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자국 이익을 챙기기 위해 국제법규나 심지어 우방국 관계도 파괴하는 것은 오늘날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기술과 생산을 둘러싼 규제에서도 들어난다. 심지어 우방국 지도자에 대한 도감청도 서슴치 않는다. 미국은 자국 정보기관이 해외 불법 도감청을 한 것에 대해 처벌한 적은 없고 그런 불법을 폭로한 내부 고발자는 간첩죄로 엄중 처벌한다는 법을 만들어놓았다.
이런 미국이 2차 대전이후 동북아에서 일본을 미국의 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에 선심을 베푸는 식으로 솜방망이 전후처리를 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을 가장 심하게 당한 한국을 조약 논의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했다. 일제의 조선 강점에 대한 배상을 과거 유럽 전범국가에 대한 응징 방식으로 할 경우 일본의 부담이 커질 것을 우려한 결과였다.
미 국무부, 샌프란시스코 조약 논의에서 한국 배제한 이유 만들어
미국은 한국 배제논리를 일본에 앞서 만들어 유포하는 방식으로 일본 지배층의 호감을 사는 비열한 방식도 마지않았다. 그런 사례의 하나가 조약 논의 과정에서 한국을 배제한 이유를 미국 정부가 작성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미 국무부는 1949년 12월12일 극동지역 연구부서의 보고서를 통해 남한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배제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참가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은 2차 대전 기간 동안 일본의 교전국 입장이라는 주장과 상당수의 한국 관리들이 자신을 1910년 한일병합 뒤 일본에 대적했던 것으로 판단한 결과이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대한 한국의 관심은 2차 대전의 결과보다 40년 동안 일본지배로 인한 착취에 대한 것으로 단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된 사소한 사건에 불과할 뿐이다. 한국의 법적 지위가 무엇이든 간에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참여하려는 의도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과 싸운 것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1910-1945년까지 일제의 지배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Emphasis added. “Participation of the ROK in the Japanese Peace Settlement,” 12 Dec 1949, Box 4, Folder “DRF 163”, Reports Relating to the Far East 1946-1952, RG 59) --
미국부의 이 연구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한국의 요구는 지나치다. 만약 미국이 한국의 조약 협의에 참여토록 허용할 경우 한국 외교관들은 일본에 대한 처벌을 요구할 것인데 이는 한국 사회 대중들의 반일 감정이나 한국 정부가 북한보다 더욱 반일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과도한 요구를 차단하면서 한국 사회의 반감을 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Participation of the ROK in the Japanese Peace Settlement,” 12 Dec 1949, Box 4, Folder “DRF 163”, Reports Relating to the Far East, 1946-1952, RG 59)
1950년 11월 한국의 한 외교관이 동경에서 연합군 총사령부에 소속된 미국이 고위층을 면담하고 ‘6.25 한국 전쟁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공동의 적은 공산주의라는 점이 확인되었으니 한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좋은 결과를 맺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밝혔다(2 “Memorandum of Conversation between Ambassador Sebald and Kim Yong Joo,” 24 Nov 1950, Box 1, Folder “Attitudes Towards a Japanese Peace Treaty 1950-51”, Misc. Records Relating to Japan and Korea 1945-1953, RG 59).
