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전쟁 이후 한반도에 대해 연합국과 협의해 식탁통치를 실시한 뒤 적절한 절차를 거쳐 독립하게 만든다는 원칙을 세우고 포츠담, 카이로 회담 등에서 영국, 중국, 소련 등과 협의했다.
▲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을 앞두고 미국 트루먼 대통령,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이 회담에서 한국문제와 관련해서는 제8항에서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천명함으로써, 전후 독립을 재확인했다. 사진 출처=위키미디어 |
미국은 일본이 붕괴 또는 항복한 이후의 한반도 점령정책을 1942년부터 미 국무부 등 연방정부 차원에서 논의 결정하고 태평양전쟁 종전이 임박하면서 미 대통령 – 미 전쟁부 – 미 합동참모본부 – 맥아더라는 지휘계통을 통해 미군에게 통고되어 집행했다.
미국은 당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유럽에서 독일을 점령하는 등 위세를 과시한데 이어 극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심히 우려, 그 대책에 부심하고 있었다. 미국의 이런 조바심은 태평양전쟁 종전이후 미군이 일본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전범처리 등을 약하게 하는 방식으로 나타났고, 남한에 점령군으로 진주해 친일청산을 차단하면서 친사회주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미국, 소련 대일 선전포고 다음날 나가사키 원폭 투하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는 시점이 가까워진 1945년 8월 미국은, 소련이 유럽에서 승승장구하면서 독일 심장부로 진격한 뒤 그 여세를 몰아 동북아시아 진출을 시도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수립에 고심했다.
일본의 항복이 기정사실화 되는 시점에서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미국은 일본에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다. 미국은 소련이 만주를 더 많이 점령할 기회를 차단하기 위해 소련에 사전 통보 없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해 소련을 압박하면서 종전을 서둘렀다는 추정이 가장 큰 힘을 얻고 있다(▶관련 내용 보기 클릭).
1945년 8월6일과 9일 핵 공격을 받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에서 현장 사망 23 만 명, 부상 및 후유증 피해 51 만 명 등 총 74만 명의 원폭 피해자가 발생했다. 두 도시는 군수 도시로 강제로 끌려와 노동에 동원됐다가 피해를 당한 조선인 피해자는 10만여 명에 달했다.
조선인 피해자 가운데 5만 명은 즉사하고 5만 명이 살아서 4만 3,000명이 영구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거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생존 조선인 가운데는 원폭 투하 후에 일제에 의해 잔해 제거에 강제동 원되어 피폭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부상자들은 일제에서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를 받았고, 귀국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관련 내용 보기 클릭).
▲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미국 원폭 폭발 모습. 사진=National Archives Museum |
미국 소련에 북위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해 통고
소련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한반도 쪽으로 진군하자 미국은 1945년 8월 13일 소련의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한반도 전역 점령을 막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해, 소련에 통고했다.
미국은 원자탄이라는 신형 무기가 일본에서 가공할 파괴력을 보인 것을 소련에게 과시하면서 제안한 것이다.
“한반도의 절반인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과 미국이 분할 점령하자.”
소련은 미국의 원자탄에 기가 꺾여 미국의 제안을 수락했다.
일본 정부는 두 차례의 미군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궁지에 몰리자 8월14일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고 미국과 영국에 통보했다. 8월15일 일본 천왕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이 끝났음을 자기네 국민에게 알렸다. 일본 정부는 8월16일 일본군에 교전 중지 명령을 내렸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태평양 전쟁은 끝났다. 원자탄 두 발에 일본은 갑작스럽고 극적인 모습으로 무릎을 꿇었다(James F. Schnabel,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Washington, 1971), 811).
소련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기 일주일 전에 만주에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을 개시해 전리품을 챙기는 작전을 시작했다. 소련은 파죽지세로 진격하면서 만주에 포진해 있던 일본군 1백 여 만 명을 무장해제 시키는 한편 한반도와 일본 본토까지 진격해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려는 기세로 보였다.
중국은 장개석과 모택동 두 세력으로 이분되어 있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장개석 군이 천하를 통일할 가능성은 희박한 상황이었다. 소련과 모택동 군이 연합하면 중국 전역의 공산화가 가능해 보였다. 미군은 당시 오키나와까지 점령했지만 일본 본토와 한반도로 군대를 진입시키려 노력한다 해도 소련군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1945년 8월21일 해방군의 기치를 들고 원산에 상륙, 평양에 소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38도선 이남으로 진격하지 않았다. 소련이 한반도 분할 점령을 요구한 미국의 제안을 실천한 것이다.
