불복종 사태가 발생할 경우 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적절한 시점이 되면 미군 사령관이 부산 지역으로 이동해 이승만 독재정치를 지지하는 핵심적 한국군 장교 5~10 명을 체포하고 한국군 총사령관의 명의로 선포된 계엄령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렇게 한 뒤 이승만 대통령에게 계엄령 해제에 동의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리고 국회가 자유롭게 입법 활동을 하게하고 한국군의 통제를 받는 한국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만들 것이다. 만약 이 대통령이 그런 요구에 불응할 경우 독방에 감금될 것이며 유사한 조치를 장택상 총리가 취하도록 만들 것이다.--
1953년 중반 이 대통령은 정전협정을 반대하면서 미군이 계속 싸울 것과 북한과 중공군포로 14만 명의 강제송환을 촉구하는 북한의 요구에 반대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포로 가운데 2만 명은 이승만의 일방적 석방조치로 남한과 대만에 남아있게 되었다.
클라크 장군은 미 언론이 수십 년 전에 추진했던 에버레디 작전에 대한 소회를 묻자 “미국은 그 작전을 심각하게 고려했었다. 그러나 그 작전은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는데 만약 실행되었다면 이 대통령이 완강한 인물이고 한국인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행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승만 반공포로 일방적 석방, 정전협정 파탄 노렸으나 빗나가
아이젠하워는 반공포로가 석방된 일주일 뒤 1953년 6월 25일 한국에 미 국무부 차관을 특사로 보내 이 대통령을 압박해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 사령관에게 넘기도록 만들었다. 이후 이 대통령은 1953년 7월 11일 미국 쪽에 서신을 보내 정전협정을 통한 정치적 해결 방안에 동의하고 협조할 의향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그러나 정접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되지 못할 경우 자신의 북진통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돌파할 계획이며 미국은 이에 동의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미 국무장관에게 통고하고 자신이 정전협정에 동의한 것에 대한 미국 측은 방위조약 타결에 응하라고 촉구했다.
이승만이 정전협정을 파탄 낼 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해 버린 것에 대해 중국과 북한은 격렬하게 항의했을 뿐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기로 미국과 합의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타결되었다(Cha, Victor D (Winter 2010). "Powerplay: Origins of the U.S. Alliance System in Asia". International Security. MIT Press Journals. 34 (3): p. 174. doi:10.1162/isec.2010.34.3.158. S2CID 57566528). 당시 중국, 북한, 미국 모두 정전협정을 타결을 원하면서 사태 악화를 원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정전협정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경제원조와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지원 등을 미국에 요구했다. 정전협정 타결 시에는 한국군이 50만 명에 달해 자주국방을 추진할 최소 규모로 볼 수도 있었는데도 이승만은 공산군의 재침 시 한국군이 궤멸될 것이라고 미 대통령에게 언급하는 등 강한 위기의식을 들어냈다.
미국은 막대한 원조를 약속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면서 미국이 한반도 유사시 즉각 개입하는 조항을 담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만을 고집했다. 미국은 상호방위조약 추진 협상을 통해 ‘한국이 무력침략을 받을 경우, 미군의 즉각 개입’이라는 부분을 제외하고 이 대통령이 요구한 사항 대부분 수용해 1953년 8월 한미 간에 이 조약이 가조인되었다.
미국 ‘이 대통령 북진통일 추진 시 미군과 유엔군에 강력 저지될 것’ 경고
1953년 11월 4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이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개되도록 일방적으로 행동할 경우 본인은 미 상원에 상호방위조약이 평화와 상호 안보를 보장할 것이라고 확인해 줄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이 대통령이 단독으로 북한 공격을 결정할 경우 그것은 한국군을 비참한 패배로 몰아넣으면서 효율적인 국방력을 영원히 상실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이젠하워가 이 대통령에게 강력 경고한 이유는 △미국이 정전협정 대가로 약속한 원조물자가 처음 부산항에 도착한 1953년 8월29일 이 대통령이 ‘한국군은 유엔군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북진할 것’이라고 공개 언급했고 △한국 내에서 정전협정에 규정된 ‘3개월 이내에 평화협상 대체’ 조항이 이행되지 못할 경우 북한에 대한 공격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주장이 다양하게 전개된 것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T’ongilwihan t’ujaengŭn pulp’ogi” [Never Give Up the Struggle for Unification], August 31, 1953. Dong-A Daily./ Chŏngch’ihoedam kyŏlryŏlsi pukjinppun” [Only One Solution is Marching North if the Political Conference is failed], September 30, 1953 Dong-A Daily).
