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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직전 6개월 동안 남북한 4백 번 총격전-남한군 38선 이북 진출도

- [고승우의 한미관계 탐구 (17)] 유엔사는 유엔 기구가 아니고 미국 정부 지휘 받아

기사승인 2023.04.27  12: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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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태평양전쟁 종전 후 유엔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전력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남한내 세력이나 움직임을 집단학살 등을 통해 가혹하게 탄압, 진압하면서 친미 정권을 세우기 위해 주력했다.

미국은 중국에서 공산주의 저지 교두보로 삼기 위해 장개석 군을 적극 지원했다. 미국은 모택동으로 상징되는 공산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 막대한 군사원조를 제공했으나 중화민국 군부 등의 심각한 부패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모택동의 중국 천하통일 혁명이 성공하자 미국 내에서 트루먼 정부의 극동 정책에 대한 비판과 재고 움직임이 일어났다. 미국은 1948년 봄 국가안보회의에서 작성한 조선반도에 대한 보고서를 트루먼 대통령이 재가했다. 보고서 내용은 향후 남한이 외침을 당할 경우 미국이 군사적 지원은 하지 않는다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NSC 8, "Report by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on the Position of the United States with Respect to Korea," 2 April 1948, FRUS, 1948, VI, The Far East and Australasia, 1164-69).

“미국은 남한이 경제와 군사력을 구축하는 것을 지원한다. 그러나 미국은 남한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전을 위해 외부의 공격에 대항해서 군사력을 동원한다는 방안은 전적으로 배제한다.”


미국, 모택동 천하 통일 성공 후 극동 방어전략 수정

미국이, 남한이 공산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사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나온 시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중국에서 장개석 군이 패퇴하고 모택동 군이 천하통일을 목적에 둔 상황과 거의 일치한다. 모택동 군은 2차 대전 종전 직후 소련의 도움으로 만주의 1/3을 점령하면서 승승장구해 1947년 2백만 명으로 증강되어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미국은 동북아, 특히 중국의 공산화를 저지해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는다는 전략이었지만 중국의 공산화가 기정사실이 되면서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남한을 공격한다면 미국이 이를 감당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한 결과였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이 지원하는  북한의 남침에 개입할 경우 득보다 실이 크다고 보고 소련의 남침 저지선을 동북아에서는 남한을 빼고 일본으로 후퇴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1948년 8~9월 남북한이 정부를 수립한 뒤 미국과 소련은 남북한에 주둔시킨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했다(CSGPO to CINCFE, 16 November 1948, Blue Binders Series, Korea Planning and Withdrawal Documents, Record Group 9, WX 92575, MacArthur Memorial, Norfolk, Virginia). 미국은 1948년 제주도 등지에서 무장대가 미군정이 지원하는 남한 군과 경찰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커지자 미 대통령은 더글라스 맥아더 극동사령관에게 남한에 예비군 병력 7천 명을 무기한 주둔시키라고 지시했다.

맥아더는 1949년 1월 미 대통령에게 회신을 보냈다.

“남한은 북한으로부터의 침략이 있을 경우 버티지 못할 것이며 미국은 그런 상황에서 남한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책무가 없습니다. 일본이 소련의 동아시아 진출을 막을 채비를 갖춰야 합니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1949년 3월 남한에 대한 정책을 발표,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남한에서 미군을 1949년 6월30일까지 군사고문단만 잔류시키고 철수한다고 발표했다(NSC 8/2, "Positions of the United States with Respect to Korea," 22 March 1949, FRUS, 1949, VII, The Far East and Australasia, Pt. 2, 969-78).

트루먼 대통령은 그러나 미군이 철수해도 미국은 남한 군경에 대해 미군사고문단을 잔류시켜 경제, 군사, 기술적 지원을 지속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남한이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강력 반대했지만 미군 전투부대는 1949년 6월 남한에서 철수했다.