전쟁 상황에서는 연합군 체제라 해도 연합국 간에 공정, 신뢰, 이타정신은 찾기 힘들고 국가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점령지를 확대하고 전리품을 챙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소련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새로 개발한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핵무기의 위세에 밀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련군은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한 뒤 가능한 한 많은 일본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공격적인 군사작전을 계속했다. 이런 작전은 1945년 8월 말까지 쿠릴 열도와 남부 사할린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도 포함됐다("History News Network - As World War II entered its final stages the belligerent powers committed one heinous act after another". hnn.us.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8-12-16. Retrieved 2008-07-19).
그러나 소련은 일본 열도의 주요 4개 섬 어느 섬도 점령하지 못했는데 이는 미국의 확고한 반대도 그 원인의 하나였다. 스탈린은 소련군이 맥아더의 직접 지휘를 받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당시 스탈린의 주 관심사는 아시아보다 유럽에서 공산주의 영향력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한 뒤 미국과 러시아 수병들이 알라스카에 만나 승전을 축하하는 맥주를 마시고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
미국, 중국 의식해 한반도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으로 교체
미국이 일본에 원폭 두 발을 터뜨려 일본의 항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 중이던 미 야전군 10군은 한반도 점령 명령을 받았다. 10군은 동시에 사령관으로 중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 사령관 조셉 스틸웰 대장이 임명되면서 서울로 이동하기 위해 분주히 서둘렀다(Except where otherwise noted, the account of occupation preparations on Okinawa is based on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1945-1948, part 1, vol. 1 (Historical Section, Headquarters XXIV Corps, n.d.), pp. 3-73).
스틸웰 대장은 동아시아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도중 장개석과 다투다가 1944년 10월 오키나와로 전출되어 미 야전군 10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태평양전쟁 종전 당시 일본군 공격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의 휘하에는 2개 보병 사단과 존 하지 준장이 지휘하는 전투 및 지원부대인 24(XXIV) 군단이 있었다. 하지 중장은 오키나와를 수비하기 위해 후방에 주둔 중이었다(Tentative Troop List by Type Units for "BLACKLIST" Operations, General Headquarters, United States Army Forces, Pacific, 8 August 1945, in folder "OPD BLACKLIST Ed. 3 to BOLERO," RG 165, Entry 418, Box 1777, NA. For background on General Stilwell's career and his tumultuous relationship with Chiang Kai-shek see Barbara W. Tuchman, Stilwell and The American Experience in China 1911-1945 (New York: Macmillan, 1971)).
스틸웰 대장의 일급참모 프랭크 메르릴 준장은 1945년 8월 11일, 미 야전군 10군은 일본본토에 대한 점령 작전이 시작된 ‘B-DAY’이후 27일째 되는 날 한반도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때는 미국이 8월 6일 히로시마시에 이어 8월9일 나가사키시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일본의 항복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아시아를 잘 아는 스틸웰 대장 “그들이 내 목을 다시 잘랐다”며 분노
8월13일 스틸웰 장군이 맥아더와 협의하기 위해 마닐라를 방문한 뒤 가벼운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그가 병실에 있는 동안 미 야전군 10군 사령부는 한반도 점령 계획이 수정되었다는 통고를 받았다. 스틸웰 대장 대신 하지 중장이 한반도 점령미군 사령관으로 교체된 것이다.
스틸웰 대장은 아시아를 잘 아는 군인이었지만 하지 중장은 태평양 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려서 무공훈장을 받은 야전 전투 사령관으로 일본 점거에서 해방된 아시아 국가의 행정을 지도할 특별한 능력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한반도 점령 사령관이 교체된 이유는 확실치 않다.
