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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련 자극하지 않으려 조선인 독립운동가 외면

- [고승우의 한미관계 탐구 (05)] 1943년 카이로 선언부터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까지

기사승인 2023.03.15  16: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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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미주리 함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들인 뒤 본국 정부의 명령을 받아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맥아더에게 남한 점령은 일본 본토 점령에 비해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미군은 남한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낸다는 목적이었지만 결국 한반도가 냉전기간 동안 미소가 정면 격돌하는 현장이 되고 말았다(Michael C. Sandusky, America's Parallel (Alexandria, Va.: Old Dominion Press, 1983. Irving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Honolulu: Univ. of Hawaii Press, 1985.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vols. (Princeton, N.J.: Princeton Univ. Press, 1981-90.).

한반도는 태평양전쟁 종전이전 미국에게는 한반도는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지에 불과했다.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후에도 한반도는 동아시아에서 벌인 미군의 군사작전에서 부차적인 문제였다.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의 공격에 대항하는 전선을 구축하면서 반격 준비를 위한 기지와 통신 체계를 만드는 노력을 했을 뿐이다(https://press.armywarcollege.edu/cgi/viewcontent.cgi?article=1734&context=parameters). 중화민국에 대한 미국 전략은 중화민국이 미군의 큰 도움 없이 계속 일본과 싸우는 것이었고 한반도는 미군에게는 일본 영토처럼 접근 불가능한 지역이었다(Maurice Matloff,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 The War Department: Strategic Planning for Coalition Warfare 1943-1944 (Washington: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1959), p. 15.).

 

▲ 1944년 3월 일본군이 인도 북동부 마니프로의 수도 임팔 지역을 공격할 때 붙잡은 인도군 전쟁포로를 총격으로 살해하고 총검으로 찌르고 있다

 


미국의 한반도 전략, 종전이 가까워지면서 변화-주먹구구식

태평양 전쟁 초기 미국 지도자들은 한반도를 주로 중국의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종전이 가까워지면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고 그에 따라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소련의 동아시아 개입을 통해 일본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미국의 비용과 희생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동시에 미국 관리들은 전후 미국이 동북아시아에 개입해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중요하며 만약 소련이 태평양 전선에 개입한다면 만주, 한반도 심지어 일본 영토 일부를 점령하는 상태에서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미국 군부의 소련의 전쟁 개입에 대한 태도는 전후 미국 정부가 공개한 공식 문서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US Department of Defense, The Entry of the Soviet Union Into The War Against Japan: Military Plans 1941-1945 (Washington: Department of Defense, 1955). For mid-level official American interpretations of Soviet intentions, see, for example, State Department Memorandum, "U.S.S.R. Aims in the Far East," 19 August 1943, in FRUS, The Conferences at Washington and Quebec, 1943, pp. 627-29; Memorandum Prepared by the Inter-Divisional Area Committee on the Far East, PWC-125/CAC-128, Korea: Occupation and Military Government: Composition of Forces, 29 March 1944, in FRUS, 1944, V, 1225-26; and PWC-124a/CAC-58a, Korea: Political Problems: provisional Government, 4 May 1944, ibid., 1239-41. For a persuasive interpretation of Soviet policy toward Korea, see Robert M. Slusser, "Soviet Far Eastern Policy, 1945-50: Stalin's Goals in Korea," in Akira Iriye and Ynosuke Nagai, eds., The Origins of the Cold War in Asia (New York: Columbia Univ. Press, 1977), pp. 127-38.).

소련은 육상에서 군사 작전을 펴 신속한 이동이 가능했지만 미국은 태평양이라는 바다에서 전투를 해야 하고 육지에 상륙작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진전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5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과의 협조가 전후 처리와 평화, 안정의 추진에 긴요하다고 보았다. 그 결과 스탈린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가는 상황에서도 소련과의 협조 관계를 증진키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전후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도 취했다.