정전협정 제4조 60항은 정전협정이 조인되어 효력을 가진 뒤 3개월 안에 한반도로부터의 외국군 철수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토의할 고위정치회담을 열도록 건의하도록 기재되어 있었다.
한미 간에 방위조약 타결 등을 위해 닉슨 미 부통령이 1953년 11월13일 방한해 이 대통령과 협상을 벌였지만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제네바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정치협상이 열리기 50일 전인 1954년 3월11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군의 단독 북진통일을 다시 주장했다.
이승만 집권 말까지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 주장, 미국 경계
아이젠하워는 1954년 3월21일 이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이 대통령이 자신의 계획대로 추진할 경우 미군과 유엔군에 의해 강력 저지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미국은 한국군을 강한 군대로 만들기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으며 한국이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줄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굽히지 않았고 1954년 7월 미 국무장관 덜레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북진통일 계획이 점차 구체화되고 있으며 두만강까지 별 힘들이지 않고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두 나라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자 아이젠하워 정부는 1954년 이승만 제거 계획을 다시 추진했다(Hong, Suk-ryul. 1994. “Hanguk Chŏnchaeng Chikhu Mikukŭi Yisŭngman Chekŏkyehoek,” Yŏkbi [Critical Review of History], 28: 138-169).
이 대통령은 그 후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정전협정 정치회의를 반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1954년 제네바 회의에 한국 대표단을 파견했지만 평화협정 타결이 안 될 경우 유엔 기치아래 평화적인 해결보다 군사작전에 비중을 두는 태도를 고집했다.
이승만은 1956년 11월 에도 북진통일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개성, 웅진반도, 한강 북부 지역 등 3곳을 수복할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집권 말기까지 지속됐다. 그는 4·19혁명으로 하야하기 6개월 전인 1959년 10월까지 북진통일론을 미국 측에 설파했고, 이로 인해 미국의 심각한 경계 대상이 되었다.
이는 1959년 10월 방한한 미국 국무부 부장관 더글러스 딜런이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하고 이틀 뒤인 10월25일 미국 국무부 앞으로 타전한 기밀문서에서 밝혀졌다. 딜런 부장관은 이 대통령이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무력뿐이라는 신념을 표현했다”고 기록했다(주간조선 2020년 7월21일).
▲ 1951년 11월1일 유엔군과 중국, 북한군이 정전협정 협의를 시작한 판문점 회의 막사 모습.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정 협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맹렬히 반대하면서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사진=위키미디어 |
이승만, 자주국방 외면 외세 의존 몰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외면
이승만은 집권 기간 동안 정부 관리들이 광범위하게 연루된 부정부패가 만연한 상태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증오와 공포를 앞세워 미국의 군사적 보호망아래 안주하는 방안만을 앞세웠을 뿐 자주 국방은 외면했다. 그는 미국에서 오랜 세월 독립운동을 하면서 강대국이 어떻게 제국주의적 이기주의에 사로잡히는가를 뼈아프게 경험했는데도 미국이 남한의 국방안보를 책임질 것만을 요구하거나 국군 단독으로 북침을 통한 무력 통일만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독재자의 길을 걸으면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을 사법 살인하는 등 비폭력적 방식의 통일론을 원천봉쇄했다.
그는 미소가 벌인 냉전시대의 심각한 대립구도 속에서 2분법 논리로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정치를 앞세워 국가보안법으로 사상의 자유까지 탄압하고 제주 4·3, 여순사건 등은 물론 6·25 전쟁 발발 직후 사상범으로 지목된 양민의 집단학살 등을 자행했다.
이승만은 6·25 전쟁 과정에서 국군 병력이 50만 명 수준에 달하자 유엔군 통제를 벗어나 단독 북진하겠다면서 정전협정을 무산시키려 지속적으로 노력했고 그것이 좌절되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의 한반도 전쟁 자동 개입 장치를 만드는데 실패하고 미군의 남한 주둔에 특혜를 베풀어 한국군의 군사적 자주권을 스스로 내팽개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미국이 일본을 위해 남한을 철저히 짓밟고 희생양으로 삼는데도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일본으로부터 40년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충분히 받을 경우 경제 발전과 자주 국방 확립이 가능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 야당 탄압, 사사오입 개헌과 같은 비정상적인 방식에 매달리고 부정선거가 자행될 여건을 방치했다가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망명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윤석열 대통령의 집권 1년과 오염 범벅 용산어린이 공원 개방
윤석열 대통령이 집권 1년을 기념하기 위해 주한미군으로부터 반환받은 용산공원 반환부지 일부를 용산어린이정원으로 조성해 지난 4일 국민에게 개방한 것은 불평등한 한미동맹관계에 대해 미국의 입장을 챙겨주면서 그로 인한 피해를 한국민에게 전가하는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윤 대통령이 일제 강제징용 배상문제에서 굴욕외교라는 비판 속에 일본 전범기업이 배상 책임을 회피하도록 ‘제3자 변제’라는 해괴한 방식을 내세워 국민 혈세나 국내 기업이 일본 대신 그 부담을 지게 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용산미군기지 부지에서는 적지 않은 독성 물질이 검출된 데다 토양 정화 작업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2021년 한국환경공단이 미군과 합동으로 수행한 ‘환경조사 및 위해성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스포츠필드에선 토양 1㎏당 석유계 총탄화수소(TPH)가 1만8040㎎ 검출돼 기준치의 36배를 넘겼다. 장군숙소 구역에서도 TPH와 아연이 각각 기준치의 29.3배, 17.8배 검출됐고, 야구장 부지는 TPH 8.8배, 비소 9.3배가 검출됐다.
