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미 중앙정보국(CIA) 한반도 정보 담당으로 박정희 정권의 자체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첩보활동에 참여했던 인물로 알려진 리처드 롤리스 전 미국 국방부 부차관이 지난 3월 한국을 방문했다. 윤석열 정부가 북한 핵위협에 대해 자체 핵무기 개발 필요성과 함께 미국에 대해 핵우산 제공 강화를 요구하던 민감한 때였다.
그의 방한 목적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는 박정희의 핵 개발을 미국이 저지시킨 비화 등을 담은 자신의 회고록 ‘핵무기 사냥’ (Hunting Nukes)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밀 핵무기 개발 시도를 무산시키는 데 직접 관여한 내용을 소개하는 등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회고록 발간을 불허한 미 국방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가 CIA 본부에 사전 심사를 받아 5백 여 군데를 삭제해 출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핵 위협 속 한국의 자체 핵개발 주장 향후 더 커질 전망
‘매파 지한파’로 알려진 롤리스 전 부차관은 한국 문제에 있어서는 사실상 장관을 대신하고 대통령에까지 영향을 끼친다(‘신동아’ 2007년 1월호)는 평가를 받았고 한반도 문제를 총괄하는 아태담당 부차관으로 용산기지 이전, 해외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보, 전시작전권 이양 등 한미 간 주요 군사현안을 총괄했다(뷰스앤뉴스 2007년 4월6일). 그는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과 함께 한미 군사동맹 재조정 과정 등에서 한국을 강하게 압박하는 한편 북핵 6자 회담 미국 측 부대표로 대북 강경 대응을 주도했다.
롤리스 전 부차관은 박정희의 핵 개발 계획을 무산시킨 것이 한미동맹을 위한 것이라고 회고했는데 그가 말한 한미동맹은 미국 이익을 위한 미국 주도의 안보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박정희 핵 개발 계획 추진 당시 미국은 키신저 국무장관이 진두지휘하는 등 한국에 최대한 압박을 가한 것으로 미국 정부의 비밀 자료에서 밝혀진 바 있다.
롤리스 전 부차관은 지난 3월 28일 산케이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윤석열 정부가 핵 개발 계획을 추진하면 일본도 핵무기 보유에 나설 우려가 있다. 이 경우 미국은 일본을 통제할 수도 없고 통제해서도 안된다”며 “한국이 핵 보유를 하려 한다면 일본도 독자적인 핵 보유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국 측에 경고했다”고 밝혔다(서울신문 2023년 3월29일). 그는 일본 입국에 앞서 한국을 찾아 정부 및 국회 관계자들과 회동을 갖고 윤 대통령이 지난 1월 ‘자체 핵 보유’에 대해 언급한 문제 등을 논의했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의 핵우산 한반도 제공 강화를 강조하면서 자체 핵무기 제조 능력이 있다고 언급하고 한국내 여론조사에서도 핵무기 자체개발을 지지하고 있는 것을 미국은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한국의 핵무장은 동북아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군사협력체제의 지각 변동을 초래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미 두 나라는 북한의 핵위협에 대해 핵우산 제공 강화를 두 정상이 합의하는 식으로 봉합했으나 향후 미국과 북한이 핵에 대한 태도를 수정하지 않는 한 한반도에서 핵 위기는 더 고조될 전망이고 그에 따라 한국의 핵 자체개발 주장도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 윤석열 대통령. 사진=대통령실 |
북한 ‘미국의 전략적 인내’ 지속하자 남한 전술핵 공격 발언
박정희의 자체 핵무기 개발 시도와 무산에 이어 최근 한국 정계에서 또다시 핵 무장론이 제기되는 것은 북한이 전술핵무기로 남한을 공격하겠다고 밝힌 것도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북한은 종래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남한이 아니고 미국을 타겟으로 삼는 것이라고 밝혀왔지만 그 태도를 바꾼 것이다.