맥아더는 스틸웰 대장에게 워싱턴에서 통보된 교체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장개석 총통이 스틸웰 대장이 지휘하는 미군이 중국 해안에 상륙한다는 소문을 듣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불평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개석 총통에게 다짐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한반도를 일본 해안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어서 맥아더는 스틸웰 대장을 한반도 점령군 사령관에서 제외시키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스틸웰 대장은 자신의 일기장에 “그들이 내 목을 다시 잘랐다. 왜 그들은 나를 지지하기는커녕 내몰려 하는가?”라고 썼다(History of USAFIK, p. 10; General Joseph W. Stilwell, Diary, 13 August 1945, Hoover Institution Archives, Stanford, Calif).
미국이 한반도 점령군 지휘관을 교체한 결정은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하지 중장은 미 군정청(USAMGIK ;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사령관을 맡은 1945년 9월8일부터 1948년 8월15일까지 복잡하고 폭발력이 강했던 한반도 상황에 무감각했고 그가 개입하기 전에 이미 복잡했던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정들을 내놓았다(James I. Matray, "Hodge-Podge: American Occupation Policy in Korea, 1945-1948," Korean Studies, 19(1995), 17-38).
▲ 존 리드 하지(왼쪽). 사진=socialistworker |
미 정부 결정, 독립 열망 강했던 한반도 현지 사정 완전 배제
당시 미국의 한반도 점령정책은 1905년 가스라-테프트 밀약을 의식하고 연합국과의 마찰 회피, 소련의 견제나 미국의 국익만을 고려해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문제가 많았다. 맥아더 본인이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해 일본 점령 정책에서도 이런 점이 중요하게 반영되었고 하지 중장도 이를 철저하게 추종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일본에 식민지로 강점되어 독립 열망이 강했던 한반도 현지의 특수 사정 등은 완전 배제된 미 연방정부의 결정이어서 미 군정청이 군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맥아더가 미 정부로부터 명령 받은 일본 항복직후 전후 처리 정책은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를 구분치 않은 채 동일한 내용이었다.
만약 하지 중장이 스틸웰 대장처럼 아시아 사정에 해박한 인물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큰 부분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미국 일부 전문가들도 하지 중장 교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스틸웰 대장이 한반도 점령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암에 걸린 상태였고 일년 후 사망했지만 그가 한반도에 갔을 경우 하지 중장보다 더 매끈하게 통치했을 가능성을 전면 부인키 어렵다. 하지 중장의 한반도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이나 경험 부족은 그가 자신의 재량권 범위 안에서 결정을 내릴 때 분단 한반도의 정치적 대치상태를 심화시키거나 심지어 한반도 전쟁을 야기한 원인의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8월 15일 일본 정부가 항복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발표하자 24 군단 메르릴 준장은 지휘관들에게 “8월15일이 B-DAY가 되었다. 한반도 점령 미군의 이동 준비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맥아더 사령부가 만들었던 일본과 한반도 점령계획 Blacklist에 따르면 누가 점령 지역 어느 곳으로 가는지를 지정하고 목적지에 도착한 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총괄적인 지침을 주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을 때 이 계획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어떤 기본 계획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미, 일본 항복하자 한반도 부대 파견 서두르며 소련 동향 살펴
미군7 보병 사단과 그 본부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한반도 점령군으로 지정된 다른 부대는 이오지마나 팔라우 군도 남쪽의 아과르, 필리핀 전역의 여러 섬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는 즉시 출발해서 오키나와로 수송되어야 했고 그 이후 한반도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함선이동은 매우 중요했고 일본에 대규모 점령군 병력 이동은 최우선 과제였다.
매우 어려운 수송 작전의 책임은 7함대 상륙군의 다니엘 바베이 부제독에게 주어졌다. 그와 그의 참모들은 당시 마닐라에 있었고 그 휘하의 함선들은 서 태평양상에 흩어져 있거나 뉴기니처럼 먼 곳에 있었다(46. Barbey, MacArthur's Amphibious Navy, p. 323; James A. Field, Jr.,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Korea (Washington: Office of Chief of Naval Operations, 1962), p. 15).