윤 대통령이 배우자 김건희 여사와 함께 개방행사에 참석한 용산어린이정원은 △정부가 토질오염에 대한 정화 사업 없이 공원이 아닌 정원을 만들어 어린이 포함 일반인의 유독물질 피해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크고 △용산기지 부지 오염의 원인 제공자인 미국이 정화에 대해 모르쇠 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일반시민에게 유원지의 형태로 덜컥 공개한 것은 미군의 환경오염부담을 면제하거나 경감시켜줄 수 있다는 비판을 자초한다.
반환 미군기지 부지를 관할하는 국토부는 일부 환경단체가 토양오염이 심각하다고 주장하자 “‘대기 중’에는 오염 물질이 없다. 잔디, 꽃 등으로 땅을 덮어 방문객과의 직접 접촉을 피했다”는 반박성 보도 자료로 응수했다. 국토부는 ‘대기 중 오염’은 일반 수준이라고 발표했지만 토양의 오염 정도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정부는 미군 기지의 완전반환 후 토양 정화를 거쳐 공원 조성까지는 최소 7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윤 대통령의 한미동맹 극찬과 국내 편 가르기 이념 공세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당시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 가능성을 언급하는 돌출행동을 하면서 북한에 대한 초강경 노선을 들어냈고 이어 집권 초 밝힌 자신의 대북노선과 야권, 노동계에 대한 이념공세의 방향과 수위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윤 대통령은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에 대해 국내외 수단을 동원해 초강수를 두고 야권이나 노동계에 대해 타협점을 찾기 힘든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데 이는 이승만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윤 대통령은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언행을 앞세워 미일과의 관계 증진을 강조하거나 제주 4.3, 광주항쟁 등 민중항쟁 성격의 역사적 사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역사바로잡기 단체장 등은 수구적 인물을 기용한다. 동시에 노동 등 시민사회운동에 대해서는 철지난 이념공세를 하거나 철권을 휘두른다.
윤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서는 과거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 등이 시도했던 한반도 전쟁 방지. 평화공존 노력 등은 철저히 외면하면서 군사력만을 앞세운 대북 정책을 내세우고 있어 남북간 불통의 벽은 높아지고 있다. 이런 모습은 이승만이 북진통일만을 외치고 50만 국군이라는 자체 군사력이나 자주 국방 당위성을 철저히 불신하면서 미국에 군사적 주권까지 넘겨주는 외세 의존적 태도를 보인 것을 상기시킨다.
윤 대통령의 미국 의존 또는 한미동맹 적극 신뢰 태도는 지난 4월 한미정상회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당시 발표된 워싱턴 선언, 즉 미국의 한국에 대한 핵우산 제공 강화를 내용으로 한 워싱턴 선언을 70년전 체결된 한미상호방조약과 함께 추켜세웠다.
윤 대통령은 또한 정상회담 후 귀국해 지난 5월2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한미 정상회담 결과와 성과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며 영역은 계속 확장될 것이고 양국 국민들의 기회는 더 커질 것"이라면서 "세계 최강 국가와 70년 동안 동맹을 맺어왔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한미동맹 70년 역사는 그냥 주어진 게 아니다. 국가 관계에 있어서 고마운 것이 있으면 고맙다고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한미가 두 나라 동맹의 핵심으로 꼽고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국제법적 시각으로 보면 미국 쪽에 크게 기울어진 심각한 불평등 조약이며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주장하면서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하면서 미국과 체결된 조약으로 평화협정 추진을 명문화했던 정전협정 취지와는 엇박자라는 점에 대해 모를 리 없을 터인데 극찬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도 지난 5월1일 한미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워싱턴 선언’에 대해 “제2의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불려도 될 정도로 의미가 크다”고 평가하며 “이번 선언은 재래식 무기를 기반으로 한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핵을 포함한 상호방위 개념으로의 업그레이드”라고 언급했다.