북한은 2022년 초부터 11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를 포함해 86번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실시해 세계를 놀라게 했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12월 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6차 전원회의 연설에서 밝힌 새해 구상에서 남한을 겨냥한 전술핵 위협 극대화를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우리 국가를 ‘주적’으로 규제하고 ‘전쟁 준비’에 대해서까지 공공연히 줴치는 남조선 괴뢰들이 의심할 바 없는 우리의 명백한 적”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전술핵무기 다량생산”과 “나라의 핵탄 보유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일 것”을 올해 핵무력 강화 정책의 기본 방침으로 못 박았다. 김 위원장은 전원회의 마지막 날 ‘600㎜ 초대형 방사포 증정식’ 연설에서 “남조선 전역을 사정권에 두고 전술핵 탑재까지 가능한 것”이라며 전술핵 확대가 남한을 겨냥한 것임을 명시했다(경향신문 2023년 1월1일).
북한이 미국에 대해 대북제재 해제 등을 요구하면서 탄도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에 주력하고 있지만 미국은 북한에 대한 별도의 대응전략을 세우는 대신 미국의 세계핵전략의 핵심인 전략핵폭격기, 핵잠수함, ICBM으로 북한에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른바 변형된 전략적 인내를 지속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북한은 한국과 일본을 타격할 전술핵 개발을 공언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소극적 대응에 대해 한국과 일본의 반응을 유발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전략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전술핵 위협에 대해 일본은 향후 5년간 국방비를 대폭 증액해 수년 후 군사력 세계 3위로 부상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한국은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의 핵우산 제공 강화를 담은 핵확장억제강화조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한국 정치권 일각에서는 북한이 남한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미국이 북한 탄도미사일의 미 본토 공격을 감수하면서 한반도에서 핵전쟁을 벌일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체 핵무기 개발이나 미국의 전술핵 배치만이 최상책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미 정부 고위당국자는 워싱턴 선언 발표 며칠 전 “냉전 때처럼 한반도에 전술핵이나 다른 종류의 핵무기를 재배치한다는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롤리스 전 부차관은 “현재 미국의 무기체계 구성을 감안하면 우리가 그렇게 할 역량이 없다. 1990년대 초 미국이 한반도에서 710여개의 미군 전술핵무기를 철수했을 당시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따라 해당 무기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전술핵무기 제조는 2~3년 이상이 소요된다. 그 때에는 한국과 일본 모두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VOA 2023년 6월13일).
롤리스 전 부차관은 “괌으로부터의 핵무기나 잠수함 발사 핵무기로도 북한을 타격할 수 있지만, 지상에 배치된 전술핵무기는 다른 차원을 의미한다. 이것은 북한이 한국을 핵으로 공격하면 우리도 핵으로 공격한다는 90%의 확실성을 가진 메시지다”라고 강조 이를 “핵 인계철선(nuclear trip wire)”이라고 불렀다(주간조선 2023년 3월30일).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제조 비밀 계획 미 CIA가 1975년 입수
미국은 한미군사관계에서 슈퍼 갑의 위치에 있는 점을 기반으로 한 한미동맹이 미 국익을 확보하는 최상 책으로 보고 이의 지속을 강조하는 기조를 유지해왔다.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비밀 제조 계획도 한미동맹을 파괴하는 시도로 보고 총력을 기울여 저지한 것으로 미국 정부 비밀 자료 등에서 밝혀졌다. 미국의 완강한 태도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여서 한국 정치권 일각에서 불을 지피고 있는 자체 핵 무장론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1975년 초 한국 정부의 핵무기 제조 비밀 계획에 대한 첩보를 입수해 본국에 타전하면서 미 포드 행정부의 한국 정부에 대한 핵무기 개발 계획 포기 압박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한국이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구입하려는 것은 이 시설을 이용해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에서 핵무기 제조에 사용되는 플루토늄을 생산을 할 목적으로 본 것이다.
당시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한국 정부의 핵무기 개발은 동북아에 큰 파국을 불러온다’면서 그 계획을 중단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https://nsarchive.gwu.edu/briefing-book/henry-kissinger-nuclear-vault/2017-03-22/stopping-korea-going-nuclear-part-i). 키신저 장관은 워싱턴 주재 캐나다, 프랑스 대사와 긴밀히 협의하면서 핵연료 재처리 시설의 한국 판매 저지를 외교 통로를 통해 추진했다.