루즈벨트는 소련을 자극하는 발언을 회피했고 연합군 체제의 전쟁 수행에 대한 미 국민의 지지를 약화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루즈벨트가 소련의 전후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취한 행동은 △중국을 동북아의 협력 파트너로 활용하면서 △핵폭탄 개발 계획을 소련에 알려주지 않고 △전후 미군이 아시아 일원에 주둔할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한 것 등이다(Dalleck, Franklin Roosevelt and American Foreign Policy, 1932-1945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81), pp. 388-90, 533-34; John Lewis Gaddis, Strategies of Containment: A Critical Appraisal of Postwar American National Security Policy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82), pp. 3-15).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은 이상과 같은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인 독립 운동가들이 중국에 있는 한반도 임시정부를 인정해달라고 외교적으로 노력했지만 미국으로부터 거부당했는데 이는 미국이 소련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던 측면이 강했다.


연합국, 종전까지 한반도 신탁통치의 구조나 운영 등 합의 못해

루즈벨트는 조선인 독립 운동가들의 한반도 임시정부 수립 요구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소련과의 대치를 회피하면서도 전후 미국이 미국, 영국, 중화민국, 소련 등이 참여하는 국제 신탁통치 계획을 제안하는데 미국이 주도하려 했다(Sandusky, America's Parallel, pp. 10-11, 87-88; Matray, Reluctant Crusade, pp. 13-21; Cumings, Origin of the Korean War, I, 102-10).

1943년 12월1일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 등이 발표한 카이로 선언에는 한반도를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해방되고 독립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From the press communiqué, in FRUS: The Conferences at Cairo and Teheran, 1943, p. 566). 이 선언에는 신탁통치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 의미는 카이로 선언에 참여한 3개국 정상이외에 소련이 참여해 1943년 11월 28일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한반도에 일정기간 외부의 감독을 실시한다는 내용을 시사했다. 그러나 종전이 가까워올 때까지 연합국은 한반도 신탁통치의 구조나 운영 등에 대한 공식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Draft Memorandum to the Joint Chiefs of Staff, Enclosure to SWNCC 176, "International Agreements as to Occupation of Korea," 22 August 1945, Records of the War Department General and Special Staffs, Office of the Director of Plans and Operations, Top Secret American-British-Canadian correspondence (hereafter ABC) folder ABC 014 Japan (13 Apr 44), Sec. 17A, RG 165, Entry 421, Box 31, NA. See also, Matray, Reluctant Crusade, pp. 38-41).

미국은 1944년 하반기에 일본 열도 침공을 검토하면서 소련의 태평양전쟁 개입을 현실화할 노력을 기울였다. 1944년 가을 미국·영국·소련의 예비회담이 시작되고 1945년 2월 열린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2-3개월 뒤에 태평양전쟁에 참전할 것이라고 동의했다. 얄타 회담은 미국·영국·소련의 수뇌자들이 모여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이다.

 

▲ 1945년 3월 미군이 필리핀 중부 비사야 제도에 있는 파나이섬에 상륙해 탱크를 앞세우고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고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이 회담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이 동의한 스탈린의 참전 조건은 남부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소련이 점령하는 것과 함께 외몽고의 현상 유지, 소련이 만주의 다랜 항구와 루산 해군기지 점거 그리고 만주 철도 운영권 등 이었다(Entry of the Soviet Union, pp. 36-37; "Agreement Regarding Entry of the Soviet Union Into the War Against Japan," 11 February 1945, in FRUS, Malta and Yalta, p. 984).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조선인 해외 독립 세력은 전쟁 수행에 기여할 방안을 미국 쪽에 제시했다. 미국이 조선인 망명정부에 대한 불인정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미 첩보기관 전략사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서 한반도에 대한 비밀 심리작전을 통해 일정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해 해외 망명 조선인들을 중국에서 훈련시켰지만 일본이 항복하면서 그 업무가 수행되지 못했다(Gye-dong Kim, Foreign Intervention in Korea (Aldershot: Dartmouth, 1993), pp. 9-17; R. Harris Smith, OSS: The Secret History of America's First Central Intelligence Agency (Berkeley: Univ. of California Press, 1972), pp. 26, 280-82; Kim Ku, Paekbom Ilji: Kim Ku Chasojon (Memoirs of Paekbom: Autobiography of Kim Ku) (Seoul: Tongmyongsa, 1960), pp. 347-50).

미 전략사무국은 미국의 첩보 기관으로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만들어졌는데 이 기관이 발족한 뒤 국무부, 재무부, 해군과 국방부 등 집행 계열의 다양한 부서에 의해 수행되었던 첩보 업무가 통합처리 되는 체계를 갖췄다.