미국 국방부는 미국은 김일성의 남침 시 남한을 구하기 위해 무력 개입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미 국무부도 같은 의견이었으며 1949년 7월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남침에 대한 미군의 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북한군이 남침할 경우 미국은 즉각 남한에서 미국 시민과 미군 및 지정된 외국인을 일본으로 소개시킬 예정입니다.”

1949년 12월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은 공산주의가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필리핀과 일본, 류큐 열도를 방어선으로 삼는다고 밝혔다(Memorandum by the Executive Secretary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20 December 1949, FRUS, 1949, VI op. cit., 1215-20; NSC 48/2, "The Position of the United States with Respect to Asia," Ibid., 1215-20).

미국은 남한에 대해서 지나가는 말투로 경제, 군사 및 기술적 지원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을 뿐이다.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1950년 1월12일 워싱턴 내셔널 클럽에서 극동에서의 미 군사전략에 대한 유명한 연설을 하게 된다. 이른바 애치슨 선언 이었다(Memorandum,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 (Rusk) to the Under Secretary of State (Webb), 2 May 1950, FR US, 1950, VII, Korea, 65).

“미국은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극동지역의 독립을 보호하기 위해 유엔헌장에 입각해 전체 문명세계와 함께 싸울 것이다.”


애치슨 선언,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미국의 극동지역 전략

애치슨 장관의 선언에 서울은 발칵 뒤집혔다. 남한 정부는 미국이 극동의 방어선 안에 남한 포함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치슨 장관은 그러나 미 의회에서 완강한 자세로 자신의 선언이 정당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남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북한의 침공을 격퇴하기는 어렵다. 미국도 그런 침략을 군사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애치슨 장관은 나아가 북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결의안이 유엔 안보리에 제출된다 해도 소련의 거부권에 걸려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미 상원 외교위위원장은 1950년 4월 남한 지도자들을 화나게 하는 발언을 내놓았다.

“미국이 남한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애치슨 장관은 미국이 남한의 독립을 존중하지만 미국은 남한이 북한의 침략으로 희생되는 경우에도 군사적 지원을 할 수 없다고 발언한 바 있다. 미국은 소련에 맞서거나 소련이 전 세계를 향해 팽창정책을 강행한다 해도 미국 정부의 남한에 대한 결정을 바꿀 수는 없다.”

 

▲ 6·25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이 촬영한 미군과 피난민, 미 공군 세이버 전투기 등의 모습 . 사진=위키피디아

 


6·25 한국 전쟁 발발 후 미국 태도 급변, 유엔 깃발 들고 남한 파병 추진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1950년 1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한 5개월 뒤인 6월25일 한국 전쟁이 발발, 북한군이 휴전선 전 지역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미국은 중국에서 모택동 군이 천하 통일에 성공하면서 공산주의 방어선을 남하시켜 대만과 남한을 제외하는 애치슨 선언을 하게 만들었고 그 직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미국의 태도가 급변했다(Dean Rusk (as told to Richard Rusk),As I Saw It (New York et al., 1990), 164-65).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군의 침략사실이 알려지자 남한에 대한 태도를 180도 바꿔 미군이 남한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태도 때문에 미국이 북한의 전면 공격을 유발했다는 일부 비판이 나왔다. 실제 6.25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군과 외교관이 미 정부에 보낸 기밀서류에 의하면 북한이 1949~1950년 38선을 넘어 전면 남침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돼있다.

그러나 당시 휴전선에서 남북한 군이 크고 작은 충돌을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전면 공격은 돌발적인 남침이 아니라는 해석이 나왔다. 트루먼 대통령은 먼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기록했다(Memoirs by Harry S. Truman, II, Years of Trial and Hope (Garden City, New York, 1956), 331).

“미 정보부에서 1950년 봄 북한이 전면전을 개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었다.”

맥아더의 정보 맨들도 1950년 3월 북한이 그 해 가을이나, 3개 월 이전에 남침을 준비하고 있다고 추측했었다. 미국은 당시 북한의 남침은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어 남한이 격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은 애치슨 장관의 발언 등에서 유추된다.