키신저는 한국이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시설 계약을 추진하고 원자로도 캐나다로부터 구입하려 추진할 경우에 대비해 여러 대처 방안을 마련했고 결국 프랑스, 캐나다와 외교적 경로를 통해 수습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 계획을 중단시킨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의 1970년대 모습. 사진=위키미디어 |
한국,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에 자극 받아 핵무장 시도
당시 한국 정부가 자체 핵무장을 시도한 것은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을 보인 뒤였다. 미국 정부가 1970년 7월 한국 정부에 주한 미군 철수 계획을 통고한 뒤 1971년 미 7사단 병력 2만 6천 명이 철수했다. 이에 한국은 독자적으로 핵무기 개발 계획에 착안했고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구입하려 시도했다(Pike, John. "S.Korean PM Against Redeploying US Tactical Nuclear Weapons).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말 핵무기를 1977년까지 제조하는 기술을 개발하라는 비밀 계획을 수립하라고 청와대 경제 2비서실에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한국원자력연구원이 1975년 1월에 프랑스의 CERCA사와 핵연료시설공급계약을, SGN사와는 핵연료재처리 건설 용역계약을 체결했고 이 사실이 미국에 알려졌다.
한국 정부가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프랑스에서 구입하려 한다는 사실에 주목한 주한 미 대사관은 1974년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한국 국방정책 담당자들은 미국의 한국 방어에 대한 이중적 태도 등에 자극받아 독자적 방어능력을 키우기 위해 핵무기 개발 능력을 갖추려 시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미 국무부는 1975년 3월 답신을 통해 “한국의 핵 무장은 동북아 균형을 파괴할 영향력을 지닌 것으로 미국은 한국이 핵 공격력을 갖추지 못하도록 적극 저지해야 한다”면서 미국 정부는 한국에 대해 직접, 강력한 조치를 취할 방침을 밝혔다(https://nsarchive.gwu.edu/briefing-book/henry-kissinger-nuclear-vault/2017-03-22/stopping-korea-going-nuclear-part-i).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미국 대사는 1975년 12월 중순 미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한국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 중인 핵무기 개발 계획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고위 관리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면서도 한국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 계획이 한미간 상호이익을 해칠 것이라는 자신의 견해에 동조했다”고 보고했다.
스나이더 대사는 한국 고위관리들이 한국은 평화적인 핵 이용 계획을 추진 중이며 미국이 이를 지원할 수 없느냐고 질문했는데 한국 고위관리들이 언급한 다양한 기술 지원에는 핵연료 재처리 기술도 포함됐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스나이더 대사는 정치적으로 논쟁하는 것보다 양국간 체면을 손상치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 대통령이 핵무기 보유를 시도할 당시 남한에는 미국 핵무기가 수 백 기 배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미국이 한국에 첫 핵무기를 배치한 시기는 1958년이고 전술 및 전략용 핵무기 숫자는 1960년대에 최고 950기까지 증대했다)Mizokami, Kyle (September 10, 2017). "The History of U.S. Nuclear Weapons in South Korea".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September 15, 2017. Retrieved September 24, 2017). 미국은 한국에 전투기와 폭격기에서 투하하거나 야포와 로켓으로 쏘는 핵포탄 등 다양한 핵무기를 배치했다가 1991년 연말 미국으로 모두 철수했다.
미국, 한국 핵무장 시 발생할 사태 지적하며 반대 의사 밝혀
포드 미 행정부는 캐나다, 프랑스 정부와 협력해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중단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1975년 베트남이 함락되면서 한국의 미국에 대한 우려가 커졌으며 박 대통령의 핵무장 추구 결의가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1975년 4월 베트남이 함락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그 해 6월12일 기자회견을 통해 핵무기에 대한 포부를 처음 밝혔다(Washington Post. 12 June 1975).