1945년 봄 미태평양사령부는 일본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일본 최남단에 있는 규슈 섬을 1945년 11월, 혼슈 섬을 1946년 6월 각각 상륙할 계획을 세웠다(John Ray Skates, The Invasion of Japan: Alternative to the Bomb (Columbia: Univ. of South Carolina Press, 1994), pp. 2-7. Skates provides the most complete examination of the plans for the proposed invasion of Japan to date. See also Wayne A. Silkett, "Downfall: The Invasion that Never Was," Parameters, 24 (Autumn 1994), 111-20).

미군은 당시 한반도를 규슈 대신 침공할 계획을 잠시 검토했다 중단했다. 한반도 미군 상륙은 규슈보다 미군 희생자가 더 많을 것 같았고 더욱이 거리가 더 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미태평양사령부는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에 대륙에서 미군이 전쟁을 벌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1945년 6월 미태평양사령부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아래와 같이 보고했다(Minutes, "JCS Meeting with President," 18 June 1945 in Entry of the Soviet Union, pp. 77-85). “아시아 대륙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소련이 만주(필요할 경우 한반도 포함)에서 일본군과 싸워야 하고 중화민국 군대를 미군이 공중 지원 등으로 활성화해서 일본군을 자기 영토에서 몰아내야 할 것입니다.”

 

▲ 1945년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작전이후 미 해병대가 전사한 일본군 시신 곁을 지나가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 1945년 3월10일 미군의 도쿄 대공습으로 사망한 일본 민간인 시신들. 당시 일본인 10만 명이 사망했다. 사진=위키피디아

 

 


미국, 소련의 태평양전쟁 개입 득실 계산

미태평양사령부는 소련의 개입이 유용할 것으로 보고 있었지만 얄타 회담이후 미소 두 나라 관계가 심하게 악화되면서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5년 4월 12일 사망한 이후 등장한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한 것도 미소관계를 멀어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

미소간 정치적 관계는 군사부문에도 영향을 미쳐 1945년 중반 미국은 대일전 수행에서 소련의 협조를 구하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다. 미태평양사령부는 소련에 연락관을 파견하려던 계획과 시베리아에 비행장을 건설할 계획을 취소하고 소련에 태평양을 통한 물자 보급 계획을 연기했다(JCS 924/15, Report by the JSP, "Pacific Strategy," 25 April 1945 in Entry of the Soviet Union, p. 67; JCS 1313/1, Revision of Policy with Relations to Russia," 23 April 1945, JCS 1313/2, same subject, 23 April 1945, and other documents in OPD 336 Top Secret (Case 132), "Implementation of Agreements with the Russians," RG 165, Entry 419, Box 144, NA; John R. Deane, Strange Alliance: The Story of Our Efforts at Wartime Co-operation with Russia (New York: Viking Press, 1947), pp. 262-65).

1945년 5월 미 국무부 장관 지명자인 요셉 그류는 미국 전쟁 및 해군장관에게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할 경우의 정치적 영향에 대한 견해를 묻는 서면 질의서를 보내 ‘얄타회담 합의 사항을 이행하기 전에 미국이 한반도의 해방과 독립, 그리고 한반도가 해방된 직후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한 합의에 대한 소련의 입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전쟁 및 해군장관은 답변서를 통해 ‘소련은 미국이 취한 정치적 행동과 관계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시기에 태평양전쟁에 참여할 것으로 믿는다’며 아래와 같이 미 대통령에게 건의했다(Joseph C. Grew, Turbulent Era: A Diplomatic Record of Forty Years, 1904-1945, ed. by Walter Johnson assisted by Nancy Harvison Hooker, 2 vols. (Boston: Houghton Mifflin, 1952), II, 1454-59).