바베이 부 제독이 자신의 수송 및 전투함을 정리할 동안 제24군단 예하의 제24군수지원사령부(ASCOM ; Army Service Command 24th Corps)는 점령군 지원에 필요한 보급품을 선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엄청난 보급품이 일본 침공을 위한 준비 작업 과정에서 오키나와에 쌓였다. 이들 보급품의 목적지를 재조정하는 작업은 단 기간 안에 처리해야할 급선무였다. 그러다 보니 혼선이 불가피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점령군 사령관들에게 보급선이 점령군의 다른 업무를 지원하려던 업무를 변경해야 하기 때문에 점령지에 도착할 보급품이 원래 목적지가 아닌 곳으로 배정되는 일이 발생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24군단은 원래 열대지역에서 겨울이 추운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어서 모든 군인들은 여름 복장을 하고 있었고 동절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털옷과 난로, 텐트 등을 실은 보급선이 알라스카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 보급선이 항로를 돌려 미군이 한반도에 당도한 직후에 인천에 도착할 수 있었다(Reports of General MacArthur, p. 16).
제24군단 예하의 제24군수지원사령부(ASCOM ; Army Service Command 24th Corps)가 군인과 군수품을 인천으로 떠날 군함에 선적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하지 중장은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진행 중인지 살피고 있었다. 그는 소련과 일본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8월22일까지 소련은 만주를 점령한 상황이었지만 한반도 상황은 모호했다. 맥아더는 한반도 점령이 연합국 4개국이 공동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미 전쟁부에 한반도와 관련해 연합국(특히 소련)과 합의한 사항을 알려줄 것을 요청했다.
9월1일 미 국무·육군·해군 삼부조정위원회(SWNCC)는 맥아더에게 답신을 보내 ‘한반도 점령과 관련해 영국, 중국이나 다른 국가가 의사표명을 하지 않을 경우 미국과 소련군이 담당할 것이다. 한반도 점령과 관련한 국제적 협의조정 문제는 미 국무부가 긴급 사항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Message, CINCAFPAC to JCS (CM-IN-21116), 22 August 1945; Draft Message, JCS to CINCAFPAC, SWNCC Memorandum, Enclosure A to JCS 1483, "International Agreements as to Occupation of Korea," 24 August 1945; JCS Note by the Secretaries advising that JCS 1483 was approved and the message dispatched on 1 September 1945, all in Combined Civil Affairs Committee (CCAC) folder 014 Korea (8-28-45)* Sec. 1, RG 218, Box 146, NA.).
맥아더는 미 국무부의 답신을 받기 전에 하지 중장에게 전문을 보내 ‘제24군단이 케이조(서울) 지역에 당도하기 전 소련군이 먼저 그곳을 점령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라’고 조언했다.
미 정부 남한 점령정책, 친일 청산 차단하면서 조선인 독립 열망 배제
일본은 9월2일 항복문서에 서명해 공식 항복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9월6일 ‘일본 항복이후 미국의 초기정책‘을 승인했다. 이 정책은 두 개의 목표를 세웠는데 △일본군 무장해제와 일본이 향후 미국이나 세계의 평화, 안전에 위해가 되지 않게 하며 일본의 전쟁 가능성의 배제, △이 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일본 국민의 의사에 따라 일본 정부를 구성하고 일본을 유엔 헌장에 맞는 민주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text in Department of State Bulletin, September 23, 1945, pp. 423–427).
▲ 1945년 9월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가 USS 미주리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위키백과 |
미군은 8월30일 일본에 도착해 연합군의 일본인 공격 금지. 일장기 사용 금지 등의 포고령을 발표했다. 9월8일에는 미국이 점령군의 위상을 앞세워 인천항을 거쳐 서울에 진주했다. 존 하지 장군이 지휘하는 제24군단 휘하의 제7사단은 그 날 서울의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 다음 날 총독부 건물에서 일장기가 내려진 뒤 조선에서 게양되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
미국은 일본 항복 이후 한반도 남쪽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발표한 맥아더 포고문 제1호에서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 임을 분명히 밝히고 북위 38도선 이북에 들어온 소련군과 대치했다. 미군의 군사통치 체제인 미군정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해방직후 독립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 선포된 여운형 중심의 조선인민공화국 등 모든 정치조직이나 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군정을 선포한 뒤 일본총독부 소속 일본 간부들을 미군정의 고문으로 위촉하고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근무하게 했다. 미군정은 이어 한국인으로 일제 치하에서 공공기관에 근무한 사람들을 원래 자리로 복귀시켰다. 1948년 이승만 정권 등장까지 지속된 미군정의 이런 조치는 결국 일제 잔재를 청산치 못하게 만든 가장 핵심적 요인의 하나로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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