미국은 박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계획은 미국이 남한에서 1개 사단을 철수하기로 한 것에 대한 불만에서 나왔으며 이 때문에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했다(U.S. Embassy Seoul Telegram 3090 to State Department, "Meeting with President Park: Missile Strategy," 1 May 1975, Secret May 1, 1975 Source: Sneider records, box 2, Amb. Sneider Telegrams - May-July 1975).
한국은 1979년까지 경수로 구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경수로에서 생산되는 사용 후 핵연료에서는 재처리 시설을 통해 농축 우라늄보다 쉽고 빠르게 핵무기 원료를 추출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를 경계했다.
미 포드 행정부는 상황을 파악하는데 수 개 월이 걸렸으며 한국 관리들과 비밀리에 접촉해서 프랑스로부터 핵물질 재처리 시설을 구입하는 것을 미국이 반대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미국은 한국이 핵무장을 할 경우 미국과의 결별, 국제적 제재, 외교와 무역 타격, 일본의 비핵정책 파기 위험, 중국과 러시아의 한국 핵공격 위험 등이 발생할 우려가 크다며 반대했고 이런 논리는 오늘날에도 통용되고 있다(https://www.eastasiaforum.org/2011/10/17/park-chung-hee-the-cia-and-the-bomb/).
박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 계획을 추진하면서도 한국이 1975년 4월 캐나다에서 원자로를 구입한다는 조건으로 핵비확산조약(NPT)에 가입했다. 이 조약에 가입하면 한국은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한다는 원칙에 순응하고 국제적으로 공인된 안전지침을 준수해야 했다. 이는 박 대통령이 미국과의 협상을 염두에 두고 행한 조치로 추정되고 있다.
키신저 장관은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한국의 핵개발 계획에 대한 포기 압박을 지속했다. 당시 미국 관리들은 박 대통령과 핵문제에 대해 직접 대화하지 않는 대신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구입하는데 깊이 관여한 박 대통령의 고위 보좌관들과 협의했다. 그 과정에서 그 계획을 추진하는 데는 복잡하고 장기간에 걸친 기술 협력 등이 포함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결국 프랑스에서 관련 기계를 구입하는 것을 중단시켰다.
캐나다가 특히 한국에 원자로를 판매하는 계획을 타결 짓는 것을 지연시키면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 기간 동안 한국은 핵 재처리 계획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캐나다에 제공했다. 그러자 캐나다 정부가 한국 정부에 원자로 판매 조건으로 재처리 공장시설을 건설하면 안 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키신저 장관은 캐나다 국무장관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 결정타가 될 것’이라며 동의했다(Memorandum of conversation, "Middle East; ROK Nuclear Reactor," 24 January 1976, Secret Jan 24, 1976. Source: RG 59, Records of Henry Kissinger, 1973-1977, box 16, Nodis Briefing Notes, 1975-76; also available on Digital National Security Archive).
한국 정부는 프랑스로부터 직접 재처리 시설을 구입할 수 없게 되었지만 캐나다와 미국 몰래 뒷거래를 통해 그것을 구입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 또한 미국 정부의 개입에 의해 좌절됐다. 1976년 7월 프랑스 주재 미 대사관이 미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는 대만 중계상인이 한국에 보낼 재처리 기술을 프랑스로부터 구입하려는 것을 파악하고 대만 중계인과의 거래를 중단시켰다(U.S. Embassy Paris telegram 20831 to Department of State, "Korean Reprocessing," 16 July 1976, Secret Jul 16, 1976 Source: FOIA release by Department of State).
키신저 장관이 주도한 미국의 압박이 강화되면서 박정희는 결국 1976년 1월 프랑스에서 재처리 기술을 도입하려는 계약 파기했다(https://en.wikipedia.org/wiki/South_Korea_and_weapons_of_mass_destruction). 그리고 그 해 12월 핵무기 개발 계획을 중단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핵무기 제조를 위한 암호명 890계획 비밀계획 추진용으로 만든 은행계좌가 1979년 말 박정희가 살해될 때 까지 존재했다. 미국은, 박정희가 그런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강압정치를 통해 한국 내에서 국회 등과 사전에 협의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판단했다.