한국 외교관의 이런 입장은 미 국무부의 연구 보고서에 순응한 결과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일본, 재일동포 60만 명 배상 문제로 한국의 조약 참가 반대, 미국 수용
미국은 1951년 초부터 한국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참가를 과거에 비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Cheong, Sung-hwa. The Politics of Anti-Japanese Sentiment in Korea: Japanese-South Korean Relations under American Occupation, 1945-1952. New York: Greenwood Press, 1991.8). 그러나 일본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만약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서명국이 된다면 일본 거주 재일동포 60 만 명은 연합국 국민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일본이 2차 대전 전쟁기간 동안 압류한 재산 등에 대해 배상할 책임을 지게 된다는 이유를 일본이 들고 나온 것이다(Price, John. “Cold War Relic: the 1951 San Francisco Peace Treaty and the Politics of Memory,” Asian Perspective, Vol. 25, No. 3 (2001): 31-60).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미국 쪽에 전달했고 결국 미 국무부는 재일동포들이 불법행위를 하는 등의 문제가 있어 일본 정부가 배상의무를 지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으로 입장을 취했다. 1951년 4월23일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가 연합국 국민의 지위를 획득하지 않는 조건이면 한국의 조약 참여에 동의한다고 미국 정부에 통고했다(“Memorandum of Conversation between Butterworth and Jiro Shirasu,” 1 May 1950, Box 3, Folder “Peace Treaty”, Records Relating to the Peace Treaty with Japan, RG 59. “Supplementary Statement to the Conversation of Friday Morning, April 23, 1951.” 23 April 1951, Box 5, Folder “Second Tokyo Trip (April 1951)”, Records Relating to Treaty of Peace with Japan, RG 59).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 해 5월16일 영국 대사와 협의한 뒤 한국의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참여 문제를 백지화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재일동포 60 만 명 배상 문제, 한국이 조약 참여시 조약 체결이 지연될 것이라는 등이었으며 특히 한국 정부의 조약 참여는 한국 정부의 국제적 위상이 격상될 가능성이 있는데 이를 미국이 원치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Memorandum of Conversation between Korean Ambassador Yu-Chan Yang and Dean Rusk.” 16 Aug 1951, Reel 9, Microform C43, US State Dept Special Files Japan 1947-1956, Files of John Foster Dulles, RG 59). 미국은 그해 7월3일 한국 정부에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서명국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통보했다.
▲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식에서 서명하는 일본 대표단. 사진=위키미디어 |
미국 정부, 일제의 한반도 침탈에 대한 일본 거짓 주장을 수용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이전인 1951년 5월 미 국무부는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남한에 남아 있는 일본인 재산과 남한이 주장하는 배상요구 액과 비교하는 자료를 내놓았다. 이 자료에 따르면 38선 이북의 북한 땅을 제외한 남한 땅에 남겨진 일본인 자산은 한국이 일본에 대해 요구하는 배상액의 4배에 달한다는 내용이었다(“Comparison of Japanese Assets in Formosa and Korea with Possible Korean and Formosan Claims in Japan,” 24 May 1951, Box 5, Folder “DRF-DR 229”, Reports Relating to the Far East, 1946-1952, RG 59).
이 자료는 남한이 요구한 배상액은 제시하지 않았는데 이를 공개한 이유는 남한이 전후 남한에 남겨진 일본 자산을 압류한 것으로 이미 상당 정도 이익을 보았다는 것을 제시할 목적이었다. 또한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한 결과 달성된 한반도에서의 투자와 경제발전의 긍정적 효과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도덕적 배상을 금전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한반도에 남겨놓은 자산과 배상을 연결시켜 계산하는 태도는 매우 비합리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우선 일본은 한반도를 침략해 수십 년 동안 토지와 임야, 각종 자원을 수탈하고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살상 행위를 저질렀다.
일본은 한반도를 강점한 직후 토지 조사를 명분으로 농토와 임야를 강탈하고 천연자원과 농산물을 일본 본토로 가져간 도둑질을 반복했고 강제징용 등으로 수많은 조선인 인력을 강제 동원해 착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의 가공할 식민지정책에 따라 한반도는 일본 본토 경제의 보조 또는 지원이나 상품판매 시장의 역할에 불과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남겨 놓은 자산은 정상적인 경제행위의 결과물이 아니라 남의 나라를 빼앗고 강도짓을 한 장물로 보는 것이 합당했다. 그런데도 미국은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고 임의대로 배상액도 계산해 그 차액을 제시하는 짓을 저지른 것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대한 도덕적, 법리적 판단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한민족을 모욕하고 유린하는 파괴적이고 악마적 행위라는 비판을 자초한다. 미국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미국 정부가 일본의 한반도 침탈에 대해 한국정부의 입장을 외면한 채 일본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의혹을 살 충분한 자료를 내놓은 것은 가스라-테프트 밀약을 맺었던 공범 관계가 연장된 것이란 해석을 피하기 어렵다.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한민족 탄압, 수탈에 대한 배상에 대해 일본인들이 40년 동안 한반도 주인행세를 하면서 부당하게 갈취한 경제적 성과물이 순전히 일본인의 재산이라고 전제하고 일본의 한국에 대한 배상 논리를 물 타기 하거나 왜곡하려 한 파렴치한 행위라 하겠다.