한편 윤 대통령은 대북 강경노선과 ‘주사파’에 대한 눈높이를 동일선상에 놓는 태도를 들어냈고 제주 4·3에 대한 내용을 교과서에 포함시키던 종래의 기준을 후퇴시켰다.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피해의 진상 규명을 전문으로 하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수장을 이 위원회의 활동 자체를 부인하던 극우인사로 지명했다. 윤 대통령의 대북 정책과 내치과정에서 적용된 이념문제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를 각각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윤 대통령은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해 취임 후 첫 3·1절 기념사를 통해 “우리 역사의 불행한 과거를 되새기는 한편, 미래 번영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협력 파트너로 변했다”며 한일 관계에 대해 ‘협력 파트너’라고 표현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 등에서 교과서를 통해 반역사적 제국주의적 시각을 강조하고 강제징용문제 등에서 일제가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식의 뻔뻔스런 태도를 고수하는 가운데 윤 대통령의 일방적인 백기 투항식 일본에 대한 태도는 결국 한미일 해군 연합훈련 실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바다 방류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식의 조치를 취했다.
이어 29일 일본 해상자위대 호위함 하마기리 함이 다국적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욱일기의 일종인 자위함기를 게양한 채로 부산 해군작전기지에 입항하는 사태로까지 급진전됐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11월 한국 해군 주최 국제관함식에 해상자위대도 초청됐지만, 한국이 욱일기 대신 일본 국기와 태극기만 게양하라고 요구하자 일본은 이에 반발해 행사에 불참했을 정도로 이는 민감한 이슈였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19일 서울 용산구 소재 국방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민의힘 원외당협위원장 초청오찬에서 “종북주사파는 반민주·반헌법 세력이다. 좌클릭, 협치 할 수도 있으나 종북주사파는 협치 대상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스스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고한 믿음·확신을 갖는 것”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그 후 참모들과의 비공개회의에서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사태를 겨냥해 “북한의 핵 위협과 마찬가지”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북핵 위협에서 국민의 안전, 재산을 보호해야 하듯 ‘불법파업’으로부터 국가 경제와 민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낸 발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박정하 수석대변인은 서면논평에서 “북한을 대변하는 민노총, 차라리 ‘민로총’으로 이름을 바꿔라”라고 말한 바 있다(연합뉴스 2022년 12월05일).
윤석열 정부의 첫 국방백서에 북한정권과 북한군을 ‘적’으로 규정하는 표현이 부활했다. ‘2022 국방백서’안에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이 담겼다. 정부 소식통은 “국정과제에 제시된 대로 북한정권과 북한군을 적으로 명시하는 표현이 국방백서 초안에 들어갔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22년 12월06일).
주적 개념은 지난 1994년 남북특사교환 실무접촉에서 북측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을 계기로 1995년 국방백서에 처음 명기돼 2000년까지 유지됐다. 이후 남북 화해 무드가 형성되면서 2004년 국방백서부터 ‘직접적 군사위협’ 등의 표현으로 바뀌었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에도 ‘직접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윤 대통령이 장관급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에 김광동(59) 상임위원을 임명했다. 김 신임 위원장은 대표적 뉴라이트 인사로 알려져 있으며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던 2008년 뉴라이트 계열의 대안교과서인 ‘한국 근·현대사’ 집필에 참여했다. 해당 교과서는 4·3을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정치 세력의 반란'으로 규정한 바 있다. 과거사 진상조사를 반대하는 인물이 과거사 조사를 담당하는 위원회의 수장으로 내정된 것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윤 대통령은 4·3을 폄훼해 온 극우 성향의 김태훈 변호사를 국무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해 4·3 관련 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윤 대통령은 일본에게 적극 다가가는 식으로 한일관계를 정상화시켜 대북 공조를 취하려하거나 북대서양조약기구와나 인도태평양지역 안보관련기구와의 대북 압박을 강화하려는 관계 증진을 시도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6월29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파트너국 정상회의에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은 유엔안보리 결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고, 한반도와 국제사회의 평화, 안보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그간 북한 문제에서 나토가 우리를 일관되게 지지해 온 것을 평가한다”라며 “북한을 비핵화의 길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북한의 무모한 핵미사일 개발 의지보다 국제사회의 북한 비핵화 의지가 더 강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세계일보 2022년 6월30일).