카터 행정부는 1977년 주한미군 1천 명을, 1978년 5백 명을 철수시킨 뒤 1979년 철수 계획을 중단했다. 이는 박 대통령의 핵무장 계획이 밝혀진 뒤 전면철수 계획을 백지화한 것을 의미했다(13 US Central Intelligence Agency, Regional and Political Analysis Memo, The Implications of Withdrawing Nuclear Weapons From Korea, RPM 77-10210 M, August 11, 1977, p. 2).
박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철회한 주요한 요인의 하나는 1978년 한미가 합의한 한미연합사 발족인 것으로 지적되었다. 당시 한미연합사 사령관이 한국군에 대한 평시 및 전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이는 미군이 한반도 유사시 자동 개입하는 ‘인계철선’으로 인식되었다(한국군 작전통제권 가운데 평시의 것은 1994년 미군으로부터 넘겨받았고 전시의 것은 2023년 현재 협상중이다. 이런 점을 보면 한미연합사 발족은 미국이 향후 한반도 군사 충돌 사태 발생 시 자동 개입한다는 것으로 본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미군은 미 대통령이 군통수권자이고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 사항으로 해외 분쟁 참여나 동맹 여부를 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미 CIA는 미국이 한국에서 미군을 일방 철수할 경우 한국이 다시 핵무장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https://www.eastasiaforum.org/2011/10/17/park-chung-hee-the-cia-and-the-bomb/).
▲ 1995년 미국 정부가 공개한 초소형 M-388 핵폭탄. 사진=위키미디어 |
박정희 핵무기 개발 추진 관련 미국 비밀자료 2017년 공개
박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추진과 관련해 발생한 한미 갈등은 미국 조지워싱턴대의 국가안보문서고(National Security Archive;이 기구는 1985년 설립되어 미국 정부 비밀문서 등에 대한 분석 자료를 제공하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NGO 단체로 손꼽힌다)가 한미간에 핵무기 제조에 대한 논란이 지속된 기간 동안 주한 미 대사 등 미 외교관들이 본국과 주고받은 전문이 포함된 미 정부 비밀문서를 2017년 3월 아래와 같이 공개하면서 밝혀졌다(https://nsarchive.gwu.edu/briefing-book/henry-kissinger-nuclear-vault/2017-04-12/stopping-korea-going-nuclear-part-ii).
- 미 중앙정보국(CIA) 리차드 로레는 1975년 초 한국의 핵무기 제조 비밀 계획을 탐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구입하려 시도하려는 목적에 대한 정보를 맨 먼저 입수해 본국 정부에 보냈다(Draft Telegram to State Department Intelligence and Research [RCI], 3 March 1975, Secret Mar 2, 1975 Source: RG 59, Richard Sneider records, box 2, Ambassador-Eyes Only). 미 정보기관은 당시 한국이 핵 기폭 장치를 1980년까지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 대사는 1975년 9월 한국 남덕우 부총리가 “박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의 핵물질 재처리 시설 구입에 대해 얼마나 심하게 반대하는지 알지 못한다”면서 “남 부총리가 다른 고위관리들과 논의해서 박 대통령에게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릴 것인지 논의하겠다”고 말했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U.S. Embassy Seoul Telegram 6850 to State Department, "ROK Nuclear Fuel Reprocessing Plans," 3 September 1975, Secret Sep 3, 1975 Source: Sneider records, box 2, Amb. Sneider Telegrams-August-December 1975).
- 키신저 장관은 프랑스와 캐나다 정부를 설득해 한국이 핵물질 재처리 시설 등의 구입 계획을 철회시킬 압력을 가하도록 할 계획을 추진했다. 당시 미 국무차관은 미국 주재 캐나다 대사에게 원자로 판매 등과 관련해 캐나다가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할 것을 요청했다.