미국의 해괴한 시각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반도에 기여했다는 논리로 비약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 수탈의 결과물인 한반도 내 일본 자산에 대해 제시한 불합리한 시각은 일본이 한반도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의 해괴한 논리로 비약될 요인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파괴적이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도 일부 학자들이 일제 식민지가 기능적으로 한반도에 기여했다는 식민사관을 맹종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지닌 침략적, 약탈적, 파괴적 성격을 도외시한 무뇌아적인 발상이라 하겠다.
미국은 2차 대전의 교전이 시작된 시기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일인 1941년 12월7일로 정했고 필리핀의 미군기지도 그 당시 공격받았다는 점에서 필리핀을 교전국에 포함시켰다. 미국은 일본 배상에 대한 기준을 미일 교전으로 국한 시켜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 등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경우를 일방적으로 배제한 것이다.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를 2차 대전 청산 범위에서 제외시킨 논리는 미국이 종전 후 아시아의 구도를 설계하는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일제의 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 대한 식민 지배 배상 책임을 면탈해준 결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일본이 장기간 광범위하게 아시아를 침공하고 식민지로 전락시킨 것에 대한 배상 책임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는 제외시키고 대신 일본과 피해국간의 개별 협상 쪽으로 전가시켜 버렸다. 일본은 침략과 2차 대전 전쟁 책임에 대한 부담을 덜고 자국의 경제발전을 꾀할 수 있는 엄청난 혜택을 미국의 도움으로 누린 셈이다.
미국은 필리핀 등이 일본의 배상을 받기 위해 미국에게 로비를 벌이자 “일본이 경제적으로 부담할 능력이 없다”는 식으로 일축하면서 일본이 이념적 전략적 이유에서 부담해야 할 배상 책임에 대한 의무를 희석시켰다(“Memorandum of Conversation between President Quirino and Ambassador Dulles.” 12 Feb 1951, Box 7, Folder “Trip Philippine Papers”, Records Relating to Treaty of Peace with Japan, RG 59).
미국이 노골적으로 일본 변호 또는 대리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미국이 정당한 처벌이나 청산 과정을 생략하거나 심지어 은폐, 비호하면서 일본이 오늘날처럼 전쟁 범죄는 물론 성노예, 강제 징용과 같은 민간인 피해 인정이나 그 배상 등을 외면하는 파렴치한 태도를 취하게 된 원인의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 강화조약 체결 때 호텔 예약만 도움 되는 비공식 게스트 조건 한국에 제안
1951년 7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에 즈음해 미 국무부는 한국에게 회의 옵서버로 참가하도록 제안하는 것을 검토했다. 이 제안은 조약 서명 권은 없고 단지 대표단 참가가 공식적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최종단계에서 이 조건도 하향 조정됐다. 한국은 회의에 비공식 게스트로 참석하라는 제안을 받았는데 이 조건은 대표단이 호텔을 예약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뿐 이었다(“Note of a Telephone Conversation between Dulles and Rusk,” 22 Aug 1951. Reel 10). 한국은 이 제안에 응답하지 않았다. 한일간 국교 정상화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14년 후인 1965년 이뤄졌다.
미국은 6·25 전쟁의 와중에 있던 이승만 정부에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관련해 철저히 무시, 비하하는 태도를 보여주었고 그에 대해 이승만정부가 공식 외교 경로를 통한 항의나 문제제기를 했다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일본의 침략과 전쟁범죄를 당한 피해국가 가운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한국이 침묵하면서 다른 피해국들의 반대 움직임도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입장에서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을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챙겨주기 위해 한국을 침묵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한 사전 작업으로 본 것이라는 점이 미국의 관련 정부문건에서 확인되고 있다.