맥아더도 남한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미군정 군사고문 책임자 윌리엄 로버트 장군이 1950년 3월 내린 결론과 유사했다(Roberts to C. L. Bolte, 8 March 1950, G-3 091, Korea, sec. I, case 3, Records of the Army Staff, Record Group 319, National Archives).

1950년 6월1일 극동 미 공군 정보기관은 남한이 북한의 침략이 있기 전 망할 것이라고 했고 그 후 10여 일 후 북한의 남침 전에 주한 미 대사 무초도 비슷한 견해를 표명했다(Frank Bowling, "Korea: Will It Become a Power, Puppet or Pawn?" Christian Science Monitor, 31 January 1948, 8-9. Frank Bowling wrote that "if you were to walk up to the first 10... [Americans] you meet on the street and ask them to locate Korea on the map or tell you what language is spoken in Korea, you would in all likelihood draw a large number of blanks.").

당시 미국 정부가 남한에 대한 군사적 지원 쪽으로 태도를 바꿀 때 남한이 북한에 점령당하도록 미국이 방치할 경우 동북아시아에서 연쇄적인 공산화 사태가 발생해 결국 세계 대전으로 비화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일본 안보에 남한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Beschloss, Michael (2018). Presidents of War: The Epic Story, from 1807 to Modern Times. New York: Crown. ISBN 978-0-307-40960-7. p. 447. /  Kim, Yǒng-jin (1973). Major Powers and Korea. Silver Spring, MD: Research Institute on Korean Affairs. OCLC 251811671. p. 46).

미국 정부와 군이 한반도 급변사태 발생과 관련해 정보가 혼선을 빚었지만 애치슨 장관의 선언에 따른 정책이 추진된 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었다. 미국은 손바닥 뒤집듯 한반도 사태에 적극 개입하려는 태도로 돌변했고 유엔 안보리를 통해  북한군의 움직임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유엔군을 구성해 한반도에 파견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안보리는 결의안 82호를 채택, 북한이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38선에서 철수할 것을 촉구했고 이틀 뒤 결의안 83호를 채택해 유엔 회원국들이 한국을 지원해 군사적 공격을 격퇴하고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solution 83 /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solution 82 /  Derek W. Bowett, United Nations Forces: A Legal Study of United Nations Practice, Stevens, London, 1964, pp. 29–60).

한국전쟁 발발 당시 소련은,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공이 대만으로 쫓겨 간 중화민국을 대신해 안보리 회원국이 되어야 한다면서 안보리 참여를 거부하고 있었다("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 History". Encyclopedia Britannica).

1950년 7월7일 안보리는 소련이 여전히 불참한 가운데 결의안 84호를 통해 한국에 군사력 등의 지원을 하는 회원국들은 미국의 연합지휘를 받을 것을 촉구했다.


안보리, 미국에 맥아더를 유엔사령관으로 임명할 권한 부여

유엔 안보리가 미국에게 유엔의 기치아래 연합군 지휘권을 행사하는 권한을 위임하면서 미국 정부에게 유엔군사령관으로 맥아더를 임명할 권한을 부여했다(James, D. Clayton(1985). Volume 3, Triumph and Disaster 1945–1964. The Years of MacArthur. Boston: Houghton Mifflin. ISBN 978-0-395-36004-0. p. 436).

유엔사는 이처럼 유엔안보리 결의 82, 83, 84호 에 의해 만들어진 다국적 군사기구로 1950년 7월에 창설됐다. 당시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 구성에 21개 국가가 참여했지만 전체 병력의 90%는 미군이었다(Pembroke, Michael (2018). Korea: Where the American Century Began. Hardie Grant Books. p. 141).