“미국은 얄타회담과 관련해 정치적 지렛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미국의 군사적 행동과 관계없이 소련이 자체 군사적 역량으로 군사적 행동을 취할 수 있고, 소련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사할린과 만주, 한반도 중국 북부를 미군에 앞서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의 의향을 묻는 작업이 효과가 크지 않다 해도 미국이 소련의 다짐을 받는 작업을 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미국, 소련의 한반도, 일본 점령 우려하다 핵무기 개발 성공으로 자신감 가져

1945년 5월 미국 특사 해리 홉킨스가 포츠담회담에 앞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홉킨스는 스탈린과 협상해 한반도 신탁통치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 등을 확보했지만 귀국해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단지 ‘스탈린은 한반도 신탁통치를 중화민국, 영국, 소련과 미국이 실시하는 것에 동의했다’만 보고했다(23 May 1945, with enclosure, "Recommended Amendments to be Used as a Basis for Exploratory Conversation and in Light of Accompanying Memorandum," in FRUS, 1945, VII 878-87. Hopkins' report is in message, "Hopkins to President," 29 May 1945 in Entry of the Soviet Union, pp. 72-73).

한반도 신탁통치에 대해서는 큰 틀만 제시되었을 뿐 구체적인 실행 계획 등은 연합국간에 논의되지 않았고 1945년 7월 열린 포츠담회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7월 열린 미국과 소련 합동참모본부 회담에서 양측은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을 경우 두 나라의 작전 역할 분담에 대해 논의했는데 거기에는 한반도 주변에서 공군과 해군 간 협조문제도 포함됐다. 그러나 그 후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연합국 수뇌들은 한반도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Minutes, "Tripartite Military Meeting," 24 July 1945 in FRUS, Potsdam, II, 351-52; Minutes, "Meeting of Chiefs of Staff of U.S. and U.S.S.R.," 26 July 1945, ibid., pp. 410-11. The only reference to Korea in the talks among the political leaders appears in "Thompson Minutes of the Sixth Plenary Meeting," 22 July 1945, ibid., p. 253).

그러나 워싱턴과 미태평양사령부 등에서 한반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사항들이 결정되었다. 그런 결정이 내려진 이유는 바로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행동과 의향에 우려를 갖고 있던 상황에서 포츠담회담 직전 핵무기 실험에 성공해 자신감을 확보했으며 이에 따라 일본은 미국이 일본 본토를 침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할 가능성이 커 미국이 한반도에 무혈 입성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7월23일 원자탄 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전쟁 장관을 불러 조지 마셜  미국 육군원수에게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여 의향이나 미국의 일본 점령에 소련의 지원이 필요한지 여부를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대해  마셜  미 육군원수는 ‘소련군은 만주 국경에 집결해 있어 어느 곳이든 공격할 위치에 있어서 일본이 항복할 경우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다’는 신중론을 제시했다(Henry Lewis Stimson Diaries, Monday, 23 July 1945, LI, 34-35 (microfilm edition, reel 9), Manuscripts and Archives, Yale Univ. Library, New Haven, Conn).

7월24일 소련군 최고사령관이 마셜 미 육군원수에게 ‘미군이 한반도 해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작전을 전개해 소련군이 한반도를 공격할 때 호응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했다. 마셜 미 육군원수는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Minutes, "Tripartite Military Meeting," 24 July 1945, and minutes, "Meeting of Chiefs of Staff of the U.S. and U.S.S.R.," 26 July 1945, in FRUS, Potsdam, II, 351-52, 410-11. Harry S. Truman, Memoirs by Harry S. Truman, I: Year of Decisions (Garden City, N.Y.: Doubleday, 1955), p. 383).

“미국은 미군의 규슈 침공이 끝날 때까지 한반도를 공격할 육해공군 합동작전 계획은 없다. 그 이유는 미군 함정이 일본해에서 일본의 자살특공대의 공격에 노출될 수 있고 미군의 공격함을 규슈 상륙작전에서 빼내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7월26일 공군과 해군 작전 경계가 확정되었으나 육상에 대한 대책은 세워지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후에 ‘육상 작전에 대한 경계선이 획정되지 않았는데 이는 미군 지휘관들이 한반도에서 작전을 전개할 것으로 예상치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다. 트루먼은 당시 육상 공격 작전 의향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소련군 최고사령관과 미국의 마셜 원수가 합동작전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킬 시점에서도 한반도에 군사작전 없이 무혈 입성할 작전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에게 비밀로 한 채 핵무기라는 신종무기를 개발하면서 성공 직전의 단계인 것을 계산한 결과였다.

 

▲ 필자 소개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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