- 스나이더 미 대사는 ‘한국 정부가 일본은 핵물질 재처리 시설을 가동하고 있는 점을 들어 한국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서 미국 정부는 한국과 일본은 그 지정학적 위치가 달라 일본이 군사 안보 측면에서 한국보다 안전하다는 점을 한국에 인식시켜야 한다고 미 국무부에 건의했다(미국은 한국에 대해서 핵물질 재처리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반면에 일본에는 광범위한 재처리 권한을 주고 있어 형평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본은 핵물질 재처리를 통해 국내에 비축한 플루토늄으로 1350기 정도의 핵탄두를 제조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6월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에서 미국에 일본과 같은 수준의 재처리 권한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문화일보 2016년 9월28일)).
- 김종필 총리는 스나이더 미 대사와의 대담에서 한국은 핵무기를 원치 않으며 프랑스 핵물질 재처리기는 평화적 목적으로 사용될 것이고 국제기구의 점검을 받아 미국의 우려를 불식 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총리는 이어 “미국이 의심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박 대통령과 본인이 책임을 지고 있는 한 미국의 이해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State Department telegram 230171 to U.S. Embassy Seoul, "ROK Nuclear Reprocessing," 4 December 1975, Secret, Excised copy Dec 4, 1975 Source: State Department mandatory declassification review (MDR) release from P-reels).
- 미국 정부는 1976년 1월 한국에 특사를 보내 한국이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시설 구입을 포기하면 미국은 한국과 향후 원자력 분야에서 협조할 것이라고 확약하는 제안을 제시했다(Department of State telegram 017725 to CINCPAC transmitting U.S. Embassy Seoul telegram 0546 to Department of State, "ROK Nuclear Reprocessing," 23 January 1976, Secret Jan 23, 1976 Source: RG 59, AAD).
- 프랑스가 결국 한국의 핵무기에 대한 야심을 무산시켰다. 한국 주재 캐나다 대사는 남덕우 부총리를 만나 “프랑스가 한국에 대한 핵물질 재처리 시설 판매를 연기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남 부총리는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계약 해지”라며 아쉬워했다(U.S. Embassy Seoul telegram 0292 to Department of State, "ROK Nuclear Reprocessing: Canadian Problem," 13 January 1976, Secret Jan 13, 1976 Source: RG 59, AAD).
미국, 한국의 핵무기 개발 저지한 뒤 핵우산 제공 사실 연례적으로 공개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자체 개발 시도이후 미국은 한국이 유사한 시도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경계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한국 자체 핵무기 개발 능력 보유와 같은 발언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박정희 정권 이후 미국 정부 등이 한국의 핵무기 개발 추진 가능성에 대해 취한 언행 등에서 확인된다.
2014년 3월 미국 워싱턴D.C 우드로윌슨 센터에서 '박정희 시대의 한·미·일 3각 협력관계'를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 참가했던 박진 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1975년 8월27일 박정희 대통령과 제임스 슐레진저 미국 국방장관의 면담에서 이뤄진 대화 내용이 담긴 비밀해제 문서들을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연합뉴스 2014년 3월27일).
-- 슐레진저 장관은 박 대통령에게 "한국이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노력은 소련이 한국을 핵무기로 위협하는 명분을 제공할 것"이라며 "한·미관계를 손상시키는 가장 유일한 요소가 바로 한국의 자체적 핵개발 노력이다. 핵무기가 한국에 없는 것이 최선이다. 평양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2∼3만 명이 사망하지만 반대로 소련이 서울을 향해 핵무기 공격을 가한다면 300만 명이 사망할 것이다. 한국의 이 같은 취약성 때문에 우리는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하는데 매우 조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미국은 한국의 핵무장을 완고히 반대하면서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을 압박, 저지시켰고 대신 ‘핵우산’을 제공하며 박 대통령의 안보 불안감을 달래려 시도했다. 미국은 1978년 7월 열린 제11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핵우산 제공을 처음 공개적으로 밝혔고 그 이후 매년 개최하는 SCM에서 그것을 반복해 발표하고 있다(중앙일보 2021년 10월17일).
박정희 정권이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것은 외교적 교섭과 압력으로 저지되었지만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의 핵무기에 대한 욕구는 근절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미국 정부는 한국이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할지 모른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개발 계획은 주한 미 2사단 철수와 한반도에 배치됐던 미 핵무기 철거가 시작되면서 멈추지 않은 것으로 미국 측은 의혹을 제기했다(https://www.globalasia.org/v6no3/feature/park-chung-hee-the-cia-&-the-bomb_peter-hayes).