한국전쟁 발발 직후 열린 안보리 회의에서 소련이 미국의 유엔군 남한 파견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한반도의 정치적 지형은 오늘날과 크게 달랐을 것이다. 김일성의 계산대로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소련이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안보리 긴급회의에 세 차례나 연이어 불참함으로써, 미국 애치슨 장관이 불가능하게 생각했던 김일성의 전면공세에 대한 유엔의 군사적 저지가 가능해진 것이다. 소련은 안보리 불참 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알고 있었을 터인데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추정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전면 전쟁을 벌일 경우 두 나라 국력이 소모되어 소련이 상대적으로  안전해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결과이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추리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강대국들은 다른 강대국들을 의식하면서 항상 최악의 힘겨루기를 상상해서 전략을 세우는 일이 적지 않은 듯하다. 미국의 경우 20세기 초 강대국 일본을 의식해 일본의 조선 침략에 동의했다. 이어 2차 대전 종전 직후의 아시아에서 누가 패권을 차지하느냐를 놓고 소련 압박의 수단으로 이용한 측면이 있었다.


이승만 북진통일 주장 속 남한군 38선 이북에 방어진지 구축 시도

미군정은 남한 군경에 대한 무기 지원 등을 한 뒤 1948~1949년 38선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당시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면서 미국에 중무기 제공 등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소련을 의식해 이를 거부했다. 남북한은 1949년 5월 이전까지 38선에서 소규모 총격전을 벌이다가 그 이후 6개월 동안 400 여 차례의 총격전을 벌였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수색대간의 총격에 그쳤으나 개성, 춘천, 옹진 등에서 벌어진 충돌은 양측에 큰 피해를 입혔다. 당시 가장 심각한 충돌은 남한군이 38선 이북까지 방어진지를 구축하려다가 북한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으면서 일어났다고 미군사고문단이 상부에 보고했다(SA Rpt, KMAG, 31 Dec 49, sec. IV, p. 22. (2) HR–KMAG, p. 6. (3) MHK, pp. 57–60).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덜레스 존 포스터 덜레스 상원의원이 한국을 방문한 1950년 6월18일에도 자신은 북한을 점령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Cumings, Bruce (2005). Korea's Place in the Sun : A Modern History.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pp. 249–58. ISBN 978-0393327021). 덜레스 의원은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 제52대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을 심각하게 우려하기도 했다.

6·25 한국전쟁이 임박한 시점에서 남한 및 미국 정보장교들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미 CIA는 북한군의 남쪽 이동이 통상적인 방어 작전이며 남침 가능성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6월23일에도 유엔 감시단은 38선을 시찰한 뒤 전쟁이 임박한 징후는 없다고 밝혔다(Tom Gjelten (25 June 2010). "CIA Files Show U.S. Blindsided By Korean War". National Public Radio.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4 August 2013. Retrieved 16 February 2013.  Seth, Michael J. (2010). A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Lanham, MD: Rowman & Littlefield. p. 324. ISBN 978-0742567160.  Millett 2007, p. 14).

북한군은 6월25일 총공격을 개시해 수 시간 만에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진격했다. 그 다음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승만은 정부와 함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정부는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니 국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일자리를 지키라고 당부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하지만 이승만은 정부와 함께 27일 서울을 떠나 국민을 기만했다는 비판을 받았다("Ten biggest lies in modern Korean history". The Korea Times. 3 April 2017). 이승만은 내란이 발생할 것이 두려워 그랬다고 변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만 ‘서울 사수’ 거짓말 라디오 방송 뒤 한강다리 폭파돼

그러나 더욱 한심한 것은 6월28일 밤 한국군은 피란민들이 건너던 한강다리를 폭파해 많은 사상자가 나게 만들었다. 당시 미 군사고문단은 한강다리에 한국군과 함께 폭약을 장치했지만 폭발시점을 사전에 협의한다는 약속을 한국군이 깨면서 서울을 벗어나는데 엄청 애를 먹었다고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직후인 1950년 6월27일 보도연맹원이나 남로당원들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Ohmynews (in Korean). 4 July 2007.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3 May 2011. Retrieved 14 July 2010). 이에 따라 퇴각하던 한국군경이 강원도 횡성군에서 그 다음날인 28일 보도연맹원에 대한 첫 처형이 집행됐다(CBS (in Korean). 4 July 2007. Retrieved 14 July 2010).