미국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배상 문제를 축소, 왜곡시키면서 전범국가 일본이 가혹한 배상 등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미국의 아시아 최대 우방국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인데 오늘날 친미적 수구세력은 한국의 경제발전이 미국이 해방이후 취한 한국에 대한 정책의 덕이라고 칭송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작태라 하겠다.
영국 권유로 한국을 조약 서명국에서 배제시켰다? 설득력 약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한국이 배제된 것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영국이 한국의 참가를 반대해 미국이 받아들였다거나 한국도 일본에 대해 초강경 태도를 취한 탓이라는 등의 분석을 내놓고 있다(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07075332.2021.1920451). 그러나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미국이 일본하고 일방적으로 조약 추진을 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우선 이 조약은 미국이 거의 단독으로 일본과 조약 추진을 시작해 그 골격을 만들었고 영국 등 연합국은 조약 추진 과정에서 거의 배제되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한국이 참여하는 것은 아시아의 다른 중립국들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을 우려가 크다는 식의 설득력이 약한 논리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미국의 입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영국이 총대를 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미국과 영국은 20세기 초 일본의 을사늑약이나 한반도 강제병합을 지지 또는 찬성했던 사실이 있는데 이런 점을 의식해 일본의 전범 책임에 대한 기한을 태평양전쟁으로 국한하는 논리를 편 것이란 추정도 가능하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군정을 실시할 때 전쟁범죄 추궁이나 그 가담자들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을 하려 했고 일본 731 부대의 경우처럼 엄청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도 그 연구 자료를 미국이 넘겨받는 조건으로 책임을 묻지 않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일본도 과거 식민지였던 한국의 조약 서명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의 구실로 삼을 가능성이 크고 그럴 경우 일본의 경제를 신속히 재건하려는 미국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점을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또한 전쟁범죄 국가로서 오만방자한 태도라 하겠는데 미국의 암묵적 동의나 비호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이 조약에서 배재된 것에 대한 한국의 책임론을 거론하는 쪽은 조약 서명을 한국이 일본에 대해 대마도 반환과 36년 불법지배에 대한 전면 배상을 요구하면서 거부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태도가 자칫 조약 체결의 지연을 초래할 우려가 크다면서 한국을 배제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설득력이 없다. 미국이 일본에 대한 군정을 통해 전후처리를 시도한 태도는 일본을 미국의 우방국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미국이 패전국 일본을 상대로 벌인 태평양전쟁에 대한 전범처리가 독일에 대한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는 점 등에서 미국의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전쟁범죄 등을 청산해야 한다는 국제법적 의무감, 도덕적 책임감은 남한에서 미군정을 시작할 때부터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 1948년 8월15일 서울 중앙청에서 열린 정부수립 기념일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이 대통령은 맥아더의 중국 공격 전략을 적극 지지하다가 맥아더가 해임되자 크게 실망해 맥아더 해임을 지지한 영국 등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사진=위키미디어 |
이승만, 조약 체결 과정서 남북통일만 주장하며 소극적 자세 취해 아쉬워
이 조약체결로 일본은 다른 2차 대전 피해국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미국의 일본에 대한 점령도 종식됐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타이완 등 일부 지역에 대한 지배를 포기했다. 미국은 일본이 자위력을 갖출 때까지 미군을 일본에 주둔시키는 조건으로 자위대 설립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소련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지만 1956년 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이 조약이후 일본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게 피해를 당한 국가들과 개별적으로 평화조약을 맺고 배상문제 등을 처리했다. 한일 간에는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이 정식 조인되었고, 그해 12월 양국 간의 국교가 정상화되었다(https://www.oxfordreference.com/view/10.1093/oi/authority.20110803100440594).
이승만은 이 조약 체결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1952년 독도를 포함시킨 이승만 라인을 전격 발표하고 이 수역 내에서 외국선박의 불법어로 행위를 엄격히 단속했다. 이에 대해 일본을 비롯해 미국·영국·타이완 등이 반대했지만 계속 유지되다가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에 의해 철폐되고 '어업에 관한 수역'으로 대체되었다.