미국의 우려는 2004년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통해 표출되기도 했다. 당시 IAEA가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사찰했을 때 한국은 일본이 개발한 우라늄 농축기술 특허에 관한 자료를 압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한국이 일본의 특허 기술을 입수해 우라늄 농축 실험을 극비로 진행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중앙일보 2015년 11월4일).
IAEA는 당시 사찰을 통해 레이저 농축법이라고 불리는 일본의 기술 자료와 관련 특허에 바탕을 둔 핵심 기기를 발견했으며 한국이 2000년 1~3월에 최소 세 차례 레이저 농축 실험을 극비로 실시해 0.2g의 농축 우라늄(농축도 최고 77%)을 제조한 사실을 확인했다. 우라늄 형 핵무기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농축도가 90% 이상인 우라늄 25kg이 필요한데, 한국의 실험은 소규모 실험실 수준에 그친 것으로 평가됐다.
한국은 우라늄 등 핵 물질을 사용한 실험을 실시할 경우 IAEA에 사전 신고하도록 돼 있는 규정을 무시했다가 2004년 8월 뒤늦게 신고해 IAEA의 사찰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 IAEA는 “농축된 우라늄 양이 많지는 않지만 심각한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고 유럽 국가 등은 이 사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국제사회에 큰 파문이 일었지만 더 이상 문제가 확산되지 않았다.
2016-2017년 북한 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남한 자체 핵무장 론이 제기되었을 때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이 실험용 핵 기폭 장치를 개발하는데 6-9개월이 걸릴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Robert Einhorn and Duyeon Kim, “Will South Korea Go Nuclear,” The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Lee Byong-Chul, “Preventing a Nuclear South Korea,” 38 North. For a different perspective, see James Van Der Velde, “Go Ahead. Let Japan and South Korea Go Nuclear,” The National Interest).
홍준표 자유한국당 전 대표는 2017년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 핵위기와 관련해 미국으로 출국해 전술핵 배치를 강하게 주장할 계획이라며 "미국은 유럽이 자체 핵개발을 할까 두려워 전술핵을 배치했다. 그 때와 같은 방식을 취해야 한다. 우리가 자체 핵개발을 할 기술이 있고 핵 물질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겠다"고 말했다(한국경제신문 2017년 10월17일).
김재규의 박 대통령 저격 원인 놓고 여러 의혹 제기돼
박 대통령이 핵무기개발 계획을 미국의 압력으로 중단한 뒤 2년 만에 김재규 중정부장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면서 이 시해 사건이 핵무기 개발 추진과 연관된 것 아니냐 하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김재규는 부마항쟁 발생 일주일후인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했는데 그 동기가 개인적 감정이 폭발한 것인지, 아니면 정보부장으로서 사전에 기획된 쿠데타 시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https://en.wikipedia.org/wiki/Assassination_of_Park_Chung-hee).
김재규는 1976년부터 중정부장을 맡아 미국 정보당국이 전하는 메시지를 박정희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 과정에서 김재규는 박정희가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기 때문에 미국의 눈 밖에 났다는 사실을 파악했을 가능성이 있고 그것이 김재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이 일각에서 존재하고 있다.
박정희 사살에 대한 미국 정부나 정보당국의 비밀 자료는 아직 공개된 적이 없으나 김재규는 서울 주재 미 CIA 책임자 로버트 브루스터나 미 외교관들과 자주 만났으며 특히 박정희를 사살하기 5시간 전에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를 만나기도 했다(Ohn, Jong-lim (January 18, 2011). "Why is the U.S. secret documents on Kim Jae-kyu still classified?"). 그는 후에 자신이 거사한 이유의 하나가 한미 간 외교관계악화에 대한 우려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박정희가 사망한 뒤 전두환은 19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미국 정부의 지지를 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핵무기나 미사일 개발 계획과 관련한 기구를 해산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https://www.globalasia.org/v6no3/feature/park-chung-hee-the-cia-&-the-bomb_peter-hayes).