이승만은 6·25 전쟁에 대한 정전협정 논의가 시작되자 전쟁 중단을 반대하면서 무력에 의한 통일을 주장했다(Kollontai, Ms Pauline; Kim, Professor Sebastian C. H.; Hoyland, Revd Greg (2 May 2013). Peace and Reconciliation: In Search of Shared Identity. Ashgate Publishing, Ltd. p. 111. ISBN 978-1-4094-7798-3). 이승만은 한국은 정전협정을 결코 수락하지 않고 통일을 위해 계속 싸울 것이라고 밝히면서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이에 대해 미국 덜레스 국무장관은 서신을 보내 “한국이 휴전을 위태롭게 할 권리가 없다”며 비난했다(월간조선 2013.07.12).

 

▲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조인식장의 모습. 왼쪽은 유엔군 총사령관을 대신해 윌리엄 해리슨 미군 중장이고, 오른쪽은 북한·중국군을 대표해 남일 북한 대장이다. 사진=위키피디아

 


미 정부, 정전협정 반대하는 이승만 제거 비밀계획 만들어

미 행정부는 이승만이 한국군에게 ‘북진 명령’을 내리는 등 돌출행동을 할 경우 등을 우려해 1953년 중반 이승만이 정전협정 내용에 반대하거나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할 경우 미국이 제거한다는 비밀계회인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4가지 요구사항을 들어 주면, 정전협정을 받아들이겠다며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경제원조와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지원 등을 요구했다. 그 결과 미국은 ‘무력침략을 받을 경우, 즉각 개입’ 요구를 제외하고 이승만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고 1953년 8월 한미 간에 상호방위조약이 가조인되었다.

이승만은 4·19혁명으로 하야하기 6개월 전인 1959년 10월까지 북진통일론을 미국 측에 주장했고, 이로 인해 미국의 심각한 경계 대상이 되었다. 이는 1959년 10월 방한한 미국 국무부 부장관 더글러스 딜런이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하고 이틀 뒤인 10월25일 미국 국무부 앞으로 타전한 기밀문서에서 밝혀졌다. 딜런 부장관은 이 대통령이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무력뿐이라는 신념을 표현했다”고 기록했다(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politics/1977/12/17/us-had-53-plan-to-overthrow-unreliable-korean-ally/53816fa5-c677-4d57-964c-09edd8605c42/).

이승만은 국내 정치를 하면서 논란이 심했다. 예를 들어 1952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추진하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신의 정치 노선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투옥한 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1954년 초대 대통령에 대한 연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사사오입개헌을 강행했다

이승만은 1952년,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에게 도전했다 낙선한 조봉암 진보당 당수를 사법살인을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조봉암은 대선공약으로 ‘평화통일’을 주장했는데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59년 사형선고를 확정 받고 처형당했다.

이승만은 1960년 3월15일 치러진 선거에서 이기붕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유례없는 부정선거라는 주장이 야당을 통해 제기되면서 4.19혁명이 발생하고 그해 4월26일 하야했다.


미군 인천 상륙작전 때 일본인 참전시켜

유엔군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북한군의 남한 지역에 대한 보급로를 차단했고 그 여파로 북한군이 북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인천 상륙작전을 시도할 때 인천앞바다 지리에 밝은 전문가 일본인의 도움을 받고 상륙정 운전도 일본인에게 시켰다. 일본은 한국전을 통해 전후 복구 작업 상당부분을 성사시켰다.