이승만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추진되는 기간 남북대결에 올인 하면서 북진통일을 관철시키기 위해 미국 대통령이나 미국 고위관리들에게 친서를 계속 보내면서 미국을 압박했을 뿐 아시아의 전후 평화 구도 및 안전보장 체제와 직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대해서는 그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이 조약 체결 당시 한국 외무장관이 미국 정부와 접촉한 기록만이 보일 뿐이다. 이승만이 민족 간 쟁탈전, 이념대결에만 몰두했을 뿐 아시아 전체의 미래에 직결되었던 부분에 무신경했던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이승만은 정전협정에 반대하면서 한국군 단독 북진 의지를 밝히고 미군이 향후 한반도 유사시 무조건 개입하는 식의 한미군사동맹을 미국에 압박했지만 관철시키지 못했다. 이승만이 미군 참전에 대한 미국 국내법 절차 등을 외면한 채 막무가내로 미국에 매달리고 압박했을 뿐 정전협정 당시 한국군 병력을 기반으로 자주국방에 대해 의식이 전무했던 것은 정치 외교적 자질이 부족했던 탓이라 보인다. 정전협정 당시 한국군은 전체 유엔군 93만2964명 가운데 절반 이상인 59만911명이었고 미군은 302,483 명이었다. 당시 미국은 정전협정 대가로 파격적인 경제 원조 등을 한국에 약속한 상태였다(United Nations Command Archived March 12, 2013, at the Wayback Machine retrieved June 27, 2011).
▲ 1953년 한국 해양경찰대가 이승만 라인을 침범한 일본 선박을 나포해 그 선원들을 심문하고 있다.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1952년 독도를 포함시킨 이승만 라인을 전격 발표하고 이 수역 내에서 외국선박의 불법어로 행위를 엄격히 단속했다. 사진=위키피디아 |
이승만, 북한과 중국에 대한 과도한 공포, 적개심만 표출 자주국방 의지 안보여
한국군은 전쟁이전에 비해 엄청난 규모를 갖추고 있었는데도 이승만은 북한과 중국의 재침 시 절망적인 사태가 닥칠 것이라는 식의 과도한 적대감, 공포감을 앞세우면서 자주국방의 조건을 갖추는 태도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승만의 주장대로 될 경우 미국의 대외정책 실패로 비춰져 미국 내 선거에서 패배할지 모른다는 점을 우려해 이승만 제거 계획까지 세웠는데 오늘날 이승만의 당시 대미정책이 탁월했다고 칭송하는 견해가 나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을 우방국으로 편입시켜 사회주의 저지를 위한 교두보로 만들었고 이는 결국 동북아의 냉전구도를 유발, 심화시키는데 기여했다. 오늘날에도 미일관계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연장선상에 있다. 일본은 이 조약을 통해 태평양전쟁 이전의 일본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야심을 추진할 근거를 마련했다. 동시에 전범국가가 아닌 패전국의 지위를 실질적으로 보장받아 전후 배상에서 우월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일본은 한반도 지배에 대한 배상에 대해서도 미국이 설계한 엉터리 방식을 앞세워 고자세를 취했고 오늘날 일본 정부가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수탈에 대해 뻔뻔스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 특히 독도문제에서 미래에 영유권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일본은 자라나는 세대를 교육시키는 간악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북한 핵과 미사일과 관련해 일본은 한국의 동의 없이 선제타격을 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한반도 분단의 원천적 책임을 져야 할 일본의 비이성적 태도는 미국이라는 뒷배를 믿고 하는 폭거라 하겠다.
그런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굴욕외교라는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쟁범죄행각을 문제 삼지 않는 해괴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바 이는 일본의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의 요구에 따른 결과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윤 대통령의 태도는 이승만이 북한과의 대결, 북한에 대한 공포를 앞세워 정전협정에 반대하면서 군사적 주권을 미국에 넘겨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외면한 처사와 매우 닮은꼴이다. 한국이 경제적 선진국, 군사적 강국이 된 상황에서도 자주를 내팽개치고 외세와 결탁해 민족의 반쪽을 거덜내려하는 태도를 지구촌이 어떻게 볼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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