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1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SA)에 참석해 “평화로운 인도·태평양을 위해서는 북한의 비핵화가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 국제사회의 거듭된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재차 발사하거나 핵실험을 감행한다면 국제사회가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VOA 2022년 11월22일).
▲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4월2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미국의 법치, 미국익 최우선 – 군사주권 문제 한미동맹 정상화로 풀어야
이승만 전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의 북한 정책과 사상, 이념차이에 따른 국민 편 가르기 시도나 정책에 대해 살펴보았다. 두 지도자가 집권했던 상황은 동일하지 않다 해도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전쟁 사례가 그렇듯이 전쟁 시작과 진행과정 등은 군통수권자인 최고 지도자의 품성 등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유권자를 포함한 전사회적인 경각심이 요구된다. 전쟁은 그 발생 자체를 막아야지 일단 발생하면 우크라-러시아 전쟁처럼 보복전이 반복되면서 규모가 커지게 되어 결국 국민적 희생이 막대해진다.
얼마전 대만에서 실시된 지방의회 선거에서 ‘친미반중’을 앞세우며 독립, 분리를 주장하던 집권당이 대패했다. 양안간 경제관계가 밀접(대만의 대중 수출 비중 전체의 40% 전후)한 특성 등이 유권자의 표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통일뉴스 2022년 11월29일).
이는 향후 미국의 대만 정책과 대북정책에 어떤 식으로 든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 유권자들도 2024년 총선에서 어떤 이유이든 전쟁은 안 된다는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전쟁은 한민족에게 회복 불능의 피해를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 정책은 미 국익 챙기기가 최상의 가치로, 우방국에 대한 도감청이나 외국 지도자 암살을 불법으로 처벌치 않고 그 폭로 행위를 되에 반국가사범으로 처벌하게 되어있다. 최근 미 국가안보국(NSA), 중앙정보국(CIA), 국무부 정보조사국 등 정부 정보기관이 한국 정부 등에 대한 불법 도감청 자료가 폭로됐는데 2013년에도 미 국가안보국(NSA)이 적대국뿐만 아니라 한국 등 다른 동맹국의 미국 주재 대사관을 염탐한 사실이 폭로된 바 있다.
국제법을 짓밟는 미국의 불법행위에 대해 한국 정부가 별 문제아니라며 덮으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국제사회의 법치를 훼손한다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미국이 경제적 이익을 앞세워 자국 반도체, 배터리 산업 보호를 위해 취하는 파렴치한 행위로 국내 기업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6·25 전쟁 전후해 한반도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미국의 오늘날의 모습이 국제사회에 어떤 모습인지 윤 대통령이 더 정확히 파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윤 대통령은 용산미군기지 오염 문제로 한미동맹의 핵심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문제점이 확인되었다면 그 정상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이 조약으로 확보한 기득권을 행사하는 것은 미국식 법치로 보면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21세기 국제사회의 상식으로 보면 매우 비정상적인 국가간 관계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 조약은 수정 보완 조항이 없으며 6조를 통해 폐기만이 가능하다. 윤석열 정부는 미국과 상호 윈윈한다는 취지에서 국제사회의 정의수립을 위한 결단을 해 한미동맹 정상화에 나서야 한다 .미국이 정상적인 법치를 통한 한미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그 정상화를 위해 시급히 폐기되는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문제는 필리핀과 미국의 군사협정이 △미군은 필리핀 군부대 안에서 해당 지역 동의를 받을 때만 한시적 주둔을 할 수 있고 △필리핀 국내법의 적용을 받으며 영구기지는 만들지 못하며 △미군이 투자한 자체 시설은 추후 필리핀에 양도하게 되어 있다는 점과 비교하면 한국의 군사부문 비자주적 현실이 확연해진다.
국내에서는 주한미군 기지나 법적 지위문제를 거론할 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부속협정인 SOFA만을 주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상위법과 하위법 관계를 볼 때 효율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 조약의 법리에 따라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SOFA 개정은 모법인 이 조약의 개선이나 폐기로 가능할 뿐이다. 그런데 이 조약은 개정할 조하이 없고 단지 제 6조에 의해 폐기만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가 이 조약 페기를 미국에 통고하는 식으로 조약 정상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한국이 미국과의 군사관계를 정상화 시키는 것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좀더 국제적 상규에 맞게 개선시킬 방안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미국식 법치주의는 한반도에서 보장된 기득권을 최대한 활용하는 관행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경제력 세계 10위권, 군사력 세계 6위인 한국이 국가의 자주권을 지구촌 2백 여 국가처럼 회복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정상화가 첫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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