트루먼 대통령은 9월11일 맥아더에게 38도 이북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고 10월에 맥아더를 웨이크 섬으로 불러 대담할 때 중국군의 위협에 대해 물었을 때 맥아더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당시 맥아더는 그 해 연말까지 한반도 전쟁이 종식될 가능성과 함께 미 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고 1개 사단을 1951년 1월에 유럽으로 이동시킬 것을 희망한다며 소련의 개입을 우려한다고 말했다(James, D. Clayton(1985). Volume 3, Triumph and Disaster 1945–1964. The Years of MacArthur. Boston: Houghton Mifflin. ISBN 978-0-395-36004-0. pp. 507–508).

당시 미 정보기관 G2, CIA 등은 상황을 오판했다. G2 사령관 윌러비는 중공군이 30만 명에 가까운데도 71,000명이라고 추정해 맥아더에게 보고했고 CIA도 중공군이 20만 명이지만 한반도를 공격할 가능성은 없다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Manchester, William (1978). American Caesar: Douglas MacArthur 1880–1964. Boston: Little, Brown. ISBN 978-0-440-30424-1. p. 604).

그러나 한 달 뒤 상황이 급변했다. 유엔군이 운산 전투에서 조우한 적군은 중공군이었다. 10월15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압록강을 넘어 참전해 12월 휴전선 이남으로 진군했다.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했지만 유엔군의 반격으로 휴전선 부근까지 퇴각했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참전을 예상치 못한데다 중국 만주 지역 폭격을 주장하다가 경질되었고 미국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3차 대전을 우려한 유럽 국가들의 우려 등을 고려해  중단했다. 이후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2년 여 동안 소모전이 계속된 상황에서 미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가해졌다. 미국은 제한전쟁의 원칙을 세웠지만 공습을 강화해 세계 전사에서 가장 많은 폭탄을 북한 지역에 투하했다.

유엔군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당시 한국군 59만 명을 포함해 17개국 총 93만 2964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https://history.army.mil/books/korea/truce/appa.htm).


‘유엔사 해체는 유엔의 결의나 미국의 정치적 결단으로 가능할 뿐’

유엔사는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창설 뒤 그 역할이 정전협정 준수 확인과 관련 임무로 축소됐다. 유엔사는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에 한국군과 주한미군에 대한 지휘권을 넘긴 이후 정전 협정과 관련한 임무만 맡고 있는데 군사분계선(MDL)으로부터 남측 2km에 이르는 비무장지대(DMZ)에 대한 통제 권한 및 관할권을 장악하고 있다.

유엔사는 1992년 군사정전위원회 대표로 한국군 장성을 지명하자 북한과 중국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참여를 거부했다.  미국이 연합군의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 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은 1994년 북한 외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Pak Chol Gu (7 May 1997). "Replacement of the Korean Armistice Agreement: Prerequisite to a lasting peace in the Korean Peninsula". Nautilus Institute).

-- 유엔안보리는 연합군을 하부조직으로 결성하지 않고 단지 그 지휘권을 미국이 행사하도록 하는 것을 추천했을 뿐이다. 이에 따라 연합군의 해체는 유엔에 있지 않고 미국 정부의 권한 문제일 뿐이다. --

이후 코피 아난 총장은 1998년 , 디칼로 유엔사무부총장도 2018년  유엔사는 유엔과 무관한 조직임을 공식 확인했다(오마이뉴스 2020년 6월14일). 그런 가운데 웨인 에어 부사령관은 2019년 5월8일 캠프 험프리의 미군기지에 있는 유엔사 사령부에서 외신기자들에게 “유엔사는 유엔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고 단지 유엔사는 유엔 깃발을 사용하고 매년 미국 정부를 통해 유엔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과 중국이 지난 수십 년 간 유엔사의 적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왔고 유엔사와 유엔의 관계는 이제 비밀도 아니다. 유엔사가 해체될 방법은 유엔의 결의안이나 미국의 정치적 결단에 의해서 가능할 뿐이다.”라고 말했다(https://asiatimes.com/2019/05/in-south-korea-a-un-command-that-isnt/).

 

▲ 필자 소개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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