한편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벤자민 리) 박사가 1977년 6월 미국 일리노이주의 80번 고속도로를 승용차를 운전하던 중 발생한 교통사고로 숨진 것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을 돕다 미국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음모론이 소설 등을 통해 퍼지기도 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상태다(아시아경제 2015년 10월30일).
한반도에서 핵무기 사용은 6.25 전쟁 당시 미국에 의해 검토되었고 그런 탓인지 한국에서는 핵무기에 대한 관심이 1950년대부터 등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 계획으로 핵무기 제조 계획이 포함된 핵에너지 연구 계획에 대해 정부 지원을 실시했다(Don-Won Kim, “Imaginary Savior: The Image of the Nuclear Bomb in Korea, 1945-1960,” Historia Scientiarum: International Journal of the History of Science Society of Japan 19 (2009): 105-118). 한국에서 당시 핵무기에 대한 반대 여론이 낮았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핵 공격을 받고 항복해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 후 1970년대 들어 미국은 남한의 핵무장 시도를 저지했고 소련은 1980년대 들어 북한이 핵비확산조약에 가입토록 권유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중국과 미국, 러시아가 북한의 핵 무장에 제동을 걸거나 제약을 가하는 조치를 취하는 가운데 오늘날에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지속되고 있다. 2022년 이후 북한이 계속적으로 개량된 미사일 발사를 통한 무력시위를 하면서 핵무장 강화를 시도하자 남한 사회에서 자체 핵무기 개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한국이 그런 시도를 할 경우 동북아 안보 질서의 지각변동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미국은 박정희 정부에게 했던 것과 유사한 대응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북한이 중국, 러시아의 관계를 호전시키면서 전술핵 개발 등의 위협적 조치를 강화해 한국과 일본을 계속 자극할 경우 한반도 상황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4월2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 논란과 미국 정부의 내로남불 태도
한미관계의 실상은 공식적인 외교 문건과 비공개 처리된 물밑 작업을 통한 갈등간에 큰 차이가 있다. 미국정부는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외교적 사실은 비밀자료로 분류하거나 출판 등으로 공개되는 것을 차단하기 때문에 그 실상이 잘 알려지지 않는다. 박정희 정권의 핵 자체 개발 추진을 백지화하려 한 미국 정부의 대응도 그런 경우의 하나일 뿐이다.
미국 정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동맹이라는 가치를 앞세우면서 자국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다. 겉과 속이 다른 미국의 모습은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의 발언을 놓고 한국 정부와 중국 정부가 긴장 상태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미국 정부의 내로남불식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가 지난 6월7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만나 "미국이 전력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 속에 일각에선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데 베팅을 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판단"이라고 말해 논란을 야기했다.
이에 대해 미국 정부는 구체적인 연이어 입장을 밝혔다. 존 커비 국가안보회의(NSC) 정책조정관도 12일 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에 "한국은 독립적인 주권 국가이며 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훌륭한 동맹이자 친구이다. 분명히 (중국의) 일종의 압박 전략이 사용된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매슈 밀러 국무부 대변인도 "한국은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외교 정책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다. 한국은 우리의 가까운 동맹이며 우린 역내 이슈에 대해 그들과 협력을 지속하겠다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다"고 답했다(연합뉴스2023년 6월14일).
한미관계는 지난 1백 여 년 간의 한국 근현대사에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상태인데 이는 학계 등이 공개된 자료에만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강탈을 지원한 사실이나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외면했고 태평양전쟁 종전이후 남한을 소련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유엔을 통해 강행했다.
또한 6·25 한국 전쟁 발생이후 자행된 수많은 민간인 학살에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으며 박정희, 전두환의 쿠데타에 의한 정권 찬탈도 승인했다. 오늘날에도 기울어진 심각한 운동장 상태인 한미관계가 강행되고 있다. 이런 불행은 정확한 사실관계에 따라 양국 관계를 재정립될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할 때 한국이 정상적인 주건 국가의 기반을 확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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